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겨울이 끝나면

내 겨울이 끝나면

By:  두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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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년 차. 배원호는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배원호가 제 아내, 오설희를 끔찍이도 싫어한다고. ... 설희가 원호를 처음 만난 건 12살 때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시절부터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까지. 그가 바닥을 딛고 정상에 오르는 긴 시간 동안, 설희는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단 한마디였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 말 하나로 설희는 사람들 눈에 제 분수도 모르고 남자 하나에 매달리는 우스운 ‘집착녀’가 되었다. 원호의 친구들은 주제도 모른 채 욕심을 부린다며 비웃었고, 그를 마음에 둔 여자들은 오랜 인연을 핑계 삼아 붙잡고 늘어지는 뻔뻔한 여자라며 설희에게 손가락질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설희가 무려 14년이라는 시간을... 배원호라는 단 한 사람의 곁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놓지 못한 것은 사랑이었고, 붙잡고 싶었던 것은 함께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끝내 그 미련은 설희를 악에 받친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원호의 눈은 언제나 차갑고 무심했다. 마침내 모든 것에 지친 설희는 이혼서류만을 남긴 채 그의 곁을 떠났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배원호가 드디어 오설희에게서 해방됐다고. 그런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평생 누구에게도 고개 한 번 숙여 본 적 없던 오만한 남자가, 흐트러진 정장 차림으로 설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처절하게 매달렸다. 이혼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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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Chapters
제1화
오설희가 숨을 몰아쉬며 강문시 외곽 산자락의 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안에서는 모임이 한창이었다.정문을 지키던 관리인은 설희가 올 줄 몰랐는지 눈에 띄게 당황했다.“오설희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다들 벌써 식사까지 끝냈는데...”남편의 생일 모임이었다. 그런데 명색이 아내인 설희만 빠져 있었다. 그 많은 지인 중 누구 하나 연락해 준 사람도 없었다.설희는 관리인에게 가볍게 웃어 보인 뒤 문을 열려다가,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손을 멈췄다.“예서 누나, 선물 뭐 준비했어요? 원호 형이 아까부터 누나 쇼핑백만 보고 있던데. 누나가 줄 선물을 엄청 기다린 것 같던데요?”“내가 그랬어?”“아직도요? 그 쇼핑백에 구멍 나겠어요. 예서 누나도 오랜만에 해외에서 돌아왔는데, 형은 그냥 오설희랑 빨리 정리해요. 괜히 다 같이 불편하잖아요.”“맞아. 애초에 오설희가 약까지 써서 네 침대에 기어들어 간 거잖아. 네가 그때 마음 약해져서 오설희 체면 챙기느라 아내 자리 안 줬으면, 걘 진작 사람들한테 매장당했어.”“...”가장 가운데 앉은 남자는 각이 반듯한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위에서 두 개쯤 풀려 있었다. 선이 날카로운 얼굴과 깊은 눈매, 곧은 콧대와 얇은 입술은 보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긴장하게 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까지 더해지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오만함이 느껴졌다.“급할 것 없어.”“형, 3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안 급해? 오설희 때문에 예서 누나 친언니가 식물인간이 됐잖아. 할머니가 감싸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진작 가만 안 뒀지.”배원호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으로 라이터를 굴리다가 문 쪽에 드리운 그림자를 흘끗 봤다.그제야 사람들도 설희가 언제부터인가 문 앞에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불렀어?”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설희가 초대도 받지 않은 자리에 찾아온 셈이었다.설희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차분하고 맑은 인상이었다. 작은 달걀형 얼굴에 밝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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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언제부터인지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별장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산 위에 있어서 호출 택시를 잡기도 쉽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은 이미 차를 타고 떠났다. 올 때 택시를 탔던 설희는 마지막까지 처마 밑에 남아 가늘게 흩날리는 빗줄기를 바라봤다.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빗속을 가르며 설희 앞에 멈췄다. 창문이 내려가자 원호의 비서 얼굴이 보였다.이름은 천현이었다.“사모님, 타시죠.”설희는 그대로 서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눈은 뒷좌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이미 아는 듯했다.설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호의 목소리가 들렸다.“출발해. 여기서 머리 좀 식히게 둬.”주천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설희를 보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설희는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바람에 실린 빗방울이 뺨에 닿았다. 서늘함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18살의 원호는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설희와 함께 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28살의 원호는 설희를 지독하게 싫어했다.지난 3년 동안 원호는 단 한 번도 설희를 안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는 날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주변에서는 설희를 재벌가에 시집간 여자 중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다. 화려한 새장 하나 빼면 가진 게 없다는 식이었다.사람들이 아는 설희는 진수청을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진예서의 약혼자까지 빼앗은 악녀였다. 용서받을 가치도 없는 여자라고 했다.하지만 설희가 12살부터 19살까지, 원호가 가장 힘들던 시절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는 사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듯했다.배씨 집안에서 가족처럼 거둬 줬는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7년의 세월을 내세워 원호에게 평생 책임지라고 억지를 부린다는 말도 따라다녔다.그 뒤로 다시 7년이 흘렀다. 세어 보니 설희가 원호 곁에 있던 시간은 도합 14년이었다.설희는 눈을 내리깔고 휴대전화의 호출 화면을 바라봤다. 여전히 배차를 잡았다는 메시지는 없었다.설희가 구름힐의 집에 도착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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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캐리어를 끌고 언니 오세영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설희는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구름힐에서 나올 때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지갑에 든 현금도 4만 원이 전부였다.결혼한 3년 동안 반복되는 싸움 속에서 설희는 심한 우울증까지 앓았다.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워 집에만 틀어박힌 채 매일 요리를 배웠다. 뜨거운 것에 데어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도 상관없었다. 그때는 아직 원호를 사랑했고, 죽을힘을 다해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관계를 되돌리고 싶었다.하지만 수없이 차갑게 식은 음식 중 원호가 손댄 것은 하나도 없었다.세영은 친언니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 함께 시골 마을을 빠져나왔고, 세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정에 입양됐다. 지금은 결혼해 배우자와 21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소박하고 따뜻하게 살고 있었다.그 뒤 설희는 원호를 만났다. 굶어 쓰러지기 직전이던 설희에게 원호가 삼각김밥 하나를 던져 줬고, 설희는 염치도 없이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둘은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함께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벌었다.설희는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얼굴을 한 번 훔치고 초인종을 눌렀다.잠옷 차림으로 문을 연 세영은 설희를 보고 놀랐다. 안방 쪽에서는 남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세영은 설희를 얼른 안으로 끌어들이고 욕실에서 깨끗한 수건을 가져왔다.“설희야, 이 한밤중에 무슨 일이야? 옷은 왜 다 젖었어? 배 서방이랑 또 싸웠어?”“언니, 나 오늘 하룻밤만 여기 있어도 돼?”“당연하지. 작은 방 하나 비어 있어. 진짜 좁긴 한데 불편하다고 하지 마.”세영은 새 잠옷을 설희에게 안겨주고 재빨리 작은 방의 침구를 정리하러 갔다.욕실은 두 사람이 서 있으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그래도 샤워 공간은 분리돼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오래된 갈색 물때가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설희는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이 늦은 시간에 드라이어까지 쓰기는 미안해 젖은 머리는 말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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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사모님, 대표님은 당분간 정말 일정이 꽉 차 있습니다. 큰 인수 건을 막 끝내셨고, 새로 편입한 회사 관련 정리할 일도 많습니다.]설희는 더 말하지 않았다. 원호가 바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결혼기념일도, 설희의 생일도 잊을 만큼 바빴고, 모든 기념일을 설희는 혼자 집에서 보냈다.“알았어요. 돌아오면 전화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사모님, 그렇게까지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전화를 끊은 설희는 가정법원 민원실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혼인 관련 서류를 들고 웃는 연인도 있었고, 이혼 절차를 밟으러 온 부부는 서로가 보기 싫은 사람이라도 되는 듯 한 발이라도 더 멀어지려 했다.설희는 핸드폰을 켜고 근처 회사들의 채용공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력서는 이미 만들어 두었다. 당장 일부터 구해야 했다.대학 시절 설희의 전공은 성악이었다. 하지만 진수청에게 일이 생긴 뒤부터 노래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지금은 한 소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으니 전공을 살릴 길이 없었다.설희는 천천히 채용공고를 넘겼다. 그중 중견 규모의 한 회사가 임원 수행비서를 뽑고 있었다. 전공이나 경력 조건은 없고, 이상할 정도로 키와 체형, 외모 기준만 적혀 있었다.이력서를 넣은 지 3분 만에 전화가 왔다. 오후에 바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었다.직장생활을 해 본 적 없는 설희는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제로 면접관 앞에 앉자, 여성 면접관은 설희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어요?”설희는 놀랐다. “업무 능력은 아무것도 안 물어보셨는데요.”“음악 전공이잖아요. 이 자리는 전문업무를 깊이 보는 게 아니에요. 임원 모시고 외부 일정이나 접대 자리 따라다니는 일이 많고, 급여도 높은 편이에요. 대신 오래 할 수 있는 직종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 봐요.”“하겠습니다.”설희는 곧바로 입사 절차를 밟았다. 해당 임원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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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기정 옆으로 가 술을 따라서 잔을 채웠다.문기정은 설희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손을 설희의 허리 쪽으로 가져갔다. 설희는 술병과 잔을 자연스럽게 사이에 두며 피했다. “문 대표님, 한 잔 받으세요.”문기정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더 손을 뻗지는 못했다. 대신 잔을 단숨에 비웠다.설희는 조태광 곁으로 돌아와 다시 얌전한 수행비서의 태도를 유지했다.중년 남자들도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 오늘 논의할 계약 이야기를 시작했다.일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나자 한 사람이 말했다. “아까 1층 로비에서 배원호 봤는데, 그 사람 기세가 장난 아니더라고. 배씨 집안은 둘째를 후계자로 밀려는 건가? 장남 배영신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보려나?”큰 재벌가에서는 형제끼리 후계 자리를 두고 충돌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배영신은 겉으로 부드럽고 품위가 있잖아. 밑바닥에서 올라온 배원호하고는 분위기부터 다르지.”“배원호는 사업에도 공격적인 편이라 집안에서도 다들 어려워한다더라. 장남이 동생한테 꽤 너그럽다는데 그게 보여 주기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누가 알겠어?”“하, 그런 집안 속사정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나 예전에 배원호한테 명함 내민 적 있는데 쳐다보지도 않던데...”“사람을 잘못 공략했네. 난 옛날 행사에서 본 적 있어. 옆에 있던 진예서 씨 칭찬을 몇 마디 했더니 명함은 받아 가더라고.”올해 서른아홉인 조태광은 그 말을 듣고 설희를 바라봤다. 눈에 희미한 동정이 떠 있었다.설희는 이미 익숙했다.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배원호가 진예서한테는 정말 잘하잖아. 몇 년 동안 행사만 가면 늘 데리고 다녔다며. 예전에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어떤 질 낮은 여자가 약을 쓰는 바람에 결혼이 깨졌다고 하던데.”“그러고 보니 집에 있다는 아내 얼굴은 본 사람이 거의 없지?”사람들은 원호와 집에 있는 아내가 어떤 관계인지 제멋대로 떠들었다. 원호가 그 여자를 얼마나 혐오할지, 이미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버렸을지까지 거침없이 추측했다.조태광이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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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문기정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원호 앞에서 꼼짝도 못 했다.원호는 큰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설희에게는 다시 눈길도 주지 않았다.문기정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원호 일행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등이 식은땀으로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했다는 생각에 더는 조태광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고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누가 봐도 도망치듯 서두르는 모습이었다.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흩어졌다.설희는 조태광에게 차 문을 열어 줬다.뒷좌석에 앉은 조태광은 계약서를 집어 들고 훑어봤다. “오늘 생각보다 잘했어. 오 비서가 문기정한테 바로 정색할 줄 알았거든.”문기정이 설희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는 누가 봐도 뻔했다. 그는 설희와 자고 싶어 했다.예전의 설희였다면 이런 상황을 절대 참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살아가려면 이런 모욕도 견뎌야 했다. 성악 전공은 당장 생계를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이사님, 저 지금 돈이 많이 필요해요.”조태광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좌석에 등을 기댔다. “너랑 배원호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원호가 설희를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다 끝났어요.”“이야, 큰 뉴스네. 3년 전에 내가 술 먹고 너한테 입 맞추려다 배원호한테 걸려서 갈비뼈 세 대 부러지고 BH그룹에서도 잘렸어.”“그때 내가 그룹에서 어느 정도 위치였는지 알아? 날 잘라내는 건 배원호한테도 부담이 꽤 컸을 거야.”당시 원호는 형 영신과 그룹 안에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시기였다.설희는 액셀을 밟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일은 분명 저 때문이 아니었을 거예요.”조태광은 BH그룹 임원까지 올라갔던 사람이다. 돌아가는 판을 못 읽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한 번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시 설희에게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원호는 자기 영역을 건드리면 끝까지 물어뜯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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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강숙경은 그제야 안도하고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희에게 물었다. “아가, 언제 들어올 거니? 어제 비가 와서 너 또 감기 들까 봐 사골국도 가져왔어.”원호는 계약서 한 장을 넘기며 차갑게 말했다. “우리 집에 국 끓일 사람이 없어서요?”밖에서 두 사람에 대한 말이 도는 걸 듣고 강숙경이 일부러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게 분명했다.설희는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대답했다. [오늘 일자리 알아보러 나왔어요. 지금 바로 들어갈게요.]강숙경이 활짝 웃었다. “그래, 그래. 너 혼자 집에만 있으면 병날까 걱정했어. 무슨 일 하고 싶니? 원호더러 회사에 자리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자. 일은 적고 돈은 많이 주는 걸로. 젊은 사람들 그런 거 좋아하잖니.”설희는 더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강숙경이 충격받아 쓰러질까 봐 사실을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몇 마디 대충 맞장구친 뒤 전화를 끊었다.통화 종료음이 들리자 강숙경은 곁에 있던 쿠션을 들어 원호에게 던졌다.“말해 봐. 대체 무슨 일이야? BH그룹 망하기라도 했니? 왜 설희가 밖에서 일자리를 찾아!”“자기 힘으로 살아 보겠다는 사람한테 왜 그렇게 간섭하세요?”강숙경은 이 손자와 말하다가는 혈압이 오를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가 영신이 반만큼이라도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으면...”원호의 눈이 서늘해졌다. ‘배려? 허울만 그럴싸하게 잘 꾸민 늑대에 불과해.’배씨 집안으로 돌아온 뒤 7년 동안 원호는 크고 작은 습격을 셀 수 없이 겪었다. 그중 영신과 얽힌 일도 적지 않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강숙경은 겨우 숨을 고르고 한숨을 쉬었다. “됐다. 그냥 설희랑 잘 지내. 그 애는 생긴 것도 순하고, 난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어.”“예전에는 네가 그렇게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난리였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둘이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원호는 대답하지 않고 계약서만 내려다봤다.얼마 지나지 않아 설희가 돌아왔다.“할머니.”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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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강숙경은 조금 안심한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나도 피곤하다. 앞으로 한 달은 여기서 지낼 거야. 괜한 짓 하지 마.”“네.”원호는 짧게 대답하고 그날 밤 바로 천현에게 지시해 믿을 만한 가사도우미 몇 명을 새로 불렀다.원호가 안방으로 돌아갔을 때 마침 재우가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의사인 재우는 다른 친구들보다 성격이 부드러운 편이었다. “난 갈게. 몸은 천천히 회복하도록 해야 해. 아, 조만간 병원 데려가서 종합검진도 한번 받아.”“알았어.”재우는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원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그대로 떠났다.원호는 안방 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손끝을 문손잡이에 올리고 몇 초 망설인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방 안의 조명은 어두웠다. 설희는 눈을 감고 있었고 잠든 모습은 놀랄 만큼 얌전했다.원호는 문을 닫았지만 바로 침대 가까이 가지 않았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설희를 바라봤다.열 때문에 설희의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속눈썹도 가늘게 떨렸다. 좋지 않은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원호는 꽤 오래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방의 불을 껐다. 침대에 눕지 않고 창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설희는 자신이 온통 불길 속에 갇힌 것처럼 느꼈다.“목말라...”“원호 씨, 물 좀 줘...”잠결에 중얼거린 뒤 차가운 물이 입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숨이 조금 편해졌다. 몸을 태우는 듯하던 열감도 약간 가라앉았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설희는 익숙한 천장을 보고 본능처럼 옆자리를 먼저 확인했다.침대에는 누군가 누웠던 자국이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설희는 이런 사소한 흔적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침대 옆 협탁에는 빈 물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설희는 급히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6시 반이 다 되어 갔다.조태광을 데리러 가야 했다.설희는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다가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강숙경을 발견했다.“할머니, 왜 아직...”강숙경은 원래 자기 집이 아닌 곳에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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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예서는 BH그룹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건물 안을 자기 집처럼 익숙하게 드나들었다.반면 설희는 원호의 아내로 3년을 살고도 BH그룹 본사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예전 같았으면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을 일이다. 지금은 잠깐 숨이 막히는 느낌만 들었을 뿐 곧 괜찮아졌다. 설희는 곧 핸드폰을 꺼내 조태광에게 전화했다.조태광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너 출입카드 없어?]“네.”조태광은 이마를 문질렀다. 설희의 사생활까지 캐묻지는 않았다. [내 지인한테 내려가라고 할게. 어차피 조항은 다 협의했으니까 1층에서 바로 서명받으면 돼.]“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설희는 1층 로비 소파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조용히 기다렸다.그때 회전문 밖에서 또 다른 여자가 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설희를 발견하자 곧장 성큼성큼 다가왔다.“이 여우 같은 년! 네가 그 인간이 밖에 숨겨 둔 여자지? 감히 우리 집까지 찾아와? 오늘 너 죽는 줄 알아!”설희가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여자가 생수병을 통째로 끼얹었다.피할 틈도 없이 차가운 물이 머리부터 쏟아졌다.아침에 봤던 조태광의 아내였다. 여자는 아침부터 조태광의 차를 계속 뒤쫓았고, 설희가 남편이 밖에 따로 두고 만나는 여자라고 확신한 상태였다. 달려들어 설희의 셔츠 앞단추를 몇 개나 잡아 뜯었다.“뻔뻔한 불륜녀 같으니라고! 사람들 다 보세요! 요즘은 남의 남편 건드리는 여자들이 본처 집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린다니까!”BH그룹 1층은 원래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주변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설희는 벌어진 셔츠 깃을 손으로 가리고 여자를 밀어냈다. “저는 조태광 이사님 수행비서예요. 불륜 관계 아닙니다. 다음부터는 사실부터 확인하고 사람을 몰아붙이세요.”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여자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다시 손을 뻗어 설희의 머리카락을 잡으려 했다.설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곁눈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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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영신은 멀리 있던 차에서 시선을 거두고 웃었다. “일단 집으로 데려다줄게.”설희는 많이 지쳐 있었고 머리도 지끈거렸다.다만 한 가지가 이상했다. ‘아주버님은 내가 여온로 근처 회사에 다니는 건 어떻게 알았지?’‘내가 말한 적이 있었나?’‘아니면 배원호가 알려줬나?’그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났다. 원호가 자신이 어디서 일하는지 알 리 없었다.설희는 좌석에 기대 잠깐 쉬려다가 정말로 잠들어 버렸다. 그래서 차가 작은 주택단지 근처에 도착한 뒤에도 멈춰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두 시간쯤 뒤에야 눈을 떴다. 곁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급히 창밖을 보니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핸드폰을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었다. 강숙경이었다.설희는 바로 영신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아주버님, 미안해요. 제가 잠들어버렸네요. 왜 안 깨우셨어요?”“환자를 굳이 깨우는 게 더 매정한 거 아니야? 들어가. 비밀번호는 관리사무소에 말해서 네 생일로 바꿔 뒀어.”“여기 집은 크지도 않아. 한 층에 서른 평 남짓이야. 네가 안 쓰면 몇 년 뒤에는 나도 팔 것 같고.”배씨 집안 사람들에게 한 층이 서른 평 남짓인 집은 확실히 작은 축에 들었다.설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차 한 대가 계속 서 있는 것 같았다.‘이 근처 사는 사람 차겠지.’설희는 단지 안으로 들어가 영신이 알려 준 집을 찾았다. 현관 키패드에 자신의 생일을 입력하자 정말 문이 열렸다.배씨 집안에서 설희를 가족처럼 받아들인 뒤, 영신은 실제로 친동생을 대하듯 설희에게 잘해 줬다.작은 캐리어가 아직 조태광의 차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 나중에 가져와야 했다.조태광은 설희에게 하루 쉬라고 했다. 내일은 출근하지 않아도 됐다.두통이 심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 핸드폰을 보니 영신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옷 몇 벌만 간단히 준비해 뒀어. 비싼 건 아니고 전부 세탁해 둔 거야. 안방 옷장에 있으니까 입어.]설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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