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네. 전하.”
“권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이번 일에 대하여.”
“물빛미르가 저희를 돕겠다 약조한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불은 물로 다스려야 하는 법이지요. 아무리 불이 세차게 타오른다 한들, 물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법. 거대한 산불도 장대비에 진화되지만, 물에 젖은 산에서 불이 타오르는 일은 생길 수가 없나이다.”
“권사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든든합니다. 하지만……”
이도가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붉빛미르가. 큰형님의 정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크게 걸립니다. 권사께서도 아시겠지만, 형님과 저는……”
“네. 멀리 떨어진 듯 하면서도 멀
“갑자기 세상에 나와 너만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을 때, 그냥 아무런 생각도 안 나더구나. 몸은 여기 있는데 영혼은 어딘가로 떠나버린 기분. 그래. 그랬었다.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지.”“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조금도 나질 않습니다.”“그럴 수밖에. 네가 젖을 떼자마자 가버렸으니.”“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아름다웠다.”백사성이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현명하고 헌신적이며, 또 누구라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예뻤지. 사람이 아닌 미르조차 그 미색(美色)에 반해버렸으니 말이다.”“아버님께서도……. 혹시 사모하셨습니까?”“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왜 기우사를 떠나 용의 알을 밴 사람을 따라갔겠느냐?”백사성의 얼굴에 시원섭섭한 빛이 어렸다.“그래도 좋았다.”백사성이 말을 이었다.“내 몸 하나 바쳐 사모하는 여인을, 그리고 조선의 하늘을 수호할 물빛미르를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그것이 사람이다. 어리석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 뜻하는 대로 살아가는 생물이지. 어찌 보면 붉빛미르는 사람을 증오하면서도 더욱 사람과 가까운 존재였는지도 모른다.”백사성이 거기까지 말하곤 술 한 잔을 홀짝 비웠다.천우가 얼른 부친의 빈 잔을 채워넣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이도가 못내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옆에 함께 서 있던 백사성, 지운도 눈을 반짝이며 답을 채근하고 있었다.“그렇게 안고 난 뒤에 말입니다.”이도가 조바심을 냈다.“그렇게 그냥 끝났습니까? 붉빛미르가 그냥 끝을 냈습니까?”“그러하였습니다. 전하.”천우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붉빛미르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포옹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말입니다.”“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껴안고 있던 중에 붉빛미르가 사라졌습니다.”“물빛께서 안고 계시던 품에서 말입니까?”“네. 마치 연기처럼.”천우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웅얼거렸다.“이 팔에 안겨있던 감촉이 여전히 남아있거늘…….”아쉬운 것인지, 꿈을 걷는 것 같은 몽롱함에서 벗어나려는 것인지는 몰랐다.그러나 품안 가득 다가왔던 온기, 촉감, 부드러움은 방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천우 네 말은.”잠자코 듣고 있던 백사성이 나서 말했다.“붉빛미르가 나타났고, 하늘로 돌아가겠다며 작별을 고했고,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달라고 했고
붉빛미르가 이어 말했다.“우리 두 미르는 사람들의 지혜가 늘어나 천문을 읽게 되는 순간, 더 이상의 쓸모가 없어 하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알고 있소.”“저는 그것이 싫어 불로 저항했던 것입니다. 왜 사람의 행보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요. 하지만 물빛미르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만을 바라보셨지요. 사람과 섞여 사셨고요.”머리칼을 가만히 넘기는 기척이었다.“저 또한 그것이 어떤 삶일지 궁금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여인의 모습으로 지내보기도 하였습니다만……. 여전히 저는 사람보다는 미르에 가까운 넋이었습니다. 더욱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사람은 여전히 어리석고 폭력적인 생물이지요. 그렇지만 미르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생명이기도 하고요.”“…….”“물빛미르와 여러 번 싸우면서 겨우 깨달았습니다. 나와 같은 미르가, 이토록 사력을 다해 사람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미르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 붉빛미르가 일으킨 사단은 항상 울음소리와 피만을 불러왔지요.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언제부턴가 의심이 들더군요. 그래도 인정 못하고 마지막 발악으로 내가 당신을 가장 미워하던 때로 시간을 돌려 싸워보기도 하였고요.”“이포교를 숙주로 삼았을 때의 말이로군.”“네. 그리고 결국 물빛께서 저와 대등하게 맞서셨지요. 그리고 천지신명께서도 직접 답을 주셨고요.”붉빛미르의 고개가 올라갔다.
“역시 당신이었군.”천우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붉빛미르 쪽에서 어둠 속에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보였다.“언젠간 찾아올 것이라고 짐작했소.”천우의 칼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당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생각했지.”“똑똑하시네요.”“이렇게 나타나주어 고맙소. 마음 졸이며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끝을 내는 것이 나을 것이오. 나한테든, 당신에게든.”천우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산속에 잠든 물 전체가 우르릉- 대는 소리와 함께 진동했다.천우의 명에 맞추어 움직이겠다며 한껏 예기(銳氣)를 다듬는 듯했다.붉빛미르는 가만히 이쪽을 살피기만 할뿐, 손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불길이라도 내밀 줄 알았는데, 별일이었다.“어떠셨습니까?”불쑥, 붉빛미르가 그리 물었다.“뭐를 말이오?”천우가 되물었다.“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지금의 조선 땅 말입니다. 물빛께서 보시기에는 이쪽의 삶이 만족스러우십니까?”“갑자기 무슨…….”“이쪽의 삶은, 시간은, 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 천지신명의 뜻을 받든 붉빛미르가 세상을 침범하지 않고, 천문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놔두기로 결심한 세계.
지운이 물었다.“서촌 말씀이십니까?”“이왕 여기까지 나온 김에 그동안 하늘 보는 거 어디까지 되었나 살펴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학사들 은자(銀子)라도 좀 챙겨줘야 닭백숙이라도 고아 먹으면서 일하지 않겠습니까?”“전하의 은덕이 하해와 같으십니다.”그렇게 4명의 사내는 순식간에 다음 행보를 정하고는 곧바로 서촌으로 옮겨갔다.“저, 전하!”어김없이 장영실이 나와 맞이했다.지난 기억보다 조금 더 피곤하지만, 눈의 생기만큼은 곱절은 더한 장영실이었다.장영실뿐 아니라, 다른 학사들도 여럿이 한자리에 있었다.밤중에 오직 장영실 혼자만 일하던 기억 때문일까. 학사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이 오히려 낯설게 보였다.“어, 어인 일로 옥체를 직접 행차하셨습니까?”“잠깐 볼일이 있어 암행을 나왔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번 와 보았다. 자, 일단 이것들 좀 받고.”이도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옆에 있던 학사에게로 건넸다.천문 연구에 지친 사기(士氣)를 채워줄 묵직한 은자 덩어리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은자를 받아든 학사가 전원이 허리를 굽히며 감사했다.장영실이 그 학사를 가만히 불렀다.“이여립. 자네는 얼른 그것을 가지고 장터에 나가 좋은 술과 포(脯)를 사오게.”“
“뉘십니까?”맑은 목소리가 들렸다.여인의 목소리였다.“지나가던 길손인데, 말씀 좀 묻겠소.”천우가 의아함을 숨긴 채로 대답했다.끼익-문이 열렸다.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엇…….”놀란 천우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냈다.어리였다.틀림없는 어리였다.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자태로 문을 열고 나와 이쪽을 보는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붉빛?”천우가 부지불식중에 그리 불렀다.“네?”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외람되지만, 선비님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빙긋 웃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 어리였다.그 바람에 천우는 뒤로 물러서며 물의 힘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물보라를 일으켜 다시금 물과 불의 다툼을 재현할 작정이었다.“나, 나는…….”천우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백……. 백천우라고 하는데&he
“이제야 알아보시는가.”천우가 강한 열기에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대 앞에 선 내가 누구인지를.”“아다마다요.”어리가, 아니 붉빛미르가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오랜만에 마주한 친우를 보는 듯하기도, 드디어 찾았다는 안도감이 보이기도, 반드시 멸해야 할 목표를 확보했다는 만족감 또한 돋보이는 미소였다.&
콰아아아-!!!!!분노한 어리의 몸짓에 맞추어 화마(火魔)가 맹렬하게 타올랐다.마당을 뒤덮은 불이 울타리를 넘어 옆집에까지 번지며 새빨간 지옥을 만들어냈다.이제 마당을 떠날 수도,밖에서 들어올 수도 없었다.불의 장벽이 잔혹하게 가로막고 있었다.“사,살려줘……”“잘못&
정맹차였다.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고,갓도 찌그러진 것이 보기가 영 초라했는데 그에 비해 심상찮은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횃불이었다.쫓겨나자마자 눈이 뒤집혀 불씨를 붙여 온 것이 틀림없었다.“저것들 태워죽일거다.”정맹차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횃불을 이쪽으로 던졌다.
“뭐야, 이거……”정맹차가 필사적으로 뒤로 몸을 뺐다.그러다 벽에 등을 부딪히고 경악에 겨운 얼굴로 어리를 올려다보았다.“너…… 너 뭐야? 뭐하는 년……”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말없이 정맹차를 향해 스르르- 다가갈 뿐이었다.탁-!어리가 정맹차의 앞섬을 붙들었다.그리고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멱살 붙잡은 듯 끌어올렸다.“으헉……”“그게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고.”“놔, 놔라……”“그저 돈벌이에 미쳐 취하려 들었다는 것이냐. 어리석은 것. 한치 앞도 보지 못하면서도 오직 탐욕만 부리는구나. 너희 인간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