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돌아서기도 전에 성유정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몸을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한빈 오빠, 혹시... 언니한테 사고가 생긴 게 저랑 관련 있다고 생각하세요?”그녀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고 단호했다.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한참을 말없이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물었다.“그래서? 정말 관계가 있어?”그날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절묘한 ‘우연’이었다.그날따라 CCTV가 고장이 났는데 그 시간대 위층에는 성유정과 성유리밖에 없었다.무엇보다도 그때 박한빈은 집에 없었고 김서영 역시 부재중이었다.만약 무언가를 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김난희거나 윤청하일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알고 있었다.설령 그들이 뭔가를 알고 있더라도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걸.성유리와 성유정 사이에서 그들은 분명 후자를 택할 테니까.그리고 박한빈이 가장 불쾌했던 건, 성유리가 그 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유산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점부터 퇴원하기까지.성유리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그녀가 자신을 믿지 않아서였을까?아니면 이 모든 게 단지 박한빈의 의심과 추측일 뿐인 걸까?정말로 성유정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한빈 오빠, 왜 저를 그렇게 봐요?”성유정은 떨리는 목소리 물었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어떻게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어요? 성유리는 제 언니예요. 혈연은 아니지만 제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이에요. 제가 어떻게 언니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게다가 오빠가 저 잘 아시잖아요. 저는 조그만 동물도 해치지 못해요. 그런 제가... 언니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아요.”성유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그녀의 흐느낌은 박한빈의 얼굴을 더 잔뜩 찌푸리게 만들었다.그러자 박한빈는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지고 짜증이 밀려들었다.결국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냥 물어본 거야. 아니면 그걸로 된 거지.”성유정은 박한빈
그들이 그토록 찾던 성유리는 근처 공원에서 발견됐다.박한빈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미끄럼틀 앞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누가 목을 막아 놓은 듯 숨이 답답했고 가슴은 먹먹했다.내려둔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손바닥에 통증이 느껴진 뒤에야 성유리에게 다가갔다.“여기서 뭐 해?”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가을의 끝자락이었다.해도 져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 차가웠다. 그런데도 성유리는 외투 한 장 걸치지 않은 채였다.모자도 없이 늘어뜨린 긴 머리는 아무렇게나 흩날리고 있었다.박한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 없이 아이들만 바라봤다.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치 자신이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박한빈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성유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그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는데 성유리는 가고 싶지 않은 듯 손을 뿌리쳤다.그렇지만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곧 체념한 듯 박한빈의 손에 이끌려 걷기 시작했다.공원은 집에서 멀지 않았지만 박한빈의 걸음이 워낙 빨라 성유리는 계속 휘청거렸다.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손목이 붉게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그런데도 아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그래서 내내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사모님, 이제야 오셨네요. 아까 대표님께서...”도우미는 안도한 듯 말을 꺼내려다, 박한빈의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떠났다.성유리는 도우미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뒀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박한빈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어깨에 걸쳐진 외투를 벗어 조용히 내려두고 고개를 숙인 채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박한빈이 성유리를 불렀다.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그 안에는
그럼에도 박한빈은 결국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고 그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선물 상자를 꺼내며 조용히 말했다.“이거 너 줄게.”성유리는 그 말에 발걸음을 멈췄는데 시선은 상자 위에 오래 머물렀다.그녀는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박한빈에게 물었다.“이것도 성유정이랑 뭐 사러 갔다가 받은 사은품인가요?”박한빈의 눈에 자신은 그런 ‘사은품’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그렇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성유정에게 뭘 주고 싶으면 그냥 주면 되는 걸 텐데 말이다.어차피 지금까지 성유리가 가진 것보다 성유정이 더 많은 걸 가졌었다.성유리는 한 번도 그걸 두고 경쟁하려 한 적도 없었으니 굳이 그런 ‘공평한 척’ 연극은 안 해도 된다.하지만 입 끝까지 올라온 날 선 말들은 결국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럴 가치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예전에도 그랬다.사람들 앞에서 목이 터져라 성유정이 범인이라고 소리쳤을 때 돌아온 건 성유정에게 사과하라는 말뿐이었다.그건 단지 ‘사고’였을 뿐이라고.김난희도, 윤청하도 그랬다.그리고 박한빈도 당연히 다르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성유리는 테이블 위의 상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저 조용히 말했다.“필요 없어요.”가볍게 던진 다섯 글자였지만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그러나 성유리는 그가 뭐라 말하든 기다리지 않았고 뒤돌아서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홀로 남겨진 박한빈은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하지만 곧 허탈함을 느껴 미친 듯 웃음이 흘러나왔다.‘그래...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애초에 이건 사업적인 결혼이었다.시작부터가 그저 어른들의 농담 같은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 거였다.감정이 전혀 없어도 결혼은 가능한 거니까.그러니 선물이나 사랑 같은 감정은 결국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도대체 뭘 바라고 먼 길을 돌아 경매까지 가서 저런 목걸이를 사 왔던 걸까?결국 성유리는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박한빈은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그럼에도 박한빈은 결국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고 그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선물 상자를 꺼내며 조용히 말했다.“이거 너 줄게.”성유리는 그 말에 발걸음을 멈췄는데 시선은 상자 위에 오래 머물렀다.그녀는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박한빈에게 물었다.“이것도 성유정이랑 뭐 사러 갔다가 받은 사은품인가요?”박한빈의 눈에 자신은 그런 ‘사은품’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그렇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성유정에게 뭘 주고 싶으면 그냥 주면 되는 걸 텐데 말이다.어차피 지금까지 성유리가 가진 것보다 성유정이 더 많은 걸 가졌었다.성유리는 한 번도 그걸 두고 경쟁하려 한 적도 없었으니 굳이 그런 ‘공평한 척’ 연극은 안 해도 된다.하지만 입 끝까지 올라온 날 선 말들은 결국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럴 가치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예전에도 그랬다.사람들 앞에서 목이 터져라 성유정이 범인이라고 소리쳤을 때 돌아온 건 성유정에게 사과하라는 말뿐이었다.그건 단지 ‘사고’였을 뿐이라고.김난희도, 윤청하도 그랬다.그리고 박한빈도 당연히 다르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성유리는 테이블 위의 상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저 조용히 말했다.“필요 없어요.”가볍게 던진 다섯 글자였지만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그러나 성유리는 그가 뭐라 말하든 기다리지 않았고 뒤돌아서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홀로 남겨진 박한빈은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하지만 곧 허탈함을 느껴 미친 듯 웃음이 흘러나왔다.‘그래...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애초에 이건 사업적인 결혼이었다.시작부터가 그저 어른들의 농담 같은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 거였다.감정이 전혀 없어도 결혼은 가능한 거니까.그러니 선물이나 사랑 같은 감정은 결국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도대체 뭘 바라고 먼 길을 돌아 경매까지 가서 저런 목걸이를 사 왔던 걸까?결국 성유리는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박한빈은
그들이 그토록 찾던 성유리는 근처 공원에서 발견됐다.박한빈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미끄럼틀 앞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누가 목을 막아 놓은 듯 숨이 답답했고 가슴은 먹먹했다.내려둔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손바닥에 통증이 느껴진 뒤에야 성유리에게 다가갔다.“여기서 뭐 해?”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가을의 끝자락이었다.해도 져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 차가웠다. 그런데도 성유리는 외투 한 장 걸치지 않은 채였다.모자도 없이 늘어뜨린 긴 머리는 아무렇게나 흩날리고 있었다.박한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 없이 아이들만 바라봤다.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치 자신이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박한빈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성유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그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는데 성유리는 가고 싶지 않은 듯 손을 뿌리쳤다.그렇지만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곧 체념한 듯 박한빈의 손에 이끌려 걷기 시작했다.공원은 집에서 멀지 않았지만 박한빈의 걸음이 워낙 빨라 성유리는 계속 휘청거렸다.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손목이 붉게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그런데도 아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그래서 내내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사모님, 이제야 오셨네요. 아까 대표님께서...”도우미는 안도한 듯 말을 꺼내려다, 박한빈의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떠났다.성유리는 도우미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뒀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박한빈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어깨에 걸쳐진 외투를 벗어 조용히 내려두고 고개를 숙인 채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박한빈이 성유리를 불렀다.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그 안에는
하지만 돌아서기도 전에 성유정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몸을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한빈 오빠, 혹시... 언니한테 사고가 생긴 게 저랑 관련 있다고 생각하세요?”그녀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고 단호했다.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한참을 말없이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물었다.“그래서? 정말 관계가 있어?”그날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절묘한 ‘우연’이었다.그날따라 CCTV가 고장이 났는데 그 시간대 위층에는 성유정과 성유리밖에 없었다.무엇보다도 그때 박한빈은 집에 없었고 김서영 역시 부재중이었다.만약 무언가를 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김난희거나 윤청하일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알고 있었다.설령 그들이 뭔가를 알고 있더라도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걸.성유리와 성유정 사이에서 그들은 분명 후자를 택할 테니까.그리고 박한빈이 가장 불쾌했던 건, 성유리가 그 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유산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점부터 퇴원하기까지.성유리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그녀가 자신을 믿지 않아서였을까?아니면 이 모든 게 단지 박한빈의 의심과 추측일 뿐인 걸까?정말로 성유정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한빈 오빠, 왜 저를 그렇게 봐요?”성유정은 떨리는 목소리 물었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어떻게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어요? 성유리는 제 언니예요. 혈연은 아니지만 제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이에요. 제가 어떻게 언니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게다가 오빠가 저 잘 아시잖아요. 저는 조그만 동물도 해치지 못해요. 그런 제가... 언니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아요.”성유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그녀의 흐느낌은 박한빈의 얼굴을 더 잔뜩 찌푸리게 만들었다.그러자 박한빈는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지고 짜증이 밀려들었다.결국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냥 물어본 거야. 아니면 그걸로 된 거지.”성유정은 박한빈
며칠째, 지화 그룹엔 어둡고 무거운 기운이 가득했다. 특히 대표 사무실은 더더욱 얼어붙은 분위기였다.누구든 그 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사소한 실수조차 곧바로 확대되어 큰 질책으로 돌아왔다.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이었기에 제일 먼저 그 타깃이 되었다.경매장에서 물건이 낙찰되어 돌아왔을 때, 그는 이번엔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사무실 문 앞에 잠시 멈춰 선 서훈은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시죠.”박한빈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톤이었다.하지만 서훈은 그런 그가 가장 무서울 때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쯤 되면 더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서훈은 머뭇거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대표님, 지난번 경매에서 구입하신 목걸이입니다. 어떻게 처리하실지... 확인 부탁드립니다.”그는 조심스럽게 목걸이 상자를 박한빈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지만 박한빈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서훈은 눈치챘다.이건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선물이란 걸.결혼 1주년을 앞두고 마련한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모든 건 물거품이 돼버렸다.서훈은 다시 입을 열려다 멈췄다.그때, 사무실 밖에서 누군가가 말했다.“대표님, 성씨 성을 가진 아가씨가 오셨습니다.”그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는 즉시 손을 뻗어 보석 상자를 움켜쥐었다.그러나 숨기기도 전에 성유정이 모습을 드러냈다.‘아, 성유리가 아니라 성유정이었구나.’성유정을 본 박한빈의 얼굴에서 곧바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그러나 성유정은 그의 눈 속에 스친 실망감을 눈치채지 못한 채 빠르게 다가왔다.“형부.”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서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서훈은 곧장 상황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문을 닫으며 서훈은 성유정을 힐끗 바라보았다.순간, 성유리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녀가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서훈은 성유리를 본 적이 있었다.그때 성유리
“그렇지? 어제는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아이가 없어졌다는 소식 듣자마자 바로 다 흩어지더니 오늘은 누구도 찾아오지 않네.”“모두 다 자식 덕분에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고 하잖아. 농담인 줄 알았어? 아이만 있으면 최소한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이도 없으니 정말... 아무런 희망도 없지. 이렇게 살 이유가 있을까?”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가다 등 뒤에서 문득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급하게 뒤를 돌아본 그들이 본 사람은 박한빈이었다.여자들은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박한빈을 보고는 더 이상 말도 못 했다.“꺼져.”박한빈은 이를 꽉 깨문 채 꺼지라는 두 글자만 내뱉었는데 두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겁먹은 채 서둘러 도망갔다.잠시 후, 박한빈은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발을 내디뎠다.성유리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본래 야위었던 얼굴이 하루 만에 풍선이 바람 빠진 것처럼 변해 있었다.눈가와 볼이 움푹 패였고 얼굴은 마치 물에 불린 듯 창백했다.성유리의 뺨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두 손은 침대 시트를 꽉 잡고 있었다.마치 꿈속에서조차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 성유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그들의 시선이 마주치자 박한빈은 이 순간이 어색하고 어눌하게 느껴졌다.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성유리가 곧 박한빈에게 선택을 내려줬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침대 시트를 움켜잡고 뒤로 물러났다!경계심 가득한 눈빛은 마치 박한빈이 성유리의 적처럼 보이게 했다.박한빈은 입술을 단단히 다물었다.그때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돌아오셨어요?”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응.”“아이가... 없어졌어요.”성유리는 다시 말했다.목소리는 쉰 듯했지만 차분하게 들렸다.그녀가 이 말을 할 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박한빈은 경매가 끝난 뒤에서야 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았다.소식을 들은 즉시 박한빈는 항공편을 바꿔 급히 금성으로 돌아왔다.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병원 복도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지만 주변은 고요했다.오직 박한빈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함 속에서 뚜렷하게 울렸다.그러다 그는 성유리를 보았다.성유리는 병상에 앉아 있었다.곁에는 이미 깊이 잠든 간병인이 있었는데 정작 그녀는 침대에 앉은 채,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달빛 아래 그는 아주 또렷이 볼 수 있었다.성유리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그건 박한빈이 처음으로 보는 성유리의 눈물이었다.성유리는 그의 앞에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감정 기복이란 게 없는 줄로만 알았다.그러나 바로 지금, 제대로 깨달았다.성유리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그녀도 슬퍼할 줄 알고 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다만 지금껏 박한빈이 몰랐던 건 성유리가 그를 충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지금 성유리는 울고 있으면서도 입으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저 덜덜 떨리는 어깨만이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박한빈은 처음엔 당장 달려 들어가 성유리를 꽉 안아주고 싶었다.하지만 이내 생각했다.지금 이 순간, 성유리가 과연 자신을 보고 싶어 할까?자기 앞에서조차 감정을 드러내길 꺼렸던 사람이다.그런 성유리가 과연 박한빈이 자신의 눈물을 보는 걸 원할까?그래서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결국 돌아섰다.집으로도 가지 않았다.그저 기사에게 회사로 가자고 했다.박한빈의 휴대폰엔 비서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경매에서 낙찰된 목걸이가 검수를 마쳤다는 내용이었다.그리고 성유리의 배송 주소를 입력할지 묻는 질문도 함께였지만 박한빈은 아무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그저 휴대폰을 옆에 툭 던지고는 두
“걱정 마세요. 여기서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그러니 따님 먼저 데리고 돌아가 주세요.”윤청하는 뭔가 더 말하려다 김서영을 한번 바라보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하려던 말을 삼켰다.그리고 성유정의 팔을 잡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안 돼... 안 돼요! 가지 말라고.”그제야 성유리는 겨우 목소리를 되찾았고 몸을 버둥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쫓아가려 했다.하지만 윤청하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몸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이러다간 정말 죽어!”“쟤가 절 밀었어요. 절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고요.”성유리는 손을 뿌리치고 이성을 잃은 듯 윤청하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잡았다.“왜 안 잡아? 왜 안 잡냐고. 성유정... 쟤가 내 아이를 죽였는데 왜 아무도 안 잡아!”“왜 다들 성유정 편만 드는 거야?”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들 마음속에서 자신은 언제나 성유정보다 못하다는걸.성유정은 말도 잘하고 사람 마음도 사로잡을 줄 알고 무엇보다 그녀보다 훨씬 더 깨끗해 보이니까.성씨 가문 사람들과 김서영, 그리고 박한빈조차도 그랬다.그러나 성유리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단 한 번도 성유정의 자리를 뺏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하지만 아이만은 달랐다.아이는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왜 애까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도대체 왜 세상에 태어날 기회조차 빼앗겨야 했을까?그때, 김서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네가 말한 CCTV, 내가 확인해 보라고 했어.”성유리가 윤청하의 옷깃을 꼭 쥔 채 흥분해 있을 때 김서영은 차분하게 말했다.“그렇지만 당시 네트워크 점검 중이라 영상이 찍히지 않았어.”“그러니까 유리야, 그건... 그냥 사고였어.”김서영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성유리의 얼굴에 떠오르던 모든 표정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옷깃을 움켜쥐고 있던 손도 힘없이 천천히 내려왔다.그리고 성유리는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툭 하고 침대에 쓰러졌다.‘사고?’그러니까 자신의 뱃속에서 함께 숨 쉬며 네 달 가까이
“유리야.”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가에 닿았다.성유리는 사실 이미 깨어 있었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상대는 성유리의 떨리는 속눈썹을 알아챈 듯 곧장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깨어났으면 뭐라도 먹자.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지금은 네 몸이 가장 중요해.”그 말이 끝난 뒤에야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김서영을 한참 바라보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CCTV는 확인했어요?”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서영은 순간 멈칫했다.“2층 계단 입구... 거기 CCTV 있잖아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다 찍혔을 거예요. 그때... 성유정이 절 밀었어요. 경찰에 신고했어요?”그 순간, 윤청하가 성유정을 데리고 방에 들어섰다.원래도 창백하던 성유정의 얼굴은 성유리의 말을 들은 순간 핏기마저 완전히 가셨다.그녀는 곧장 김서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 아니에요. 어머님, 전 정말 아니에요!”“언니, 언니가 아이를 잃어서 마음 아픈 거 알아. 근데 난 정말 그런 짓 안 했다고.”성유정은 곧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언니 몰랐겠지만... 나 요즘 계속 언니 아이를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했어. 옷도 여러 벌 샀단 말이야. 난 아이의 미래 이모였어. 그런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성유정은 흐느끼며 울먹였고 윤청하는 그녀를 감싸안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 넌 어떻게 네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어서... 어서 사과해.”‘사과하라고?’성유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이내 목소리는 갈라지고 점점 더 뻣뻣해졌다.“엄마... 지금 나보고 사과하라는 거야?”눈앞의 사람은 성유리의 친어머니였다.비록 그동안 자신에게 늘 차가웠고 무심했지만 그래도 성유리는 언젠가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믿어왔다.과거가 어떻든 간에 그들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니까.설령 마음에 안 들고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자신은 그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이니까 언젠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