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는 에릭이 어울리는 사람들이야말로 비정상적이고 정신병자들이라 생각했다.“여기가 당신 오빠 집이야?”셀레나는 헬리콥터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이런 데서 사람이 살 수는 있는 거야?”그녀는 얼굴에 손수건을 갖다 댔다.마치 이 공기 자체가 더럽기라도 한 듯, 코로 들어오는 걸 막으려는 듯한 제스처였다.“좀 참아. 어차피 딱 사흘뿐이야.”알리는 짧게 대꾸했지만 셀레나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진짜 이해가 안 가네.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곳에서 지내야 하는 거야? 내 별장 중 아무 데나 가도 여긴 백 배는 나을 텐데? 부모님이 오라니까 그냥 오는 거야?”알리는 셀레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자기야, 아무리 그래도 내 형이 지내는 곳이야.”알리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리고 딱 사흘이라고 했잖아. 그 정도도 못 참아?”셀레나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헬기 착륙과 동시에 이곳의 집사가 나와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에릭 씨는 아직 업무 중이라 대신 제가 두 분을 안내하러 나왔습니다.”“그렇군요. 여긴 그 사람 혼자 살아요?”셀레나가 물었다.“네. 손님방은 미리 청소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집사는 앞장서 걸으며 두 사람을 별장 안으로 이끌었다.실내로 들어서자 천장이 높고 넓은 거실이 펼쳐졌다.그제야 셀레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곧 한쪽 벽면에 걸린 그림을 발견한 그녀는 손수건을 내리고 그 앞에 다가가 눈여겨보았다.한편, 알리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집사에게 물었다.“형은요?”“서재에 계십니다.”대답이 끝나자마자 알리는 바로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는 여러 대의 모니터가 설치돼 있었고 그 화면들엔 온통 빨강과 초록으로 얽힌 복잡한 그래프들이 빽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에릭은 알리의 존재를 눈치채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이렇게 일 계속
“오늘 달빛 되게 예쁘네요.”박한빈의 등에 업혀 있던 성유리가 불쑥 말했다.그 말에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박한빈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저거 달 아니고 해야.”지금은 해가 막 지는 저녁이었기에 달이 뜰 시간은 아직 아니었다.성유리는 입을 삐죽이며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저기요. 저렇게 노랗고 둥근 거 달 맞거든요?”“그래. 네가 달이라면 달이겠지.”박한빈은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무심하게 받아넘겼다.그런데 성유리는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고개를 빼고 박한빈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그러자 박한빈은 시선을 피했다.그 작은 행동에도 성유리는 금세 눈치를 챘다.“기분 안 좋으세요?”“아니.”“분명 안 좋은 것 같은데요.”성유리는 집요하게 물었다.“왜요? 제가 에릭 씨 일에 끼어든 게 마음에 안 드세요?”박한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그건 아니야.”“그럼 왜 안 좋으신데요?”그 말에 박한빈의 걸음이 멈췄다.지금 그들은 프라이빗 비치 위에 있었고 이제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에릭의 저택도, 경호원들도 모두 뒤로 하고 한참 걸어 나온 참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마음이 불안했다.자신에게 업혀있는 성유리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고 그 탓에 그녀는 조금 아파졌다.“아... 아파요.”그제야 박한빈은 팔에 들어간 힘을 살짝 풀어주며 말했다.“미안, 내가 무서워서 그래.”그 말에 성유리는 멈칫했다.“나 무섭다고. 알겠어?”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잠시 박한빈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이내 조용히 고개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그리고 팔을 뻗어 박한빈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말했다.“뭐가요. 저 이렇게 잘 있잖아요.”“근데 만약에...”박한빈이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하자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만약이라는 건 없어요.”“저 그렇게 무능한 사람 아니거든요? 제가 제 몸 지킬 힘도 없다고 생각하세요?”박한빈은 아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성유리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리고 그 눈빛엔 분명한 압박이 담겨 있었다.결국 박한빈은 에릭을 바라봤고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미안하다.”얼마 후,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미리 말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야. 그건 인정해. 하지만 네가 내 아내를 납치한 건, 그건 절대 용서 못 해.”에릭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네 용서 따윈 필요 없어.”그 말에 박한빈은 더 말할 가치도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때, 성유리가 두 사람의 손을 억지로 붙잡았다.에릭의 손은 눈에 띄게 굳었고 이마에는 주름이 잡혔다.그리고 박한빈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포옹도 할래요?”이내 성유리가 웃으며 말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박한빈은 바로 손을 빼냈다.“됐어. 그건 안 해.”에릭도 똑같이 손을 뺐다.“그럼... 두 분 아직도 친구 맞아요?”성유리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이미 자기 입으로 뭐라 하는지도 헷갈렸다.그래도 두 눈은 여전히 또렷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에릭은 아무 말 없이 박한빈을 쳐다봤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그 침묵에 성유리는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무언가 더 말하려는 찰나, 에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미안하다.”성유리는 잠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어차피 저 다친 데도 없으니까요.”“그럼 화해한 걸로 할게요?”그녀는 다시 말했다.“내일 우리 집에 오세요. 제가 직접 한식으로 요리해 줄게요.”에릭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그의 대답을 확인한 뒤, 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저희는 이제 가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저 이제 자고 싶어요.”박한빈은 짧게 대답한 뒤, 그녀를 안아 올렸다.이내 몇 걸음 걷던 성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불편해요. 업어줘요.”“그래.”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그는 그녀를 내
“에릭 씨가 왜 화난 건지 아세요?”성유리가 먼저 박한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눈빛엔 날이 서 있었고 박한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얼마 후,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유리야, 너 술 취했어.”말을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확 밀쳐냈다.“저 안 취했어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그 전에 대답부터 하세요. 에릭 씨가 왜 화났는지 아시냐고요.”박한빈은 말이 없었다.그 질문에 굳이 답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에릭이 왜 화를 내는지, 지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 그는 이미 에릭을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그래서 더더욱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았다.“대답하세요.”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그에게 답을 요구했고 침묵하던 박한빈이 결국 입을 열었다.“내가 펀드에서 손 떼려니까.”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맞긴 한데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에릭 씨는 당신을 친구로, 또 파트너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한빈 씨 행동은 그냥 에릭 씨를 버린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니까 화낸 거죠.”“에릭 씨가 얼마나 화났는지 알아요? 아까... 아가 총구를 제 머리에 겨눴어요. 저한테요! 왜냐하면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제가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대요. 이게 말이 돼요?”말을 하던 성유리의 입술이 떨리더니 눈빛엔 억울함이 가득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굳더니 날 선 눈빛으로 에릭을 쳐다봤다.하지만 에릭은 말없이 무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그러니까 그냥 가서 말 좀 해주면 안 돼요?”성유리는 다시 박한빈을 향해 말했다.“회사 그만두는 게 친구를 그만두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당신한텐 아직도 에릭 씨가 소중한 친구고 파트너라고. 앞으로도 같이 할 수 있다고 설명만 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잖아요!”그 말투는 마치 이 모든 책임이 박한빈에게 있다는 듯했다.그리고 박한빈은 그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지금 벌어진 일들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예 이 자리에 성유리를
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았다.지금 그는 마치 성유리를 숨도 못 쉬게 만들겠다는 만큼 강하게 끌어안았다.그 안에 갇힌 그녀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아파요.”결국 성유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힘을 풀지 않았다.성유리가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콕 찌르고 꼬집었을 때야 박한빈은 마침내 그녀를 놓아주었다.곧 그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진지한 눈빛으로 성유리의 몸 어딘가에 자신이 놓친 상처는 없는지 살폈다.“저 정말 괜찮아요.”성유리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미간을 찌푸렸다.“진짜예요.”성유리는 말하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그래도 일단 나가요. 여긴 좀...”“그래.”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표정에 살기가 스쳤다.이내 그는 성유리의 손을 꼭 쥐고 밖으로 향했다.아래층엔 여전히 에릭이 있었다.박한빈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걸 본 에릭은 별다른 표정 없이 그들을 바라봤다.그는 와인잔을 하나 더 따르며 말했다.“한잔하지.”박한빈은 잠시 에릭과 눈을 마주보다가 성유리의 손을 놓았다.“문 앞에 경호원 있어. 너 먼저 데려다 달라고 해.”말과 동시에 그는 에릭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조용히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지만 성유리는 시선을 그에게 두지 않고 에릭을 정면으로 바라봤다.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저도 껴도 될까요?”에릭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물론이죠.”그는 직접 와인잔을 하나 더 집어 성유리 앞에 내밀었고 그녀 또한 자연스럽게 잔을 받아들었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애써 막으려 했지만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아요.”그리고 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에릭과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들이켰다.와인은 독특한 향이었다.처음엔 알싸하고 쓴맛이 느껴졌고 목 넘김 뒤에는 과일 향이
에릭의 별장 대문이 누군가에 의해 부서지듯 열려버렸다.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경호원들은 원래 박한빈을 막으려 했지만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그는 경호원의 허벅지에 총을 쐈다.그의 사격 실력은 매우 정확했다.하지만 그 한 발에 현장엔 더 많은 총구가 박한빈을 겨눴다.박한빈이 다음 목표를 조준하려는 순간, 에릭이 안에서 나와 경호원들의 행동을 막았다.그리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왔구나?”“유리는 어디 있어?”박한빈이 바로 물었다.에릭은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박한빈은 더 이상 수수께끼 같은 말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그가 입을 다물자 박한빈은 다시 총구를 들었다.이번엔 겨냥한 상대가 바로 에릭이었다.그들은 전에 함께 아프리카에 간 적이 있다.사냥팀을 고용해 초원에서 맹수를 사냥하고 그들의 머리를 공훈 휘장으로 벽에 걸어두는 그런 일이었다.그래서 박한빈의 사격 실력은 에릭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에릭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두 손을 들었고 박한빈은 차분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성유리는 어디 있지?”“로얀, 지금 네 모습 좀 봐.”그러자 에릭이 대답했다.“넌 원래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어떻게 이렇게 충동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할 수가 있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에릭을 응시했다.“전부 다 그 여자 때문이지? 성유리 씨가 네 마음을 뒤흔들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히려 네가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해. 결국 내가 너 대신 처리했으니까.”에릭의 말에 박한빈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처리했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사실 에릭 성격상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지만 박한빈은 믿지 않았다.성유리가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얼마 전 그녀가 침대에 누워 의식을 잃었을 때도 박한빈은 끝까지 믿지 않았다.그때 그는 결심했었다.설령 기계와 약으로 연명해야 해도 성유리를 끝까지 붙잡겠다고.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