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지금 마침 남자랑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으니 배지수는 내심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박한빈을 등에 업고 자신의 위치를 더욱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내려야 하는 층에 도착했고 박한빈은 먼저 내리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긴장한 탓에 손에서도 땀이 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배지수가 박한빈을 보며 물었다. “저 먼저 씻을까요?” “응.” 박한빈은 짧은 대답만 했지만 배지수의 얼굴을 터질 듯 빨개졌다. 배지수는 방 안에 있는 박한빈을 한 번 더 힐끔 쳐다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떨려 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전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 안에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연성의 밤이 금성의 밤보다 조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축 기술의 발전으로 연성 또한 높은 빌딩과 화려한 조명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박한빈은 창문 너머 빌딩의 불빛만 조용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성유리의 눈빛이 떠올랐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이 경계하던 눈빛과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가던 뒷모습. ‘얼마 만에 보는 거지?’ 박한빈은 한참을 생각하다 마지막으로 성유리를 본 곳이 윤청하의 장례식장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그날 박한빈도 장례식장을 찾았지만 도착했을 때 시간이 꽤 늦었던 터라 바로 제일 뒤쪽에 서 있었다. 박한빈은 아직도 떨리던 성유리의 어깨와 꽉 쥔 두 주먹을 선명하게 기억났다. 성유리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박한빈이었지만 창백한 그녀의 안색과 참으려고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물고 있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박한빈이 그날 성유리를 떠올리고 있을 무렵, 뒤에 있는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배지수가 수건 한 장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진한 화장을 지운 배지수의 민낯은 청순했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배지수의 눈을 보고는 순간 가슴이
박한빈은 성유리라는 이름을 김서영의 입에서 처음 전해 들었었다. 김서영은 성유리가 박성훈이 고른 박한빈의 결혼 상대라고 알려주었다. 그쯤 성씨 가문에서 애타게 찾고 있던 성유리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된 터라 김서영은 핑계 삼아 성유리를 데리러 가라는 말도 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결혼 상대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았고 김서영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박한빈은 끝내 성유리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다 두 사람의 결혼이 가문들 사이 무언의 계약이라고 여겼다. 심지어는 결혼하는 박한빈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김서영은 세상에서 박한빈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박한빈이 한사코 거부했다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박한빈이 성유리와의 결혼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오늘에서야 박한빈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이 성유리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 말이다. 좋아하니까 성유리와 결혼을 하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전에 박한빈은 성유리와 오직 육체적인 욕망을 해결하는 사이라고만 생각했다. 필경 성유리는 자신의 아내이자 제일 잘 맞는 반쪽이라고 느꼈으니까. 육체적인 욕망을 빼고도 사실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치기 싫었지만 소유욕이 강해지면 질수록 이혼이 하고 싶었다. 그런 감정은 성유리가 아니어도 다른 여자가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박한빈은 자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허비하기 싫었다. 그래서 늘 성유리를 제일 먼저 선택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면 그녀를 제일 먼저 버렸다. 성유리는 항상 박한빈이 마음대로 버려버리는 “장난감”이었다. 상인으로서 박한빈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에 능했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이 틀렸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너무 높게 평가했고 성유리가 자신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너무 낮게 평가했다. 박한빈은 문득 성유리와 갓 결혼
그때, 성유리의 목소리가 집안에서 들렸다. “민재 씨, 밖에 누구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내가 잘 못 찾아온 게 아니구나.’ 성유리의 집에 낯선 남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 박한빈은 피식 웃더니 뒤돌아 떠나버렸다. ‘좋아한다면서 가능성이 없냐고 물을 때는 언제고 지금 저러고 있어?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만약 자신에게 깊은 감정이 있었다면 그렇게 깔끔하게 이혼을 해줄 리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박한빈의 기억이 맞는 거라면 이혼 전, 성유리는 몰래 수많은 피임약을 복용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정말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런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성유리는 자기감정을 너무 잘 아는 여자여서 연성에서도 승승장구를 한다고 확신했다. 그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여기저기 웃으며 인사를 하는 성유리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박한빈은 제일 먼저 봤었다.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다면 박한빈은 영상 속 성유리와 자신이 알던 성유리가 동일 인물이라고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전에 함께 참여했던 가면무도회에서도 신나게 놀던 성유리가 떠올랐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 모습들이 전부 성유리의 진짜 얼굴이고 자신과 생활할 때 얼굴은 “가면”을 쓴 채 감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어두운 안색으로 차에 올라타고는 기사에게 말했다. “출발하세요.” 그의 안색을 본 기사는 무슨 일인지 물어볼 용기조차 없어 묵묵히 시동을 걸었다. 한참 뒤, 박한빈은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먼저 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성유리에 관련된 일들은 저한테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드림 타운에 있는 집도 이젠 내놓으세요.” 자신의 할 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시각, 성유리의 집. 정민재는 문을 닫고도 벨을 누르던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지만 이름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박한빈은 이 세상에 어떤 규칙들이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규칙은 바로 늘 속으로 행여나 진짜로 발생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일은 꼭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마주치기 싫어 요리조리 피해 다녀도 꼭 어딘가에서 의도치 않게 만나게 되는 규칙도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 시각,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오늘 여자의 옷차림은 평소보다 더 정갈하고 깔끔했다. 연한 파란색의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고 머리도 낮게 묶은 여성은 화장도 어젯밤보다 더 연하게 했다. 하지만 여성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앞에 있는 남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 대표님?” 옆에 있던 사람은 박한빈의 지시를 기다리다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박한빈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저분 조 대표님 아니에요?” 옆에 있던 사람이 박한빈의 시선을 따라 쳐다본 곳에서 조 대표와 그 여성을 발견했다. 성유리와 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박한빈의 옆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이내 박한빈을 발견한 남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성유리는 사실 아까부터 박한빈을 발견했지만 못 본척 하고 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이곳에서 마주칠 줄 몰랐는지 미간이 찌푸려졌고 인사조차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성유리는 박한빈과 인사를 하기 싫었지만 결국 남성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박 대표님도 식사하시러 오셨습니까? 이것 참 우연이네요.” 조 대표는 박한빈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우리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박 대표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랑 함께 식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게...” 박한빈이 뭐라 하기도 전,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필경 박한빈이 연성에 머무는 시간이 짧았으
하지만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속을 꿰뚫어 보는 사람처럼 그녀가 입을 떼기 전 먼저 말을 꺼냈다. “조 대표님이랑 성 대표님 두 분 많이 친하십니까?” 그의 말에 룸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만 껌뻑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문득 박한빈과 성유리의 관계가 떠올랐다. 조 대표는 등 뒤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 입을 떼지도 못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친구 사이예요.” “그러시구나.” 박한빈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 똑같으니까 서로 어색해하지 맙시다.” 말을 마친 박한빈이 술잔을 들었고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눈치껏 같이 술잔을 들 수밖에 없었다. 시원하게 술을 마신 박한빈은 또다시 조 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남원의 항목이 조 대표님 회사 것이죠?” “네. 맞습니다.” 조 대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박한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박 대표님 덕분이죠.” “저는 그 항목이 괜찮아 보이더군요. 마침 저도 비슷한 개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한빈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현 대표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성유리도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조 대표는 현 대표와 경쟁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박한빈의 말에 그저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그러십니까? 전에는 왜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못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쉽지만 이번 저희 회사의 중점은...” “지화 개발. 조 대표님은 그저 저랑 협업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돈을 많이 투자하실 필요도 없는데... 혹시 저랑 함께 일할 의향이 없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조 대표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을 했지만 다른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현 대표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박한빈에게 말했다. “박 대표님, 그 항목은...” “현 대표님
사실 성유리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이 일부로 조 대표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어 성유리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성유리는 도대체 박한빈이 자신한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러는지 몰랐다. 하지만 성유리는 조 대표처럼 체면을 차라기 좋아하는 사람이 오늘 박한빈에게 당한 일을 언젠가 자기한테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억지로라도 일어서야만 했다. 박한빈도 성유리가 나서자 입을 꾹 닫았고 술잔을 손에 들고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성유리는 또다시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는 말했다. “마침 현씨 가문 성립 10주년을 기념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으니 제가 먼저 오늘 이 자리에서 축하드릴게요.” 현 대표는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지만 술잔을 손에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 대표님도 참 별말씀을.” 박한빈의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듣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성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뗐다. “성 대표님과 현 대표님 사이가 아주 각별해 보입니다?” “현 대표님이 저를 잘 챙겨주셔서 그래요.” “그렇다면 저와 현 대표님 사이 협업에 성 대표님이 작은 제안을 해주실 수도 있겠군요. 방금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요즘 시간이 있으셔서 제가 모르는 일들을 알려줄 수 있다고.” 웃으며 말하는 박한빈에게서는 범접하지 못할 포스가 철철 흘러넘쳤다. 성유리는 처음으로 박한빈이 업무에 관해 토론을 하는 모습을 봤지만 그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하찮은 개미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들 박한빈의 눈치를 살피며 긴장하고 있었다.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박 대표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 영광이네요.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현 대표님을 대신해 담보를 해줘야겠어요.” “하지만 저도 제 자신을 잘 아는 타입이라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던 다 소용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주량은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성유리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자 술병 채로 손에 들고는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박한빈이 상 밑에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 화장실에 다녀온 성유리는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지나가던 직원이 성유리의 상태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그녀를 챙기려 했지만 성유리는 직원을 밀어내고는 쓰레기통에 마구 구토를 했다. 알코올의 쓴맛과 독한 냄새가 위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성유리는 위액까지 깨끗하게 토해냈다. 아직 기침이 제대로 치료되지도 않았던 터라 성유리는 콧물과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오늘 단아하고 청순한 느낌으로 신경 써서 한 화장마저 다 벗겨졌지만 성유리는 그런 것을 상관할 겨를도 없었다. “괜찮으세요? 119라도 불러드릴까요?” 옆에 있던 직원은 이런 경험이 풍부한 탓에 성유리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는 핸드폰을 꺼내 신고하려고 했다. “아니요. 저 괜찮아요.” 성유리가 힘겹게 말하며 직원을 말렸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절대 여기서 쓰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성유리는 직원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애를 써 몸을 일으키며 비틀비틀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오늘 안 신던 하이힐까지 신었고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몸을 가누기 힘들어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화분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성유리는 생각보다 고통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맞은 듯 심한 고통이 밀려오는 머리보다 위가 더 아팠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런 곳에서 쓰러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필경 이곳에는 성유리를 아는 사람도, 성유리가 아는 사람도 없었기에 쓰러지면 자신을 그 누구도 챙겨주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남자의 손이 다가오는 순간,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그 남자는 성유리를 더욱 꽉 잡았다. 그때,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고 그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성유리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어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고 정민재가 보이자 성유리는 긴장이 풀렸다. 성유리는 조 대표라는 사람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밤 비록 혼자 이곳으로 왔지만 성유리는 혹시 몰라 정민재에게 메시지를 보내 시간이 되면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정민재는 성유리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식당 로비에서 그녀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성유리를 발견한 정민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곁에 있는 박한빈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정민재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간 뒤, 그대로 쓰러졌고 정민재는 그런 그녀를 급히 붙잡았다. “병원으로 가주세요.” 성유리는 고통을 꾹 참고 짧은 말을 내뱉은 뒤, 바로 기절해 버렸다. 정민재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기회도 없었고 쓰러진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 과정에서 정민재는 엘리베이터 안에 또 다른 남자가 있었던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의 손은 성유리를 붙잡으려는 듯 공중에 경직된 채로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두 사람이 사라진 후, 그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비록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고 오히려 끝없는 암울함만이 가득했다. ... 성유리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녀 곁을 지키는 사람은 오직 정민재와 그의 여자 친구뿐이었다. 여자 친구는 두 사람의 사이가 불안한 듯 옆에서 핸드폰을 보면서도 가끔 성유리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가 먼저 성유리가 깨어난 것을 발견했다. 이내 정민재도 성유리가 깨어난 사실을 알아차렸고 다급하게 벨을 눌러 의사를 호출했다. “지금 몇 시죠?” 성유리가 깨어나자마자 바로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매우 쉰 것을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