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으려던 성유리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내가 오늘 어떤 소식을 들었는지 알아?”박한빈이 그렇게 말하자 성유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에게 내가 모르는 형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 평온하게 말했다.성유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무슨... 소리예요?”“아버지에게 사생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야.”박한빈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다. 마치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왜 그가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부부였을 때조차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성유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묻지 않았고 박한빈은 그녀보다 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며칠 동안 마주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그런 부부 관계였으니 그들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 새삼 우스울 정도였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성유리에게 자신의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다니. 그녀는 어리둥절함과 동시에 뭔가 불편했다.“어떻게 알았어요?”성유리는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어.”“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요?”“모른대. 하지만 어머니랑 할머니는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아.”박한빈은 말할수록 목소리가 차가워졌다.성유리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박한빈이 눈을 내리깔고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동정하는 거야?”“아니요...”성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한빈 씨를 동정할 자격이 있나요?”사실 그녀는 여전히 어젯밤 그가 했던 말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박한빈은 그걸 느낀 듯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 싫었지만 먼저 문제를 일으킨 건 성유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간에 완전히 잘못한 일은 아니었으니 더 이상 탓할 필요도 없었다고 여겼다.“이제 그만해도 되겠지.”성유리는 그가 잡고 있던 수
박한빈과 성유리는 한 번도 같은 침대에서 나란히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박한빈이 그녀를 아무리 지치게 해도 성유리는 항상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그들 사이가 부부라기보다는 단순한 파트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침대 위의 파트너, 일상 속의 파트너.성유리에게는 한 침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이 오히려 성관계보다 더 친밀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박한빈과 성유리는 분명히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잠든 박한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수도 없이 봤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낯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도 그의 얼굴 윤곽을 정확히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학생 시절부터 이미 수없이 그려본 얼굴이었다.그 시절 하얀 교복을 입고 있었던 박한빈은 학교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점점 더 성숙하고 잘생긴 외모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고상하고 차가운 분위기도 더욱 뚜렷해졌고 이제는 그가 그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그때 갑자기 잠들어 있던 박한빈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한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잡아채더니 그녀를 침대로 확 끌어당겼다.그는 겨우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었고 성유리의 말린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그의 피부를 살며시 간지럽혔다.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이내 성유리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그녀 위에 얹었다. 이번에는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머리카락 깔았잖아요!”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손이 멈췄다.성유리는 의아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순간
박한빈은 결국 약속 장소에 나왔다.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안녕하세요, 박 대표님.”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저 기억하시겠죠? 단예진이에요.”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해주었다.“그날 가면무도회에서 우리 춤도 췄었잖아요.”“예진 씨, 반갑습니다.”박한빈은 그날의 가면무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지 않고 간단히 악수했다.“그날 왜 갑자기 가셨나요?”단예진이 다시 물었다.“급한 일이 생겨서요.”“정말요?”단예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박한빈은 다소 불편해졌다.그 불편함은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주는 어떤 느낌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박한빈은 영리한 사람과의 대화를 꺼리지 않았지만 자기만 아는 듯이 굴면서 교묘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싫어했다.다행히 단예진은 그 주제를 더 파고들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그들은 같은 대학에 다녔었고 단씨 가문과 반씨 가문은 오래된 인연이 있어 대화 소재는 끊이지 않았다.비록 박한빈은 내심 지루했지만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며 단예진이 꺼낸 주제에 맞장구를 쳤다.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분위기는 한 번도 가라앉지 않았다.계산서가 나왔을 때, 단예진은 갑자기 두 장의 음악회 티켓을 박한빈 앞에 내밀었다.“아주머니께 들었는데 박 대표님이 음악회를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마침 제게 표가 두 장 있어서요. 박 대표님,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단예진의 초대는 솔직하고 담백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성유리가 생각났다.성유리와 단예진은 확실히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성유리는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더구나 약속을 먼저 잡는 법도 없었다.화가 났을 때조차 그녀는 그와 싸우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성유리도 자신처럼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그런데 그녀가
성유정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런데 전 왜 두 분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요?”“정보력이 부족하신 거겠죠.”단예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말에 성유정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멍하니 멀리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한빈 오빠?”성유정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박한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까 할 일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먼저 가실래요?”그러나 단예진이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건넸다. 성유정은 그녀의 말에 당황했지만 그저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단예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단예진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박한빈은 성유정을 남기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성유정은 그를 따라가려 했으나 단예진이 재빨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유정 씨, 아직 뭐 볼일이 남았나요?”“한빈 오빠 만나러 갈 거예요. 그쪽이 뭔데 날 막아요?”“아참, 유정 씨가 무열 씨와 약혼한다는 소식 들었어요. 축하해요.”단예진의 말에 성유정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단예진을 향한 눈빛은 마치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기세였다. 반면에 단예진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한빈 오빠는 그쪽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성유정이 갑자기 말했다.“정말요?”“오빠는 시끄러운 여자를 싫어하거든요. 그리고 난 어렸을 때부터 오빠와 함께 자랐어요. 그런 감정은 그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예요.”“그런데 한빈 씨는 왜 유정 씨 언니와 결혼했을까요?”“그건... 아무튼 오빠는 성유리를 좋아하지 않아요.”“그렇겠죠. 아니었으면 이혼했겠어요? 안 그래요?”성유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유리 씨는 꽤 조용한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유정 씨는 한빈 씨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네요?”단예진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성유정은 더
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임정우를 한참 동안 바라본 뒤 마침내 입을 열었다.“정우 씨도 제 상황을 아시잖아요?”“알죠. 전에 몇 번 연회에서 본 적도 있잖아요?”“저 이혼한 지 얼마 안 됐어요.”성유리가 덧붙였다.“네, 들었어요. 박한빈과 그렇게 결단력 있게 이혼하시다니, 존경스러워요.”성유리가 하는 말에 임정우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성유리는 왠지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결국 성유리는 말했다.“저는 당분간 연애에 대해 생각할 마음이 없어요.”“그래요? 그럼 연애는 안 해도 돼요.”임정우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친구로 시작해도 괜찮잖아요.”성유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그렇게 받아들이는 걸로 알게요? 갈까요, 이제?”임정우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자 성유리는 놀라며 두 발짝 물러났다.그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왜 그래요? 제 손에 독이라도 있나요?”“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요.”“그래요? 무슨 일인데요?”“그냥 직업상 일 때문에요.”“직업이 있었어요? 어떤 일인데요? 아니면 그냥 핑계로 저 피하는 건가요?”성유리는 미소로 답했다.“그렇죠? 역시 핑계였네요.”임정우는 예상했다는 듯 시원하게 인정하며 말했다.“그러니까 저랑 나가는 게 별로라는 거죠?”“우린 맞지 않아요.”“서로 맞지 않다고요? 우리 아직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잖아요. 어떻게 알아요?”“제가... 성격이 너무 어두워서요. 정우 씨가 안 좋아할 거예요.”“그래요? 근데 전 그냥 억눌린 것 같던데요?”임정우는 웃었지만 눈빛만은 진지했다.“그날 춤을 출 때처럼 조금 편하게 생각해요. 사실 유리 씨는 정말 매력이 넘쳐요.”성유리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그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성유리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임정우는 계속해서 말했다.“영화는 취소하죠. 대신 저녁 식사는 어때요? 제가 아주 재밌는 곳으로 데려갈게요. 스트레스 확 풀리는 곳이에요, 괜찮죠?”성
성유리가 임정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도 그녀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기예요!”…한편 박한빈은 시월파크 서재에 앉아 모니터에 떠 있는 메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끊임없이 옆에 있는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가끔 메신저 알림이 뜨긴 했으나 박한빈은 한 번 흘끗 보고는 바로 무시했다.밤 11시가 넘자 드디어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박한빈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성유리의 발걸음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먼저 그의 침실로 갔다가 아무도 없자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성유리는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 외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박한빈은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무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시간이 2분 더 지나고 나서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아직도 일하고 있어요?”성유리는 문 앞에 서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제야 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성유리는 방금 샤워를 마치고 온 듯 머리가 반쯤 젖은 상태였고 손가락은 불안하게 움츠러들어 있었다.“저녁에 메시지를 못 봤어요.”그녀가 말을 덧붙였다.“확인하자마자 바로 왔어요. 미안해요...”박한빈이 그녀를 내쫓지 않자 성유리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몇 발짝 더 다가갔다.그러나 그녀는 선을 지키며 그의 컴퓨터 화면이 보이지 않는 곳에 멈춰 섰다.박한빈은 잠시 더 기다리더니 이내 성가신 듯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성유리는 그의 무릎 위로 넘어지듯 앉게 되었다.“어디 갔었어?”그는 감정이 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성유리를 피할 곳 없게 만들었다.“그냥... 밖에 좀 나갔어요.”“혼자?”“아니요, 친구랑요.”“어느 친구?”박한빈이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는지 성유리는 알 수
박한빈은 더 이상 성유리에게 그날 저녁 일에 관해 묻지 않았고 성유리 역시 그 일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이틀 후 임정우가 또다시 성유리에게 연락해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성유리는 그때 처음 알았다. 누군가와 데이트 약속을 잡는 일이 이렇게 단순하고 거침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임정우는 확실히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노는 걸 좋아하고 잘 노는 사람이었다.어릴 때부터 금성에서 자랐고 그의 인맥은 넓었다.하지만 임정우는 화려한 클럽이나 고급 술집 같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유리를 데리고 다니는 곳은 언제나 오래된 골목이었다.어느 날은 맛집을 찾아다녔고 또 다른 날은 작은 소품을 사러 다녔다.이에 비해 박한빈도 같은 금성에서 자랐지만 그는 성유리를 한 번도 이런 곳에 데려온 적이 없었다.그들이 함께한 몇 번의 외식은 모두 고급스럽고 우아한 레스토랑에서만 이루어졌었다.딱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그건 성유리가 그를 매운탕 집에 데려갔을 때였다.물론 그 매운탕도 결국 제대로 먹지 못하고 끝났다.임정우는 그런 박한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그에게는 그 바닥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냉정함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었다.임정우가 성유리에게 했던 말도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 그저 친구가 되어 몇 번 만나면 서로를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성유리는 그를 만날 때마다 확실히 즐거웠다. 그것도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즐거움이었다.아무 걱정도, 신경 쓸 것도 없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만 하면 되는 그런 행복이었다.물론 박한빈은 이들의 만남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리고 임정우를 만날 때면 성유리는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하며 박한빈의 메시지에 더는 답을 미루지 않았다.오늘도 임정우는 성유리를 데리고 나왔다.사람들로 붐비는 대형 오락실에서 그는 아이들 틈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성유리는 그와 함께 게임을 즐기면서 조금씩 기분이 고조되었다.마침내 그들은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섰다.임정우는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그 인형을 천천히 받아 들었다. 임정우는 그녀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름을 즉시 눈치챘다.“무슨 일이에요?”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대체 무슨 일인데요?”“아무 일도 아니에요. 우리 그냥 가요.”임정우는 갑자기 초조해져 그녀의 팔을 붙잡고 다그쳤다.“빨리 말해요!”“방금 누가 저를 치고 지나갔어요.”성유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임정우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누구예요?”“네?”“누가 그랬냐고요!”임정우는 말하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때마침 방금 성유리를 건드렸던 그 남자가 또 다른 여자에게 접근하며 뻔뻔하고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저 자식이에요?”임정우가 성유리에게 물었다.하지만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임정우는 이미 남자에게 달려가 그의 코에 주먹을 냅다 꽂아 넣었다.“야, 이 새끼야!”…“대표님, 그림이 이미 도착했습니다. 이건 검수 확인서입니다.”서훈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박한빈에게 건넸다.박한빈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아까 사모님이 전화하셨는데 대표님이 안 작가님의 작품을 낙찰받으신 걸 알고 계신 듯합니다. 그리고 요즘 별다른 일정이 있는지도 물으시더군요.”박한빈은 고개를 들고 서훈을 바라보았다.서훈은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둘러 한마디를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박한빈은 더는 말하지 않고 서류를 넘겨받았다.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서훈은 그런 박한빈을 보며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대표님, 이 그림은...”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서훈은 오랫동안 박한빈을 보좌해왔지만 이런 표정을 본 건 처음이었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