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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 구역의 미친 호랑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14:14:11

​탁.

​허공을 가르던 몽둥이가 내 왼손에 잡혔다.

​내 눈앞에는 잔뜩 겁에 질린 졸개의 얼굴이 있었다. 놈은 있는 힘껏 휘둘렀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동체 시력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슬로 모션에 불과했다.

​"어?"

​졸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놈은 본능적으로 몽둥이를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지만, 내 손아귀에 잡힌 참나무 몽둥이는 마치 바위 틈에 박힌 고목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건 산에 가서 멧돼지 잡을 때나 쓰는 거야. 사람한테 휘두르면 쓰나."

​나는 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손목을 가볍게 비틀었다.

​우지끈!

​경쾌한 파열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두께가 내 팔뚝만 한 생나무 몽둥이가 비스킷처럼 허무하게 부러져 나갔다. 나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며 놈의 얼굴을 때렸다.

​"히익!"

​졸개가 부러진 몽둥이 자루를 쥔 채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나는 손에 남은 부러진 조각을 바닥에 툭 던졌다. 흙먼지가 푸석 일었다.

​"다음."

​이번엔 왼쪽에서 낫을 든 놈이 덤벼들었다.

​"죽어라!"

​시퍼런 낫 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이건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명백한 살의.

내 안의 무언가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현대인 강철민의 이성은 잠시 뒤로 물러나고, 김덕령의 야성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놈이 낫을 휘두르기도 전에 한발 앞서 파고들었다.

​오른발을 깊숙이 찔러 넣고, 어깨로 놈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무협지에서나 보던 철산고(鐵山靠). 아니, 그냥 110kg의 체중을 실은 몸통 박치기였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놈의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다.

​"퀘엑!"

​놈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날아갔다. 대문 밖 흙바닥에 처박힌 놈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순식간에 두 명이 리타이어.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우두머리 최가는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 덩치만 큰 순둥이 호구인 줄 알았는데,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횃불이 흔들리며 놈의 경악한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너, 너... 뭐냐? 귀신이라도 들린 거냐?"

​"뭐긴. 집주인이지."

​나는 마당 구석에 세워져 있던 쇠스랑을 집어 들었다. 밭을 갈 때 쓰는,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무쇠 농기구였다. 묵직한 쇠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저벅저벅.

​내가 걸어가자 최가와 남은 졸개들이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오, 오지 마! 이거 안 보여?"

​최가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15cm 정도 되는 날카로운 칼날. 손잡이를 쥔 놈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칼이라."

​나는 걸음을 멈췄다.

​"위험한 장난감이네. 그러다 다친다."

​"닥쳐! 가까이 오면 쑤셔버린다! 진짜야!"

​최가가 칼을 허공에 휘저으며 악을 썼다. 공포에 질린 개의 짖음이었다. 저런 놈들이 더 위험하다. 겁에 질려 우발적으로 찌를 수 있으니까.

​말로 해서 들을 놈들이 아니다. 확실한 시각적 충격요법이 필요했다.

​나는 들고 있던 쇠스랑을 양손으로 잡았다. 굵은 쇠막대 부분이었다.

​"잘 봐라. 네놈 허리가 이렇게 되기 싫으면."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흡!"

​전완근이 불끈 솟아오르며 삼베 옷 소매가 터질 듯 팽팽해졌다. 혈관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끼기기긱-!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고막을 후려쳤다. 쇠와 쇠가 비틀리며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최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놈의 시선이 내 손에 고정되었다. 대장간에서 망치로 두들겨야 겨우 모양이 잡히는 단단한 무쇠 쇠스랑이, 마치 불에 달군 엿가락처럼 서서히 휘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양 끝을 잡아당겨 아예 매듭을 지어버릴 기세로 구겨버렸다. 으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스랑은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툭.

​나는 찌그러진 쇠스랑을 최가의 발치에 던졌다.

​"이게 내 자릿세다."

​"......"

​"가져가서 엿 바꿔 먹든가."

​최가는 바닥에 떨어진 쇠스랑을 집어 들려 했다. 하지만 손이 너무 떨려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묵직하고 차가운 고철의 감촉. 환각이 아니었다.

​"히, 히익...!"

​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단도가 힘없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저걸 사람이 맨손으로 했다고? 내가 저 손에 잡히면?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오는 공포였으리라.

​"다, 도망쳐! 괴, 괴물이다!"

​최가가 비명을 지르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뺐다.

​"형님! 같이 가요!"

"사람 살려!"

​졸개들도 기절한 동료를 질질 끌고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났다. 순식간에 대문 앞이 텅 비었다. 남은 건 놈들이 떨어뜨린 횃불 하나가 바닥에서 타닥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싱겁기는."

​나는 손을 탁탁 털었다. 손바닥에서 쇠 냄새가 났다.

​이 정도면 당분간 얼씬도 못 할 거다. 소문도 확실히 퍼지겠지. 김덕령이 미쳤다고. 아니면 산신령이 씌었다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난세에는 얌전한 선비보다 미친 호랑이가 더 대우받는 법이니까.

​나는 돌아섰다.

​"덕령아..."

​마루 기둥을 붙잡고 서 있는 형님, 김덕홍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안도감. 평생 글만 읽던 선비에게 동생의 이런 폭력적인 모습은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형님. 보셨습니까."

​나는 최대한 순박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전 쇠를 구기던 귀신의 형상은 지우고, 철없는 동생의 얼굴로 돌아왔다.

​"너... 그 힘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쇠스랑을 맨손으로..."

​"아, 그거 말입니까?"

​나는 짐짓 능청을 떨었다.

​"요즘 밥을 잘 먹어서 그런가 힘이 좀 솟네요. 그리고 저 쇠스랑, 원래 좀 삭아서 약해져 있었습니다. 녹이 슬어서 손만 대도 휘어지던데요? 하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형님은 믿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동생이 괴물이라는 사실보다는, 쇠스랑이 낡았다는 쪽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편했으니까.

​"허어... 그래도 조심하거라. 힘이란 함부로 쓰면 화를 부르는 법이다. 남을 다치게 해서는 안 돼."

​"걱정 마십쇼. 우리 가족 건드리는 놈들 아니면 손끝 하나 안 댑니다."

​나는 대문을 걸어 잠갔다.

​빗장을 지르는 묵직한 소리가 마음을 놓게 했다. 일단 오늘 밤의 위기는 넘겼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최가 놈들은 동네 양아치에 불과하다. 앞으로 내가 상대해야 할 적들은 저런 조무래기가 아니다.

​관아의 부패한 관리들, 그리고 바다 건너올 15만 대군.

그들에 비하면 최가는 귀여운 수준이지.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내 몸 안에 잠재된 거대한 힘을 실전에서 확인했다는 희열. 그리고 이 힘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돈이 필요해.'

​쇠스랑을 구기는 것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다. 전쟁을 준비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있어야 한다.

​​나는 머릿속의 지식을 뒤적였다.

1590년대 조선. 주식도 비트코인도 없는 이 시대에, 내 힘과 현대의 지식을 돈으로 바꿔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누가 있지? 거상, 혹은 거상이 될 인물.'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야사(野史)와 구전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 유통을 꽉 잡았던 호남의 숨겨진 거상(巨商). 개성 출신이지만 전쟁 직전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담양으로 흘러들어왔다는 전설적인 여인.

​[서백설(徐白雪)].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담양 장터에서 빚더미에 앉아 고생했다고 한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긁지 않은 복권이 바로 내 코앞에 떨어져 있는 셈이다.

​'그녀라면 가능하다.'

​그녀의 상술과 내 무력이 합쳐진다면, 전쟁 물자를 독점하는 것도 꿈은 아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장터로 나가야겠다. 그녀를 만나야 내 계획의 첫 단추가 끼워진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내 손은 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은 더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

​꼬끼오-!

​닭 울음소리가 새벽을 깨웠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건 지독한 허기였다.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은 게 아니라, 블랙홀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어제 저녁에 쓴 힘을 보충하라고 세포 하나하나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몸이 가벼웠다. 근육통? 그게 뭐지? 어제 쇠를 구기고 사람을 날려버렸는데도, 관절 마디마디가 기름칠한 기계처럼 매끄럽게 돌아갔다. 금강불괴의 회복력은 실로 경이로웠다.

​부엌으로 향했다. 형수님이 아침을 짓고 계셨다.

​"형수님, 밥 좀 많이 주십쇼. 아주 많이요."

​형수님은 솥뚜껑을 열다가 내 덩치를 보고 흠칫 놀라셨다.

​"아이고, 도련님. 어제 그렇게 드시고도 또 배가 고프십니까?"

​"한창 클 나이 아닙니까."

​만 스물셋. 이미 성인이지만, 성장기 핑계를 댔다. 형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고봉밥을 퍼주셨다. 밥그릇 위로 산처럼 쌓인 보리밥.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나는 마루에 앉아 밥을 마셨다.

​씹는 시간도 아까웠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탄수화물의 포만감이 뇌를 짜릿하게 자극했다. 순식간에 두 그릇을 비우고 숭늉까지 들이켰다.

​"꺼억."

​그제야 살 것 같았다.

​"형님, 저 장터 좀 다녀오겠습니다."

​사랑방에서 글을 읽던 형님이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장터? 뭣 하러 가느냐. 또 사고 치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세상 물정 좀 보고, 일거리라도 있나 찾아보려고요. 밥값은 해야죠."

​형님은 미심쩍은 눈초리였지만, "일찍 들어오거라" 하며 보내주었다. 어제 왈패들을 쫓아낸 공로를 참작해 준 모양이다.

​나는 짚신을 단단히 묶고 집을 나섰다.

​담양 읍내로 가는 길.

공기가 맑았다. 2025년의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과는 차원이 달랐다. 길가에 핀 들꽃,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멀리서 들려오는 소달구지 소리.

​평화로웠다.

너무나 평화로워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 풍경이 1년 뒤면 잿더미가 된다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어질 그 참혹한 전쟁. 코가 베이고 귀가 잘린 백성들이 넘쳐나고, 굶주림에 인육을 먹는다는 기록까지 있는 지옥.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막아야 한다. 다 막을 순 없어도, 적어도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호남 땅만큼은 지켜내야 한다. 그러려면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을 뒷받침할 돈이 필요하다.

​읍내에 들어서자 활기찬 소음이 귓가를 때렸다.

​"자, 골라 골라! 싱싱한 고등어가 왔어요!"

"떨이요, 떨이! 무 한 단에 닷 푼!"

​담양장은 꽤 컸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인근 고을에서 온 상인들과 백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갓을 쓴 양반, 짐을 진 보부상, 아이를 업은 아낙네들이 뒤엉켜 생존의 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인파 속을 걸었다. 내 덩치가 워낙 커서 사람들이 홍해 갈라지듯 길을 터주었다.

​"워메, 저 양반 키 좀 보소."

"장군감이네, 장군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짐짓 모른 척하며 장터를 훑어보았다.

​물가를 파악했다.

쌀 한 섬에 5냥. 무명 한 필에 2냥. 소 한 마리에 20~30냥.

아직은 평시 물가다. 하지만 전쟁 징후가 보이면 이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을 것이다. 그전에 쌀과 소금, 그리고 화약을 만들 재료를 사재기해 둬야 한다.

​내 주머니에는 땡전 한푼도 없었다. 전형적인 무자본 창업을 해야 하는 상황.

​'서백설을 찾아야 해.'

​기억 속의 정보에 따르면, 그녀는 담양 장터 구석진 곳에 있는 허름한 객주에 머물고 있다. 원래는 개성 상인이었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재기를 노리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훗날 전쟁통에 거상이 되는 인물이다. 나의 힘과 그녀의 상술이 합쳐진다면 못할 게 없다.

​나는 장터 외곽으로 발길을 돌렸다.

​메인 스트리트가 아닌, 뒷골목. 냄새부터가 달랐다. 생선 비린내 대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싸구려 탁주 냄새가 진동했다. 가난한 상인들과 날품팔이꾼들이 모이는 곳.

​그곳에 낡은 간판을 단 객주가 하나 있었다.

[담양 객주].

이름만 거창했지, 지붕은 반쯤 내려앉았고 담벼락은 금이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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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놈들이 상륙하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올 거다. 경상도 방어선? 미안하지만 기대하지 마라. 순식간에 뚫릴 거다.""관군이 그렇게 약합니까?"최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약한 게 아니라, 준비가 안 됐어. 반면 놈들은 백 년 동안 지들끼리 칼부림만 하던 전쟁광들이야. 정면 승부로는 안 돼."나는 손가락을 서쪽으로 옮겼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놈들의 1차 목표는 한양이지만, 보급을 위해서는 반드시 호남을 노릴 거다. 곡창 지대니까."내 손가락이 험준한 산맥을 가로질러 두 지점에 멈췄다."이치(梨峙)와 웅치(熊峙)."진산과 금산을 넘어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역사 속에서 권율 장군과 황진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그곳."우리는 여기로 간다.""네? 담양을 비우고요?"서백설이 놀라서 물었다."담양에서 기다리면 늦어. 놈들이 전주성을 넘게 두면 호남 전체가 먹혀. 그전에 산속 좁은 길목에서 틀어막아야 해."나는 나대용을 바라보았다."형씨. 현무들, 산길 기동 가능합니까?""바퀴를 보강해서 험지 주파도 문제없소. 다만 끄는 놈들이 죽어나겠지.""그건 우리 애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밥값 해야죠."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내일 새벽에 출발한다.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 식량, 무기, 화약. 남기지 말고 싹 다.""객주는요? 우리 가게는 어떡하고요?"서백설이 울상을 지었다. 그녀에게 이곳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피땀 흘려 일군 터전이었다."가게가 중요해, 목숨이 중요해? 전쟁 끝나면 더 크고 좋은 기와집으로 지어줄게. 약속한다.""......진짜죠? 딴소리하면 그땐 대장님이고 뭐고 없어요.""그래. 이 김덕령 이름 걸고 맹세한다."그때, 서백설이 눈매를 매섭게 하며 말했다."그럼 저도 갑니다.""뭐? 넌 왜?""군자금 관리 누가 해요? 쌀은 누가 배급하고요? 당신들끼리 보내면 흥청망청 다 써버리고 굶어 죽기 딱 좋잖아요. 내 돈은 내가 지켜요."그녀의 말이 맞았다. 보급관이 없으면 군대는 유지가 안 된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44화: 폭풍이 오고 있다 1

    시간은 화살처럼, 아니 조총 탄환처럼 빠르게 지나갔다.어느새 찬 바람이 잦아들고, 메마른 가지에 물이 올랐다. 담양천 변에는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추월산 자락에는 진달래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1592년, 임진년(壬辰年)의 봄.조선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그리고 가장 뜨거웠던 봄이 왔다.객주 뒷마당.대장간의 열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어이! 3호기 왼쪽 바퀴 축이 좀 뻑뻑하다! 기름칠 더 해!"나대용의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이제 선비라기보단 완벽한 현장 소장이었다. 기름때 묻은 도포를 걷어붙이고 망치를 든 모습이, 붓을 든 모습보다 백 배는 더 잘 어울렸다.그의 시선 끝에는 세 대의 검은 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현무(玄武) 1호, 2호, 3호.초기작이었던 1호기는 덩치만 컸지 투박했지만, 개량을 거듭한 2호기와 3호기는 세련된 살인 병기로 진화해 있었다.두꺼운 정철 장갑 위에는 적병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쇠못을 촘촘히 박았고, 전면부에는 도깨비 형상의 충각을 달아 파괴력을 높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화력'이었다."화포 장착 완료했습니다!"최가가 2호기 전면부 해치를 열고 소리쳤다.용머리 형상의 포문 안쪽에는, 나대용이 심혈을 기울여 주조한 '현자총통(玄字銃筒)'이 거치되어 있었다. 대형 화포인 천자총통보다는 작지만, 기동성과 파괴력을 갖춘 중형 화포.이걸 수레에 싣고 쏜다고?조선 수군도 배가 뒤집힐까 봐 조심하는 물건을?하지만 나대용은 해냈다. 수레바닥에 충격 흡수용 판스프링(대나무와 쇠를 겹쳐 만든)을 설치하고, 무게 중심을 낮춰 반동을 잡은 것이다. 역시 천재는 다르다."좋아. 이 정도면 왜놈들 진형을 볼링핀처럼 쓰러뜨릴 수 있겠어."나는 3호기의 장갑을 두드려보았다. 텅,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대장님, 볼링핀이 뭡니까?""있어, 그런 게. 둥근 공 굴려서 다 넘어뜨리는 거.""아, 격구 같은 겁니까?""비슷해. 이번엔 공 대신 이 쇳덩이를 굴려서 왜놈들을 넘어뜨릴 거니까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43화: 심문과 결단 2

    ​"부산이 뚫리면 놈들은 세 갈래로 올라올 겁니다. 그중 한 갈래는 반드시 호남을 노릴 겁니다. 곡창 지대니까요."​나는 담양과 전주, 그리고 남해안 일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우리는 여기를 지킵니다. 조정이 도망가든 말든, 우리는 우리 땅을 사수합니다."​"하지만 대장님."​최가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우리 병력은 고작 50명입니다. 15만 대군이랑 싸우기엔 너무 적습니다."​"알아. 그래서 지금부터 판을 키울 거다."​나는 서백설을 바라보았다.​"서 행수. 돈 아끼지 마. 창고에 있는 거 다 풀어."​"다... 다요?"​"쌀을 사. 무조건 많이. 전쟁 나면 쌀값이 금값이 될 거야. 지금 사두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 애들 굶겨야 해."​서백설이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인근 고을 쌀은 제가 다 쓸어올게요. 창고가 터지도록 채워놓을게요."​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상인의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난세일수록 물자 확보가 생존의 열쇠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대용 형씨."​"말하시오."​"현무 2호기, 3호기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화약. 지금보다 10배는 더 필요합니다."​"10배라... 똥지게를 짊어지고 살아야겠구려."​나대용이 씁쓸하게 웃었지만, 눈빛은 결의에 차 있었다.​"걱정 마시오. 내 손가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들어보리다. 그리고 거북선 설계도도 거의 마무리됐소. 여차하면 좌수영(이순신) 쪽에 보낼 생각이오."​"좋습니다. 그건 나중에 제가 직접 전달하겠습니다."​나는 마지막으로 최가와 익호군 간부들을 보았다.​"너희는 내일부터 '징병'에 들어간다."​"징병이라니요?"​"동네 건달, 백수, 산적, 유민...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밥 주고 재워준다고 하면 올 놈들 천지다."​"아무나 다 받습니까?"​"아니. 면접은 내가 본다. 깡다구 있는 놈들만 추려서 정예병으로 만든다. 목표는 300명이다."​300명.스파르타? 아니, 익호군이다.잘 훈련된 300명이면 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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