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성유리는 가끔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친부모가 사실은 자신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것만 같았으니까.어릴 적 그녀는 몇 번이나 이상한 꿈을 꾸곤 했지만 꿈속에서 부모에게는 늘 또 다른 딸이 있었다.그 딸 앞에서 부모는 늘 다정하게 웃었고 아이의 못된 버릇이나 작은 투정마저도 기꺼이 받아주었다.그런데 꿈속에서도 성유리는 늘 소외된 채, 밖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그저 꿈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말해왔건만 그 꿈이 너무도 현실 같아서 성유리는 지금도 그 속의 장면들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부모와의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늘 뒷순위로 밀려나고 존재감 없이 무심히 지나쳐지는 삶, 성유리는 이제 그런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그런데 지금, 박한빈 앞에서도 똑같았다.옥지나가 말한 것도 틀리지 않았다.그가 자신과 함께 있고 끝내 결혼까지 하겠다고 고집했던 것은 결국 종이에 적힌 혼약 때문일 뿐이었다.그 약혼서가 누구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든 박한빈은 결국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사실 성유리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고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그런데 왜인지 지금 다시 떠올리자니 마음속 어딘가가 쓸쓸하고 시큰해졌다.마치 박한빈이 자신의 부모처럼 언제나 자신을 다른 것들보다 뒷전으로 미뤄놓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서글펐다.성유리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문이 불쑥 열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그 소리에 놀란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는데 너무 급히 움직인 탓에 자신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박한빈은 손에 컵을 든 채 방으로 들어섰다.곧 시뻘건 성유리의 눈가를 보는 순간,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우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얼른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쓱 닦아냈다.“어디 불편해서 그래요? 아니면 어디 아프십니까?”박한빈이 다시 물었다.“아니요.”“그럼 방금 누가 다녀갔나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한 겁니까?”
박한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그 말투에 진무혁은 뭔가 느꼈다.“설령 제 약혼녀가 단순히 사고로 빠진 거라 해도 반드시 뭔가 해명해야 할 겁니다.”인위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결국 이 파티의 주최자인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었다.그 생각에 진무혁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CCTV는 이미 확인 요청을 했습니다. 다만, 성유리 씨가 빠진 각도가 조금 애매해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박 대표님. 반드시 원인을 찾아내겠습니다.”진무혁이 다급히 덧붙였다.박한빈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고개를 돌려 의사에게 물었다.“상태는 어떻습니까?”의사는 성유리의 몸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뜻밖의 질문에 그는 잠시 움찔했지만 곧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큰 부상은 없습니다. 다만 감기에 걸린 듯하니 오늘 밤 발열만 없도록 주의하시면 됩니다.”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진무혁이 성유리를 향해 말했다.“성유리 씨, 부디 푹 쉬세요. 오늘 밤 일은 제가 꼭 책임지고 조사하겠습니다.”박한빈은 그저 옆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덕분에 진무혁은 성유리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말에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렀지만 옆에 있는 박한빈을 슬쩍 쳐다본 후에야 대답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아닙니다. 저한테 너무 예의 차리지 마십시오.”진무혁이 급히 답하고는 박한빈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의사를 데리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문이 닫히자마자 성유리는 다시 연달아 재채기를 했다.박한빈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아직도 춥습니까?”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그와 떨어지려는 듯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던졌다.“뭐 하는 겁니까?”박한빈이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저... 샤워하려고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갑자기 그 사실을 떠올렸다.처음 물에 젖었을
성유리는 처음엔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다 박한빈이 팔로 자기 어깨를 감싸안자 비로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를 본 순간, 성유리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리더니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하지만 성유리는 곧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박한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굽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진무혁은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그리고 박한빈의 잔뜩 어두워진 얼굴을 보자 진무혁의 심장이 저절로 철렁 내려앉았고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박 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누가 한 짓인지 밝혀내겠습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꽉 다문 입술로 성유리를 품에 안은 채 곧장 걸음을 재촉했다.그때 마침 소식을 들은 성시원과 윤청하가 달려왔다.윤청하는 얼른 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옆에 있던 성시원이 팔을 잡아끌며 그녀를 막았다.박한빈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아니, 아예 그들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듯 보였다.오로지 성유리만을 안은 채 곧장 위층 객실로 향했다.방에 들어오고 나서도 성유리는 몸을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연달아 재채기를 터뜨리더니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박한빈은 그 모습을 보자 미간을 더 잔뜩 찌푸렸고 곧 휴대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다.“의사 불러요.”그의 목소리는 차분해 보였지만 귀 기울여 들으면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전화를 끊자마자 박한빈은 욕실로 가서 수건을 챙겨와 성유리의 젖은 머리칼을 조심히 닦아주기 시작했다.“춥죠?”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에어컨 온도를 따뜻하게 맞춰놓고 있었다.“따뜻한 물이라도 마실래요?”곧 그가 다시 물었다.그러나 성유리는 여전히 멍하니 앉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그녀의 모습에 굳은 얼굴로 거의 명령하듯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말 좀 하시죠?”그 한마디에 성유리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박한
결국 성유리가 먹은 건, 주방장이 직접 만들어 준 해산물 파스타였다.오늘 아침 갓 낚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덕분에 맛도 일품이었고 성유리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그 사이 박한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저 지금 식당이에요.”성유리는 마지못해 자신의 행방을 보고했다.“아래로 내려가기 싫어요. 별일 없으면 그냥 혼자 노세요.”“지금 제가 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이나요?”박한빈의 말투에는 살짝 짜증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 안에서 나른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별로 화난 것 같진 않았기에 그녀는 아예 못을 박았다.“그럼 한빈 씨는 한빈 씨대로 놀고 저는 저대로 놀게요.”“아, 그리고 제 핸드폰도 곧 배터리 다 닳을 거 같아요. 이만 끊을게요.”그 말과 함께 성유리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때였다.원유진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너랑 박 대표님 진짜 사이좋네?”성유리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반면, 박한빈은 꺼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그녀가 정말 전화를 끊어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진짜 위로 올라가서 당장 끌어내려야 하나?’이런 생각이 들 즈음 누군가 박한빈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는 일단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사실, 박한빈도 이런 자리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은 다르게 굴러가는 이들과 마주하는 건 언제나 불쾌한 일이었다.하지만 좋아하든 싫어하든,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지화 그룹의 대표로서 그는 누구보다 완벽하게 이런 자리를 소화해 냈고 겉으로는 누구도 흠잡을 수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사람이었다.여느 때처럼 여유롭게 사람들을 상대하던 중, 갑작스레 2층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잔잔하게 흐르던 연주곡 사이로 새어 나온 날카로운 비명이었기에 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렇지만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 여기고 조용히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넘겼다.진무혁이 준비한 이번 파티는 전반
결국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보이는 특별한 애정이었다.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옥지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자신과 박한빈이 겉으로 보기엔 친밀해 보일지 몰라도 그건 사실상 이모부와의 관계를 소비해서 겨우 만들어낸 자리일 뿐이었다.박한빈이 자신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 주는 것도 결국은 사업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하지만 그가 성유리에게 보이는 태도는 전혀 달랐다.옥지나는 박한빈이 성유리 앞에서 어떤 모습인지 본 적이 있었다.웃고 화내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분명 살아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진짜 모습이었다.자기 앞에서 보여주는 무미건조하고 공적인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그 사실이 옥지나를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그녀는 자신이 성유리보다 결코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겨우 성유리가 자기보다 얼굴이 조금 더 예쁘다는 이유로?하지만 박한빈처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없이 예쁜 여자를 볼 텐데 설마 그렇게 겉모습만 보고 휘둘릴 사람이라고는 옥지나는 믿지 않았다.그렇다면 결국 이유는 그들 사이의 약혼 때문일 것이다.세상은 정말이지 불공평했다.성유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았는데 그냥 그렇게 박한빈의 마음을 얻어 버렸다.그게 옥지나로선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옥지나 씨.”옥지나가 성유리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며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옥지나는 뒤를 돌아보았다.“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요?”원유진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다들 수영장 쪽에서 놀고 있는데 지나 씨도 같이 갈래요?”옥지나는 원유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저는 유리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성유리요?”그 이름이 나오자 원유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걔를 왜 기다려요?”“어쩔 수 없잖아요. 한빈 씨가 저더러 성유리 씨 좀 챙기라고 하시더라고요.”옥지나가 대답했다.“성유리 씨가 이런 파티엔 잘 안 어울린다고... 혹
성유리는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지나치고 싶었지만 그녀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그녀의 걸음이 멈추지 않자 뒤따라오던 사람이 성큼 다가와 성유리 앞을 막아섰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무슨 일인데요?”옥지나는 오늘 저녁 노란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 또렷하게 강조된 정교한 화장은 그녀의 이목구비를 최대한으로 부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고 그 시선은 매섭게 성유리를 꿰뚫고 있었다.“일부러 그런 거죠?”옥지나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무슨 말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점심때 말이에요.”옥지나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일부러 한빈 씨한테 들이댄 거죠? 사람들 앞에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예요?”그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성유리는 정말이지 옥지나의 사고방식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사실 처음부터 옥지나를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박한빈을 향한 그녀의 감정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성유리는 그게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고 여겼다.선택해야 할 사람은 결국 박한빈이니까.그런데도 지금 옥지나가 쏟아내는 이 말들은 성유리로 하여금 어이없게 만들었다.“두 사람 약혼 이야기, 저도 알아요.”성유리가 대답도 하기 전에 옥지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저는 제가 한빈 씨한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요.”“그냥 어른끼리 한 농담 같은 거였잖아요?”“그에 반해 전 오랫동안 한빈 씨를 지켜봤어요. 나온 뉴스, 인터뷰... 다섯 번도 넘게 봤고 한빈 씨한테 가까이 가고 싶어서 유학도 갔어요. 그리고 죽어라 공부했죠. 더 가까워지려고.”옥지나의 눈빛은 점점 더 이글이글 타올랐다.“성유리 씨도 저처럼 그렇게 노력했다면 제가 양보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는 느껴져요. 당신은 한빈 씨를 아예 신경도 안 쓰고 있다는 사실이.”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아침에 저랑 한빈 씨 같이 있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