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노래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사라를 향한 박수가 이어졌다.
“진짜 반칙 아니야?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해!” “앵콜! 한 곡 더!” “싫어요. 비싼 여자는 한 곡만 부르는 거예요.” 사라는 능청스럽게 마이크를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강수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눈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강수는 대답 대신 술잔을 내려놓았다. “나 먼저 간다.” 직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십시오, 회장님.” 강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재킷을 챙겼다. 그러다 사라 앞을 지나치기 직전 걸음을 늦췄다. “적당히 마셔.”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장님도 잔소리해요?” 강수는 대꾸하지 않고 룸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사라는 피식 웃었다. “서희 남편 아니랄까 봐.” 그 뒤로도 술자리는 한참 이어졌다. 자정을 넘기자 하나둘 고개를 떨구기 시작했고, 결국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보다 취한 사람이 많아졌다. 한정민은 택시를 잡아 직원들을 차례대로 태워 보냈다. 마지막 직원까지 떠나고 나자 거리에 남은 사람은 정민과 사라뿐이었다. “민사라 씨도 택시 잡아드리겠습니다.” “실장님.” “네.” 사라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한잔 더?” 정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아까 술 세다는 말, 진짜였습니까?” “이제 믿어요?”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싫으면 저 혼자 가고.” 사라가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정민의 한숨이 들렸다. “어디로 갈 겁니까.” 사라가 뒤돌아 활짝 웃었다. “포장마차!” ---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 두 사람은 길가 포장마차에 마주 앉아 있었다. 김이 오르는 어묵탕과 소주 두 병. 회사에서 단정한 수트를 입고 있던 정민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고, 사라는 재킷을 의자에 걸쳐놓은 채 잔을 기울였다. “실장님은 여자친구 없어요?” 정민의 손이 멈췄다. “있습니다.” “오.”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있구나.” “왜 의외라는 표정입니까?” “맨날 회사에서 회장님만 쫓아다니니까 연애할 시간이 없을 줄 알았죠.” 정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민사라 씨는요?” “저요?” 사라는 소주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없어요.” “여행하면서도?” “남자는 있었죠.” “그런데 남자친구는 없었다?” “네.” 사라는 너무나 태연했다. 오는 사람을 막지도 않았고,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도 않았다. 누군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건 좋았지만 그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서로의 하루를 보고해야 하는 순간부터 답답해졌다. 그래서 늘 떠나는 쪽은 사라였다. “이상합니까?” “아니요.” “실장님은 생각보다 편견이 없네.” “남의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여자친구는 좋아하면서?” 정민이 잔을 들다 말고 사라를 바라봤다. “그건 다른 문제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먼저 피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끄럽던 포장마차 안에서 이상하게 그 순간만 조용해진 것 같았다. 술 때문인지. 새벽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호기심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라가 먼저 웃었다. 평소처럼 밝은 웃음은 아니었다. 정민도 더는 잔을 들지 않았다. 짧은 침묵. 그것으로 충분했다. 누가 먼저 가자고 했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계산을 마치고 포장마차를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엘리베이터 안에 나란히 서 있었다. 딩― 문이 닫혔다. 사라가 벽에 등을 기대며 정민을 올려다봤다. 187cm. 정민 역시 작은 사라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장님.” “네.” “지금이라도 갈래요?” 정민의 눈빛이 짙어졌다. “민사라 씨는요?” 사라가 대답 대신 그의 느슨해진 넥타이를 손끝으로 잡았다. 그 순간 마지막 남아 있던 거리마저 무너졌다. 호텔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정민의 손이 사라의 허리를 끌어당기자 작은 몸이 단단한 가슴에 부딪쳤다. 사라 역시 물러서지 않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술 냄새와 뜨거운 숨이 뒤섞였다. 벽에 등이 닿았다. 짧게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맞붙었고, 정민의 재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라가 그의 셔츠 깃을 움켜쥔 채 웃음을 터뜨렸다. “실장님 회사랑 완전 다르네.” “지금 그 얘기가 나옵니까?” “왜. 재밌잖아.” 정민이 더는 대꾸하지 못하게 입술을 막았다. 사라의 웃음도 금세 흐트러졌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내일이면 다시 비서실장과 보조 비서로 마주해야 했고, 정민에게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날 새벽만큼은— 둘 중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먼저 눈을 뜬 사라가 낯선 천장을 바라보다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진 침대 위. 자신의 옆에 잠든 남자를 확인한 순간. “……미쳤네.” 사라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새벽 두 시가 넘어가자 넓은 집 안은 완전히 고요해졌다.거실에 남아 있던 술병과 접시는 이미 치워진 뒤였고, 서희가 내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사라는 손님방 침대에 엎어진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낮부터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 저녁 내내 술까지 마신 탓인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든 참이었다.그렇게 모두가 잠든 줄 알았던 시간.끼익―고요한 안방에서 낮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하흣…….”서희가 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하얀 베개 위로 흩어지고 가쁜 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바로 곁에 있는 강수의 넓은 어깨를 붙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끼익, 끼익―침대가 다시 낮게 울었다.“오빠…….” “왜.”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강수의 낮은 목소리와 달리 서희의 목소리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서희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살살해줘…… 집에 사라 있어.”강수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자잖아.”“그래도…… 하, 들으면 어떡해.”“방 멀어.” “오빠는 진짜…….”서희가 민망한 듯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러나 강수는 그런 서희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고, 금세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다시 사라졌다.결혼한 뒤에도 강수와 서희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오히려 좋은 편이었다.강수에게 서희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여자였다. 피와 폭력이 당연했던 사뇌파의 보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웃어주고, 얼굴의 흉터를 보고도 무서워하기보다 아프지 않았느냐고 먼저 물었던 여자. 처음에는 그 부드러움이 낯설었고, 나중에는 그 따뜻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 결혼했다.서희 역시 그런 강수를 사랑했다.
시간이 꽤 늦었는데도 사라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소파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서희가 깎아준 과일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술도 제법 마셨다.평소라면 취기가 오를수록 더 시끄러워졌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얌전했다.물론 사라 기준에서였다.“아저씨.”“왜.”“저거 재미없죠?”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수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네가 보자며.”“제가 재미있다고는 안 했잖아요.”“그럼 왜 틀었어.”“혹시 재미있을까 봐.”강수가 어이없다는 듯 사라를 바라봤다.서희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사라 원래 저래. 영화도 예고편 보고 재미없을 것 같다고 해놓고 끝까지 봐.”“중간에 재미있어질 수도 있잖아.”“그래서 재미있어진 적 있어?”“없어.”너무 당당한 대답에 서희가 다시 웃었다.사라도 따라 웃었다.잘 먹고, 잘 떠들고, 잘 웃었다.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은 전부 잊은 사람처럼.하지만 강수는 이제 그 웃음을 전부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다.술잔이 비었는데도 한참 동안 다시 채우지 않는 손.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 확인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는 모습.그리고 가끔 대화가 끊어질 때면 멍하니 허공에 머무는 시선.그럴 때마다 사라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다시 웃었다.밤 열한 시가 가까워졌다.서희가 시간을 확인했다.“사라야, 늦었는데 내가 택시 불러줄까?”“응?”사라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평소 같으면 벌써 일어나 가방부터 챙겼을 시간이었다.어디서든 잘 놀았고,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일어나는 게 민사라였다.그런 사라가 오늘은 이상하게 꾸물거렸다.쿠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사라가 서희를 올려다봤다.“서희야.”“응.”잠깐 망설였다.아주 잠깐.“나 오늘 자고 가도 돼?”서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멈췄다.강수의 시선도 사라에게 향했다.사라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더니 금세 능청스럽게 웃었다.“왜 그렇게 봐? 싫으면 간다?”“아니.”
사라는 제 뺨을 손바닥으로 한번 쓸더니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벗었다.“아, 이거?”묻기도 전에 먼저 나온 말이었다.서희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벌레.”“벌레?”“응. 완전 큰 거.”사라는 두 손가락을 벌려 크기까지 설명했다.“얘가 자꾸 내 얼굴 앞에서 얼쩡거리잖아. 그래서 내가 죽인다고 이렇게.”짝―!제 손바닥으로 허공을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했는데.”사라가 잠깐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걔는 날아가고 내가 내 뺨을 때렸어.”정적이 흘렀다.강수의 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벌레를 잡다가?”“네.”“네가 네 얼굴을 때렸다고?”“네.”사라는 당당했다.“걔가 생각보다 빨랐어요.”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라를 오래 봐온 만큼 알고 있었다.저건 거짓말이었다.그리고 굳이 저렇게까지 우스운 거짓말을 한다는 건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서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그래서 벌레는?”강수가 물었다.“놓쳤죠.”“너만 맞고?”“그러니까 열받는다니까요.”사라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거실로 들어갔다.“와, 냄새 미쳤다. 나 진짜 배고파.”강수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말이 될 리 없었다.하지만 옆에 선 서희가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역시 입을 다물었다.식탁에 앉은 사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였다.“이거 다 나 먹으라고 한 거야?”“응.”“김서희, 나랑 결혼할래?”“나 유부녀야.”“아, 맞다.”사라가 강수를 힐끗 봤다.“경쟁자가 너무 세네.”“밥이나 먹어.”강수가 고기를 사라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저씨가 구웠어요?”“왜.”“의외라서.”“뭐가.”“회장님도 고기를 구울 줄 아는구나.”“고기 굽는데 직급이 필요하냐?”“사뇌파 보스가 앞치마 두르고 고기 굽는 건 좀 귀엽잖아요.”“민사라.”“먹겠습니다.”사라가 얼른 고기를 입에 넣었다.서희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평소와 똑같았다.사라
사라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결국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죄송해요.”재희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사라는 고개를 숙인 뒤 상철을 바라봤다.혹시 한 번쯤은 자신을 봐주지 않을까.그런 기대가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하지만 상철의 시선은 끝까지 아들의 사진에만 머물러 있었다.사라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갈게, 오빠.”서후에게 작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붙잡는 사람은 없었다.추모공원을 빠져나올 때까지 사라는 울지 않았다.그날 오후.“오빠, 오늘 저녁에 사라 부르자.”외출 준비를 하던 강수가 서희를 돌아봤다.“민사라?”“응. 셋이 같이 밥 먹자.”“갑자기?”“친구랑 밥 먹는데 이유가 있어야 돼?”서희가 웃으며 강수의 팔을 잡았다.“같이 장 보러 가자. 사라 좋아하는 거 해주게.”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집 근처 대형마트였다.카트를 미는 건 강수였고, 그 안을 채우는 건 대부분 서희였다.“고기는 이거.”고기 한 팩.“새우도 좋아하고.”새우 한 팩.“버섯도.”강수가 어느새 절반 가까이 찬 카트를 내려다봤다.“다 민사라 먹일 거냐?”“응.”“너보다 많이 먹겠는데.”“사라 진짜 잘 먹어. 몸만 작지.”서희가 웃으며 다시 채소를 골랐다.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민서후의 기일.오랜 친구인 만큼 사라의 과거도 알고 있었다.어린 시절 여러 번 입양과 파양을 반복했다는 것.일곱 살에 서후의 집으로 입양되어 그곳을 진짜 가족이라고 믿었다는 것.그리고 서후가 죽은 뒤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것도.그래서 오늘만큼은 사라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강수에게 할 생각은 없었다.사라의 상처였다.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대신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술도 사자.”서희가 주류 코너로 방향을 틀자 강수가 카트를 세웠다.“또 마시려고?”“사라 오는데 술이 빠지면 섭섭하지.”“둘 다 적당히 마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사라는 창밖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아까 스팸이라고 둘러댄 전화. 받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잠시 후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가 도착했다.[장재희]― 오늘은 오지 마. 서후도 네가 오는 거 원하지 않을 테니까.화면을 바라보던 사라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주 잠깐이었다.곧 휴대전화를 뒤집어 무릎 위에 내려놓자 옆에 앉은 강수가 낮게 물었다.“왜.”“뭐가요?”“표정.”사라는 금세 입꼬리를 올렸다.“배고파서 그래요.”앞에 앉은 정민이 돌아봤다.“민사라 씨, 조금 전에 밥 두 공기 먹었습니다.”“실장님은 눈치가 없어.”“거짓말을 좀 그럴듯하게 하십시오.”“한창 클 때잖아요.”“스물넷입니다.”사라가 정민의 뒤통수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평소의 민사라였다.강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휴대전화를 쥔 작은 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만 눈에 담았다.다음 날 아침.휴일인데도 사라는 일찍 눈을 떴다.화려한 옷들로 가득한 옷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를 꺼냈다. 옅게 화장을 마친 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잘 웃는 민사라.아무렇지 않은 민사라.“됐어.”집을 나선 사라는 꽃집에서 흰 국화를 사고 작은 케이크 하나를 샀다.매년 똑같았다.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는 것도.그래도 가는 것도.추모공원에 도착한 사라는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그리고 한 자리 앞에 멈춰 섰다.민서후.사진 속 젊은 남자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사라는 흰 국화와 케이크를 내려놓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오빠.”손끝으로 사진을 살며시 쓸었다.“나 왔어.”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데도 사라는 익숙하게 말을 이어갔다.“엄마는 또 오지 말래. 나 진짜 미움 많이 받지?”피식 웃은 사라가 무릎을 끌어안았다.“그래도 나 약속 지키고 있어.”스무 살이 되면 함께 떠나기로 했었다.둘이서 세상을 돌아다니며 살자고.서후는 떠나지 못했지만 사라는 떠났다.
사라의 얼굴에서 아주 잠깐 웃음이 사라졌다.언제나 장난기부터 떠오르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지고, 입가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스쳤다.고작 몇 초.정민이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하지만 강수는 봤다.그리고 사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여행 갈 돈 떨어져서요.”밝은 목소리였다.“3년이나 돌아다녔더니 통장이 텅텅 비었어요. 다시 벌어야 또 떠나죠.”옆에 있던 정민이 헛웃음을 흘렸다.“그래서 취업을 했다고요?”“돈 없으면 벌어야죠. 실장님은 돈 많아요?”“적어도 민사라 씨처럼 여행으로 탕진하진 않습니다.”“그게 얼마나 재밌는데.”사라는 태연하게 웃으며 태블릿을 가슴에 끌어안았다.“아무튼 CH건설 월급 괜찮더라고요. 열심히 모아서 또 떠날 거예요.”“언제.”강수의 질문에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뭐가요?”“언제 다시 떠날 거냐고.”“글쎄요.”사라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했다.“돈 모이면?”가벼운 대답이었다.그런데 강수는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그런지는 자신도 몰랐다.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직원이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다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더구나 사라는 서희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던 여자였다.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사람.마음이 가는 곳이 생기면 떠났고, 싫증이 나면 또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정착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여자.그게 민사라였다.“회장님.”“왜.”“표정 왜 그래요?”사라가 고개를 기울였다.“제가 벌써 퇴사한다고 할까 봐 걱정돼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맞네.”“민사라.”“네, 회장님. 열심히 일하겠습니다.”사라는 능청스럽게 허리를 숙였다.정민이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두 분 회사에서도 이러시면 제가 먼저 퇴사하겠습니다.”“실장님 돈 많다면서요. 퇴사해요.”“제가 언제 돈 많다고 했습니까?”“그럼 같이 다녀요. 제가 여행 코스 짜드릴게.”“싫습니다.”“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