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날 아침 이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정민은 여전히 비서실장이었고, 사라는 보조 비서였다. 회사에 들어서면 서로 존댓말을 썼고 업무가 시작되면 전날 밤 어디에서 누구와 있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다만 가끔. 퇴근 시간이 겹친 날 눈이 마주치거나 술 한잔을 함께한 밤이면 굳이 말로 약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같은 곳으로 향하는 날이 생겼다. 그뿐이었다. 연애도, 사랑도 아니었다. 서로 외로운지 묻지도 않았고 관계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 원할 때 만나 즐기고,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사라에게는 오히려 그래서 편했다. 정민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늘은 안 됩니다.” 퇴근 준비를 하던 정민이 먼저 말하자 사라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뭐랬어요?” “눈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의식 과잉이네.” 사라가 피식 웃었다. “여자친구 만나러 가요?” “네.” “그럼 빨리 가요. 기다리겠다.” 그게 끝이었다. 다음 날 출근한 정민에게 어제 뭐 했냐고 캐묻지도 않았고 여자친구와 연락한다고 질투하지도 않았다. 붙잡지 않는 여자.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떠나는 사람도 잡지 않는 게 민사라였다. 그래서 정민에게도 사라는 편했다. 몸을 섞었다고 자신의 여자 행세를 하지 않았고 평소에는 친한 동생처럼 굴었다. 때로는 말 많은 직장 후배였고, 술자리에서는 죽이 잘 맞는 친구였으며, 서로 원하는 밤에만 조금 다른 관계가 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그 관계를 이성적인 감정으로 착각하지 않았다. 정민에게 사라는 재미있고 편한 녀석이었다. 사라에게 정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 뒤 오후 두 시. 서울 강남의 한 호텔 비즈니스 라운지에서는 CH건설과 대형 자재 협력업체의 외부 미팅이 진행되고 있었다. 긴 테이블 상석에는 강수가 앉았고 오른쪽에는 정민, 그 옆에는 사라가 자리했다. 사라는 태블릿 화면을 켜놓은 채 오가는 내용을 빠르게 기록하고 있었다. 납품 단가와 공사 일정, 자재 수급 문제부터 신규 현장에 적용될 제품 규격까지. 상대 업체의 말이 길어지면 핵심만 추려냈고 강수가 질문한 부분은 별도로 표시했다. “기존 납품 일정으로는 맞추기 어렵다는 겁니까?” 강수의 낮은 목소리가 떨어지자 협력업체 상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원자재 입고가 예정보다 늦어졌습니다. 최소 열흘 정도는 필요합니다.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강수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최대한이라는 말 들으려고 나온 자리 아닙니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납품이 열흘 밀리면 자재 하나가 늦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해당 자재가 들어와야 시작되는 후속 공정부터 그 뒤의 작업 일정까지 줄줄이 밀릴 수 있었다. 사라는 고개를 숙인 채 생산 현황표와 납품 계획표를 다시 확인했다. 그러다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원자재 전체가 늦어지는 게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건 CH건설에서 주문한 물량 중 특정 규격이었다. 현재 확보된 물량. 생산 가능한 수량. 현장별 필요 수량. 그리고 실제 투입 날짜. 몇 번이나 숫자를 확인하던 사라가 정민에게 몸을 기울였다. “실장님.” “네.” “이거 전량이 같은 날 필요한 거예요?” 정민이 자료를 확인했다. “아닙니다. 1차 시공 물량이 먼저 필요하고 나머지는 후속 공정에 들어갑니다.” 사라가 다시 숫자를 훑었다. 그렇다면 굳이 열흘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회장님.” 회의 중 갑자기 들려온 사라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였다. 강수도 고개를 돌렸다. “왜.” “납품일 안 미뤄도 될 것 같은데요.” 협력업체 상무의 표정이 굳었다. 정민 역시 사라를 바라봤지만 사라는 태블릿 화면을 강수 쪽으로 돌렸다. “전체 물량을 한꺼번에 받으려고 하니까 열흘이 밀리는 거잖아요.” 사라가 화면에 표시된 숫자를 짚었다. “근데 현장에서 전량을 같은 날 쓰는 건 아니고요. 첫 공정에 필요한 물량은 전체의 삼십 퍼센트 정도예요.” 강수의 시선이 화면으로 내려갔다. “계속해.” “지금 확보된 원자재로 이 삼십 퍼센트를 우선 생산해서 기존 납품일에 먼저 보내면 첫 공정은 예정대로 시작할 수 있잖아요.” 사라의 손가락이 후속 공정 일정을 차례로 짚었다. “나머지는 원자재 들어오는 대로 2차, 3차로 나눠서 보내고요. 실제 현장 투입일 전에만 들어오면 전체 공정은 안 밀려요.” 협력업체 상무가 자료를 다시 들여다봤다. “그리고 한 생산 라인으로 부족하면 같은 규격 생산이 가능한 다른 라인에 일부 물량을 돌릴 수 있는지도 확인해보면 되고요. 운송도 분할해서 현장으로 바로 보내면 창고에 전량 쌓아둘 필요도 없고.” 사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을 마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상무가 옆자리 직원과 빠르게 이야기를 나눴다. 생산 현황표를 확인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던 직원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강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합니까.” “네. 1차 물량을 우선 생산하면 기존 납품일에 맞출 수 있습니다. 나머지도 현장 투입 일정에 맞춰 분할 출고하면 전체 공정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전까지 열흘은 필요하다던 일이었다. 사라는 다시 태블릿을 끌어당겨 방금 합의된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정민이 그런 사라를 힐끗 바라봤다. “이걸 어떻게 봤습니까?” “계속 적다 보니까 이상하잖아요.” “뭐가요?” “필요한 날짜가 다 다른데 왜 전부 같은 날 받으려고 하나 싶어서.” 사라에게는 정말 그게 전부인 듯했다. 하지만 강수는 달랐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사라를 가만히 바라봤다. 술을 좋아하고, 노는 걸 좋아하고, 입만 열면 사람을 어이없게 만드는 여자. 그게 자신이 알던 민사라였다. 그런데 알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전혀 다른 얼굴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때. 라운지 문이 열리며 협력업체 직원 한 명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상무님, 해외 본사 담당자들이 벌써 도착했습니다.” 상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통역은?” “아직 오는 중입니다.” 강수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사라가 아무렇지 않게 태블릿을 내려놓았다.식사는 거의 끝나 있었다. 테이블 위 음식은 대부분 식었고, 처음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세 사람 사이에 놓인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사라는 여전히 서희를 용서하지 않았다. 서희 역시 사라를 용서하지 못했다. 강수와 서희 사이에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누구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는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세 사람은 한 테이블에 끝까지 앉아 있었다. 5년 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서희는 맞은편을 바라봤다. 진이는 강수의 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커다란 팔 안에 작은 몸이 완전히 묻혀 있었고, 강수는 대화하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아이의 자세를 고쳐 안았다. 그 옆에서 사라는 남은 밥을 먹고 있었다. 강수의 손이 움직였다. 사라 앞에 반찬 하나를 당겨놓았다. 사라는 쳐다보지도 않고 집어먹었다. “이거 맛있다.” “더 시켜?” “아니. 배불러.” “그만 먹어.” “방금 더 시키냐며.” “배부르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강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서희
사라는 눈을 깜빡였다. 질문이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내가 널 이해를 왜 해?” 서희의 표정이 멈췄다. 강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품에 잠든 진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릴 뿐이었다. “……왜라니?” “왜 이해해야 되는데?” 사라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너는 나 이해하려고 1년이나 돌아다녔다며.” “응.” “나는 그런 생각 안 해봤어.” 너무 단순한 대답이었다. 서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너답다.” “응. 나 원래 이래.” 사라는 태연하게 국을 한 숟갈 먹었다. 조금 식어 있었다. 강수가 그걸 보고 호출 버튼을 누르려 하자 사라가 손등을 잡았다. “됐어. 그냥 먹어.” 강수는 버튼에서 손을 떼었다. 사라는 다시 서희를 봤다. “네가 왜 그랬는지 생각은 해봤지.” “그게 이해하려고 한 거 아니야?” “아니.”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궁금한 거랑 이해하는 건 다르잖아.” 서희가 말이 없어졌다. “네가 왜 나를 밀었는지.” 사라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왜 그렇게까지 망가졌는지.” 그날의 기억은 아직 남아 있었다.
사라는 멈췄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서희를 한동안 바라봤다. “말했잖아.”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때 미안하다고.” 거기까지였다.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다시 사과하지도 않았다. 강수의 품에서는 진이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작은 등을 받친 커다란 손만 일정하게 움직였다. 서희가 물었다. “그게 끝이야?” “응.” 사라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컵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너는?” “뭐가.” “너도 있잖아.” 사라의 눈이 서희에게 똑바로 향했다. “나한테 미안할 일.” 서희의 손가락이 물컵에 멈췄다. 둘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강수는 끼어들지 않았다. 이건 사라와 서희가 해야 할 이야기였다. 진이가 품에서 조금 움직이자 작은 뒤통수를 받쳐 자세만 고쳐줬다. 서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지.” 사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많이.” “그래.” 그 한마디였다. 서희가 허탈하게 웃었다. “넌 안 물어봐?” “뭘.” “뭐가 미안한지.” 사
로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희가 돌아오고 싶었다는 말을 꺼낸 뒤 누구도 쉽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먼저 움직인 건 사라였다. “밥 먹었어?” 서희가 눈을 깜빡였다. “뭐?” “점심.” “……아니.” 사라가 강수를 올려다봤다. “오빠.” “왜.” “같이 먹자.” 강수의 눈이 서희에게 한번 갔다가 다시 사라에게 돌아왔다. 마음에 든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왜.” “나 배고파.” “너만 먹으면 되잖아.” “차강수.” 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강수는 몇 초 바라보다 진이를 한쪽 팔에 고쳐 안았다. “가자.” 그걸로 끝이었다. 회사 근처 한식당의 조용한 룸으로 들어갔다. 강수 옆에는 사라가 앉았고 서희는 맞은편에 자리했다. 진이는 강수의 품에서 아직 자고 있었다. 음식이 하나씩 들어왔다. 사라는 젓가락을 들자마자 갈비찜부터 집었다. “맛있겠다.” 강수는 말없이 사라 앞에 있던 작은 접시를 당겼다. 갈비의 뼈를 발라 살만 올려놓고 다시 밀어줬다. 사라는 익숙하게 집어먹었다. “맛있어.” 강수는 대답 대신 다른 반찬
사라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다시 멈췄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사라야.”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붙잡으려는 목소리도, 강수를 만나게 해달라는 말도 아니었다. 사라가 돌아봤다. 서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강수도 걸음을 멈췄다. “왜.” 사라가 물었다. 서희는 잠시 강수를 바라봤다가 다시 사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사실.”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혼하고 5년 동안 외국에 있었어.” 사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강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시선이 서희에게 머물렀다. 둘 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여행했어.” 서희가 작게 웃었다. “여기저기.” 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희가 이혼 뒤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찾아보지도 않았다.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5년이었다. “왜?” 사라가 물었다. 서희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너처럼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았어.” 사라의 표정이 굳었다. “뭘.” “네가 했던 말들.” 서희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
강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사라에게 걸어갔다. 서희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시선이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왜 안 올라와.” “가려고 했지.” 강수의 눈이 사라의 얼굴을 한번 훑었다. 화가 난 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다 아기띠 안에서 잠든 진이에게 내려갔다. “줘.”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 “진이?” “어.” “잘 자는데.” “알아.” 강수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다. 사라가 아기띠를 풀어주자 커다란 손이 진이의 목과 뒤통수를 먼저 받쳤다.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빼내 제 품에 붙인 뒤 자세를 고쳐 안았다. 진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수의 손이 등을 천천히 쓸었다. “쉬.” 작은 몸이 다시 힘을 풀었다. 사라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내가 잘 안고 있었거든?” “알아.” “근데 왜 뺏어.” “무겁잖아.” “안 무거워.” 강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비어버린 아기띠를 사라 몸에서 풀어냈다. 끈이 어깨에서 내려오자 사라가 그제야 목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