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난겨울, 헐벗고 굶주렸던 왜군들과 달리, 우리는 따뜻한 밥 먹고 종이 깔깔이 입고 훈련만 했다. 체급 차이가 더 벌어졌다는 뜻이다.그리고 마당 한가운데.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검은 괴물들."현무 6호기까지 배치 완료했습니다."나대용 형씨가 기름걸레를 들고 현무의 장갑을 닦으며 나타났다."고생하셨습니다. 6대라... 이 정도면 기갑 부대네요."기존 4대에 2대를 더 만들었다.게다가 성능도 업그레이드되었다. 지난번 개발한 물푸레나무 서스펜션과 독립 차축이 전 차량에 적용되었고, 화력도 강화되었다."전면 포문에 현자총통, 측면에는 승자총통을 다발로 묶어서 달았소. 옹성 전투 때 써먹었던 화염방사기도 개량해서 사거리를 늘렸고."나대용이 1호기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내부 공간도 넓어져서 병사들이 좀 더 쾌적하게(덜 구겨져서) 바퀴를 굴릴 수 있게 되었다."훌륭합니다. 이 정도면 한양 성벽도 들이받으면 뚫리겠는데요?""허허, 성벽은 무리라도 성문 정도는 가루로 만들 수 있지."나대용은 만족스러운 듯 수염을 쓰다듬다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끌었다."참, 대장. 내 자네에게 보여줄 게 있소. 아주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오.""또 뭡니까? 잠수함이라도 만드셨습니까?""잠수함? 물 밑으로 가는 배 말이오? 오... 그것도 재밌겠군. 허나 이번엔 반대요. 위로 가는 거지."나대용이 나를 구석진 헛간으로 데려갔다.그곳에는 커다란 천과 대나무 살로 만든, 거대한 연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이게 뭡니까?""비거(飛車)요. 날아다니는 수레.""......예?""성 밖에서 안으로 사람을 태워 날려 보내는 특수작전용!"나대용이 도면을 펼쳤다.현대적인 비행기라기보단, 행글라이더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가죽 주머니에 뜨거운 공기를 채우는 열기구 원리와, 날개로 바람을 타는 글라이더 원리를 섞어놓은 기괴한 혼종."이 화약통을 뒤에 달고 터뜨리면, 그 추진력으로 하늘을 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1593년 4월.지독했던 동장군이 물러가고, 담양의 산천초목에도 물이 올랐다.개나리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났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은 녹아내려 생명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딱 1년 전이다.내가 이 몸에 빙의하고, 호랑이를 때려잡고, 전쟁이 터졌던 그 시기.1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선 팔도는 피로 물들었지만, 이곳 담양만은 딴 세상처럼 평화롭고 활기찼다.마을 어귀, 밭을 갈러 나가던 농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워메, 금년 봄은 유난히 꽃이 곱구먼. 이게 다 우리 익호장군님이 호남 땅을 철통같이 지켜주신 덕분 아니것소? 왜놈들이 얼씬도 못 하니 꽃들도 맘 놓고 피는 거제."마을 사람이 쟁기를 지고 껄껄 웃으며 덕담을 건넸다. 그러자 옆에서 새참을 나르던 아낙네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를 쳤다."그것뿐인가! 내 듣자 하니 장군님이 밟고 지나간 땅은 흙이 저절로 기름져서 거름을 안 줘도 쌀알이 주먹만 하게 열린다드라! 그리고 장군님 목소리를 들은 암소들은 쌍둥이를 낳고, 닭들은 하루에 알을 두 개씩 낳는다던데?"구석 평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촌로 하나가 혀를 끌끌 차며 끼어들었다."어허, 이 사람들이 핵심을 모르네. 그게 다 장군님 양기(陽氣)가 땅으로 스며들어서 그런 거여. 내가 저번에 냇가에서 장군님 씻는 걸 또 봤는데... 어우야. 다리 사이에 달린 그 흑단목 방망이가 겨우내 더 굵어졌드라! 아주 흉기여, 흉기! 땅신(地神)이 그 기운을 받아서 놀라 자빠지니 꽃이 피고 곡식이 솟구치는 거제. 암, 그렇고말고.""......"저 촌로 영감님은 날 냇가에서만 감시하나. 전생에 관음증 환자였나. 칭찬인 건 알겠는데, 내 거시기가 풍년의 원동력이라는 논리는 21세기 농업 기술로도 설명이 안 된다.객주로 돌아오니, 서백설이 대청마루에 앉아 장부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그녀의 앞에는 장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지난 1년간의 '주식회사 익호' 결산 보고서였다."왔어요? 앉아요. 정산해야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냄새를 맡는 듯했다. 동물적인 감각. 하지만 땅 밑에 숨겨진 화약 냄새까지는 맡지 못했으리라.놈이 손짓하자, 뒤따르던 무리가 간격을 벌리며 산개했다.화약고 폭파를 위해 침투하는 전문가들다운 움직임이었다.'멍청한 놈들. 거긴 이미 내 구역인데.'나는 미숙이를 꽉 쥐었다.놈들이 지뢰밭 한가운데, '킬존(Kill Zone)'으로 설정한 구역으로 들어섰다.선두 닌자가 발을 내딛는 순간.딸깍.청량한 나무음. 나무판자가 눌리며 부싯돌이 튀는 소리.그 찰나의 순간, 닌자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것이 보였다.콰아앙-!!!고요한 밤하늘을 찢어발기는 굉음.눈밭에서 붉은 불기둥이 치솟았다."으아악!"선두에 섰던 닌자가 공중으로 붕 떴다.아니, 상체만 떴다. 하반신은 이미 화약의 폭발력과 쇳조각에 의해 산산조각 나 사라진 뒤였다."나니?!(뭐야?)""폭발이다! 함정이다!"뒤따르던 놈들이 기겁해서 흩어지려 했다. 본능적인 회피 기동.하지만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우리가 깐 지뢰는 하나가 아니었으니까.콰광! 쾅! 콰아앙!놈들이 당황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눈 속에서 지옥문이 열렸다.연쇄 폭발.하얀 눈보라와 검은 화약 연기, 그리고 붉은 피보라가 뒤섞여 기괴한 풍경을 만들어냈다."아악! 내 다리!""눈이 안 보여!"팔다리가 잘려나간 닌자들이 눈 위를 기어 다니며 절규했다. 하얀 눈밭은 순식간에 도축장 바닥처럼 시뻘겋게 물들었다. 호박탄에 들어있던 깨진 도자기 파편과 쇳조각들이 놈들의 몸에 박혀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은밀한 침투?개뿔. 이건 그냥 한밤의 불꽃놀이였다. 아주 잔혹하고 화려한."와... 죽이는데요? 사람 몸이 저렇게 터질 수도 있습니까?"춘식이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화력이 좀 과했나? 뼈도 못 추리겠네."나대용 형씨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만든 무기의 위력에 본인도 놀란 눈치였다.나는 바위 위에 올라가 놈들을 내려다보았다.50명 중 서 있는 놈은 대여
이원익 대감이 떠나고, 담양에는 다시 묘한 적막이 감돌았다.정치적 태풍은 지나갔지만,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동장군의 심술은 여전했다.밤새 내린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춘식이를 데리고 객주 주변을 점검했다. 최가가 없는 동안 행동대장 노릇을 하느라 녀석의 어깨가 꽤나 무거워 보였다."대장님. 미령이 아씨랑 최가 형님은 언제쯤 오신답니까?"춘식이가 눈을 치우며 물었다."글쎄다. 눈길이라 좀 걸릴 거야. 그래도 류성룡 대감을 만났다는 전갈은 왔으니 조만간 도착하겠지."그때, 객주 안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미령이가 두고 간 '익호 정보국'의 부팀장, 점순이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주막 주모 출신으로, 미령이에게 정보 수집 노하우를 전수받은 베테랑이었다."대장님! 급보입니다!"점순이가 품에서 꼬깃꼬깃한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이게 뭐냐?""미령 아씨가 심어둔 '까치(정보원)'들이 보내온 소식입니다. 이치(梨峙) 고개 너머, 금산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답니다."나는 쪽지를 펴들었다.암호처럼 적힌 글귀들. 하지만 내용은 명확했다.[설욕(雪辱). 닌자(忍者). 화약고.]"고바야카와 다카카게..."나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지난여름, 이치 전투에서 나에게 턱이 돌아간 뒤 도망쳤던 그 늙은 여우. 겨울이 다 가도록 잠잠하다 싶더니, 기어이 쥐새끼들을 풀었다."병력 규모는?""대군은 아닙니다. 눈 때문에 대규모 이동은 불가능하니까요. 대신 소수 정예, 50명 안팎의 특수 부대라고 합니다. 복장은 검은색, 움직임은 늑대 같다고...""늑대는 무슨, 개새끼들이지."목표는 뻔했다.정면승부로는 현무와 화력을 당해낼 수 없으니, 우리의 아킬레스건인 '화약고'를 터뜨리겠다는 수작."춘식아.""예, 대장님!""손님 맞을 준비 해라. 이번엔 아주 화끈한 놈들이 온단다."나는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나대용 형씨는 화덕 앞에서 언 손을 녹이고 있었다."형씨. 작업 중지
"그래서요? 저 잡아가시려고 오셨습니까?"나는 삐딱하게 앉으며 물었다."잡아가려면 금부도사를 데려왔겠지. 내가 온 건, 서애 대감이 전하를 뜯어말렸기 때문일세. '김덕령은 아직 쓸모가 있습니다. 그가 가진 쌀과 군대가 한양 수복에 필요합니다. 소신이 확인해 보고, 만약 역심이 있다면 그때 베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지."이원익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즉, 내 판단에 따라 자네 목이 붙어있을 수도, 떨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야. 자, 변명해 보게. 왜 명나라 장수를 팼나? 왜 사병을 키우나? 역모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 봐."살벌했다. 하지만 나는 쫄지 않았다.그런데 의문이 들었다."잠깐만요. 영감님이 제 편지를 보고 오셨다면... 편지를 가져간 제 부하들은 어디 있습니까? 미령이랑 최가 놈은 왜 안 보입니까?"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 중간에 잡혔거나, 이 영감님이 인질로 잡고 있는 건 아닌가.내 눈빛이 험악해지자, 이원익이 헛기침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걱정 말게. 그 아이들은 무사하네. 지금 평양 인근에서 안주(安州)로 이동 중인 서애 대감을 만나고 내려오는 길일 걸세.""그럼 영감님은 어떻게 그들보다 먼저 오셨습니까?""이 사람아. 자네 부하들은 상단 행세를 하며 짐을 끌고 오니 늦는 게 당연하지. 나는 전시 특명을 받고 파발마를 갈아타며 밤낮없이 달려왔네."이원익이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서애 대감께서 평양에서 자네 편지를 받자마자, 사안이 시급하다며 나를 급파하셨지. 전하의 진노가 극에 달해 금부도사가 먼저 출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와서 자네를 검증해야 했거든. 내가 자네 부하들보다 닷새는 먼저 도착했을 게야.""휴..."안도의 한숨이 나왔다.초고속 출장 코스였군. 류성룡 대감이 나를 살리기 위해 꽤나 애를 쓴 모양이었다."오해는 풀렸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왜 명나라 장수를 팼나?"나는 찻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영감님. 내 집에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근데 옆집 아저씨가 도와준답시고 와서는,
1593년 2월의 끝자락.겨울바람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담양 객주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미숙이를 허리춤에 차고 마을 순찰을 돌았다. 밤새 내린 눈을 치우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쟁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아이고, 장군님 나오셨습니까! 덕분에 올겨울은 배도 안 곯고 아주 따뜻하게 보냈습니다. 관아 놈들은 콧빼기도 안 비치는데 장군님은 새벽부터 이러고 다니시니, 이게 생불(生佛)이 아니고 뭐다요?"마을 사람이 빗자루를 내려놓으며 넙죽 허리를 숙였다. 진심 어린 존경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눈을 퍼 나르던 사내가 삽자루를 짚으며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그것뿐인가! 내 듣자 하니 장군님이 눈을 한 번 부라리면 하늘에서 내리던 눈송이도 겁을 먹고 피해 간다드라! 그래서 우리 담양 땅에만 눈이 덜 쌓인 거여. 장군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용광로보다 뜨거워서 눈이 닿기도 전에 다 녹아버린 거제!"그러자 구석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쬐며 곰방대를 털던 촌로 하나가 혀를 끌끌 차며 거들었다."어허, 이 사람들이 뭘 모르네. 그게 다 양기(陽氣)가 차고 넘쳐서 그런 거여. 내가 저번에 냇가에서 장군님 씻는 걸 슬쩍 봤는데, 어우야... 다리 사이에 웬 굵직한 흑단목 방망이를 하나 더 차고 다니시드만! 그 거시기가 아주 실혀, 실혀! 흉기여 흉기! 그러니 동장군인들 그 뜨거운 양기를 당해내겠어? 왜년들도 보면 오금을 지릴 것이여.""......"지나가다 그 소리를 정통으로 들은 나는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칭찬인지 성희롱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마음속은 저들의 농담처럼 편하지 않았다.북쪽.저 멀리 의주에 박혀 있는 왕, 선조가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가 등 뒤를 찌르는 것 같았다.미령이와 최가를 떠나보낸 지 보름이 지났다.소식은 없었다.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지금 같은 난세에 연락 두절은 곧 사고를 의미했다. 산적을 만났나? 아니면 왜군 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