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아내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강도현의 휴대폰에 신작 연재 알림이 떴다. 작가의 이름은 윤슬. 죽은 아내 한서윤의 필명이었다. 10년 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던 작품들. 그 뒤에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도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매주 일요일, 서윤이 남긴 그림이 한 편씩 공개될 때마다 그가 외면해 온 진실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야 아내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 남편. 하지만 그가 아무리 다음 장을 기다려도, 서윤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Ver mais아내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새 원고가 올라왔다.
밤 10시였다. 강도현은 식탁에 쌓인 조의금 봉투를 정리하다 휴대폰을 집었다. 검은 화면에 오래 잊고 있던 이름이 떠 있었다.
[구독한 작가 윤슬의 신작이 공개되었습니다.]
[너에게 남긴 여백 — 1화]
윤슬.
한서윤이 결혼 전에 쓰던 작가명이었다.
도현은 알림을 밀어 없애려다 작품을 열었다. 누가 이 계정을 만지고 있는지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 장례식에서까지 서윤의 작업 이야기를 꺼내던 차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첫 컷이 화면을 채웠다.
비가 그친 정류장, 젖은 의자 한쪽을 닦아 놓고 빈자리를 보는 여자. 그 곁으로 길게 내려오는 말풍선까지.
도현은 손가락을 멈췄다.
거실 책장에는 『물의 가장자리』가 꽂혀 있었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첫 장편. 10년 동안 인터뷰에서 수없이 설명한 첫 장면이었다.
지금 아내의 이름 아래 떠 있는 그림은 그 첫 컷과 같았다.
***
21주 전.
“이거 오늘 안에 가능하지?”
서윤이 국을 데우다 돌아보니 도현이 식탁 위에 태블릿을 내려놓고 있었다. 화면에는 네모 칸 몇 개와 짧은 메모가 떠 있었다. 장면 순서와 구도를 잡는 밑그림인 콘티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빈칸이 더 많았다.
“몇 장면인데?”
“뒤쪽만. 앞은 거의 됐어.”
서윤은 불을 줄인 다음 화면을 넘겼다. 앞부분은 오전에 자신이 그려 넘긴 원고였다.
마지막 장면의 빈칸 9개 앞에 도현이 그린 남자 얼굴이 붙어 있었다. 얼굴만은 말끔했다. 도현은 팬 사인회에서 고개를 반쯤 돌린 남자를 그려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망설이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칸에는 ‘여주 반응’, 그다음에는 ‘둘이 대화’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왜 돌아왔는데?”
“지난주에 싸웠잖아.”
“싸운 건 아는데, 돌아온 이유.”
도현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대답했다.
“네가 잡아 줘. 지금 그게 좀 안 풀려.”
“어제까지 해 보겠다고 했잖아.”
“해 봤어. 그러니까 이만큼이라도 있지.”
서윤은 칸 사이를 더 내려 보았다. 마지막에는 고백 장면이라는 메모가 있었다. 돌아온 이유도, 싸움을 풀 계기도 없는데 고백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대로 대사를 붙이면 남자는 화를 내고 나간 지 한 회차 만에 사랑한다고 말하게 된다.
“오늘 고백하면 너무 빨라. 문 앞에서 멈추는 게 낫겠어.”
“그러면 독자들이 또 답답하다고 해.”
“자기 우산까지 없어진 걸 보게 하자. 여자가 자길 찾으러 나갔을 수도 있잖아. 안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는 거지.”
도현이 물병 뚜껑을 닫았다.
“그거 괜찮네.”
칭찬은 짧았다. 서윤은 화면 위로 손을 가져가다 국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끓어오른 거품이 냄비 가장자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밥 먹고 할게.”
“나는 나가 봐야 해. 은수 PD한테 11시 반까지 준다고 했어.”
“지금?”
도현은 현관 쪽으로 가면서 외투를 들었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둔 회색 목도리가 바닥으로 끌려 서윤이 주워 올렸다.
“사람 만나기로 했어. 내가 빠지면 안 되는 자리야.”
“당신 장면 잡는 동안 나는 앞부분 색 맞추려고 했는데.”
“색은 나중에 하면 되잖아. 이야기가 먼저지.”
그가 팔을 내밀었다. 서윤은 들고 있던 목도리를 건네고 식탁 쪽을 보았다. 2인분의 밥그릇을 꺼내 놓은 것을 이제야 알아본 도현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말 안 했나? 먹고 들어올게.”
“안 했어.”
“그럼 내 건 넣어 놔. 내일 먹지, 뭐.”
현관에서 구두를 신던 도현은 휴대폰을 귀에 댔다. 조금 전과는 다른, 한결 느긋한 목소리였다.
“네, 대표님. 지금 출발합니다. 아내가 자꾸 밥 먹고 가라고 붙잡아서.”
서윤은 그의 등 뒤에서 그릇 하나를 도로 가져왔다. 붙잡은 적은 없었다. 나간다는 말을 못 들었을 뿐이었다.
통화를 마치지 않은 도현이 손을 흔들자 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데운 국이 다시 식는 동안 식탁 위 태블릿 화면도 어두워졌다.
밥을 먹으려니 시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후 7시 40분. 남은 장면을 짜고 인물을 그리고 앞부분과 연결하려면 11시 반도 빠듯했다. 서윤은 국에 밥을 조금 말아 먹고 나머지를 냉장고에 넣었다.
복도 끝 작은 방에는 창가를 향해 책상이 놓여 있었다. 원래 손님용 침대가 있던 자리였지만, 도현의 자료 상자가 늘면서 침대부터 치웠다. 상자는 그대로였고 서윤의 의자만 그 틈에 들어갔다.
거실 옆 큰 작업실은 도현이 인터뷰 촬영을 할 때 썼다. 그 방 책상에는 선물 받은 펜들이 받침대에 꽂혀 있었다. 서윤은 자기 펜을 찾다가 키보드 아래에서 꺼냈다. 손가락이 닿는 고무 부분이 헐거워져 검은 테이프로 감아 둔 것이었다.
도현의 파일을 열자 이전 원고가 함께 나타났다. 서윤은 지난 회차 마지막 부분부터 읽었다. 남자는 화가 나서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갔다. 여자는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문을 닫는 소리 때문에 끝말을 전하지 못했다.
서윤이 펜을 움직였다.
되돌아온 남자가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문을 손바닥 너비만큼 열자 불 켜진 현관이 보인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틈만 들여다본다. 늘 우산 2개가 꽂혀 있던 자리가 비어 있다.
도현이 그려 둔 얼굴을 그대로 쓰려다가 눈썹 선을 지웠다. 잘생긴 얼굴이 필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돌아오고 싶어서 왔으면서도 들키기 싫은 사람, 먼저 문을 열었다가 또 밀려날까 봐 망설이는 사람이어야 했다.
서윤은 문손잡이를 잡은 손부터 다시 그렸다. 엄지에 힘이 들어가다가 풀리는 작은 동작을 2컷으로 나누니 얼굴을 크게 넣지 않아도 머뭇거림이 보였다.
휴대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어머니 전화 오면 받아 줘. 나 통화 중이라고.]
서윤이 메시지를 읽자마자 박정란의 전화가 걸려 왔다. 펜을 내려놓고 받으니 인사보다 질문이 먼저 나왔다.
“도현이랑 같이 있니?”
“아니요. 약속 있어서 나갔어요.”
“주말에도 바쁘네. 너는?”
“집에서…….”
서윤은 화면의 빈칸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원고 보고 있어요.”
“아, 도현이 거 틀린 데 봐 주는구나.”
“네, 같이 좀.”
“그러면 됐다. 나는 걔가 집에 와서도 일을 다 끌어안고 있을까 봐. 옆에서 잘 좀 챙겨 줘.”
수화기 너머로 텔레비전 소리가 커졌다. 정란은 다음 주에 친척을 만나는데 도현이 받은 상 이름을 정확히 알려 달라고 했다. 서윤이 주최 기관과 수상 부문을 말하자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잘못 옮겨 적으면 안 된다며 철자를 하나씩 불러 달라는 부탁까지 이어졌다.
통화를 끊고 보니 12분이 지나 있었다. 서윤은 메모해 둔 대사를 읽다가 마지막 문장을 지웠다. 방금 전에는 자연스러웠던 말이 지금은 너무 친절하게 느껴졌다. 여자가 사정을 전부 설명해 주면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됐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문 앞에 선 남자를 보고 우산을 먼저 내민다. 남자는 받아 들지 못한다.
‘내 것까지 가져갔어?’
‘비 온다며.’
서윤은 그 밑에 넣으려던 긴 대사를 없앴다. 여자가 우산을 2개 들고 나간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였다.
화면을 휴대폰으로 옮겨 실제 읽는 크기로 확인했다. 우산 손잡이가 너무 작았다. 확대할 때는 선명했던 정보가 줄이자 묻혔다. 서윤은 앞 장면의 빈 우산꽂이를 조금 키우고 마지막 컷의 여자가 젖은 팔을 숨기지 않도록 구도를 고쳤다.
도현에게 장면 몇 개를 캡처해 보냈다. 오래 기다릴 시간은 없어서 선을 정리하고 있자니 답이 왔다.
[좋네. 근데 마지막에 안아 주면 안 돼?]
서윤은 전화를 걸었다. 멀리서 웃는 소리와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안으면 다음 회차가 약해져.”
“그럼 손이라도 잡든가.”
“우산을 받아 주는 걸로 끝내자. 다음 주에 같이 들어가는 데서 시작하면 돼.”
“너무 작지 않아?”
“지금 이 사람한테는 그게 먼저야. 집에 다시 들어와도 되는지 묻는 거.”
잠시 답이 없었다. 서윤은 화면을 내려다보며 그가 그림을 보고 있기를 기다렸다.
“그래. 네가 그렇게 봤으면 그렇게 해.”
전화를 끊기 직전 도현이 덧붙였다.
“너무 피곤하게 생각하지 말고. 원래 독자들은 그렇게까지 안 봐.”
서윤은 꺼진 통화 화면을 잠깐 두었다가 작업 창으로 돌아갔다. 여자가 내민 우산 끝에서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지우면 훨씬 깔끔했지만,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남겨 두고 싶었다.
그 작은 점을 두고 한동안 확대와 축소를 반복했다. 결국 그대로 두었다.
10시가 지나자 아파트 복도에서 아이 뛰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누군가 현관문을 닫고,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린 뒤에는 펜 끝이 화면에 닿는 소리만 남았다. 서윤은 굳은 손가락을 펴다가 새끼손가락 옆에 붙은 테이프 자국을 문질렀다.
앞부분의 색을 맞추고 말풍선을 정리하자 11시 18분이었다. 선과 색을 나눠 그려 둔 작업 칸들이 화면 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서윤은 수정 전 파일을 먼저 저장한 뒤 전달용 사본을 만들었다.
맨 마지막에는 늘 들어가는 이름이 있었다.
글·그림 강도현.
작업을 시작할 때는 보이지 않게 접어 두는 칸이었다. 마지막 이미지를 뽑을 때만 다시 켰다. 흰 바탕 위에 검은 글씨가 나타났고, 여자가 들고 있는 우산 아래로 반듯하게 놓였다.
서윤은 잠깐 그 글씨를 눌렀다. 글자를 고치는 작은 창이 열렸다. 커서가 도현의 이름 뒤에서 깜빡였다.
컴퓨터 오른쪽 아래에 11시 22분이 떠 있었다. 휴대폰에는 은수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안에 받을 수 있느냐는 확인이었다. 서윤은 이름 뒤에 놓인 커서를 문장 맨 앞으로 옮겼다가, 그대로 두었다.
창을 닫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내렸다. 지난 회차와 이어지는 표정, 비가 그친 시각, 우산의 개수를 확인했다. 도현이 그린 선은 후반 첫 컷의 얼굴에만 남아 있었다.
메일 받는 사람에는 차은수의 주소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발신 계정의 이름은 강도현이었다. 서윤은 제목 끝에 ‘최종’을 붙이고 파일을 첨부했다.
본문에는 2줄만 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전송 창이 닫히자 서윤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마감에 맞췄다. 우산 끝의 빗방울도, 망설이다 손을 펴는 남자도 그대로 실릴 것이다. 그것부터 다행이라고 생각한 뒤에야 방금 켰던 이름 칸이 떠올랐다.
휴대폰에 도현의 메시지가 왔다.
[보냈어?]
서윤은 ‘응’이라고 쓰고 전송했다. 답장을 기다리면서 작업 파일을 닫으려는데, 메일 도착 알림이 먼저 떴다.
강도현 작가님, 원고 잘 받았습니다.
5월 7일 오후, 서윤은 입원 가방을 옆에 세워 놓고 다시 진료를 기다렸다. 아침에 예정했던 절차는 바뀌어 있었다. 몸 상태를 확인받고 필요한 처치를 받은 뒤 다음 진료를 잡을 때까지, 가방은 의자 옆에 그대로 있었다.직원이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다.“다음에는 이 시간에 오실 수 있으세요?”“네. 올 수 있어요.”서윤은 수첩에 날짜를 적고 새 예약을 확인했다. 다음 날 다시 병원에 왔고, 이어진 조정을 거쳐 5월 12일 입원했다.짐을 풀자 가방 속에서 구겨진 안내지가 나왔다. 지난주에 쓰려던 종이였다. 그녀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다른 서류 밑에 넣었다.입원 중의 하루는 검사와 진료 시간에 맞춰 흘렀다. 그사이에는 병상에 누워 쉬었다.도현이 파일 위치를 물으면 폴더 이름만 답했다. 집에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는 퇴원 날짜를 아직 모른다고 했다. 병원에서 컴퓨터를 쓸 수 있는지 묻는 말은 답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다.의사는 병이 위 바깥까지 퍼져 있다고 설명했다. 수술로 모두 제거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약물치료를 포함해 가능한 방법을 따져야 했다. 서윤은 설명을 들으며 수첩을 펼쳤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다 적으려고 하지 않고 먼저 들었다.“그럼 수술은 안 하는 거예요?”“지금 확인한 범위에서는 수술로 없애는 치료를 우선하기 어렵습니다. 병의 진행을 억제하는 치료를 검토하면서, 식사와 통증 문제도 같이 조절해야 해요.”“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죠?”의사는 현재 할 수 있는 일과 몸 상태에 따라 조정해야 하는 일을 나누어 말했다. 서윤은 치료를 받고 싶다고 답했다. 가능하다면 언제 시작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입원 중에는 먹을 수 있는 양과 불편한 증상을 알리는 일도 치료의 일부였다. 덜 아프다고 대답하면 빨리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던 습관이 남아 있어, 간호사가 물을 때마다 서윤은 잠깐 생각해야 했다. 어느 때 더 아팠는지, 먹은 뒤 무엇이 불편했는지 말하고 나면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그 말을 적는 사람이 있었다.퇴원 수납을
5월 7일 아침, 여행 가방은 현관에 나와 있었다. 서윤은 병원에서 가져오라고 한 서류를 확인하고 휴대전화에 택시 호출 화면을 띄웠다. 아직 호출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도현이 뒤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이거 한 줄만 봐.”서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8시 55분이었다.“지금 나가야 해.”“병원 10시잖아. 읽는 데 1분도 안 걸려.”그가 가져온 것은 축하 영상의 대본이었다. 지난주에 자료를 보낸 뒤 추가 촬영용으로 다시 고쳐 달라는 요청이 왔다고 했다. 서윤이 쓰지 않은 문장이 중간에 들어가 있었다. 오래된 원고에서 인물의 대사를 떼어 작가 자신의 경험처럼 붙인 부분이었다.“이건 인물이 한 말이잖아.”“그래서 좀 이상하다고. 내가 한 말처럼 바꿔 줄 수 없어?”“빼면 돼.”“그걸 빼면 앞에 영상이랑 안 맞는다니까.”도현은 종이를 돌려 그녀 쪽으로 더 밀었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식탁에 놓고 잘라낼 문장에 표시했다. 출발 시각을 늦추지 않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을 긋자 도현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물었다.“그건 당신이 해. 생각해 둔 게 있잖아.”“지금 이 상태로 넘기라는 거야?”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도현은 촬영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30분 안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가능한지 묻지 않은 약속이었다.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서윤이 가방을 들자 그가 작은 방을 가리켰다.“원고도 같이 열어 봐야 해. 장면 순서가 달라져서.”“오늘 못 한다고 했어.”“입원해도 바로 뭘 하는 건 아니잖아. 접수만 조금 늦으면 되는 거 아니야?”“당신이 정할 일이 아니야.”목소리가 커지자 도현은 거실 창문 쪽을 보았다. 밖에서 들을 사람을 의식하는 그 동작 때문에,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낮추려던 목소리를 그대로 두었다.“내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몇 번 말했어. 날짜도 2번 바꿨어.”“그러니까 오늘 끝내고 가라고.”도현은 같은 설명을 반복하며 촬영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나면 나갈 수
서윤은 돌려받은 봉투를 책상 서랍 안쪽에 넣었다. 은수가 보관할 원고 목록에는 그 봉투가 없었다. 목록을 접어 파일철에 끼운 뒤에도 책상 위에 남은 종이가 많아, 당장 필요한 병원 안내부터 가방에 챙겼다.4월 16일 진료에는 예약한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앞선 검사 자료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하고 앉아 있으니, 간호사가 최근 식사량을 물었다. 서윤은 잘 먹고 있다고 답하려다가 전날 먹은 것을 차례로 말했다. 말하고 보니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다.진료실에서는 검사 결과와 몸 상태를 함께 보았다. 의사는 병의 범위를 더 확인하고 치료 계획을 정하기 위해 입원 평가를 권했다. 먹는 양이 줄어든 문제도 같이 살펴야 했다.“며칠 정도 생각하면 될까요?”“검사와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우선 입원해서 필요한 평가를 진행하고 계획을 설명드리겠습니다.”서윤은 달력을 열었다. 의사가 기다려 주는 동안 남편의 일정이 화면에 나타나, 자기 예약을 적은 작은 수첩을 따로 꺼냈다. 4월 23일 옆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그날로 해 주세요.”그녀는 날짜를 받아 적었다. 병원에서는 그 사이에도 증상이 심해지면 예정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연락하라고 했다.진료실을 나오자 다음 주 원고가 먼저 떠올랐다. 서윤은 메신저를 열려던 손을 멈추고 입원 준비물 안내부터 읽었다. 빠진 물건을 적어 둔 뒤 약국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도현에게 날짜를 말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아직 몰라. 검사도 더 해야 하고, 치료 계획을 잡아야 한대.”“그럼 검사하는 데 시간을 얼마나 쓰는지도 모르는 거야?”“해 봐야 정할 수 있대.”서윤이 가방에서 안내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도현은 종이를 읽는 대신 메신저에 올라온 수정 요청을 확인했다. 다음 주까지 넘겨야 하는 원고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인물이 싸우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내가 그 부분은 건드려 봤거든. 그런데 앞뒤가 또
원고를 가방에 넣으려니 가장 오래된 스케치북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윤은 모서리를 억지로 눌러 보다가 가방을 바꾸었다. 남편의 행사 자료를 넣던 큰 보조 가방이었다. 안쪽 주머니에서 지난 행사장의 안내 종이가 나와, 그것만 빼서 책상에 놓았다.4월 13일 오전, 바닥에 펼친 스케치북들은 크기부터 제각각이었다. 문구점에서 산 얇은 연습장 옆에는 표지가 떨어져 고무줄로 묶어 둔 것도 있었다. 종이마다 적힌 날짜는 몇 년씩 떨어져 있었고, 뒤쪽이 통째로 빈 공책도 눈에 띄었다. 남편의 원고가 급해질 때면 그리던 장을 덮어 두곤 했다.서윤은 완성한 그림에 붙여 둔 파란 표시를 확인했다. 말풍선과 동작만 잡아 둔 콘티에는 회색 표시를 붙였다. 선을 정리하지 못한 인물들은 얼굴이 동그라미뿐인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해의 것은 연필이 너무 흐려서, 나중에 촬영할 때 빛을 따로 비추어야 할 것 같았다.한 장을 넘기다가 여자가 혼자 빵을 먹는 그림에서 멈췄다. 봉투를 열기 전에는 맞은편에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먹기 시작한 뒤의 칸에는 여자가 벗어 놓은 외투 때문에 그 의자가 반쯤 가려졌다.서윤은 옷깃을 고쳐 그리려다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고치는 날보다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날에 가까웠다.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며 원고를 다시 묶었다. 다음 진료일이 적힌 종이는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었다. 계약을 한 다음에도, 원고를 고르는 아침에도 그 날짜는 필요했다.은수는 전날과 같은 상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노트북 옆에 빈 파일철과 촬영용 받침대를 준비해 놓았다. 서윤이 가방을 내려놓자 은수가 손을 뻗다가 먼저 물었다.“꺼내도 될까요?”서윤은 스케치북부터 꺼내 달라고 했다. 원고의 크기가 달라 책상 위에 한꺼번에 펴 놓을 수는 없었다. 은수는 몇 권만 펼치고 나머지는 의자 위에 세워 놓았다. 두 사람이 앉은 책상 사이로 연필 자국과 지운 흔적들이 이어졌다.“이쪽은 완성본이고요. 여기부터는 콘티예요.”서윤은 표시 색을 설명했다. 은수는 회색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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