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가 박한빈의 이런 표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솔직히 지금 그의 표정은 과거의 그 차분하고 냉정한 모습보다 훨씬 생동감 넘쳤다.그제야 성유리는 알았다. 그도 그녀로 인해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사실을.참 신선한 기분이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방금 그녀가 했던 말을 듣고 화내지 않을 남자는 없었을 것이다.그에 반해 성유리는 지금 아주 평온한 기분이었다.박한빈과 눈을 마주한 성유리는 그에게 반문했다.“아까 충분히 알아듣게 말하지 않았나요? 나...”말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박한빈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그 순간 성유리는 그 동작이 너무도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수없이 이 순간을 겪어왔으니까.성유리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손이 얼굴에 닿기를 기다렸다.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오지 않았다.천천히 눈을 뜬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공중에 멈춘 채로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마에 굵은 혈관이 도드라졌고 성유리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 혈관이 미세하게 뛰고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때려봐요, 왜 안 때리는 건데?”여자가 맞을 준비를 하는 것과 실제로 맞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아무런 차이가 없었다.지금 이 순간 성유리는 그의 손이 자신에게 내려오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래야 그녀는 그에게 완전히 실망할 수 있을 테니까.몇 년간 사랑했던 그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테니까.차갑고, 냉정하며, 심지어 손찌검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최근 그가 보였던 소소한 온정들은 다 가짜였다는 걸 말이다.햇볕 아래 부서지는 거품처럼 닿기도 전에 스스로 사라져 버릴 그 온기.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날 밤 박한빈과 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성유리는 많은 생각을 했다.그때 처음으로 그의 심장 박동을 느꼈고 그의 품 안에서 그가 가진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성유리는 심지어 그가 왜 욕실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
박한빈은 원래 이런 수법을 쓸 정도로 치졸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가 성유리라니...그녀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도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우스워졌다.성유리와 임정우가 안 지 얼마나 됐다고?박한빈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게 그때의 가면무도회일 텐데, 벌써 이렇게 깊은 사이가 된 건가?아까 그녀가 했던 말이 뭘까? 임정우가 더 세심하고 더 자상하다고?정말이지 너무 우스웠다.살면서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비교당할 줄이야. 박한빈은 상상조차 못 했다.임정우라니?사실 조금 전까지 박한빈은 그에게 눈길조차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성유리는 그보다 임정우가 낫다고 말했다.지금 성유리는 마치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자신에게 덤벼들 기세였다.그리고 그녀가 지키려는 상대는 임정우라니.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왔다.그 순간 성유리의 휴대전폰이 울렸다. 두 사람은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화면에 뜬 이름을 본 둘의 표정은 동시에 굳어졌다.성유리가 급하게 손을 뻗어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박한빈이 더 빨랐다. 그는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채 받았다. 심지어 스피커까지 켜고서.“여보세요? 유리 씨?”임정우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조용한 차 안에서 그의 선명한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성유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임정우는 잠시 기다리더니 다시 물었다.“왜 말이 없어요? 안 들려요?”“나...”성유리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은 그녀의 의자를 강제로 눕히더니 곧바로 성유리의 위에 몸을 얹었다.그 동작에 성유리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박한빈이 무엇을 하려는지 즉각 깨달은 그녀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하지만 그는 단단히 그녀를 붙잡았다.핸드폰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임정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무슨 일이에요? 지금 어디예요? 집에 갔어요?”성유리는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두
“미안하네요, 정우 씨. 유리가 지금 그쪽 전화를 받을 시간이 없어요.”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의 치마 속에서 손을 빼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벨트를 풀면서 다른 손으로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는 지금 아주... 좋아하니까.”그 말을 하며 박한빈의 눈은 성유리를 계속해서 꿰뚫어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아까 짧게 새어 나온 그 소리 이후 성유리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아무런 반응도 주지 않았다.임정우가 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은 말끝을 맺자마자 전화를 끊었고 주저 없이 성유리를 다시 눌러 제압했다.둘의 몸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었다.박한빈의 눈은 조금 전까지 분노로 차 있었지만 이제는 약간의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희미하게 붉어진 그의 눈가에는 욕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가 누르고 있던 손은 점차 힘없이 축 늘어졌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술을 향해 몸을 기울여 키스하려 했으나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피했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곧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입을 맞췄다.성유리는 다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지만 그는 틈을 놓치지 않고 성유리의 입을 벌려 깊이 키스했다.차 안은 점점 더 거칠게 흔들렸고 성유리는 마치 산소가 전부 빨려 나가는 듯 숨이 막혔다.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의 정신은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입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성유리는 끝내 말을 꺼냈다.“박한빈, 더럽지 않아?”그 말에 박한빈의 움직임이 멈칫하더니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난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너야말로 너 자신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박한빈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는 성유리의 손을 다시
이날 밤 박한빈은 자신의 자제력과 품위를 모두 내던져 버린 듯했다.성유리 역시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심지어 옷매무시도 정리하지 않은 채 두 팔을 감싸안고 조용히 걸어갔다.차 문이 닫히고 박한빈은 바로 가속페달을 밟았다.검은색 마세라티는 이내 밤 속으로 사라졌다. 성유리는 이것이 아마도 그와의 마지막 만남일 것임을 직감했다....박한빈은 그대로 도연제로 돌아왔다.이곳에 온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지난 두 달 동안 성유리가 시월파크에 더는 오지 않아도 그는 그곳에서 머무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그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자 숙자 아주머니는 매우 기뻤다.“저녁은 드셨나요? 뭘 좀 준비해 드릴까요?”“아니요, 괜찮아요.”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2층으로 올라갔다.그러다 복도 끝에 있는 방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 방은 성유리가 쓰던 방이었다.성유리는 이혼할 때 자신의 물건만 챙겨갔고 남은 보석과 옷들은 그대로 남겨뒀었다.박한빈은 그 물건들을 치우지 않고 문을 잠가둔 상태였는데, 오늘은...숙자는 박한빈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시선을 발견한 후 급히 설명했다.“오늘 사모님께서 오셔서 방을 정리하라고 하셨어요. 계속 문을 잠가둘 수는 없다고 하시면서 보석과 옷들을 가져가셨습니다.”숙자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곧바로 그 방으로 향했다.안에 있던 물건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침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깔끔한 침대 시트가 덮여 있었다.이제는 그저 집 안의 다른 손님방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마치 그 방에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박한빈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그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단예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박 대표님이 저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여쭤볼게요. 내일 저녁 식사 어떠세요?]박한빈은 잠시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다가 방을 한 번 더 둘러본 후 짧게 답장을 보냈다.[좋아요.]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한 달 동안 내리던 잔잔한 비가
“네.”“그래. 유정이에게 줄 선물도 준비했으니 그때 같이 가져가렴.”김난희가 말했다.“진씨 집안의 그 애... 신분이 좀 탐탁지 않긴 하지만 성씨 집안의 일이니, 그저 둘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김난희는 박한빈의 반응을 기다리며 말을 건넸다. 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약혼식에 성유리도 오겠지?”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김서영이 불쑥 말을 꺼냈다.성유리의 이름은 박씨 집안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았기에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다른 두 사람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성유리가 성씨 집안과 더는 상관없지 않나?”김난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박한빈을 한 번 쳐다보았다.박한빈은 조용히 식사를 계속하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김서영은 말을 덧붙였다.“그날 많은 기자들이 올 텐데, 성씨 집안이야 어떻게든 체면을 유지하겠죠.”“그렇겠지.”“그래서 내 생각인데 한빈이는 이번 약혼식에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김서영이 말했다.“선물은 내가 전해주면 되니까.”말을 하며 그녀는 박한빈의 의견을 묻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것도 괜찮네. 어차피 약혼식이니까 누가 가도 상관없지.”“전 다 먹었어요.”김난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한빈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럼 주말은...”“알아서 하세요.”박한빈은 이 주제에 더 이상 관심 없는 듯 말했다.“회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김난희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김서영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주말은 금방 찾아왔다.약혼식은 진씨 가문의 저택에서 열렸다.정원에는 하얀 긴 테이블과 신선한 꽃잎으로 장식된 아치 프레임이 있었다. 성유정은 약혼식이라 웨딩드레스를 입지는 않았지만 옅은 파란색 드레스가 그녀의 몸매를 완벽히 살려주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성유정을 바라보지 않았다.그는 먼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곧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한빈 오빠.”성유정은 참다못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가득했다.그제야 박한빈은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넸다.“축하해.”고작 축하해라니...성유정은 그가 마지막으로 해줄 말이 이렇게 가벼운 한마디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선물을 받아서 들었다.“고마워.”선물 상자를 받으며 성유정은 무심코 그의 손끝을 살짝 스쳤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차갑기만 했다.성유정은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조용히 손을 내릴 뿐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때 진무열이 성유정의 곁으로 다가왔다.“박 대표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그는 손을 내밀어 박한빈과 악수를 나누었다.“오늘 같은 중요한 날에 진 대표님은 안 보이시네요?”단예진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출장 중입니다.”진무열이 웃으며 설명했다.“회사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수성에서 시작돼서 그쪽으로 가셨어요.”단예진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중요한 프로젝트인가 보네요. 진 대표님이 직접 가셨다니?”진무열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박한빈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약혼식의 주요 행사는 이미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손님들과의 대화와 인사였다.금성의 대표적인 기업인 지화그룹의 대표 박한빈이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물론 더 주목할 만한 것은 단예진이 그의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모습이었다.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성씨 집안 쪽을 바라보았다.이제 보니 성씨 집안의 그 사람, 성유리는 이제 완전히 과거의 인물이 된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오늘 성유리는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조롱거리가 될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박한빈은 주변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
미화로 37번지로 향하던 길에 박한빈은 진무혁이 올린 SNS 게시물을 보았다. 위치는 수성이었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사진 구석에 하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이 성유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박한빈의 미간이 즉시 찌푸려졌고 그는 곧바로 말했다.“차 세워요.”택시 기사가 당황한 듯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박한빈이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방향을 돌려서 지화 빌딩으로 가주세요.”택시는 미터기로 요금이 계산되니 택시 기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냥 중얼거리며 조용히 차를 돌렸다.박한빈은 무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기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몇 번 두드리다가 결국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성으로 가는 비행기 표 예약해 줘요.”...성유리는 지금 수성에 있었다. 그녀의 작품이 영화로 각색되는 과정에 참여했지만 그녀의 역할은 그렇게 크지 않았기에 굳이 올 필요는 없었다.그러나 마침 성유정의 약혼식이 다가왔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왔다.그런데 진무혁이 함께 오리라곤 성유리도 생각지 못했다.“나도 약혼식에 가고 싶지 않아서.”레스토랑에서 진무혁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그녀와 같은 편에 서 있는 듯했다.성유리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진무혁이 와인잔을 들자 성유리도 잔을 들어 그와 가볍게 부딪쳤다.“너 정우 씨한테 요즘 연락 안 했어?”진무혁이 물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해조 그룹과의 계약은 끝난 거 아닌가요?”“그렇지. 하지만 정우 씨는 친구 같다고 할까, 요즘 기분이 축 처져 있던데 보는 내내 마음이 좀 안 좋더라고.”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와인잔을 내려놓고 말했다.“정우 씨는 괜찮을 거예요. 분명 누군가 정우 씨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거니까요.”“그게 너일 수는 없어?”성유리는 눈을 들어 진무혁을 보며 물었다.“우리 진 대표님 이제 중매까지 하려는 거예요?”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그
성유리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진무혁의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로 박한빈에게 인사말을 했다. “박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봅시다.” 진무혁의 인사에 박한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자 진무혁의 표정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입술을 피가 날 듯이 꽉 깨물고 있었다. 한편, 성유리가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성유리가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진무혁이 물었다. “내일 너 촬영장 갈 거야?”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아요?” 성유리가 되물었다. 진무혁은 이내 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난 그냥 너한테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어. 혹시 너한테 다른 일정이 있을까봐.” 성유리는 그의 말속에 담긴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없어요.” “그럼 됐어. 푹 쉬어. 잘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기 전, 진무혁은 뒤를 돌아 성유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성유리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진무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입구에서 잠시 머무르다 문득 아까 박한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박한빈이 그들의 모습을 봤을 때도 전혀 놀라지 않아 보였다. 당연하게도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들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박한빈과 그의 눈빛을 보니 박한빈에게 성유리는 그저 낯선 사람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성유리는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근 한 달 내에 성유리는 일부로 자기 자신에게 여유시간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바삐 돌았다. 늘 빽빽한 일정을 유지하고 살아간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