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대답을 듣기도 전에.도망치듯 차 문을 열고 내렸다.텅.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27년 동안 두 사람 사이를 이어온 시간이, 그 소리 하나에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선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시 그 차 안으로 끌려 들어갈 것 같았다.윤오의 젖은 눈과.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과.친구라는 이름 아래 묻어두었던 감정까지.전부 다시 자신을 붙잡을 것 같았다.밤공기는 차가웠다.하지만 가슴속에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겨우 숨을 고르며 회사 정문을 향해 걸었다.“…….”그리고 그곳에.에단이 서 있었다.“…….”에단이 천천히 다가왔다.선우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생각보다 빨리 왔네요.”젖은 눈가.창백해진 얼굴.아직 가라앉지 않은 호흡.에단의 시선이 선우의 얼굴 위에 잠시 머물렀다.“……왜 울어요.”***에단의 차는 한강 둔치의 후미진 주차장에 멈춰 섰다.도심의 소음은 강바람에 씻겨 멀어졌고, 차 안에는 낮은 엔진 소리만이 고요하게 남았다.에단이 재킷을 벗었다.그리고 선우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따뜻한 체온이 밴 재킷에서 익숙한 향이 희미하게 번졌다.“스테이크 썰기에는.”에단이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선우 씨 표정이 너무 체할 것 같아서.”선우가 그를 바라봤다.“오늘 같은 날 굳이 비싼 음식 앞에 앉아서 예의 차릴 필요는 없잖아요
“선우야.”한참 만에 윤오가 입을 열었다.“나 좀 봐봐.”강요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시선이 마주쳤다.윤오의 눈이 젖어 있었다.“나한테 화내.”“…….”“차라리 그게 나아.”선우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내가 너한테 화를 왜 내.”“욕이라도 해.”윤오가 씁쓸하게 웃었다.웃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처참한 표정이었다.“오늘 그런 일을 당하는 동안 나 뭐 하고 있었냐고.”선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너 지켜주겠다고 큰소리치더니 고작 이거밖에 안 되냐고.”윤오의 목소리가 점점 잠겼다.“병신 같다고 해도 돼.”“윤오야.”“소리 질러도 돼.”그가 고개를 숙였다.“나한테 화내. 제발.”“…….”“나 진짜…….”윤오가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입술을 다문 끝에 겨우 내뱉었다.“못 봐주겠다.”“…….”“내가 너무 한심해서.”윤오가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핸들에 이마를 툭 기댔다.툭.툭.작은 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치 스스로를 벌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구는 윤오가 낯설었다.“……윤오야.”“화 안 낼 거면.”윤오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차라리 버려.”“…….”“나 같은 거 필요 없다고.”윤오가 눈을 감았다.“그냥 내버려.”윤오야.넌 도대체 나를 어디에 가두고 싶은 거야?“…….”질문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차 안에는 엔진의 낮은 진동만이 남았다.도대체 무엇이.너를 이렇게까지.흐트러진 윤오의 호흡을 들으며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섞였다.평생을 나란히 걸어왔다.그게 둘 사이의 당연한 질서라고 생각했다.결국 돌아오면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윤오는 단 한 번도 그 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선우 역시 그 선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윤오는.처음 보는 얼굴로.처음 듣는 목소리로.버려달라고.필요
파티션 너머에서 낮게 오가는 목소리가 들렸다.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그런데도 알 것 같았다.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모니터를 바라보는 시선 끝마다 호기심이 묻어났다.안쓰러움인지, 흥미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표정들.선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키보드를 두드렸다.몇 줄을 썼다가 지웠다.다시 썼다가 지웠다.머릿속에는 윤오의 메시지와 민재의 고함이 번갈아 떠올랐다.결국 보고서 한 줄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사무실은 오히려 더 조용해졌다.말소리는 줄었지만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그때.본부장실의 문이 열렸다.에단이 나왔다.그의 구두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 바닥을 가로질렀다.탁.탁.사람들의 키보드 소리가 하나둘 잦아들었다.에단은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곧장 선우에게 걸어왔다.책상 앞에 멈춰 선 그가 선우의 모니터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그만하죠.”선우가 고개를 들었다.낮은 목소리로 뱉는 문장은 사무실 전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그가 자연스럽게 선우의 서류를 갈무리했다.“같이 나가죠.”그가 선우의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그 순간.선우가 입술을 깨물었다.“……죄송해요, 본부장님.”에단의 손이 멈췄다.“오늘 저녁은 같이 못 갈 것 같아요.”순간 사무실의 공기가 미묘하게 굳었다.에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왜인지, 누구를 만나는지.그저 잠시 선우를 바라봤다.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민재에게 포기란 없었다.아니.포기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했고, 열등감은 이미 이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무엇보다 손에 쥔 고소장이 그를 끝없이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그날 오후.윤오는 진료실 안에서 환자를 마주하고 있었다.차트를 넘기는 손길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최근에는 통증이 어떠세요?”“많이 좋아졌습니다.”“약은 빠뜨리지 않고 드셨고요?”“네.”환자의 대답을 들으며 윤오가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했다.평온한 얼굴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환자가 긴장을 풀 수 있도록 맞추는 익숙한 말투였다.그때였다.쾅!대기실 쪽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고함이 터졌다.“권윤오! 나와!”윤오의 펜끝이 멈췄다.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환자가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원장님, 무슨 일이에요?”윤오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금방 정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아, 네.”***로비 바닥에 드러누울 기세로 버티고 있는 민재를 간호사들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권윤오!”윤오가 모습을 드러내자 민재의 눈에 비열한 생기가 번졌다.“야.”민재가 낄낄 웃었다.“내가 김선우한테 가서 다 말했는데, 네가 나 고소한 것도 모르더라?”윤오의 걸음이 멈췄다.“둘이 뜸해졌나 봐?”민재가 입꼬리를
선우와 에단이 1층 로비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보안요원 서너 명이 한 남자를 둘러싼 채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이거 놔!”익숙한 목소리였다.“……김민재.”선우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야! 김선우! 나와!”민재가 보안요원들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당장 나와서 이거 취하하라고!”로비에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선우가 황급하게 민재 앞을 막아섰다.“왜?”민재가 입꼬리를 비틀었다.“네 고고한 사생활은 지키고 싶나 보지?”“무슨 개소리야.”선우의 턱 끝에 힘이 들어갔다.“하.”민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너 설마 몰랐냐?”“그러니까 무슨 개소리냐고.”“권윤오가 나 고소했다고!”순간.선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뭐?”고소.윤오가 민재를 고소했다고?대체 언제.무슨 일로.당황스러웠다. 고소라니, 대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평소 무슨일이든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게 대응하던 윤오였기에 이 상황이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민재의 손에 들린 서류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니들끼리 그렇게 좋아 죽겠으면 조용히 연애나 할 것이지!”민재의 고함이 로비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왜 죄 없는 나한테 지랄이야, 어?”“…….”“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선우의 얼굴이 굳었다.“니들 둘이 붙어먹는 꼴 보기 싫어서 한마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조금 전까지의 소란스러운 공기는 거짓말처럼 증발했다.대신 하트비트 런칭을 앞둔 팽팽한 업무의 긴장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선우와 에단은 곧장 샘플링 룸으로 향했다.테이블 위에는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인 모틀락 원액 샘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잔을 들어 향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그의 눈빛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남았다.완벽한 하트비트.“이번 하트비트의 핵심은 모틀락 특유의 육중한 미티(Meaty)함과 화려한 풍미 사이의 균형입니다.”에단이 샘플 잔을 천천히 돌렸다.“버번 캐스크에서 오는 바닐라와 꿀의 부드러운 단맛. 그리고 셰리 캐스크 특유의 말린 과일과 스파이시함.”잔을 코끝에 가져간 그가 잠시 향을 음미했다.“결국 이 둘을 어디까지 밀어붙이고, 어디에서 멈추느냐가 관건이죠. 더블 캐스크의 장점을 살리되, 어느 한쪽이 모틀락을 집어삼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선우는 준비해둔 차트를 펼쳤다.“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에단의 시선이 올라왔다.“대중적인 부드러움보다는 하트비트만의 강렬한 첫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선우가 비율을 가리켰다.“버번 4, 셰리 6.”잠시 침묵.“첫 모금에서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야 합니다.”“셰리를 6이나 쓰자고요?”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모틀락은 더프타운의 야수라고 불릴 만큼 원액 자체가 힘이 좋습니다.”그의 손가락이 차트 위 비율을 짚었다.“그 육중한 바디와 복합적인 풍미를 셰리의 진한 와인 캐릭터로 덮어버리겠다는 겁니까?”“덮는 게 아니라 강조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