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로 37번지로 향하던 길에 박한빈은 진무혁이 올린 SNS 게시물을 보았다. 위치는 수성이었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사진 구석에 하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이 성유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박한빈의 미간이 즉시 찌푸려졌고 그는 곧바로 말했다.“차 세워요.”택시 기사가 당황한 듯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박한빈이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방향을 돌려서 지화 빌딩으로 가주세요.”택시는 미터기로 요금이 계산되니 택시 기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냥 중얼거리며 조용히 차를 돌렸다.박한빈은 무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기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몇 번 두드리다가 결국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성으로 가는 비행기 표 예약해 줘요.”...성유리는 지금 수성에 있었다. 그녀의 작품이 영화로 각색되는 과정에 참여했지만 그녀의 역할은 그렇게 크지 않았기에 굳이 올 필요는 없었다.그러나 마침 성유정의 약혼식이 다가왔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왔다.그런데 진무혁이 함께 오리라곤 성유리도 생각지 못했다.“나도 약혼식에 가고 싶지 않아서.”레스토랑에서 진무혁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그녀와 같은 편에 서 있는 듯했다.성유리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진무혁이 와인잔을 들자 성유리도 잔을 들어 그와 가볍게 부딪쳤다.“너 정우 씨한테 요즘 연락 안 했어?”진무혁이 물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해조 그룹과의 계약은 끝난 거 아닌가요?”“그렇지. 하지만 정우 씨는 친구 같다고 할까, 요즘 기분이 축 처져 있던데 보는 내내 마음이 좀 안 좋더라고.”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와인잔을 내려놓고 말했다.“정우 씨는 괜찮을 거예요. 분명 누군가 정우 씨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거니까요.”“그게 너일 수는 없어?”성유리는 눈을 들어 진무혁을 보며 물었다.“우리 진 대표님 이제 중매까지 하려는 거예요?”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그
성유리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진무혁의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로 박한빈에게 인사말을 했다. “박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봅시다.” 진무혁의 인사에 박한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자 진무혁의 표정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입술을 피가 날 듯이 꽉 깨물고 있었다. 한편, 성유리가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성유리가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진무혁이 물었다. “내일 너 촬영장 갈 거야?”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아요?” 성유리가 되물었다. 진무혁은 이내 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난 그냥 너한테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어. 혹시 너한테 다른 일정이 있을까봐.” 성유리는 그의 말속에 담긴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없어요.” “그럼 됐어. 푹 쉬어. 잘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기 전, 진무혁은 뒤를 돌아 성유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성유리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진무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입구에서 잠시 머무르다 문득 아까 박한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박한빈이 그들의 모습을 봤을 때도 전혀 놀라지 않아 보였다. 당연하게도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들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박한빈과 그의 눈빛을 보니 박한빈에게 성유리는 그저 낯선 사람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성유리는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근 한 달 내에 성유리는 일부로 자기 자신에게 여유시간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바삐 돌았다. 늘 빽빽한 일정을 유지하고 살아간
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제야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자리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가만히 멍만 때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선명한 라이터 소리를 들었다. 딸깍하는 소리에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누가 서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마 어젯밤에 미리 마주친 탓일까? 오늘 그를 마주한 순간 성유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의 손은 뜻대로 되지 않아 미세하게 떨려왔고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길고 넓은 복도에 오직 두 사람이 남아있었고 박한빈과 전혀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성유리는 불편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금 망설이던 성유리는 불편함을 못 이겨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틀거리는 그 사람은 성유리를 못 봤는지 그대로 그녀의 몸에 강하게 부딪혀버렸다. 상대가 자신의 몸에 부딪히는 그 찰나에 성유리는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를 맡았다. 촬영장에서 주는 도시락도 느끼하고 저녁으로 먹는 일식도 성유리의 입맛이 아니었기에 오늘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맡아버린 진한 알코올 냄새에 성유리는 위안에서 뭔가가 강하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부딪히려는 그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아 옆으로 비켜 세웠다. 성유리에게 부딪힌 그 남자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성유리는 빠르게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 예상보다 센 성유리의 힘에 박한빈은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안색이 어두워진 박한빈이 뭐라 하기도 전,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구토하기 시작했다. 위가 이상하리만큼 불편한데 더해 하루 종일 먹은 음
성유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늘 시기를 잘 맞춰 오던 생리 주기가 늦춰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사실까지 발견한 성유리는 하던 생각도 멈춘 채, 박한빈에게 손을 잡힌 채로 그를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 방 밖으로 나온 진무혁은 두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봐버렸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박한빈을 따라나서는 성유리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진무혁의 의도를 빠르게 알아차렸는지 그를 슥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우리 둘 사이 일이니 진 대표님께서 끼어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박한빈의 목소리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지만 경고하려는 의도는 명확했다. 진무혁은 그의 말에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성유리는 얼른 괜찮다고 말했다. 진무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성유리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박한빈은 약국을 들러 사 온 물건을 성유리에게 건넸다. 성유리는 깜짝 놀라더니 이를 꽉 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 “병원 가는 거 아니었어요?” “지금 시간에 병원 가면 응급실밖에 없어. 원하다면 내가 사람을 시켜 특별히 안배해 줄게.” 박한빈이 대답했다. “아니요. 됐어요.” 성유리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만약 박한빈에게 안배해달라고 말한다면 소문이 빠르게 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임신 결과보다 이런 결과를 더욱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먼저 테스트라도 해봐.” 박한빈이 말을 이어갔다. “내일 아침 병원 가서 피검사도 하자.” 아주 담담해 보이는 박한빈은 마치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 같아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성유리는 쓸데없는 질문은 던지지 않으려 결심했고 손에 들린 테스트기 상자를 꽉 쥐었다. 차는 빠르게 달려 어느덧 호텔에 도착했고 성유리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박한빈이 그녀 뒤를 따랐다. “저 혼자 해보면 돼요.” 성유리는 자신을 따라오는 박한빈이 불편한
“성유리?” 박한빈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하더니 살짝 노크하며 성유리를 불렀다. “...” 하지만 그는 안에 있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걱정되는 마음에 몇 번이고 노크했지만 안에서 여전히 반응이 없자 박한빈은 발로 문을 차서 억지로 열 준비를 했다. 박한빈이 뒤로 물러나 다리에 힘을 주려는 그 순간, 성유리가 화장실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는 하려던 행동을 빠르게 멈췄고 조용히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임신 아니에요.” 말하는 성유리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평온해 보였다.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한빈에게 성유리는 들고 있던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며 다시 말했다. “박 대표님, 이제 안심하셔도 되겠어요.”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테스트기를 확인했고 위에는 선명하게 한 줄이 나타나 있었다. “내일 병원 가보자.” “이게 정확할지 안 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박한빈이 입을 뗐다. “안 가요.” 단호하게 거절하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데 왜 그러시죠?”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전 그저 위가 불편할 뿐이에요. 박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우연은 없을 거라는 말이죠.” “아침 8시, 데리러 올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자신이 할 말만 내뱉고는 몸을 휙 돌렸고 빠르게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럼 저 혼자 갈게요.” 뒤에서 들려오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재촉하던 발걸음을 뚝 멈췄다. “결과가 나타나면 꼭 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성유리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박한빈 씨,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게다가 병원엔 보는 눈도 많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죠. 저는 그 어떤 예외도 발생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과 선을 딱 그어버리려는 의도가 가득한 말을 했다. 박한빈은 전에 늘 성유리가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보니 참 단호
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8시, 아래층 1613호실로 가서 여자 한 명 찾아. 그리고 그 여자랑 같이 병원으로 가고.” 그의 요구에 차제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박한빈을 쳐다봤다. “이 일은 그 누구한테도 알려지면 안 돼. 만약 소문이 조금이라도 퍼진다면 무슨 대가를 치를지 알 것이라고 믿어.” 박한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차제니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오해한 것을 알아차렸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넵.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봐.” 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차제니마저 방을 떠나자 방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박한빈은 방금 발생한 일을 더 생각하기 싫었지만 저녁에 잠을 잘 때, 갑자기 아이가 나타나는 꿈 하나를 꿨다. 그는 종래로 어린아이들에게 깊은 감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다루는 법이 서툴렀던 박한빈은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부모님에게도 의지하지도 않았다. 박한빈이 다 커서도 그의 가정은 딱히 화목한 편이 아니었기에 사랑에 서툴렀다. 그렇다고 박한빈이 아이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확고히 키워왔던 개념 탓일까? 박한빈은 늘 자신에게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버지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아이가 갖고 싶었다. 꿈속에 나타난 아이는 흐릿한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박한빈은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아이는 뒤돌아 박한빈을 쓱 쳐다보고는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박한빈이 뒤늦게 쫓아가려고 할 때, 아이는 이미 종적을 감췄다. 이상한 꿈에 눈을 번쩍 뜬 박한빈은 날이 이미 밝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꿈이 너무 생생하고 기이했기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이의 정체를 추측했다. 그때, 차제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박 대표님, 1613호실에 사람이 없는데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차제니의 말
한편, 성유리는 이미 피검사를 다 마치고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성유리는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지금 그녀 본인조차도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서운 건지 파악이 안 됐다. 성유리는 당연히 아이가 생기면 꼭 낳고 싶었다. 필경 그 아이는 자신과 피를 나눈 사람이자 자신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사할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성유리는 가정을 이루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두려운 감정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날 아이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아이가 태어난다면 박씨 가문에서 아이를 뺏어갈까 두려웠다. 박한빈의 태도를 떠올려보니 그는 절대 아이를 자기 자신에게 남겨둘 것 같지 않았다. 성유리는 정말 그때가 되면 자신이 어떻게 박한빈과 싸울지 가늠이 안 됐다. 어젯밤, 이것까지 생각한 성유리는 일부로 수돗물로 테스트했었다. 결과를 보여준다면 순순히 포기할 줄 알았던 박한빈은 완강히 자신을 데리고 병원을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말 그대로 그에게서 도망을 쳤다. 뭐가 어떻게 되든 성유리는 지금 그저 검사 결과만 알고 싶었다. 결과를 알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에 깊게 잠겼을 때,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앉았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거니와 병원에 오고 가는 사람도 많아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성유리는 무언가 감지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유리가 고개를 들자 박한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표정이 삽시간에 바뀐 성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박한빈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다시 앉혔다. “또 어디로 갈 생각이지?” 묻는 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애를 쓰며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조용히 말했다. “만약 정말 임신이 맞는 거
성유리는 자신을 부르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고 의아해하며 뒤돌아봤다.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에게 다가가 자기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박한빈의 행동에 성유리는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그때, 성유리는 몸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유리는 잘 알았다. 그녀는 박한빈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임신 아닙니다.” 의사가 단호하게 성유리에게 결과를 알려줬다. “생리가 늦춰지는 원인은 아마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생리가 끝난 후에 다시 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비록 성유리는 조금 전 이미 결과를 알아버렸지만 의사의 입에서 확실한 결과를 듣자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임신하시려고 준비 중이십니까?”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유리를 발견한 의사가 물었다. “아니에요.” 의사는 신유리의 대답을 바로 무시해 버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너무 조급해하시면 안 됩니다. 조급해하시면 하실수록 임신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보면 되고요.” 의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주며 많은 말을 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성유리는 응당 기뻐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박한빈과 있었던 그 일을 자세히 떠올려보면 임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 만약 그날 일로 성유리가 임신했다면 정말 하늘이 내린 장난과도 같은 기적이었다. ‘나한테 그런 기적은 없나 보네.’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성유리가 더 이상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어떻게 박한빈과 싸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했다. 성유리는 임신이 아니니 이건 좋은 일이라고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고 결과를 알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성유리가 진료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이미 떠나버렸는지
“그렇지? 어제는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아이가 없어졌다는 소식 듣자마자 바로 다 흩어지더니 오늘은 누구도 찾아오지 않네.”“모두 다 자식 덕분에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고 하잖아. 농담인 줄 알았어? 아이만 있으면 최소한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이도 없으니 정말... 아무런 희망도 없지. 이렇게 살 이유가 있을까?”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가다 등 뒤에서 문득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급하게 뒤를 돌아본 그들이 본 사람은 박한빈이었다.여자들은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박한빈을 보고는 더 이상 말도 못 했다.“꺼져.”박한빈은 이를 꽉 깨문 채 꺼지라는 두 글자만 내뱉었는데 두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겁먹은 채 서둘러 도망갔다.잠시 후, 박한빈은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발을 내디뎠다.성유리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본래 야위었던 얼굴이 하루 만에 풍선이 바람 빠진 것처럼 변해 있었다.눈가와 볼이 움푹 패였고 얼굴은 마치 물에 불린 듯 창백했다.성유리의 뺨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두 손은 침대 시트를 꽉 잡고 있었다.마치 꿈속에서조차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 성유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그들의 시선이 마주치자 박한빈은 이 순간이 어색하고 어눌하게 느껴졌다.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성유리가 곧 박한빈에게 선택을 내려줬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침대 시트를 움켜잡고 뒤로 물러났다!경계심 가득한 눈빛은 마치 박한빈이 성유리의 적처럼 보이게 했다.박한빈은 입술을 단단히 다물었다.그때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돌아오셨어요?”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응.”“아이가... 없어졌어요.”성유리는 다시 말했다.목소리는 쉰 듯했지만 차분하게 들렸다.그녀가 이 말을 할 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박한빈은 경매가 끝난 뒤에서야 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았다.소식을 들은 즉시 박한빈는 항공편을 바꿔 급히 금성으로 돌아왔다.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병원 복도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지만 주변은 고요했다.오직 박한빈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함 속에서 뚜렷하게 울렸다.그러다 그는 성유리를 보았다.성유리는 병상에 앉아 있었다.곁에는 이미 깊이 잠든 간병인이 있었는데 정작 그녀는 침대에 앉은 채,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달빛 아래 그는 아주 또렷이 볼 수 있었다.성유리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그건 박한빈이 처음으로 보는 성유리의 눈물이었다.성유리는 그의 앞에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감정 기복이란 게 없는 줄로만 알았다.그러나 바로 지금, 제대로 깨달았다.성유리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그녀도 슬퍼할 줄 알고 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다만 지금껏 박한빈이 몰랐던 건 성유리가 그를 충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지금 성유리는 울고 있으면서도 입으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저 덜덜 떨리는 어깨만이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박한빈은 처음엔 당장 달려 들어가 성유리를 꽉 안아주고 싶었다.하지만 이내 생각했다.지금 이 순간, 성유리가 과연 자신을 보고 싶어 할까?자기 앞에서조차 감정을 드러내길 꺼렸던 사람이다.그런 성유리가 과연 박한빈이 자신의 눈물을 보는 걸 원할까?그래서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결국 돌아섰다.집으로도 가지 않았다.그저 기사에게 회사로 가자고 했다.박한빈의 휴대폰엔 비서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경매에서 낙찰된 목걸이가 검수를 마쳤다는 내용이었다.그리고 성유리의 배송 주소를 입력할지 묻는 질문도 함께였지만 박한빈은 아무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그저 휴대폰을 옆에 툭 던지고는 두
“걱정 마세요. 여기서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그러니 따님 먼저 데리고 돌아가 주세요.”윤청하는 뭔가 더 말하려다 김서영을 한번 바라보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하려던 말을 삼켰다.그리고 성유정의 팔을 잡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안 돼... 안 돼요! 가지 말라고.”그제야 성유리는 겨우 목소리를 되찾았고 몸을 버둥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쫓아가려 했다.하지만 윤청하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몸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이러다간 정말 죽어!”“쟤가 절 밀었어요. 절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고요.”성유리는 손을 뿌리치고 이성을 잃은 듯 윤청하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잡았다.“왜 안 잡아? 왜 안 잡냐고. 성유정... 쟤가 내 아이를 죽였는데 왜 아무도 안 잡아!”“왜 다들 성유정 편만 드는 거야?”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들 마음속에서 자신은 언제나 성유정보다 못하다는걸.성유정은 말도 잘하고 사람 마음도 사로잡을 줄 알고 무엇보다 그녀보다 훨씬 더 깨끗해 보이니까.성씨 가문 사람들과 김서영, 그리고 박한빈조차도 그랬다.그러나 성유리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단 한 번도 성유정의 자리를 뺏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하지만 아이만은 달랐다.아이는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왜 애까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도대체 왜 세상에 태어날 기회조차 빼앗겨야 했을까?그때, 김서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네가 말한 CCTV, 내가 확인해 보라고 했어.”성유리가 윤청하의 옷깃을 꼭 쥔 채 흥분해 있을 때 김서영은 차분하게 말했다.“그렇지만 당시 네트워크 점검 중이라 영상이 찍히지 않았어.”“그러니까 유리야, 그건... 그냥 사고였어.”김서영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성유리의 얼굴에 떠오르던 모든 표정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옷깃을 움켜쥐고 있던 손도 힘없이 천천히 내려왔다.그리고 성유리는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툭 하고 침대에 쓰러졌다.‘사고?’그러니까 자신의 뱃속에서 함께 숨 쉬며 네 달 가까이
“유리야.”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가에 닿았다.성유리는 사실 이미 깨어 있었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상대는 성유리의 떨리는 속눈썹을 알아챈 듯 곧장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깨어났으면 뭐라도 먹자.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지금은 네 몸이 가장 중요해.”그 말이 끝난 뒤에야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김서영을 한참 바라보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CCTV는 확인했어요?”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서영은 순간 멈칫했다.“2층 계단 입구... 거기 CCTV 있잖아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다 찍혔을 거예요. 그때... 성유정이 절 밀었어요. 경찰에 신고했어요?”그 순간, 윤청하가 성유정을 데리고 방에 들어섰다.원래도 창백하던 성유정의 얼굴은 성유리의 말을 들은 순간 핏기마저 완전히 가셨다.그녀는 곧장 김서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 아니에요. 어머님, 전 정말 아니에요!”“언니, 언니가 아이를 잃어서 마음 아픈 거 알아. 근데 난 정말 그런 짓 안 했다고.”성유정은 곧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언니 몰랐겠지만... 나 요즘 계속 언니 아이를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했어. 옷도 여러 벌 샀단 말이야. 난 아이의 미래 이모였어. 그런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성유정은 흐느끼며 울먹였고 윤청하는 그녀를 감싸안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 넌 어떻게 네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어서... 어서 사과해.”‘사과하라고?’성유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이내 목소리는 갈라지고 점점 더 뻣뻣해졌다.“엄마... 지금 나보고 사과하라는 거야?”눈앞의 사람은 성유리의 친어머니였다.비록 그동안 자신에게 늘 차가웠고 무심했지만 그래도 성유리는 언젠가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믿어왔다.과거가 어떻든 간에 그들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니까.설령 마음에 안 들고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자신은 그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이니까 언젠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