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는 경호원 십여 명의 호위를 받고서야 겨우 강의동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한여름의 모기처럼 끝까지 쫓아왔다.“당신들은 누구십니까?”“누가 보냈습니까?”기자들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면서 마이크를 무표정한 경호원들의 얼굴에 들이댔다.그 바람에 많은 학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민아 쪽을 쳐다보았다.맨 뒤에 걷던 한 경호원이 귀찮게 달라붙는 기자들에게 증을 보여줬다.기자들은 증에 적힌 대통령실이라는 네 글자를 본 순간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그 경호원이 기자들에게 경고했다.“무엇을 보도할 수 있고 보도할 수 없는지 잘 알고 있겠죠? 보도해서는 안 될 것을 보도하면 결과는 알아서 감당해야 할 겁니다.”웅성거리던 기자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몇몇 눈치 빠른 카메라맨들은 어깨에 멘 카메라를 내려놓고 카메라 렌즈를 덮개로 덮었다.그들이 대통령실 소속 경호원이라는 걸 알게 된 기자들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검은색 현대 제네시스 한 대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서경대학교에서는 학교 지도부의 차조차도 캠퍼스 내에서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장엄한 모습의 제네시스는 캠퍼스 안으로 들어왔다.차 문이 열리자 넓은 뒷좌석에 훤칠한 키의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차량 내부가 어두컴컴하여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곽이 뛰어난 건 알아볼 수 있었다.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을 길게 빼 들고 눈을 크게 떴다.“혹시 반하준 대표님이에요? 좀 닮았는데.”“강민아 씨랑 이혼했다고 하지 않았어요?”“반 대표님이 대통령실의 경호원을 동원할 수 있어요? 불가능할 텐데.”기자들은 훈련이 잘된 경호원들에게 2, 3m 떨어진 곳에서 가로막혔다.강민아는 차 문 쪽으로 걸어가 차 안에 있는 남자를 보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작은아버지.”무심코 불렀다가 문득 그 호칭이 적절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차 안의 분위기도 숨 막힐 듯 무거워졌다.이젠 반하준과 이혼했으니 더 이상 반용화를 작은
반용화가 문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차 문이 다시 닫혔다. 기자들은 밖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경호원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추적 818 기자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현이 형. 반씨 가문의 그분이 계속 강민아를 감싸고돌 거란 말은 안 했잖아요. 오늘 그분을 건드렸으면 앞으로 이 바닥에서 발도 못 붙일 뻔했어요.”반용화는 이미 떠났지만 추적 818 기자는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강나현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울려 퍼졌다.“반씨 가문의 그분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반용화 말이에요. 그분이 경호원들을 데리고 와서 강민아를 데려갔어요.”“말도 안 돼.”강나현이 큰 소리로 말했다.“반용화가 강민아를 데려가는 걸 직접 봤다고? 나랑 하준 오빠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도 몇 번 본 적이 없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고연과학원의 수석 연구원이, 그것도 국가 극비 프로젝트도 참여하는 사람이 왜 강민아를...”“정말 반용화예요.”기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내가 직접 봐서 절대 거짓일 리가 없어요. 연구원님께서 나한테 베테랑 기자가 5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특종을 파내려는 게 창피하지도 않냐고 했어요.”기자가 가슴을 움켜쥐고 걱정스럽게 말했다.“회사로 돌아가면 해고당하는 거 아니겠죠? 현이 형을 도와줬다가 반용화를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강나현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반용화가 왜 강민아를 도와줘? 말도 안 돼.”기자가 또 말했다.“아무튼 강민아에 관한 기사는 내지 못하겠어요.”그러자 강나현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강민아의 추문을 보도하려는 언론사는 너 말고도 엄청 많아. 걔가 아들을 학대했다는 기사가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강나현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쥔 채 싸늘하게 웃었다.‘ALI 수학 경시대회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려고? 흥. 인터넷에서 추앙받는 만큼 더 처참하게 추락시켜줄게.
강민아는 반용화에게 정중하게 말했다.“다음 달에 정이랑 이사 가려고요. 이미 학군 좋은 곳에 집을 알아뒀어요. 다음 주에 ALI 수학 경시대회 결승 결과가 발표될 텐데 3위 안에 들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일자리는...”그녀의 가늘고 짙은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가볍게 떨렸다.“저...”그녀는 반용화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망설이다가 결국 용기를 내어 물었다.“용성에 들어가도 될까요?”어찌나 긴장했는지 목소리에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반용화의 맑고 깨끗한 시선이 강민아의 얼굴을 스쳤다.그녀는 반용화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대략 알고 있었다. 반용화는 중책을 맡고 있었고 그가 이끄는 용성연구센터는 우리나라 10대 연구센터 중 하나였다. 심지어 위치가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강민아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반용화에게 자신을 추천했다.“지금 우리나라에서 인공지능 연구를 진행 중이고 연구원님이 책임자인 거 알아요. 저...”“강민아.”반용화가 성까지 부르자 강민아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바르게 앉았다.“용성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그의 목소리는 깊은 우물처럼 잔잔했다. 그가 이 말을 내뱉었을 때 반하준에게서 봤던 차가움이 조금 보이는 듯했다.‘역시 피는 못 속인다니까.’하지만 강민아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연구원님이 직접 절 뽑으셨잖아요.”13년 전 반용화는 교육 자원이 부족한 작은 마을에서 강민아를 발굴했고 그의 추천서 한 장으로 강민아는 고연대학교 영재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강민아의 뜨거운 눈빛에 반용화는 숨을 가볍게 들이쉬었다가 고개를 돌렸다.“그럼 금상을 받고 나서 얘기해.”강민아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웃음을 머금은 눈빛이 마치 촛불처럼 흔들렸다.“연구원님도 제가 ALI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한 걸 지켜보고 계셨던 건가요?”“우연히 봤어.”반용화는 짧게 대답하며 오해를 살 만한 여지를 주지 않으려 했다.검은색 현대 제네시스가 호텔 문 앞에 멈춰 섰다. 강민아가 내리려 하자
어느 한 5성급 호텔 꼭대기 층, 육성민이 헬스장에서 돌아왔다. 금방 운동을 마친 상태라 온몸의 근육이 살아있었다.샤워를 마쳤는데도 몸에서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서가 한참 전부터 계속 기다렸다.평소 사람들에게 늘 친절하고 잘난 척하는 법이라곤 없는 사람이라 비서가 웃으면서 장난을 쳤다.“대표님, 여동생분이 부신 그룹 대표의 아내였다니. 왜 그동안 한 번도 말씀 안 하셨어요?”육성민의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어디서 들었어?”비서가 휴대폰을 그에게 보여주었다.“보세요. 여동생분이 또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요.”[#강민아 아들 학대#][#강민아 전남편 반하준#][#강민아 돼지 먹이#]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한 내용 모두 강민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었다.육성민이 기자가 반현민을 인터뷰한 녹음을 눌렀다. 그러다가 녹음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휴대폰을 부숴버릴 듯 꽉 쥐었다.그의 팔에 있는 핏줄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터무니없는 소리.”분노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비서는 깜짝 놀라 심장이 다 쿵쾅거렸다.강민아의 전남편이 서경시의 재벌인 부신 그룹 대표 반하준이라는 사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친아들이 강민아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 난 후 네티즌들은 분노를 터트렸다.[반씨 가문 도련님 말이 맞아요. 강민아가 반하준이랑 결혼한 7년 동안 반씨 가문에 아이 둘을 낳아준 것 외에 무슨 기여를 했나요? 어떻게 기자들 앞에서 전남편을 무시하는 발언을 할 수가 있죠? 염치도 없나 봐요.][재벌가 사모님이 됐으면 얌전히 있기나 할 것이지, 남편과 자식을 버리다니. 허. 가정주부가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는데도 자존심은 엄청 강하더라고요.][강민아는 아예 모를 거예요. 전남편이 밖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서경의 재벌 2세라서 아이를 낳아주겠다는 여자가 줄을 섰을 텐데.][제 친척이 서경시 상류층과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반하준은 사생활이 깨끗하고 스캔들 하나 없다고 하더라고요. 많은 여자들이 매달리는데도 눈길 하나
반하준은 일이 너무 많아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가끔은 심지어 반현민과 대화할 시간조차 없었다.반현민이 강민아에게 학대를 받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강민아가 돼지 먹이 같은 음식을 먹였다는 건 그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연진숙은 강민아가 만든 음식을 보면 창피해서 어디 내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또 그녀가 차린 밥상을 보는 것 자체가 수치였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강민아의 고향 음식이 서경시의 재벌들에게는 돼지 먹이나 다름없었다.엄규민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드디어 누명을 벗으셨네요. 지금 인터넷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대표님 편을 들고 있어요.”반하준은 인터넷 여론에 별 관심이 없었다.“앞으로 강민아와 관련된 일이나 인터넷 여론 같은 건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돼.”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고 강민아가 죽든 살든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어?”그런데 그때 엄규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강민아 씨한테 불리한 실검들이 전부 삭제됐어요.”반하준은 강민아가 돈을 써서 실시간 검색어를 내렸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근데 160억 원을 건드릴 수 없어서 실검을 내릴 돈이 없을 텐데.’그는 곧장 휴대폰으로 SNS를 열어보았다. 강민아와 관련된 부정적인 단어를 검색할 경우 관련 법규에 따라 검색할 수 없다는 문구만 떴다.그의 깊은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이건 엄청난 배경을 가진 누군가가 SNS 직원에게 연락하여 실시간 검색어를 내리도록 지시한 게 틀림없었다.그래야만 강민아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들이 인터넷에서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으니까.‘누군가 민아를 돕고 있어.’반하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대체 누구지? 설마 심은호?’...강민아는 콘도에서 물을 시원하게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정이와 막 식사를 끝냈고 정이는 의자 위에 올라가 식탁을 닦았다. 그때 식탁 위에 놓인 강민아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모르는 번호였다.“엄마.”정이가 강민아를 불렀지
휴대폰 화면 속 연진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잔뜩 일그러졌다.“강민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연진숙은 당장이라도 휴대폰 속으로 뛰어 들어가 강민아의 손을 잡아 뜯고 싶었다. 어찌나 노발대발하는지 눈알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무슨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내가 그런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강민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여사님,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일주일 안에 알게 되실 겁니다. 아, 그리고 제가 제출한 증거는 여사님이 받으셨던 화려한 표창상을 내려놓게 하는 정도예요. 만약 또 저를 못살게 군다면 그땐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강민아의 경고가 연진숙에게는 도발이나 다름없었다.“흥, 신고해봐, 그럼. 네 재주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 네까짓 게 날 끌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아?”‘무식한 시골 촌뜨기 같은 것. 내가 서경시의 상류층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연진숙이 대놓고 비웃었다. 휴대폰 속 그녀의 붉은 입술이 더욱 요염하게 보였다.“원래는 정이를 생각해서 너한테 조금이나마 정을 줬는데. 감히 나를 신고해? 지금부터 현민이 친엄마는 죽었어. 다신 현민이 만날 생각 하지도 마.”연진숙의 두 눈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마치 판사처럼 강민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아들을 완전히 빼앗고 면접 교섭권을 박탈하는 것 자체가 강민아에게는 사형이나 다름없었고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반현민이 두 살이 되던 해에 반씨 가문에서는 엘리트 교육을 시키기 위해 친모와 완전히 떼어놓겠다고 했다.이건 강민아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연진숙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연진숙은 강민아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강민아가 정이를 데려간 게 연진숙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했고 반하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두 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녀서 아들을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연진숙이 휴대폰 카메라를 보면서 말했다.“네 아들을 완전히 잃게 될 거야.”그러고는 강민아가 예
강나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지시했다.“나만 보기 게시글들 전부 공개해. 강민아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여줘야지.”“알겠어요. 바로 처리할게요.”해커는 강민아가 그동안 올렸던 모든 나만 보기 게시물들을 공개로 설정했고 강나현은 곧바로 몇몇 마케팅 회사에 연락했다.그 마케팅 회사들은 팔로워 백만 명 이상의 SNS 계정들을 통해 강민아의 계정 내용을 퍼 날랐다. 강민아가 과거에 올렸던 나만 보기 게시물들이 세상에 공개되었다.[이게 바로 강민아 씨가 아들을 학대한 증거입니다.]팔로워 백만 명의 유명 인플루언서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반현민의 사진을 리트윗했다.수천만 명의 네티즌들이 강민아의 SNS로 순식간에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타자 속도가 빠른 네티즌들은 벌써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그러자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강민아를 욕하는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녀요? 이 사진은 누가 봐도 아이가 알레르기 반응이 생긴 사진이잖아요.]또 다른 네티즌은 강민아의 2천 개가 넘는 게시글 중에서 남자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무릎에 반창고를 붙인 사진을 찾아냈다.[이건 강민아가 아들을 때린 증거입니다. 아들을 때리고 사진까지 찍어서 SNS에 올리다니. 완전 사이코패스 아니에요?]똑똑한 네티즌들이 바로 반박했다.[바로 위 게시글을 보면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진 사진인 것 같네요.]강민아의 SNS에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모든 기록이 남아 있었다.네티즌들은 강민아의 SNS에서 아이에게 돼지 먹이 같은 음식을 먹인 사진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강민아가 올린 음식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오히려 군침을 삼켰다.[강민아 씨가 이런 요리 솜씨로 돼지 먹이 같은 음식을 만들었다고요? 난 절대 못 믿어요.][강민아 씨가 만든 음식이 돼지 먹이면 내가 평소에 먹은 건 뭔가요? 음식물 쓰레기인가요?]한 네티즌이 강민아의 SNS에서 죽 사진을 찾아냈다.[새로 배운 죽이에요. 딸은 맛있다고 남김없이
차에 앉아 있는 반하준의 얼굴에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강나현이 이런 일을 벌인 건 반현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였겠지만 여론의 방향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대표님.”엄규민이 긴장한 얼굴로 차 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열리자마자 휴대폰을 차 안으로 들이밀었다.“인터넷에 강나현 씨에 관한 안 좋은 영상이 퍼지고 있어요.”반하준이 휴대폰을 받고 확인해보니 몰래 촬영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강나현이 한 남자의 허벅지에 앉아 있었는데 나시와 검은색 데님 반바지 차림으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술잔을 입에 물고 남자에게 술을 먹여주자 남자의 입이 술잔에 부딪히면서 술잔이 떨어졌다. 그 순간 강나현의 입술이 그 남자의 입술에 닿은 듯했다.“젠장.”강나현이 먼저 소리치면서 남자의 가슴팍을 마구 두드렸다.“야, 진찬규. 이것도 못 해?”그녀가 술을 먹여주던 남자는 가장 친한 남사친 중 하나인 진찬규였다. 진찬규는 가슴을 쫙 펴고 강나현의 가슴에 부딪혔다.“못하긴 뭘 못해. 한번 해볼래?”강나현이 욕설을 내뱉자 주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3년 전 진찬규는 평범한 여자를 짝사랑했었고 두 사람은 아주 뜨겁게 사랑했었다.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도 사랑하는 여자와 꼭 결혼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의 결혼식은 서경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많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그런데 이 영상이 퍼진다면 사랑꾼 도련님의 이미지는 무너질 것이고 그의 다리에 앉아 있던 강나현 또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영상이 끝나기도 전에 엄규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심은호라는 이름이 뜬 걸 본 순간 차 안에 앉아 있는데도 반하준에게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반하준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심은호의 나른하고 무심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엄규민 씨, 반 대표 좀 바꿔줘요.”반하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듣고 있어.”휴대폰 너머로 심은호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인터넷에 떠도는 영상 봤어?”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