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뭐라?”
그 소리에 지운은 크게 놀란 듯 허둥지둥 그의 목걸이를 빼어 들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확신이 갔다. 크기며 모양이 아주 흡사했다.
“틀림없나?”
지운이 목걸이를 천우의 눈앞에 들여다보이며 물었다.
“정말 이것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네. 확실합니다.”
“어떻게?”
“뭐라 따로 하신 말씀은 없으셨으나, 늘 소중히 몸에 품고 지니셨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지운이 무언가를 말하려
지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물이 수상하게 흐르는 기운을 감지했다네. 알다시피, 나도 나름 경륜이 있는 기우사다보니 어디서 갑자기 격하게 물이 흐른다거나 하는 이상 현상 정도는 느낄 수 있어. 자네처럼 정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그럼 혹시…… 불도 마찬가지이십니까?”“붉빛미르의 그것은 우리와는 궤가 다르지. 알아낼 수 없다네. 기우사들이 2년 전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몰살당한 것도 그때문이지. 불이 어디서 덮쳐오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붉빛미르…… 이 악독한……”천우가 가만히 읊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그 중간에서, 미르를 처음 접하는 이포교는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어색한 눈만 끔벅이며 천우와 지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저, 외람되지만…… 붉빛미르가 무엇입니까?”“자세한 내용은 궐에 가서 함께 듣지.”지운이 도포 자락을 휙- 젖히며 말했다.축지법의 순간이었다. * * *궁궐까지
푸하-차가운 물이 얼굴을 뒤덮었다.반촌 밖 한적한 개울가에 다다르자마자 거기 엎어지듯 뛰쳐나간 천우는 냅다 개울물에 머리를 박고 찬물을 한 사발은 들이켰다.이렇게 물이 주린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심한 갈증은 처음이었다. 오죽하면 개울물이 천우보고 괜찮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후우…… 후우……”“이제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보게.”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이포교가 물어왔다.이쪽 역시 천우처럼 개울물을 떠다가 세수를 하고 목 뒤에 묻은 검댕을 씻어내느라 제법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었다.“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건가?”“……”“그리고 어리 낭자는? 낭자는 또 어디 가셨고? 왜 천우 자네 혼자만 여기 있는 건가?”어리가, 붉빛미르가 어디로 가버렸는지는 천우 본인도 정말로 알고 싶었다.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역법 연구하는 관리들을 살해하러 갔을까, 아니면 양녕대군 옆으로 날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인을 연기하고 있을까.‘이런……’양녕대군의 정인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더욱 섬뜩했다.일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폐세자의, 주상전하의 형님되시는 분 옆에 붉빛미르가 붙어있다. 그것도 군신이나 상하관계가 아니라 서로 연모하는 형태로. 한쪽이 목숨을 걸면
어리의 말이 이어졌다."사람은 무릇 하늘의 명을 받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권위 앞에서 복종하고, 겸손하고, 섬김으로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미르는 그런 천명의 대리자. 방해되는 자는 모두 없앨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이 나라의 주상이라고 하더라도.”“나를 여기서 죽이지 않는 이상.”천우가 불끈 힘을 주며 경고했다.푸른 기운이몰아치며,양팔을 완갑(脘甲)처럼 둘러쌌다.“주상전하께는 손댈 수 없을 거요.내 목숨을 다해 당신을 막을 테니까.”“목숨을 걸어도 제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겪어보지 않으셨습니까?”어리가 피식 비웃으며 놀리듯 말했다.사실은 사실인지라,천우로서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패배하셨어요.물빛께서는 제게.비루한 허섭스레기처럼.”“이길 수 없다 하더라도 생을 걸어볼 가치는 있소.”“원래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는 것이 아니랍니다.어리석은 짓이지요.합리적이지 않은 짓이고.그리고 아무리 그러한들,물빛의 숨통을 제 손으로 끊어버릴 생각은 없습니다.물빛의 목숨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귀중한 것이니까요.저한테도 말이지요.”어리가 후훗-웃는 기색으로 천우를 노려보았다.장난기가 어려있는 가운데,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따위는 죽여버리고도 남는다……는 여유와
“뭐라 하셨소?”천우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반촌에 있던 관리를 없앴다? 내가 맞게 들은거요?”“네. 조선 땅의 역법을 연구하던 관리였습니다. 강원도 산속에 들어가 일몰, 일출 시각을 적어서 정리하고 있더군요. 그러다 한양에 자료를 제출하러 돌아왔고.”어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모골이 송연해진 천우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없앴다는 말은… 설마 살해했다는 뜻입니까?”“……”“대답해보시오.”천우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재촉했다.눈앞에 서 있는 여인이 무자비한 살인귀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 순간만큼은.“그저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치운 것뿐입니다.”어리가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그 관리가……”천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반촌에서 실종되었다는 그 사람입니까? 오늘 오며가며 얘기 들었던 그 사람?”“네. 포청에서 이미 살피고 갔다는 그 사람입니다.”“포교 앞에서 자기가 관리를 죽여 없앴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구려. 낭자께서는.”“그 자의 역법 연구가 미르의 생존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모르니까요.”“역법을 공부한다고 해서 미르가 소멸한다는 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단 말이오?”“증거는 필요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천지신명의 뜻에 따라…”“설령 천지신명께서 그리 정해놓았다고 해도, 당신이나 나나 그것을 거스르려 사람 명줄을 해할 권리는 없소. 오늘 불타버렸던 반촌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죄 없는 그 관리도.”천우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어리는 그 앞에서 한쪽 눈살을 찌푸린 채로 듣고 있었다.“사람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소.”천우는 믿고 있는 바를 그대로 쏟아냈다.“그리고 나는 낭자가 이번 일의 범인이라 자백한 이상, 가만히 두고 보고 있지는 않을거요. 포교로서, 그리고 또 자식으로서 낭자는 내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소. 내가 사랑하는 분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갈라놓았소. 난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물빛미르이니 숙적인 붉빛미르를 막아내겠다
어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이 더 이상 미르가 필요 없음을 천지신명께 증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그리고 파괴적으로 그 작업은 행해지고 있지요. 착실하게.”“그게 무슨……”“사람들도 애초부터 우리를 노리고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벌이는 일이 우연찮게도 미르를 몰아내는데 일조하고 있을 뿐이지요.”“무슨 일입니까, 그게? 정확히 말 좀 해주시오!”천우가 답답한 심정에 목소리를 크게 냈다.엄청난 고함소리였다.미르의 그것과도 같았다.산 전체가 우르릉- 울리는 듯했다. 나뭇잎 우수수 흩날리던 소리가 끓어올랐다가 다시 잠잠해졌다.“제 짐작에는.”어리가 진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다 말했다.천우의, 미르의 면모를 보아서 그런 것일까? 얼굴에 은근한 미소와 어려 있었다.“사람들 더 이상 미르의 권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붉빛미르에게는 더 이상 무찌를 적이 없고. 물빛미르에게는……”“돌보아야 할 것이 없다?”“물빛미르는 올바른 곳에 물과 비를 내려 농사지을 땅을 융성케 하고, 풍성한 소출을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용. 즉, 이 땅의 천문(天文)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이로울 수 있게 보조해주는 것이지요. 비와 물에 젖은 땅에서 자라난 곡식으로 모두가 먹고 사니까.”&l
일순간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흘렀다.바람조차 놀란 것인지 밤중의 산속임에도 나뭇잎 하나 흔들리는 소리 하나 들리질 않았다. 세상 만물이 모두 이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했다.“그, 그게……”천우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시오?”“지금 이 조선 땅.”어리가 발을 들어 딛고 서 있던 바닥을 쾅쾅 구르며 말했다.“이 조선 땅에서, 물빛께서 고향이라고 여기시는 이 땅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심상찮은 일?”“우리 두 미르의 생존을 담보로 하는 일이겠지요. 이미 시작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생명과 권능을 좀먹어가고 있습니다.”“그게 무슨……”“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입니다.”“말도 안 되오.”천우가 딱 잘라 말했다.“나조차도 미르라는 짐승이 실존하는 것을 알지도, 실감하지도 못하였는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없앤다니? 그게 가능하단 말씀이오?”“그러합니다.”“당최 뭘 어떻게 한다는 얘기입니까? 창칼을 들어 미르를 사냥하기라도 한다는 말이오?”“창이나 칼, 화살 따위로는 우리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보시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