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리는 사랑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러게. 그런데 왜 지금 와서 그게 마음에 안 들지?” 사랑 없는 결혼이었다. 서로의 야망을 위해 손을 잡았고, 각자의 목표를 이루는 날 미련 없이 헤어지기로 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좋았다. 서로의 침실에 누가 드나들든 상관없었다. 분명 그렇게 약속했는데. “네가 다른 남자 품에 안기는 꼴은 못 보겠어.” “…당신 미쳤어?” “그래. 네 남편이 된 날부터 미쳐 있었나 봐.” 우리는 결혼과 동시에 이혼을 약속했다. 그런데 어쩌면, 이혼보다 먼저 끝내야 할 것이 생긴 것 같다. 서로를 향한 이 지독한 욕망부터.
View More“…당신 미쳤어요?”
한서윤이 물었다. 제 입술을 당장이라도 집어 삼킬 듯한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향해서였다. 강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물러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듯이.
“강도윤.”
“이름 부르지 마.”
“뭐?”
“지금 그 목소리로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서윤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 오늘 여자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
“만났어.”
“나도 남자 만났고요.”
“알아.”
“그럼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제야 도윤이 웃었다. 아주 짧고,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러게.”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네가 다른 남자한테 웃어 주는 걸 보고 있으니까, 내가 생각보다 인내심이 없는 새끼더라고.”
“…….”
“이런 건 계약서에 없었잖아, 한서윤.”
그 말에 서윤의 표정이 굳었다.
계약서. 그래. 그들은 계약으로 맺어진 부부였다.
서로의 사업이 목표치에 도달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서로의 연애 상대에 관여하지 않는다. 목표를 달성하면 합의하에 이혼한다.
간단하고 명료했다. 사랑은 없고, 손익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가.
“이거 놔요.”
서윤이 말했다. 도윤은 곧장 손을 놓았다.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에 오히려 서윤의 속이 뒤틀렸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제멋대로 선을 넘을 것처럼 굴다가도, 막상 그녀가 거부하면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물러났다. 마치 정말로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후회할 텐데.”
“뭘요?”
“오늘 나 밀어낸 거.”
서윤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이야말로 후회하지 마요.”
“내가 왜?”
“나한테 마음이라도 생긴 것처럼 굴었잖아.”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윤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착각하지 마.”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나도 당신한테 관심 없어요.”
“다행이네.”
“너 정말 재수 없어.”
“너도.”
서로를 향한 감정이라고는 고작 이 정도였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끝내 서로에게서 물러나지 못했다.
“이러지 마요.”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도윤의 가슴을 밀어내지 못했다. 손바닥 아래로 뜨겁고 단단한 체온이 느껴졌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여유로운 무표정 대신 낯선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강도윤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언제나 한발 먼저 계산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은 만들지 않으며, 어떤 순간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마치 무언가를 참느라 이를 악물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도윤이 물었다.
“네가 싫다고 하면 그만둘게.”
서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한마디만 하면 물러날 사람처럼.
그 사실이 이상하게 더 화가 났다.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요.”
“어떤 식으로?”
“내가 선택하는 것처럼 굴지 말라고요.”
도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네 선택 아니야?”
“…….”
“한서윤. 네가 싫으면 여기서 끝내.”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 남자는 끝까지 이런 식이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면서, 모든 결정의 책임을 그녀에게 넘겼다. 마치 자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듯이.
서윤은 그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당신은 정말 재수 없어.”
“알아.”
“잘난 척은 혼자 다 하고.”
“그것도 알아.”
“……진짜 최악이야.”
“그런데도 안 밀어내네.”
서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윤은 더는 웃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밖으로는 늦은 밤의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화려한 도심 한가운데, 서로의 이름으로 묶인 두 사람만이 자신들이 세운 규칙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서윤이 먼저 그의 셔츠 깃을 놓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도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후회하지 마요.”
도윤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후회는 내가 결정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윤이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 순간 도윤의 몸이 굳었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던 모양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한 발짝씩 밀어내던 여자가 먼저 거리를 좁혔다는 사실이 그를 잠시 멈춰 세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도윤은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입맞춤에 응했다. 처음의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로를 떠보던 입맞춤은 이내 숨을 고를 틈조차 주지 않는 입맞춤으로 바뀌었다.
서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실수였다. 분명 실수였다.
저 남자는 그녀가 사랑할 사람도,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계약서에 이름을 나란히 적은 남자였다. 사업이 목표에 도달하면 헤어질 사람. 각자의 연애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한 사람.
그런데 왜. 왜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때보다 이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이 더 신경 쓰이는 걸까. 왜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하나에 이토록 예민해지는 걸까.
서윤은 생각을 멈췄다. 지금은 이유를 찾고 싶지 않았다.
도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윤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런 자신이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오늘 저녁 그녀가 다른 남자와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속이 불편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얼마나 오래 만났는지, 서윤이 그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얼굴을 보여 주는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서윤이 다른 남자에게 웃어 주는 모습을 보고 나니, 그토록 간단한 약속이 우스울 만큼 어려워졌다.
“한서윤.”
그가 낮게 불렀다.
“…왜요.”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어.”
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요?”
“뭐가.”
“그만두고 싶어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솔직했다. 서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거짓말은 못 하네, 강도윤.”
“너한테까지 잘 보일 생각 없어.”
“다행이네요. 나도 당신한테 잘 보일 생각 없으니까.”
“그럼 됐네.”
“그러게요.”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끝내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서로를 끌어당겼다.
도윤의 입술이 서윤의 입술에 겹쳐졌다. 방금 전까지 날카롭게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서윤은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고, 도윤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을 것처럼.
숨이 모자랄 만큼 입을 맞추고서야 두 사람은 잠시 떨어졌다. 그러나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 짧은 틈마저 견디지 못했다.
“……정말 후회 안 해?”
서윤이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물었다.
도윤은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누구에게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을 여자였다. 자신 앞에서도 늘 여유롭게 웃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던 여자.
그런 서윤이 지금은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쓸었다.
“그 질문, 아까도 했어.”
“대답은 안 했잖아요.”
“네가 듣고 싶은 대답이 뭔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네 마음을 모르겠으니까.”
서윤은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그런 말도 다 하네요.”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어.”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더 묻지 마.”
그 말에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도윤의 이마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숨결이 뒤섞였다. 평소라면 한마디쯤 비꼬았을 서윤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상황을 정리했을 도윤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럴 생각은 없었다.
서윤이 먼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도윤은 짧게 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로를 향한 감정을 인정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입맞춤에 더 깊이 매달렸다.
마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계약도, 약속도, 각자의 연인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주 앉을 두 사람의 관계도.
그 밤만큼은 전부 잊기로 한 것처럼. 창밖의 불빛이 하나둘 희미해졌다.
몇 번이나 서로를 밀어내려 했고, 몇 번이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잠시 떨어져 있으면 어느 한쪽이 먼저 상대를 바라봤고, 시선이 마주치면 결국 다시 거리가 좁혀졌다.
누구도 먼저 끝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끝내자는 말을 꺼내는 순간, 정말로 멈춰야 할 것 같았으니까. 새벽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침묵만 쌓여 갔다.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다.
좋아한다는 고백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로를 끌어안은 손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 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계약서에 적힌 모든 조항이 무색해질 만큼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둘 중 누구도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저녁 일곱 시.양가 식사 자리는 예상보다 화기애애했다. 양가 부모님은 공동 사업의 진행 상황을 이야기했고, 앞으로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해야 할 공식 행사에 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서윤은 평소처럼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도윤 역시 빈틈없이 행동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고, 누가 보더라도 사이가 좋은 부부였다.적어도 겉으로는.“요즘 두 사람은 어때?”서윤의 어머니가 물었다. 서윤은 미소를 지었다.“좋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도윤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서윤이가 잘해 줘서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서윤은 포크를 쥔 손에 힘을 줬다.'이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도윤은 태연했다.“그렇지, 여보?”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여보? 방금 여보라고 했어?'도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서윤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그럼요. 저희 남편이 워낙 잘해 주셔서요.”이번에는 도윤의 손이 멈췄다. 양가 부모님은 흐뭇하게 웃었다.“아이고, 신혼이라 그런가. 둘이 보기 좋네.”“그러게요. 도윤이가 원래 저렇게 살갑게 구는 애가 아닌데.”서윤은 환하게 웃었다.“집에서는 더 잘해요.”도윤은 물을 마셨다. 서윤은 그가 잔을 내려놓는 순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남편 노릇 잘하시네요.”도윤도 웃는 얼굴로 답했다.“너도 아내 노릇은 잘하네.”“그럼요. 계약은 지켜야 하니까요.”“…그래.”그는 미소를 유지했다.“계약은 지켜야지.”두 사람의 웃음은 완벽했다. 하지만 테이블 아래에서 서윤의 구두 끝이 도윤의 구두를 살짝 건드렸다. 실수인 척.도윤이 그녀를 돌아봤다. 서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을 마셨다.도윤은 낮게 웃었다.이 여자.정말 보통이 아니었다.***식사가 끝난 뒤.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 올랐다.문이 닫히자마자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여보는 무슨 여보예요?”도윤은 안전벨트를 매며 대답했다.“부부니까.”“평소에는 이름도 제대로 안 부르시면서요.”“부
오후 네 시 삼십 분.강도윤은 예정에 없던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정확히는, 회사 관계자와의 미팅이 근처에서 끝났다.그는 비서가 준비한 차에 오르려다가 길 건너편을 바라봤다. 그리고 보았다.한서윤. 윤태하.두 사람은 전시관을 나오는 중이었다.태하가 서윤의 코트 깃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서윤은 웃으며 무언가를 말했고, 태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오래된 연인처럼.도윤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대표님?”비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태하가 서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길을 건너려 했다. 그때 서윤이 웃으며 무언가를 말하자 태하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차 대기시켜.”“네?”“저쪽으로.”비서는 도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망설였다.“…사모님이 계시네요.”“못 봤나?”“아닙니다.”“그럼 움직여.”비서는 더 묻지 않았다. 검은색 세단이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마침 서윤과 태하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이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갔다.“한서윤.”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강도윤?”도윤은 태하를 한 번 바라본 뒤 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타.”서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뭐라고요?”“집에 가야 하잖아.”“아직 시간 남았는데요?”“양가 식사.”“알아요. 여섯 시 반까지 들어가면 되잖아요.”도윤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지금 네 시 반이야.”“그러니까요.”“차 타.”서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강도윤 씨.”“왜.”“저 지금 태하랑 같이 있잖아요.”“보이는데.”“그런데 왜요?”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이 웃었다.“설마 데리러 오신 거예요?”“지나가는 길이야.”“아, 지나가는 길.”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가던 길 가세요. 저희도 알아서 갈게요.”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태하가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괜찮습니다. 제가
토요일 오후 두 시.한서윤은 거울 앞에서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태하와 보내는 주말이었다.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점심을 먹고, 전시회를 보고, 시간이 남으면 카페에 들를 생각이었다.평범한 데이트. 그런데 옷을 고르는 데 평소보다 십 분이나 더 걸렸다. 서윤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좁혔다.“…뭐 하는 거야, 한서윤.”누구를 만나든 평소처럼 입으면 그만이었다.태하를 만나는 데 특별히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어색할 리도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너 오늘 누구 만나?'물어볼 리도 없는 남자였다.'누굴 만나든 내 알 바 아니야.'분명 그렇게 말할 사람이었다. 서윤은 립스틱을 내려놓았다.“아, 몰라.”가방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그 순간이었다.“어디 가?”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강도윤이었다.주말인데도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다. 소파에는 펼쳐 놓은 서류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식어 가는 커피가 있었다.서윤은 시계를 확인했다.“약속 있어요.”“누구랑?”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걸 왜 물어보세요?”도윤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주말에 외출한다니까 물어본 거야.”“제 외출 일정까지 보고해야 하나요?”“그런 말 안 했어.”“그럼 왜 궁금한데요?”그제야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윤태하?”서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와.”“뭐.”“진짜 신기하다.”“뭐가.”“제가 누구 만나는지 관심 없다고 하시는 분이 이름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시네요.”도윤의 표정이 굳었다.“그쪽이 네 주변에서 제일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니까.”“제가 언제 그렇게 자주 언급했어요?”“됐어. 나갈 거면 나가.”“네. 그러려고요.”서윤은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으려는 순간, 도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한서윤.”“이번엔 또 왜요?”“너
서윤의 손이 멈췄다.“…그건 왜 궁금하세요?”세린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저는 도윤 씨를 오래 봐 왔으니까요.”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런데 결혼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갑작스러웠거든요.”“그랬겠네요.”“혹시 두 분, 정말 서로 좋아해서 결혼한 건 아니죠?”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린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그럼 다행이에요.”서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뭐가 다행이라는 거죠?”“도윤 씨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저를 떠난 건 아니라는 뜻이니까요.”세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저는 도윤 씨와의 관계를 쉽게 정리할 생각이 없어요. 물론 결혼하셨으니 예전처럼 만날 수는 없겠죠.”그녀는 서윤을 똑바로 바라봤다.“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저도 확인해 보고 싶어요.”서윤은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해는 됐다. 세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과 도윤의 결혼이 사업적 합의에 가깝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서윤은 그 감정을 굳이 분석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정세린 씨.”“네.”“도윤 씨가 뭘 원하는지는 도윤 씨에게 물어보세요.”세린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저는 그 사람의 마음을 대신 설명해 드릴 수 없거든요.”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한 가지 더요.”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저희 결혼이 어떤 결혼이든, 지금 저는 그 사람의 아내예요. 그러니까 저한테 허락을 구하실 필요도 없지만, 저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실 필요도 없어요.”세린은 한동안 서윤을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미소 지었다.“생각보다 단단한 분이시네요.”“그런 말 자주 들어요.”“그럼 다음에 또 이야기해요.”“네. 들어가세요.”서윤은 라운지를 나섰다.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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