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01화: 3만의 파도 1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3 22:52:50

​둥- 둥- 둥- 둥-

​지옥을 알리는 북소리가 새벽 안개를 찢었다.

​나는 성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야를 메우고 있던 오색 깃발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검은 철갑과 붉은 투구를 쓴 인간의 파도가 채우고 있었다.

​3만 대군.

글자로만 보던 숫자가 눈앞에 실체화되었을 때의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놈들이 내뿜는 살기가 진주성을 집어삼킬 듯이 일렁였다.

​"철포대! 요이! (조총 부대! 준비!)"

​성 아래에서 왜군 지휘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숙여!"

​내 외침과 동시에, 성벽 위의 병사들이 몸을 웅크렸다.

​타타타타탕-!

​콩 볶는 소리가 아니었다. 대기가 찢어지는 굉음이었다. 수천 자루의 조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성벽 위로 납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돌 틈에 박히고, 나무 기둥을 뚫고,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의 투구를 깨뜨렸다.

​"으악!"

"내 팔! 팔이!"

​비명 소리가 빗발치는 총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102화: 3만의 파도 2

    ​"이걸로 뭘 하려고? 대장도 한 곡조 부를 텐가?"​"한 곡조는 무슨, 랩 배틀이나 한 판 해야죠."​나는 깔때기를 입에 대고, 성벽 밖을 향해 섰다.그리고 배에 힘을 꽉 주고 고함을 질렀다.​"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깔때기를 타고 증폭되어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피리 소리가 뚝 끊겼다.​"야! 거기 피리 부는 놈! 박자가 틀렸잖아! 밥은 먹고 부냐!"​정적.왜군 진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일본어와 병행해서 두번 도발 중이다.​"배고프지? 우리는 방금 소고기 국밥 먹었는데! 국물이 아주 끝내주더라! 깍두기도 아삭아삭하고!"​나는 쩝쩝거리는 소리까지 리얼하게 냈다.​"거기 총대장! 우키타인지 우끼끼인지 하는 놈! 너는 쌀밥 먹냐? 네 부하들은 배고파서 손가락 빨고 있는데 혼자 처먹으니까 맛있냐!"​패드립과 식고문.전생에 인터넷 게임 채팅창에서 갈고닦은 '아가리 파이터'의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네놈들 보급 끊긴 거 다 안다! 우리가 다 털어먹었거든! 니네가 먹을 쌀, 우리가 배 터지게 먹고 있다! 억울하면 들어와 보든가! 아, 못 들어오지? 문이 닫혀서!"​성벽 위의 조선군들이 킥킥거렸다.우울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와하하! 맞습니다! 놈들 쫄쫄 굶고 있을 겁니다!""야! 너네 엄마가 밥은 먹고 다니라더냐!"​병사들이 덩달아 소리치기 시작했다. 욕설과 조롱이 성벽을 넘어 왜군 진영으로 쏟아졌다.​반면, 왜군 진영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조선의 장수가 신성한 다이묘의 이름을 욕하고, 배고픈 병사들의 상처를 후벼파고 있으니 눈이 뒤집힐 만도 했다.​"그만해라! 저 놈의 입을 닥치게 해라!"​어둠 속에서 일본어 고함 소리가 들렸다.​반응 좋네.​나는 한 술 더 떴다.​"야! 니네 그거 아냐? 니네 대장 고바야카와 영감탱이, 저번에 나한테 턱주가리 돌아가서 밥도 못 씹는 거? 죽만 먹는다며? 불쌍해서 어쩌냐!"​도발의 정점.적장의 치부를 건드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101화: 3만의 파도 1

    ​둥- 둥- 둥- 둥-​지옥을 알리는 북소리가 새벽 안개를 찢었다.​나는 성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평야를 메우고 있던 오색 깃발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검은 철갑과 붉은 투구를 쓴 인간의 파도가 채우고 있었다.​3만 대군.글자로만 보던 숫자가 눈앞에 실체화되었을 때의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놈들이 내뿜는 살기가 진주성을 집어삼킬 듯이 일렁였다.​"철포대! 요이! (조총 부대! 준비!)"​성 아래에서 왜군 지휘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숙여!"​내 외침과 동시에, 성벽 위의 병사들이 몸을 웅크렸다.​타타타타탕-!​콩 볶는 소리가 아니었다. 대기가 찢어지는 굉음이었다. 수천 자루의 조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성벽 위로 납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돌 틈에 박히고, 나무 기둥을 뚫고,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의 투구를 깨뜨렸다.​"으악!""내 팔! 팔이!"​비명 소리가 빗발치는 총성에 묻혔다. 화약 연기가 성벽을 휘감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이게 정규전이구나.산속에서 게릴라전이나 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것은 거대한 폭력의 해일이었다.​"반격하라! 놈들을 성벽에 붙게 해선 안 된다!"​김시민 목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화살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꼿꼿이 서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쏴라!"​조선 관군과 익호군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피융! 피융!​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 비가 왜군의 선두 대열을 덮쳤다. 놈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지만, 뒤에 있는 놈들은 시체를 밟고 계속해서 밀려왔다.​"사다리! 사다리를 걸어라!"​왜군들이 긴 대나무 사다리를 들고 해자를 건너왔다. 성벽에 사다리가 턱, 턱 걸리는 소리가 났다.​"밀어버려!"​최가가 소리쳤다. 익호군 녀석들이 긴 쇠스랑으로 사다리를 밀어냈다. 매달려 있던 왜군들이 비명과 함께 추락했다. 하지만 하나를 밀어내면 두 개가 걸렸다.​"대장님! 북문 쪽이 위험합니다!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100화: 진주성 입성 2

    김시민(金時敏).저 장수가 바로 진주 목사 김시민이다. 현재는 진주 성벽을 지키는 한 명의 목관(牧官)일 뿐이나, 먼 훗날 조정은 그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리게 된다. 그는 땅 위에서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진정한 영웅으로 기록될 인물이었다.​그는 피로에 쩔어 있었다. 갑옷은 여기저기 찌그러졌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3만 대군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호랑이의 눈빛.​나는 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읍(揖)을 했다.​"담양 의병장 김덕령, 진주 목사님을 뵙습니다."​김시민은 나를, 그리고 내 뒤에 있는 거대한 쇳덩어리(현무)와 1,000명의 병사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자네가... 소문의 그 김덕령인가?"​"예. 소문이 좀 흉흉하게 났더군요. 오니라느니, 괴물이라느니."​"허허... 그 소문이 사실인 것 같구먼. 저런 괴물을 끌고 3만 대군을 뚫고 들어오다니."​김시민이 쓴웃음을 지었다.​"고맙네. 정말 고마워. 주변 고을 수령들은 다 도망가고,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자네가 와줬어."​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외로웠을 것이다. 3,800명의 목숨을 어깨에 짊어지고, 구원군 하나 없는 고립된 성에서 버티는 그 중압감이 얼마나 컸을까.​"혼자가 아니십니다. 제가 왔고, 제 부하들이 왔습니다."​나는 뒤를 돌아 서백설을 불렀다.​"서 행수! 짐 풀어라!"​"알았어요! 야! 1조부터 5조까지! 수레 덮개 벗겨!"​서백설의 지시에 익호군들이 현무 뒤에 매달고 온 수레들의 덮개를 벗겼다.​"헉!"​김시민과 주변 관군들이 숨을 삼켰다.​쌀가마니.산더미처럼 쌓인 쌀가마니가 드러났다. 500석. 굶주린 성안 사람들을 며칠은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양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화약입니다."​나대용이 숯 검댕이 묻은 얼굴로 나와 화약통을 열어 보였다. 검은 흑색화약이 가득 차 있었다.​"그리고 이건 조총탄환이고, 이건 비격진천뢰입니다."​"이... 이 귀한 것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99화: 진주성 입성 1

    ​콰아앙!​거대한 파열음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3톤짜리 쇳덩어리가 사람의 뼈와 살을 들이받는 소리였다.​"끄아악!""뭐, 뭐야! 뒤에서!"​진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왜군 후미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놈들은 당황했다. 성벽만 보고 있었지, 등 뒤에서 무언가가 달려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그것도 말이 아니라, 집채만 한 쇠 수레가 굴러올 줄이야.​"밀어버려! 멈추면 죽는다!"​나는 현무 4호기의 뒷문을 박차고 나와 고함을 질렀다.​현무 1호기부터 4호기까지, 네 대의 육지 거북선이 쐐기 대형을 이루며 적진을 파고들었다. 나대용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충격 흡수 현가장치가 진가를 발휘했다. 울퉁불퉁한 시체 더미 위를 지나가면서도 현무는 덜컹거림을 어느정도 잡아주며, 잔혹하게 전진했다.​우지끈! 뽀각!​바퀴 아래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끔찍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추면 우리가 포위당한다.​"막아라! 저 미친 수레를 멈춰!"​왜군 장교들이 칼을 휘두르며 고함쳤다. 장창병들이 달려들었다.​하지만 현무는 단순한 수레가 아니었다.고슴도치처럼 박힌 쇠송곳과, 틈새마다 튀어나온 창날들. 접근하는 놈들은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비켜라! 이놈들아!"​나는 현무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높은 곳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니 놈들의 머리통이 수박밭처럼 깔려 있었다.​"미숙아, 밥 먹자."​나는 허리춤에서 흑단목 방망이 미숙이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춤을 추듯 휘둘렀다.​붕- 퍽!휘익- 억!​현무 위로 기어오르려던 왜군들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투구가 찌그러지고, 칼이 부러졌다. 내 악력과 흑단목의 무게가 합쳐진 타격은 갑옷 따위는 무시하고 충격을 전달했다.​"저, 저놈은 뭐야!""오니가 수레를 타고 왔다!"​놈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하지만 내 공격은 근접전뿐만이 아니었다.​나는 방망이를 다시 차고, 등 뒤에서 활을 꺼냈다.이순신 장군님이 주신 흑칠각궁, 고삐리.​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98화: 남쪽의 붉은 바람 3

    ​"진주가 뚫리면 끝이야. 3만 대군이 기세를 타고 넘어오면, 담양 따위는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돼. 집 앞마당까지 불이 번지길 기다릴 거야? 아니면 대문 밖에서 끌 래?"​"하지만... 우리 병력은 고작 1,000명인데요."​"그래서 가는 거야. 진주성에는 김시민 장군이 있어. 그 양반이랑 합치면 승산이 있어. 그리고..."​나는 나대용을 바라보았다.​"우리에겐 현무가 있잖아."​나대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 지금의 '현무'라면 3만 대군 앞에서도 길을 낼 수 있을 거요. 험한 산길도 '나무 탄조'와 '소가죽 완충재'가 버텨줄 거요."​"결정합시다. 갑니까, 맙니까?"​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나는 흑미숙이를 집어 들었다.​"간다. 가서 놈들의 콧대를 아주 박살을 내주자."​"알겠습니다! 까짓거 한번 해보죠!"​최가가 주먹을 쥐었다. 서백설은 한숨을 쉬면서도 벌써 보급품 목록을 적고 있었다.​"쌀 챙겨. 화약 다 털어 넣고. 가는 길에 먹을 주먹밥 3천 개 준비해."-​다음 날 새벽.익호군 1,000명과 현무 4대가 연병장에 도열했다.​지난 3개월간, 이들은 똥지게를 지고, 쇠를 나르고, 밥을 축내며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 살이 빠지고 근육이 붙은, 눈빛이 살아있는 진짜 군대.​"출발한다!"​내 호령과 함께 진격이 시작되었다.​담양에서 진주까지.지리산 자락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평지라면 하루 이틀이면 갈 거리였지만, 수 톤에 달하는 현무를 끌고 산을 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하지만 나대용의 발명품은 위대했다.​"오오! 바퀴가 튀지 않습니다!"​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지나는데도 현무는 부드럽게 굴러갔다. 나무 스프링이 낭창거리며 충격을 흡수했고, 소가죽 패드가 진동을 잡아주었다.​"밀어! 더 세게 밀어!"​"으라차차!"​가끔 진흙탕에 빠지면 병사 수십 명이 달라붙어 들어 올렸다. 나도 미숙이를 내려놓고 직접 현무 뒤에 어깨를 대고 밀었다. 근육이 터질 듯 팽창하고 핏줄이 솟았다.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97화: 남쪽의 붉은 바람 2

    ​"쇠 바퀴의 딱딱함은 소가죽으로 막고, 무게는 네 바퀴로 나누고, 흔들림은 물푸레나무가 잡는다... 와, 진짜 미쳤네요."​"어떤가? 이제 산길을 달려도 승차감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을 걸세. 자네가 밀 맛 좀 나지 않겠나?"​나대용이 으쓱거리며 웃었다.​"문제는 자금이지. 물푸레나무에 소가죽까지 쓰려니 돈이 줄줄 새네. 바퀴 하나가 황소 값이야."​나대용이 한숨을 쉬자,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돈 걱정은 마세요. 제가 다 해결했으니까."​서백설이었다.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수레에는 패물들이 가득했다.​"이게 다 뭡니까?"​"뭐긴요. '특별 안보 회비'죠."​그녀가 씩 웃으며 땀을 닦았다.​"소문을 듣고 피난 온 양반들이 갈수록 늘고 있어요. '김덕령 장군이 지켜주는 특별 구역' 입주비를 알아서들 낸다니까요. 다들 살겠다고 앞다퉈 돈 보따리를 푸는데, 심지어 어떤 대감마님은 첩실이 아끼던 은비녀, 노리개까지 탈탈 털어왔더라니까요?"​"와... 진짜 악마네. 존경합니다, 행수님."​"칭찬으로 들을게요."​돈, 기술, 그리고 사람.주식회사 익호는 전쟁통 속에서도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평화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독하게 준비했다.​시간은 흘러 처서(處暑)가 지나고 9월이 되었다.들판의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수확의 계절이자, 전쟁의 계절.왜군들도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이제 움직여야 할 때였다.​어느 날 늦은 밤.나는 잠이 오지 않아 마당에 나와 미숙이를 닦고 있었다. 흑단목이 달빛을 받아 검붉게 빛났다.​"똑똑."​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급박하면서도 절제된 노크 소리.​"누구냐."​"접니다, 대장님. 미령이에요."​미령이였다. 평소라면 자고 있을 시간인데.문을 열어주자, 미령이가 창백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찻잔이 아닌, 붉은 도장이 찍힌 서신들이 들려 있었다.​"들어와. 무슨 일인데?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