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내의 웹툰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죽은 아내의 웹툰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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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강도현의 휴대폰에 신작 연재 알림이 떴다. 작가의 이름은 윤슬. 죽은 아내 한서윤의 필명이었다. 10년 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던 작품들. 그 뒤에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도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매주 일요일, 서윤이 남긴 그림이 한 편씩 공개될 때마다 그가 외면해 온 진실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야 아내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 남편. 하지만 그가 아무리 다음 장을 기다려도, 서윤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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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001화. 업데이트 알림

아내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새 원고가 올라왔다.

밤 10시였다. 강도현은 식탁에 쌓인 조의금 봉투를 정리하다 휴대폰을 집었다. 검은 화면에 오래 잊고 있던 이름이 떠 있었다.

[구독한 작가 윤슬의 신작이 공개되었습니다.]

[너에게 남긴 여백 — 1화]

윤슬.

한서윤이 결혼 전에 쓰던 작가명이었다.

도현은 알림을 밀어 없애려다 작품을 열었다. 누가 이 계정을 만지고 있는지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 장례식에서까지 서윤의 작업 이야기를 꺼내던 차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첫 컷이 화면을 채웠다.

비가 그친 정류장, 젖은 의자 한쪽을 닦아 놓고 빈자리를 보는 여자. 그 곁으로 길게 내려오는 말풍선까지.

도현은 손가락을 멈췄다.

거실 책장에는 『물의 가장자리』가 꽂혀 있었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첫 장편. 10년 동안 인터뷰에서 수없이 설명한 첫 장면이었다.

지금 아내의 이름 아래 떠 있는 그림은 그 첫 컷과 같았다.

***

21주 전.

“이거 오늘 안에 가능하지?”

서윤이 국을 데우다 돌아보니 도현이 식탁 위에 태블릿을 내려놓고 있었다. 화면에는 네모 칸 몇 개와 짧은 메모가 떠 있었다. 장면 순서와 구도를 잡는 밑그림인 콘티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빈칸이 더 많았다.

“몇 장면인데?”

“뒤쪽만. 앞은 거의 됐어.”

서윤은 불을 줄인 다음 화면을 넘겼다. 앞부분은 오전에 자신이 그려 넘긴 원고였다.

마지막 장면의 빈칸 9개 앞에 도현이 그린 남자 얼굴이 붙어 있었다. 얼굴만은 말끔했다. 도현은 팬 사인회에서 고개를 반쯤 돌린 남자를 그려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망설이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칸에는 ‘여주 반응’, 그다음에는 ‘둘이 대화’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왜 돌아왔는데?”

“지난주에 싸웠잖아.”

“싸운 건 아는데, 돌아온 이유.”

도현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대답했다.

“네가 잡아 줘. 지금 그게 좀 안 풀려.”

“어제까지 해 보겠다고 했잖아.”

“해 봤어. 그러니까 이만큼이라도 있지.”

서윤은 칸 사이를 더 내려 보았다. 마지막에는 고백 장면이라는 메모가 있었다. 돌아온 이유도, 싸움을 풀 계기도 없는데 고백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대로 대사를 붙이면 남자는 화를 내고 나간 지 한 회차 만에 사랑한다고 말하게 된다.

“오늘 고백하면 너무 빨라. 문 앞에서 멈추는 게 낫겠어.”

“그러면 독자들이 또 답답하다고 해.”

“자기 우산까지 없어진 걸 보게 하자. 여자가 자길 찾으러 나갔을 수도 있잖아. 안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는 거지.”

도현이 물병 뚜껑을 닫았다.

“그거 괜찮네.”

칭찬은 짧았다. 서윤은 화면 위로 손을 가져가다 국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끓어오른 거품이 냄비 가장자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밥 먹고 할게.”

“나는 나가 봐야 해. 은수 PD한테 11시 반까지 준다고 했어.”

“지금?”

도현은 현관 쪽으로 가면서 외투를 들었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둔 회색 목도리가 바닥으로 끌려 서윤이 주워 올렸다.

“사람 만나기로 했어. 내가 빠지면 안 되는 자리야.”

“당신 장면 잡는 동안 나는 앞부분 색 맞추려고 했는데.”

“색은 나중에 하면 되잖아. 이야기가 먼저지.”

그가 팔을 내밀었다. 서윤은 들고 있던 목도리를 건네고 식탁 쪽을 보았다. 2인분의 밥그릇을 꺼내 놓은 것을 이제야 알아본 도현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말 안 했나? 먹고 들어올게.”

“안 했어.”

“그럼 내 건 넣어 놔. 내일 먹지, 뭐.”

현관에서 구두를 신던 도현은 휴대폰을 귀에 댔다. 조금 전과는 다른, 한결 느긋한 목소리였다.

“네, 대표님. 지금 출발합니다. 아내가 자꾸 밥 먹고 가라고 붙잡아서.”

서윤은 그의 등 뒤에서 그릇 하나를 도로 가져왔다. 붙잡은 적은 없었다. 나간다는 말을 못 들었을 뿐이었다.

통화를 마치지 않은 도현이 손을 흔들자 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데운 국이 다시 식는 동안 식탁 위 태블릿 화면도 어두워졌다.

밥을 먹으려니 시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후 7시 40분. 남은 장면을 짜고 인물을 그리고 앞부분과 연결하려면 11시 반도 빠듯했다. 서윤은 국에 밥을 조금 말아 먹고 나머지를 냉장고에 넣었다.

복도 끝 작은 방에는 창가를 향해 책상이 놓여 있었다. 원래 손님용 침대가 있던 자리였지만, 도현의 자료 상자가 늘면서 침대부터 치웠다. 상자는 그대로였고 서윤의 의자만 그 틈에 들어갔다.

거실 옆 큰 작업실은 도현이 인터뷰 촬영을 할 때 썼다. 그 방 책상에는 선물 받은 펜들이 받침대에 꽂혀 있었다. 서윤은 자기 펜을 찾다가 키보드 아래에서 꺼냈다. 손가락이 닿는 고무 부분이 헐거워져 검은 테이프로 감아 둔 것이었다.

도현의 파일을 열자 이전 원고가 함께 나타났다. 서윤은 지난 회차 마지막 부분부터 읽었다. 남자는 화가 나서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갔다. 여자는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문을 닫는 소리 때문에 끝말을 전하지 못했다.

서윤이 펜을 움직였다.

되돌아온 남자가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문을 손바닥 너비만큼 열자 불 켜진 현관이 보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틈만 들여다본다. 늘 우산 2개가 꽂혀 있던 자리가 비어 있다.

도현이 그려 둔 얼굴을 그대로 쓰려다가 눈썹 선을 지웠다. 잘생긴 얼굴이 필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돌아오고 싶어서 왔으면서도 들키기 싫은 사람, 먼저 문을 열었다가 또 밀려날까 봐 망설이는 사람이어야 했다.

서윤은 문손잡이를 잡은 손부터 다시 그렸다. 엄지에 힘이 들어가다가 풀리는 작은 동작을 2컷으로 나누니 얼굴을 크게 넣지 않아도 머뭇거림이 보였다.

휴대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어머니 전화 오면 받아 줘. 나 통화 중이라고.]

서윤이 메시지를 읽자마자 박정란의 전화가 걸려 왔다. 펜을 내려놓고 받으니 인사보다 질문이 먼저 나왔다.

“도현이랑 같이 있니?”

“아니요. 약속 있어서 나갔어요.”

“주말에도 바쁘네. 너는?”

“집에서…….”

서윤은 화면의 빈칸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원고 보고 있어요.”

“아, 도현이 거 틀린 데 봐 주는구나.”

“네, 같이 좀.”

“그러면 됐다. 나는 걔가 집에 와서도 일을 다 끌어안고 있을까 봐. 옆에서 잘 좀 챙겨 줘.”

수화기 너머로 텔레비전 소리가 커졌다. 정란은 다음 주에 친척을 만나는데 도현이 받은 상 이름을 정확히 알려 달라고 했다. 서윤이 주최 기관과 수상 부문을 말하자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잘못 옮겨 적으면 안 된다며 철자를 하나씩 불러 달라는 부탁까지 이어졌다.

통화를 끊고 보니 12분이 지나 있었다. 서윤은 메모해 둔 대사를 읽다가 마지막 문장을 지웠다. 방금 전에는 자연스러웠던 말이 지금은 너무 친절하게 느껴졌다. 여자가 사정을 전부 설명해 주면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됐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문 앞에 선 남자를 보고 우산을 먼저 내민다. 남자는 받아 들지 못한다.

‘내 것까지 가져갔어?’

‘비 온다며.’

서윤은 그 밑에 넣으려던 긴 대사를 없앴다. 여자가 우산을 2개 들고 나간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였다.

화면을 휴대폰으로 옮겨 실제 읽는 크기로 확인했다. 우산 손잡이가 너무 작았다. 확대할 때는 선명했던 정보가 줄이자 묻혔다. 서윤은 앞 장면의 빈 우산꽂이를 조금 키우고 마지막 컷의 여자가 젖은 팔을 숨기지 않도록 구도를 고쳤다.

도현에게 장면 몇 개를 캡처해 보냈다. 오래 기다릴 시간은 없어서 선을 정리하고 있자니 답이 왔다.

[좋네. 근데 마지막에 안아 주면 안 돼?]

서윤은 전화를 걸었다. 멀리서 웃는 소리와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안으면 다음 회차가 약해져.”

“그럼 손이라도 잡든가.”

“우산을 받아 주는 걸로 끝내자. 다음 주에 같이 들어가는 데서 시작하면 돼.”

“너무 작지 않아?”

“지금 이 사람한테는 그게 먼저야. 집에 다시 들어와도 되는지 묻는 거.”

잠시 답이 없었다. 서윤은 화면을 내려다보며 그가 그림을 보고 있기를 기다렸다.

“그래. 네가 그렇게 봤으면 그렇게 해.”

전화를 끊기 직전 도현이 덧붙였다.

“너무 피곤하게 생각하지 말고. 원래 독자들은 그렇게까지 안 봐.”

서윤은 꺼진 통화 화면을 잠깐 두었다가 작업 창으로 돌아갔다. 여자가 내민 우산 끝에서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지우면 훨씬 깔끔했지만,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남겨 두고 싶었다.

그 작은 점을 두고 한동안 확대와 축소를 반복했다. 결국 그대로 두었다.

10시가 지나자 아파트 복도에서 아이 뛰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누군가 현관문을 닫고,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린 뒤에는 펜 끝이 화면에 닿는 소리만 남았다. 서윤은 굳은 손가락을 펴다가 새끼손가락 옆에 붙은 테이프 자국을 문질렀다.

앞부분의 색을 맞추고 말풍선을 정리하자 11시 18분이었다. 선과 색을 나눠 그려 둔 작업 칸들이 화면 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서윤은 수정 전 파일을 먼저 저장한 뒤 전달용 사본을 만들었다.

맨 마지막에는 늘 들어가는 이름이 있었다.

글·그림 강도현.

작업을 시작할 때는 보이지 않게 접어 두는 칸이었다. 마지막 이미지를 뽑을 때만 다시 켰다. 흰 바탕 위에 검은 글씨가 나타났고, 여자가 들고 있는 우산 아래로 반듯하게 놓였다.

서윤은 잠깐 그 글씨를 눌렀다. 글자를 고치는 작은 창이 열렸다. 커서가 도현의 이름 뒤에서 깜빡였다.

컴퓨터 오른쪽 아래에 11시 22분이 떠 있었다. 휴대폰에는 은수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안에 받을 수 있느냐는 확인이었다. 서윤은 이름 뒤에 놓인 커서를 문장 맨 앞으로 옮겼다가, 그대로 두었다.

창을 닫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내렸다. 지난 회차와 이어지는 표정, 비가 그친 시각, 우산의 개수를 확인했다. 도현이 그린 선은 후반 첫 컷의 얼굴에만 남아 있었다.

메일 받는 사람에는 차은수의 주소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발신 계정의 이름은 강도현이었다. 서윤은 제목 끝에 ‘최종’을 붙이고 파일을 첨부했다.

본문에는 2줄만 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전송 창이 닫히자 서윤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마감에 맞췄다. 우산 끝의 빗방울도, 망설이다 손을 펴는 남자도 그대로 실릴 것이다. 그것부터 다행이라고 생각한 뒤에야 방금 켰던 이름 칸이 떠올랐다.

휴대폰에 도현의 메시지가 왔다.

[보냈어?]

서윤은 ‘응’이라고 쓰고 전송했다. 답장을 기다리면서 작업 파일을 닫으려는데, 메일 도착 알림이 먼저 떴다.

강도현 작가님, 원고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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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화. 업데이트 알림
아내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새 원고가 올라왔다.밤 10시였다. 강도현은 식탁에 쌓인 조의금 봉투를 정리하다 휴대폰을 집었다. 검은 화면에 오래 잊고 있던 이름이 떠 있었다.[구독한 작가 윤슬의 신작이 공개되었습니다.][너에게 남긴 여백 — 1화]윤슬.한서윤이 결혼 전에 쓰던 작가명이었다.도현은 알림을 밀어 없애려다 작품을 열었다. 누가 이 계정을 만지고 있는지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 장례식에서까지 서윤의 작업 이야기를 꺼내던 차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첫 컷이 화면을 채웠다.비가 그친 정류장, 젖은 의자 한쪽을 닦아 놓고 빈자리를 보는 여자. 그 곁으로 길게 내려오는 말풍선까지.도현은 손가락을 멈췄다.거실 책장에는 『물의 가장자리』가 꽂혀 있었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첫 장편. 10년 동안 인터뷰에서 수없이 설명한 첫 장면이었다.지금 아내의 이름 아래 떠 있는 그림은 그 첫 컷과 같았다.***21주 전.“이거 오늘 안에 가능하지?”서윤이 국을 데우다 돌아보니 도현이 식탁 위에 태블릿을 내려놓고 있었다. 화면에는 네모 칸 몇 개와 짧은 메모가 떠 있었다. 장면 순서와 구도를 잡는 밑그림인 콘티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빈칸이 더 많았다.“몇 장면인데?”“뒤쪽만. 앞은 거의 됐어.”서윤은 불을 줄인 다음 화면을 넘겼다. 앞부분은 오전에 자신이 그려 넘긴 원고였다.마지막 장면의 빈칸 9개 앞에 도현이 그린 남자 얼굴이 붙어 있었다. 얼굴만은 말끔했다. 도현은 팬 사인회에서 고개를 반쯤 돌린 남자를 그려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망설이는 법도 없었다.그런데 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칸에는 ‘여주 반응’, 그다음에는 ‘둘이 대화’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이 사람이 왜 돌아왔는데?”“지난주에 싸웠잖아.”“싸운 건 아는데, 돌아온 이유.”도현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대답했다.“네가 잡아 줘. 지금 그게 좀 안 풀려.”“어제까지 해 보겠다고 했잖아.”“해 봤어. 그러니까 이만큼이라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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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화. 다시 그릴 수 있을 때까지
도현은 서윤이 잠든 뒤에 돌아왔다.아침에 일어나니 현관 앞에 벗어 둔 구두가 나란하지 않았고, 식탁에는 편의점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 안에 든 푸딩 2개가 미지근해져 있었다.“냉장고에 넣지 그랬어.”서윤이 침실 쪽을 보며 말하자 도현이 셔츠 소매에 팔을 끼우면서 나왔다.“깜빡했네. 오는 길에 생각나서 샀어. 너 그거 좋아하잖아.”좋아했었다. 퇴근길에 역 앞에서 하나씩 사 먹던 때가 있었다. 도현은 여전히 같은 맛을 골랐고, 서윤은 반가워해야 할 것 같아서 봉투를 접어 주방에 두었다.“어제 늦었어?”“응. 대표님이 2차까지 가자고 해서.”“원고는 봤고?”“봤지. 잘했더라.”서윤은 그 말을 듣고 찬장 문을 닫았다. 물을 끓이려던 참이었다. 어젯밤에 고친 장면 중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물을까 하다가 도현이 먼저 휴대폰을 보여 주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은수에게 받은 메시지였다.마지막 우산 장면 좋습니다. 이 흐름이면 다음 회차 첫 장면도 자연스럽겠네요.“거봐. 내가 고백 좀 미루자고 하길 잘했지.”도현은 메시지를 올려 읽으며 말했다. 서윤은 화면에서 그의 얼굴로 눈을 옮겼다.“미루자는 건 내가…….”“그러니까. 네 얘기 듣고 내가 그쪽으로 정했잖아.”주전자가 끓기 시작했다. 도현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찻잔을 꺼냈다. 서윤이 컵 받침을 내미는 동안에도 메시지 창을 보고 있었다.“다음 주엔 들어가서 안는 데까지 가면 되겠다.”“아직 그 여자는 할 말이 남았어.”“그건 안고 나서 하면 되지. 우리 독자들 이런 거 오래 끄는 거 싫어해.”서윤은 끓인 물을 찻잔에 부었다. 도현이 입을 대기 전에 잔을 조금 당겨 손잡이를 돌려놓았다. 그가 오른손으로 편하게 잡는 방향이었다.“그 여자, 싫다는 말은 안 했어.”서윤이 말했다.“지난 회차에서 혼자 있고 싶다고 한 거잖아. 잠깐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다고 돌아온 사람이 자기 할 말부터 해 버리면…….”“알았어, 알았어. 그럼 네가 한번 잡아 봐.”도현은 웃으며 찻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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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화. 사위의 근황
“오늘 집에 올 수 있니?”목요일 오전, 미숙에게 전화가 왔다. 서윤은 창가에 펼쳐 둔 스케치북을 덮었다. 어머니가 먼저 오라고 하는 일이 드물어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부터 물었다.“별일은 없고. 반찬 좀 해 놨어. 너희 가져가라고.”“도현 씨는 오늘 못 갈 텐데.”“바쁜 사람을 오라겠니. 네가 가져가면 되지.”서윤은 펼쳤던 장을 다시 보았다. 컵을 씻는 여자의 손과 마른 행주가 걸린 창틀을 그려 놓은 페이지였다. 밑그림을 정리해 보고 싶었지만 서두를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둔 음식은 오늘 가져가야 했다.“점심때 갈게. 뭐 필요한 거 있어?”“오는 길에 들기름 좀 사 와. 지난번에 네가 가져온 게 좋더라.”서윤은 메모장을 열었다. 들기름, 어머니가 좋아하는 두부. 그 밑에 적어 두었던 ‘내 그림 정리’는 지우지 않고 한 줄 아래로 옮겼다.외출 준비를 하던 중 입금 알림이 떴다. 생활비를 받는 계좌였다. 서윤은 도현에게 보낼 답장을 적다가, 은수가 보낸 원고 수신 메시지가 그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도현은 이번 달엔 지출이 많을 테니 조금 보냈다는 메시지도 남겼다. 서윤은 고맙다는 답을 보내고 미뤄 둔 관리비부터 이체했다. 잔액을 확인한 뒤 장바구니에 담아 뒀던 펜심도 주문했다. 끝이 닳아 작은 선을 그릴 때마다 미끄러지던 참이었다.도현에게 새 펜을 사 달라고 하면 사 줄 것이다. 가격이 문제인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왔고, 그럴 때마다 서윤은 자기 그림 이야기를 설명해야 했다.펜심을 주문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배송지를 집으로 지정하고 화면을 닫았다.버스를 타기 전 시장에 들렀다. 들기름을 사던 가게 옆에서 상인이 접힌 상자를 펴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새로 들어온 찻잔들이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서윤은 포장을 푸는 손을 보다가 걸음을 늦췄다. 상인은 잔을 꺼내자마자 가장자리부터 확인했다. 흠이 있으면 손끝에 먼저 걸리는 모양이었다. 멀쩡한 잔과 금이 간 잔을 놓는 곳이 달랐다.“찾는 거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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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화. 받는 사람
은수에게 연락이 온 것은 화요일 아침이었다. 다음 주 공개를 앞둔 47화에 수정할 부분이 있다고 했다.[서윤 씨, 47화 표정 수정 때문에 잠깐 통화 가능할까요?]서윤은 컵을 책상 안쪽으로 밀고 전화를 걸었다. 완성 파일을 보내고도 손을 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온 요청을 보면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마지막에 여자가 고개를 드는 컷 있죠.”은수는 인사 뒤 바로 원고 이야기로 들어갔다.“네.”“눈물을 조금 덜어도 될까요? 남자 돌아온 것만으로 마음이 풀린 것처럼 보여서요.”서윤은 파일을 열었다. 처음 콘티를 잡을 때 도현에게 설명했던 부분이었다. 한 번에 풀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뒤 수정하면서 여자의 눈가를 너무 밝게 그려 놓았다.“빛을 좀 빼면 될 것 같아요. 우는 건 아니었거든요.”“저도 그렇게 읽었는데 모바일에서 보니 눈물처럼 보여요.”“원본에서 고쳐 볼게요.”은수는 잠깐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오늘 나오실 수 있으면 같이 보면 좋겠어요. 단행본 행사에 쓸 이미지도 확인해야 해서.”“도현 씨도 와요?”“오전에는 다른 일정이 있다고요. 서윤 씨가 대신 자료 가져다주실 수 있다고 들었어요.”서윤은 달력을 보았다. 비워 둔 오전이었다. 개인 원고를 읽을 시간을 정하려고 어젯밤에 선을 하나 그어 놓았는데, 그 칸 위로 제작사 주소가 들어왔다.“몇 시까지 가면 돼요?”제작사 접수대에서 방문 목적을 말하자 직원이 명단을 확인했다. 서윤의 이름을 한 번 더 물은 뒤 통화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유리문 옆에는 『물의 가장자리』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그림 아래로 도현의 얼굴과 짧은 약력이 붙어 있었다. 서윤은 약력보다 포스터 가장자리를 보았다. 인쇄가 진하게 나와 원본에서는 보이던 창틀의 그림자가 조금 뭉쳐 있었다.“강도현 작가님 사모님 맞으시죠?”직원이 돌아와 방문증을 내밀자 서윤은 네, 하고 받아 들었다. 접수할 때 한서윤이라고 이름을 밝혔는데도, 방문증의 소속 칸에는 강도현 작가 가족이라고 쓰여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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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화. 객석의 박수
“이거 하고 가면 될까?”어머니 집 현관 거울 앞에서 미숙이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서윤은 신발을 신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꺼내 온 것은 작은 진주가 달린 목걸이였다.“응. 잘 어울려.”“너는 왜 그렇게 수수하게 입었니. 사진도 찍을 텐데.”“내가 무대에 올라가는 건 아니잖아.”서윤은 코트 소매를 조금 내려 손목 보호대를 가렸다. 아침에 행사장에서 연락이 와서 이미지 하나를 다시 보냈다. 원래 잘라 놓았던 그림의 윗부분이 화면에서 또 빠져 있었다. 수건이 보여야 한다고 설명하는 동안 손목이 시큰해 보호대를 감아 둔 참이었다.미숙은 도현이 몇 시에 오는지 물었다. 도현은 먼저 행사장에 갔다. 대기실에서 준비할 것이 있다고 했고, 서윤에게는 어머니를 모셔 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우리도 좀 일찍 가자. 괜히 늦어서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행사는 오후 2시였다.서점 안쪽 행사장에는 『물의 가장자리』 단행본 개정판이 쌓여 있었다. 진열대 옆으로 도현의 이름이 인쇄된 긴 배너가 서 있었다. 미숙은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 앞에 섰다.“사진 하나 찍어 줘.”서윤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머니가 배너의 글자를 가리지 않으려고 옆으로 비켜섰다. 화면에는 미숙의 얼굴과 도현의 이름이 함께 들어왔다.“한 장 더. 방금 눈 감은 것 같아.”서윤은 2장을 더 찍고 보여 주었다. 미숙은 만족스러운 사진을 고르느라 안내 직원의 인사를 듣지 못했다. 서윤이 대신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좌석표를 확인했다.“6열 통로 쪽 2자리 준비해 두었습니다.”의자마다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서윤의 자리에는 이름 대신 가족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숙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대가 잘 보인다며 좋아했다.서윤도 무대 뒤 화면을 보았다. 조금 전 다시 보낸 이미지가 제대로 들어가 있었다. 문 옆에 걸린 젖은 수건, 그 아래 놓인 여자의 장화까지 다 보였다. 도현이 인터뷰 때 좋아하는 장면으로 자주 꼽던 그림이었다.“이거 유명한 거지?”미숙이 물었다.“응.”“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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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화. 지워진 서명
서윤은 마지막 컷 아래에 윤슬이라고 썼다.그림을 가리지 않을 만큼 작은 글씨였다. 휴대폰 크기로 줄이면 알아보기 어려워 한 번 키웠다가, 다시 처음 크기로 돌렸다. 오른쪽 아래에는 이미 강도현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두 이름 사이가 멀었다.월요일 아침, 식탁 위에는 사인을 받지 못한 책 2권이 그대로였다. 서윤은 그것들을 옆으로 밀어 두고 원고를 다시 읽었다. 남자가 의자를 빼 주는데 여자는 앉지 않는 장면이었다. 도현은 여자가 화난 표정을 짓기를 원했지만, 서윤은 의자 등받이를 잡은 손만 남겼다.서윤에게는 그 손이 더 오래 보였다. 앉으라고 하면 앉고,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려 왔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자리를 옮기려는 장면이었다.서명까지 들어간 화면을 따로 저장하고 도현의 작업실로 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는 전날 올라온 독자 반응을 읽고 있었다.“다음 원고 봐 줘.”“보냈어?”“아직. 마지막에 넣은 게 있어서.”서윤이 태블릿을 책상 위에 놓았다. 도현은 중간 부분을 빠르게 넘기다가 마지막 화면에서 손을 멈췄다.“이건 뭐야?”그가 가리킨 곳은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내 이름.”“그건 아는데, 왜 여기다 넣었어?”“나도 그렸으니까.”도현은 태블릿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한동안 말이 없어 서윤은 그가 서명이 잘 보이는지 확인하는 줄 알았다. 화면을 확대하고 나서야 그의 입에서 짧은 숨이 나왔다.“납품 표기는 맞춰야지. 갑자기 이것만 다르면 어떡해.”“다음부터도 넣으면 되잖아.”“회사랑 얘기된 것도 아니고.”“그럼 얘기하자.”서윤은 그 말을 하기 전부터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막상 입 밖으로 나오니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다시 말해야 할까 싶었는데 도현이 태블릿을 든 채 그녀를 보았다.“너 토요일 일 때문에 이러는 거야?”“그 일도 있고.”“아직도?”아직이라는 말에 대답할 말을 놓쳤다. 주말이 지났을 뿐이었다. 서윤이 식탁에 놓인 책 쪽을 바라보자 도현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나도 밖에서 말하다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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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화. 낯익은 장면
상자 안에서는 눅눅한 종이 냄새가 났다.서윤은 제일 위에 있던 졸업 전시 도록부터 들어냈다. 구겨진 포스터와 쓰다 만 채색지가 그 밑에 끼어 있었다. 펴 놓을 자리가 모자라 도현의 자료 상자를 조금 밀고 바닥에 앉았다.찾는 스케치북의 표지는 노란색이었다. 이사할 때 모서리가 찢어져 테이프를 붙여 둔 기억이 났는데, 막상 눈앞에 있는 것들은 모두 비슷한 회색으로 바래 있었다. 서윤은 책등을 하나씩 만져 보고 안쪽의 이름을 확인했다.『닫는 시간』.제목을 찾았을 때 밖에서는 쓰레기 수거 차량이 후진하는 소리가 났다. 서윤은 무릎 위에 스케치북을 올렸다. 첫 장에 써 둔 자기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아 책상 조명을 바닥 쪽으로 돌렸다.한서윤. 단편 합평용.그 아래에는 지운 제목이 하나 더 있었다. 처음에는 『돌려줄 열쇠』라고 썼다가 이야기가 너무 일찍 드러나는 것 같아 바꾼 것이었다. 서윤은 종이 가장자리를 누르며 다음 장을 펼쳤다.빈 세탁소 앞에 선 여자.닫힌 유리문 안쪽에 걸린 앞치마.여자의 몸에 가려 반쯤만 보이는 의자.채령의 소개서를 옆에 띄웠다. 옛 그림 속 여자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새 작품의 여자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가게 간판도 달랐다. 서윤이 연필로 대강 그어 둔 전깃줄 대신 화려한 건물 장식이 들어가 있었다.그런데 장면을 넘기는 순서는 같았다.서윤은 첫 컷을 가린 채 다음 컷을 읽어 보았다. 여자 뒤로 보이는 의자가 무슨 의자인지, 그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바로 알 수 없게 한 구도였다. 세탁소 유리문에 붙은 종이 때문에 실내가 한 번 더 가려졌고, 여자가 몸을 옮긴 다음에야 빈자리가 드러났다.당시 합평에서는 가게 안을 먼저 보여 주라는 말을 들었다. 독자가 어디인지 알아야 따라온다고 했다. 서윤은 한 장을 다시 그려 갔다가 처음 순서로 되돌렸다. 여자는 사정을 아는데 독자만 모르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소개서 속의 여자도 같은 순서로 빈 의자를 드러냈다.우연일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세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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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화. 내가 그린 그림
“원본까지 가져왔어?”채령은 서윤의 가방에서 나온 스케치북을 보고 웃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 앞에는 커피가 2잔 놓여 있었다. 서윤은 코트를 벗지 않은 채 맞은편 의자에 가방부터 내려놓았다.“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아직도 그걸 갖고 있네. 난 이사하면서 예전 건 거의 버렸는데.”채령은 서윤의 커피를 조금 앞으로 밀어 주었다. 잔 밖으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서윤은 따뜻한 물도 주문할 수 있는지 물은 뒤 스케치북을 펼쳤다.금요일 오전의 카페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커피 머신이 돌아갈 때마다 목소리를 조금 높여야 했고, 그러고 나면 옆자리까지 이야기가 들렸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서윤은 원고를 채령 쪽으로 돌리며 말을 시작했다.“소개서에 들어간 세탁소 장면이요. 여기부터 여기까지 제 콘티랑 같아요.”채령이 종이 위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페이지를 넘기려기에 서윤이 먼저 해당 장을 펼쳐 주었다. 오래된 접착 부분을 더 벌리고 싶지 않았다.“이거 보여 주려고 보자고 한 거야?”“네. 어떻게 쓰시게 된 건지 듣고 싶어서요.”“우리가 그때 작업 같이 했잖아.”채령은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듯 말했다. 서윤은 복사본을 한 장 더 올려놓았다.“언니가 색 연습해 보고 싶다고 가져가셨어요.”“응. 그래서 같이 해 봤지.”“그림은 제가 다 그린 다음이었고요.”채령은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손에는 얇은 반지가 2개 끼워져 있었다. 그녀가 잔을 놓자 컵 받침이 살짝 밀려 스케치북 아래로 들어왔다.“서윤아. 색만 얹으면 그냥 네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색은 언니가 하셨죠. 간판이랑 배경도 새로 그리셨고요. 그 부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서윤은 가져온 종이에서 표시한 곳을 짚었다.“가게 안을 가렸다가 보여 주는 순서, 여자가 돌아서는 위치, 손을 내미는 장면이요. 대사도 마지막 말만 바뀌었고요.”“그런 구도는 많이 써.”“따로 보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이어지는 건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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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화. 남편의 확인
“앞에 보낸 말도 있어.”서윤은 자기 휴대폰을 켜서 도현에게 내밀었다. 채령이 잘라 보낸 문장 바로 위에는 담당 편집부에 비공개 검토를 요청하겠다는 말이 남아 있었다. 대화창을 더 올리면 그전에 보낸 원본 사진들도 나왔다.도현은 화면을 읽고도 자기 휴대폰을 거두지 않았다.“채령이는 지금 이걸 밖에 퍼뜨리겠다는 말로 들은 거야.”“편집부에 제출한다고 썼잖아.”“받는 사람이 그렇게 느꼈다는데.”서윤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림을 보여 주려고 앞쪽으로 옮겨 둔 종이가 팔에 걸려 바닥으로 흘렀다. 도현이 먼저 허리를 숙여 주워 주었다. 종이는 순서대로 놓지 않고 한데 모아 건넸다.“이런 건 말로 풀어. 글로 보내니까 서로 오해하잖아.”“오늘 만나서 얘기했어.”“좀 더 좋게.”“그림을 쓴 경위를 알려 달라고 했어. 어떻게 더 좋게 말해야 해?”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스케치북 표지를 보았다. 서윤은 원본을 보관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부터 다시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쳤다. 하지만 그가 그림을 보지 않은 채 나가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당신도 이거 알아.”“안다고 했잖아.”“그럼 누가 그렸는지도 알잖아.”도현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네가 그렸지.”대답이 너무 쉽게 나와 서윤은 다음 말을 바로 잇지 못했다. 도현이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기 전에 종이 한 장을 그의 앞에 펼쳤다.“그걸 채령 언니한테 말해 줘.”“그게 지금 무슨 도움이 되는데.”“내가 자기 자료를 가져간 것처럼 얘기하잖아. 그건 아니라고 말해 줘.”도현은 원고를 내려다보다 종이를 반듯하게 맞췄다. 옆면에 채령의 소개서가 겹쳐 있었다. 그는 그쪽을 위로 올려놓았다.“옛날 습작 얘기하고 지금 나오는 작품 얘기는 다르지. 채령이가 새로 만든 부분도 있잖아.”“내가 그 부분까지 달라고 했어?”“회사에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겠냐고. 복귀 직전에 남의 아내가 나타나서 자기 이름 넣어 달라는데.”서윤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남의 아내라는 말이 도현의 입에서 나왔다. 지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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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화. 보내지 못한 설명
메일 제목에서 ‘남편’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나니 용건이 짧아졌다.콘티 사용 경위 확인 및 표기 정정 요청.서윤은 그 아래에 자신이 그린 단편의 제목과 채령의 복귀작 제목을 적었다. 같은 장면이 나온다는 말부터 쓰지 않고, 언제 그렸고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보냈는지 순서대로 설명했다.화요일이었다. 전날 찾아 놓은 문의 주소를 다시 확인한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원본에서 복사한 해당 페이지, 공개 미리보기, 잘리지 않은 대화 화면을 첨부했다.도현에게 미리 읽어 달라고 하지 않았다.자동 수신 안내가 온 것은 금방이었다. 접수 번호가 붙은 메일을 열어 보니 신청인 이름과 작품명을 다시 적어 달라는 양식이 있었다. 서윤은 이름 칸에 한서윤이라고 입력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활동명에는 윤슬을 적었다. 현재 계약 작품을 쓰는 칸에서는 손이 멈췄다.지금까지 만든 장편들은 강도현의 이름으로 공개돼 있었다. 그 제목을 쓰면 이번 문의와 다른 원고까지 설명해야 했다. 서윤은 ‘그 외 문의’를 선택하고 설명란에 단편 콘티의 창작자라고 적었다.입력을 마친 뒤 담당 번호로 전화했다. 연결을 기다리는 동안 안내 음악이 2번 반복됐다. 서윤은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종이에 적다가, 상대가 전화를 받자 펜을 내려놓았다.“메일로 콘티 사용과 표기 정정을 문의한 한서윤입니다. 접수 번호가…….”번호를 읽자 담당자가 자료를 찾았다. 잠깐의 침묵 뒤 상대는 현재 계약된 작가가 맞느냐고 물었다.“아니요. 그 작품에 사용된 이전 콘티를 제가 그렸어요.”“그럼 제출하신 자료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다만 바로 표기를 바꾸기는 어렵고요.”“확인하는 데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서윤은 대답을 적었다. 해당 부분만으로는 앞뒤 맥락을 보기 어려우니 전체 콘티가 필요하다고 했다. 최초 작성 시점과 전달 경위를 설명할 자료도 있으면 함께 보내 달라는 말이 이어졌다. 당시 작업 참여자와 원고를 보기만 한 사람을 구별해서 적어 달라고도 했다.“종이 원본은 제가 갖고 있어요. 필요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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