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고윤택, 고지후, 임채아, 그리고 응원차 온 장하준이 눈에 들어왔다.장하준의 손에는 임채아와 고윤택의 바이올린이 들려 있었다.임채아는 고지후를 올려다보며 놀란 듯 말했다.“지후야, 지율 씨도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았어?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윤택이도 아무 얘기 없었고...”그러자 장하준이 비웃듯 말했다.“흉내 좀 내보겠다는 거겠지. 그냥 채아가 바이올린 켜는 모습이 예뻐 보여서 그 흉내 내보겠다고 따라 한 거 아니겠어?”“채아는 A대에서 소문난 음악 천재였잖아. 아무리 흉내 내도 채아의 발끝도 못 따라가지. 그리고 예전에 일부러 채아처럼 꾸미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지후가 사람을 헷갈릴 일이 있었겠어?”임채아는 급히 장하준의 말을 막았다.“그만해, 하준아. 윤택이도 있는데 괜한 얘기 하지 마.”장하준은 ‘흥’ 하고 코웃음 치며 입을 닫았다.그때, 정시온 곁에 서 있는 엄마 하지율을 본 고윤택은 그 예쁜 차림새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질투로 인해 눈까지 붉어졌다.이에 큰소리로 외쳤다.“아무리 채아 이모 따라해도 엄마는 절대 채아 이모처럼 못 돼요!”뒤이어 낮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사람들 뒤편에서 울려 퍼졌다.“얘야, 너도 네 아빠랑 똑같구나. 눈썰미가 별로야.”곧게 뻗은 키, 정갈한 얼굴, 정기석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었다.입가에는 무심한 미소가 어렸고 그의 눈매는 은은한 빛을 머금은 듯 부드럽게 빛났다.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드는 그런 눈이었다.정시온이 물었다.“아빠, 어디 갔다 왔어요?”“아는 사람이 있어서 잠깐 얘기 좀 나눴지.”정기석은 고윤택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얘야, 네가 정말 몰라서 그래. 너희 엄마가 채아 씨보다 훨씬 더 예쁜 거 안 보여?”예전의 하지율은 고윤택을 돌보느라 좀처럼 자신을 꾸미지 못했다.정확히 말하면 고윤택을 낳은 이후로는 치마도 거의 입지 않았고 화장도 잘 하지 않았다.허름하거나 초췌하지는 않았지만 늘 맨얼굴에
고지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싸늘했다.“내가 서명하지 않으면?”“채아 씨의 꿈이 이루어질지 말지는... 모르는 일이 되는 거지.”이 말에 고지후가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는 사람조차 눈이 시릴 정도였다.“하지율, 죽고 싶은 거야?”하지율은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이며 고지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왜? 당신이 내 소중한 사람을 이용해 협박하는 건 당연하고 내가 당신 첫사랑 건드리는 건 죽을 짓이라는 거야?”“지후 씨, 우리 사이의 일에 난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었던 적 없어. 임채아 씨가 내 앞에 몇 번이고 나타나 날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굳이 손댈 일은 없었을 거야.”“나한테 불만 있으면 나한테 직접 해. 하지만 내 친구한테 조금이라도 손대면... ”하지율은 고지후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또렷한 발음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맨발인 사람은 신발 신은 사람 안 무서워해. 채아 씨만 불행하게 되는 게 아니라 당신네 집안 전부, 내가 편히 못 살게 할 거야.”그녀의 눈빛 속에 스친 냉혹한 기색에 고지후는 잠시 멍해졌다.그 순간, 그는 분명히 깨달았다.자신이 ‘순하고 다정하다’고만 여겼던 아내는 전혀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걸.그녀를 진짜로 자극하면 정말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침을 꿀꺽 삼키더니 잠시 후 고지후는 이혼서류를 다시 하지율의 품에 던졌다.“이혼해. 하지만 내 재산 절반은 못 줘.”하지율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조건이 뭐든 그냥 말해.”그러자 고지후는 소파에 앉으며 무심하게 말했다.“아무것도 가져가지 마. 그럼 이혼해줄게.”‘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예상대로인 답변에 하지율은 놀라지도, 상처받지도 않았다.고지후는 임채아에게는 아낌없이 주면서도 하지율에게는 늘 계산적이었다.뒤이어 하지율이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지후가 먼저 끼어들었다.“가서 잘 생각해봐. 지금 당장 결정해도 오늘은 나 시간 없어. 이혼서류도 수정해서 다시 가져와.”“알겠어.”하
하지율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말헀다.“내가 그 아이를 책임질 수 있다면 나에게 맡길 생각은 있고?”고지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럴 수는 없어.”하지율은 그의 날 선 얼굴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만약 내가 꼭 아이를 데려가야겠다면?”고지후의 눈빛이 냉담하게 가라앉았다.“하지율, 나와 양육권을 두고 싸울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그렇겠지.”하지율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수입 하나 없는 전업주부가 법정에서 양육권을 받긴 어렵겠지.”그녀는 고지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하지만 생각해 봐. 난 아이를 위해 직업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되기를 선택했어. 하지만 결국 직업도 없고 안정적인 수입도 없다는 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양육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결국 전업주부의 희생은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거였어.”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지후, 그런데도 내 아이라고 할 수 있을까?”만약 하지율에게도 믿을 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고윤택의 양육권도 쉽게 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무도 없었고 고씨 집안 어른들조차 그녀를 곱게 보지 않았다.이혼하고 나면 고윤택과 그녀 사이의 연결고리는 더 희미해질 것이고 어쩌면 고윤택은 엄마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색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정말로 양육권을 원해서가 아니었다.하지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아이를 데려갈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떠나기로 결심한 그날부터 그녀는 모든 걸 놓아버릴 준비를 마쳤다.그녀가 직접 들고 온 이혼 협의서야말로 그 각오의 증거였다.고지후가 그때 서명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대신 임채아는 그녀 앞에 수차례 나타나며 그녀의 인내심은 끝없이 시험했다.결국 선을 넘어버린 그들의 행동에 하지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게 된 것이다.고지후는 말문이 막혔다.
고윤택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정확히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아빠와 엄마가 이혼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채아 이모가 좋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엄마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그의 마음이 어쩐지 불안해졌다.그는 아빠의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잠시 후, 고지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고요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너와 채아는 서로 비교할 수 없어.”그는 끝내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고 하지율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래, 답을 알겠네.”그녀는 고윤택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방으로 올라가. 나랑 네 아빠는 따로 할 얘기가 있어.”고윤택은 아빠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말없이 위층으로 향했다.그가 올라간 뒤, 하지율은 봉투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이건 내가 새로 쓴 이혼 협의서야. 특별한 문제 없으면 그냥 서명해.”고지후의 표정이 굳어졌다.“하지율, 난 너에게 여러 번 기회를 줬어. 그런데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결국엔 너만 손해야.”“손해?”하지율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그런 좋은 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니, 정말 반가운 말이네.”고지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좋아. 그 말, 네가 한 거야. 나중에 후회하지 마.”“난 이미 여러 번 말했어. 내가 후회할 것처럼 보여?”고지후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이혼 협의서를 받아 들고 묵묵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잠시 후, 그는 하지율을 바라보며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내 재산의 절반을 요구하겠다고? 하지율, 너 정말 욕심이 정말 과하구나.”하지율의 표정은 담담했다.“난 너희 고씨 집안을 위해 아이를 낳고 하루 종일 가정부처럼 살림하며 당신 어머니한테는 며느리가 아니라 도우미처럼 행동했어. 그런 내가 당신 재산의 절반을 받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지?”고지후는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스스로 가정부에 비유하며 낮춰 말하는데 아이가 너를 좋아할 리가 있겠어?”하지율은 무표정
하지율은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으며 말했다.“애도 채아 이모를 좋아하잖아. 어쩌면 우리가 이혼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새엄마가 생기는 걸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네 생각은 어때? 정말 그 애가 우리 이혼을 막을 것 같아?”고지후는 낮고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하지율, 왜 늘 그런 쓸데없는 생각만 해?”“쓸데없는 생각이라고요?”하지율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윤택을 바라보았다.“윤택아, 엄마랑 임채아 이모 중에 누가 더 좋아?”하지율이 이혼 이야기를 꺼낸 순간, 고윤택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아빠와 엄마가 헤어진다고?’그건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그는 무슨 일어도 엄마는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아빠 곁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어왔다.“고윤택.”하지율의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그는 멍한 눈으로 하지율을 바라봤지만 부모의 대화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하지율은 다시 물었다.“엄마랑 임채아 이모 중에 누가 더 좋아?”고윤택은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엄마 편을 들어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하지만 눈앞의 엄마의 그 맑고 단단한 눈을 마주하자 목이 꽉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하지율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대답하기 어려워?”그때 고지후가 나서며 고윤택 앞을 막아섰다.“하지율, 아이를 곤란하게 하지 마.”“그저 질문한 것뿐인데?”하지율은 가볍게 웃으며 하지후를 향해 말했다.“좋아. 그럼 당신한테 물을게.”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고지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고지후, 나랑 임채아 중에 누가 더 좋아?”고지후는 입술을 꾹 다물고 말문이 막혔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하지율이 먼저 말했다.“또 나한테 이유 없이 화낸다거나 비이성적이라는 말은 하지 마. 이제 그런 말은 질렸으니까. 남자라면 당당하게 대답해. 누가 더 좋아?”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고윤택도 조용히 고개를 들어 아빠를 바라보았다.
고윤택은 하지율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고지후 역시 무언가를 감지한 듯 얼굴이 굳었다.“하지율, 뭘 하려는 거야?”하지율은 고지후의 물음을 무시한 채 고윤택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엄마가 요즘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너도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해. 엄마는 이미 짐을 다 정리했어. 이제 이 집에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거야.”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윤택아, 너한테 꼭 알려줘야 할 게 있어. 난 네 아빠와 이혼할 거야. 너의 양육권은 아빠한테 가게 될 거고 앞으로는 아빠랑 함께 살게 될 거야.”고윤택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이혼이요?”다섯 살인 그는 이혼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고지후의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마를 찌푸린 그의 눈썹 사이에는 분명한 분노가 비쳤다.“하지율, 꼭 아이 앞에서 이런 말을 해야겠어?”하지율은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아이 앞에서 말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애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네 아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유, 평등, 존중을 입에 달고 살았잖아. 하물며...”그녀는 고개를 돌려 고지후를 바라봤다.“네가 나더러 임채아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는, 아이 생각한 적 있어? 날 곤란하게 만들 땐 아이가 안중에도 없었으면서.”고지후의 표정이 굳었다.“나랑 다투는 건 그렇다 쳐도 아이의 말까지 이렇게 따지고 들 거야? 하지율, 윤택이는 남이 아니야. 네 친아들이라고.”하지율은 비웃듯 말했다.“내가 낳은 아이인 건 맞아. 하지만 그거 말고는 내 아들이라고 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어. 네가 말하는 그 친아들은 하루 종일 남 눈치만 보고 아첨이나 하며 살잖아.”고지후는 억누르듯 말했다.“네가 아이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건, 네 문제야. 하지율, 항상 남 탓만 하지 말고 너 자신부터 돌아봐.”하지율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 냉소적인 목소리로 물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