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현은 거들먹거리며 비웃었다.“난 강씨 가문 둘째 딸이야!”비서는 주름진 옷을 털었다. 대표 비서 자리를 얻기 위해 무려 수백만 원 주고 맞춤 제작한 정장이었다.“부사장님께서 비서면 비서답게 행동하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출근 시간이니까 예전처럼 회사에서 멋대로 돌아다니지 마요.”강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감히 그녀와 맞서는 비서를 노려보았다.그러더니 홱 뒤돌아 복도에 놓인 의자를 걷어차자 꽃병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강나현은 살벌한 표정으로 여비서를 노려보았다.“너도 이 꽃병처럼 되고 싶어?”강나현이 말하며 벽으로 차버리자 꽃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그녀는 더더욱 오만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비서는 강나현의 기세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듯 침착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내며 그녀에게 말했다.“부사장님께서 난동을 부리고 기물 파손하면 3배로 배상해야 한다고 했어요. 물건 3개 이상 망가뜨리면 신고할 거예요. 이제 막 구치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번에 또 들어가면 처벌이 가볍지 않을 거예요. 부사장님께서 또 이런 말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과연 이번에 또 들어가도 반하준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줄지 모르겠다고요.”강나현은 심장에 총을 맞은 기분이었다. 강민아는 진작 그녀의 행동을 예측하였다.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격하게 들썩거렸다. 강민아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이런 조롱을 당했다.“나한테 배상하라고? 허, 경고하는데 이 회사 우리 집안 거야! 내가 우리 집 꽃병 좀 깨뜨린 게 뭐 어때서?”비서는 차분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부사장님께서 3배로 배상하는 것을 거부하면 대표님 계좌에서 돈을 꺼낼 거라고 하셨어요. 회사 전체가 그쪽 집안 거니까 강나현 씨가 4천만원짜리 꽃병을 깨뜨렸으면 대표님이 1억 2천만원 배상하시면 되겠네요.”강나현은 지금 누군가 강성진을 언급하는 게 제일 두려웠다. 며칠 전 클럽에서 놀다가 우연히 이런 말을 들었다.“강 대표님 본 것 같은데.”그 한마디에 강나현은 겁에 질려 바로
강민아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짓는데 강성진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하준이가 6천억을 제시했어!”강성진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승이 부신 그룹에 인수되면 나도 너와 함께 부신 그룹 이사회에 들어갈 수 있어!”이는 심은호가 인수 문제와 관련해 강씨 가문 측에 약속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이건 하준이가 직접 작성한 인수 계획서인데 한번 봐.”강성진은 강민아에게 두툼한 계획서 한 권을 건넸다.반하준이 제시한 가격과 거래 조건은 그를 매우 흥분하게 만들었다.강민아는 계획서를 건네받고도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첫 페이지를 찢어 자동 파쇄기에 넣었다.곧바로 두 번째, 세 번째 페이지도 찢어버리며 강민아는 느긋하게 종이를 파쇄기에 넣었다.반하준이 밤새워 작성한 계획서였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강성진이 고함을 질렀다.“강민아, 뭐 하는 거야!”서늘한 얼음이 반하준의 얼굴을 뒤덮었다.“나한테 원한이 있는 건 알겠지만 6천억짜리 인수 계획서를 들여다보지도 않는 건 너무 감정적인 행동 같은데?”반하준은 강민아의 행동을 지켜보며 말했다.“6천억이 부족해서 그래? 1조로 강승 인수할게.”강성진은 가슴이 떨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이 제시한 가격은 심은호보다 두 배, 아니, 두 배 이상 높은 금액이었다.“하준아, 정말 그 가격에 살 의향이 있다면 내가 강승 테크 대표로...”“아빠, 이제 아빠는 결정권이 없어요.”강민아는 한 마디로 강성진을 의자에 다시 앉게 만들었다.강승에 대한 의사 결정권을 잃은 것을 생각하니 강성진은 강나현을 더욱 원망하며 이렇게 충고할 수밖에 없었다.“민아야, 우리 우강 그룹의 미래를 생각해야지! 하준이랑 일하는 게 뭐가 문제야? 하준이랑 7년 동안 부부로 지냈으니 섭섭지 않게 널 챙겨줄 거야.”강민아는 반쯤 찢어진 계획서를 책상 위에 던졌고 반하준은 의자에 앉아 강민아를 올려다봤다.그는 강민아의 얼굴에서 또다시 자신을 가두었을 때 강민아가 몸을 짓밟으면서 드러냈
이보다 더 사람을 괴롭게 하는 건 없었다.분명 한때는 그의 소유였는데 소중히 여기지 않다가 다 잃은 뒤에야 그리워하며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그는 진지하게 강민아를 향해 물었다.“정말 심은호를 선택할 거야?”강민아는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이미 태산 그룹과 인수에 관련된 모든 프로젝트 계약을 마무리했고, 다음 주에 공식적인 인수 계약식을 진행할 거야.”강민아는 남자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무심하고 덤덤하게 말했다.“반 대표님은 너무 늦게 오셨네요. 반년 전에 우강 그룹 인수를 제안했으면 경쟁자가 없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받아줄 수가 없네요. 진짜 말 안 바꾸고 변덕 부리지 않아도 당신이 내미는 돈은 1조가 됐든 2조가 됐든 안 받아요.”그가 아무리 많은 돈을 들고 와서 손을 내밀어도 소용없었다.감정이란 게 원래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아 올리기 어려운 거니까.마치 수백만 개의 차가운 바늘이 반하준의 몸을 찌르는 듯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남자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심은호를 선택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강민아는 그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아빠, 손님 배웅하세요. 반 대표님이 알아서 떠나지 않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반하준은 의자에 앉아서 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그는 강민아를 위해 한발짝 물러섰다.“우강 그룹 입찰에선 손을 떼겠지만 조건이 있어. 지금 당장 심은호와 헤어져!”강민아는 우습기만 했다.“당신이 뭔데? 이 지구의 주인이라 온 세상이 당신 말을 들어야 하나?”반하준이 서류봉투를 내밀었다.“이것 좀 봐.”강민아는 볼 생각이 없었고, 결국 반하준이 서류봉투의 포장을 풀고 안에 든 서류를 꺼내 강민아 앞에 내놓았다.심은호의 이름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심은호 씨 진료 기록?’강성진과 다른 임원들도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심은호의 기록을 들여다보자 강민아는 곧장 서류를 집어 들었다.대충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화가 난 듯 반하준을 노려보았다.“미쳤
반하준은 마치 전쟁터에 발을 들여 보이지 않는 연기가 사방에서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육성민의 깊은 동공은 맹수처럼 사나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찰나의 순간 엘리베이터 안에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더니 육성민이 매섭게 소리쳤다.“민아 내려놔!”육성민이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있으니 반하준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강민아를 내려놓았다.강민아는 가슴을 움켜쥔 채 반하준의 몸에 토하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메스꺼움이 다시 내려갔다.육성민은 손을 뻗어 강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반하준, 꺼지라는 말 몰라?”육성민은 속으로 살인은 범죄라는 걸 무수히 되뇌고 나서야 반하준의 머리를 뭉개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었다.하지만 반하준은 떠날 생각이 없었고, 서류봉투를 꺼내 육성민에게 건넸다.“한번 보시죠.”육성민은 반하준이 건네는 것을 받고 싶지 않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그러자 강민아가 말했다.“고작 비뇨기과 진료 기록 하나가 나와 심은호 씨 협업 관계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반하준은 예리하게 무언가를 감지하고 곧바로 되물었다.“너 진짜 심은호랑 만나는 거 아니지? 연애하는 게 아니야, 그렇지?”강민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하준은 계속 물었다.“정말 좋아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비뇨기과에 다니는 데 전혀 신경 안 쓸 수 있겠어?”강민아의 표정은 싸늘했다. 이혼까지 한 상황에서 반하준과 굳이 좋게 얘기할 생각도, 그럴 인내심도 남아있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연인이라는 사실을 반하준이 퍼뜨린다면 또다시 인수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남의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는 게 참 비열하다. 하지만 당신은 원래 역겨운 사람이었지. 이미 그 사람이 비뇨기과에 간 걸 봤다니까 그냥 얘기할게. 우리가 하도 격정적으로 놀다가 다쳐서 간 거야.”반하준의 귓가에 스피커를 가져다 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강민아를 바라보았다.
심은호는 반하준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은 채 그를 무시했다.그의 시선이 반하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강민아에게 향했다.순간 심은호의 눈빛이 허공에서 멈칫했다.달빛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강민아는 심은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목을 잡았다.남자는 시선을 내린 채 강민아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며 풍성한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강민아가 고개를 돌려 심은호에게 말했다.“비뇨기과에 간 거 알아요.”그녀를 바라보는 심은호의 검은 눈동자가 파문을 일으키며 말을 꺼내려는데 강민아가 새끼를 지키는 어미 암탉처럼 그를 자기 뒤로 보냈다.“반하준, 우리 일에 참견하지 마!”동시에 두 남자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심은호는 입꼬리를 피식 올렸고 반하준의 얼굴은 극도로 어두워졌다.태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강민아가 심은호와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전남편인 그는 완전히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반하준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그는 무기력하게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무언가를 참는 듯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를 깊이 사랑했던 강민아는 그의 의식주와 관련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메모해 두었다.앞으로 심은호한테도 그렇게 해줄까?반하준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우리에 갇힌 맹수가 된 기분이었다.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그래도 애써 내면의 감정을 무시한 채 이 불편한 고통을 날카로운 말로 바꾸어 입밖에 내뱉었다.“나랑 만났던 네가 그쪽으로 하자 있는 놈을 만날 리가 없잖아!”차갑게 웃는 반하준의 두 눈은 어느새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둘은 진짜로 사귀는 게 아니야.”분노에 찬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단지 계약 관계일 뿐이겠지.”강민아는 입술을 다물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반하준은 심은호가 비뇨기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물고 늘어져 그가 강승 테크를 인수하는 걸 방해할 생각인 것 같다.하지만 절대 그의
지금 심은호가 하는 말이 우리말이 맞나?그들이 생각하는 의미가 맞나?“그게 무슨 뜻이죠?”육성민은 정말 몰라서 의아해하며 물었다.심은호는 육성민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기록을 건네주었다.“형님, 그쪽 매제는 몸이 아주 튼튼해요.”육성민은 곧바로 심은호의 진료 기록에 적힌 상세한 수술 과정을 살펴보았다.일부 난해한 의학 용어를 알아볼 수 없었던 그가 심은호를 올려보다가 다시 손에 든 기록을 내려다보았다.“대체 왜 그 구슬을 몸에 집어넣은 겁니까?”반하준이 거센 힘으로 심은호의 진료 기록을 낚아챘고 육성민은 그대로 넘겨주었다.기록을 확인한 반하준의 얼굴은 먹물보다 더 어둡게 변했다.지나치게 힘을 준 탓에 손가락은 떨리고 손등엔 핏줄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몇 장이나 되는 진료 기록이 반하준의 손에서 구겨졌다.그는 악귀에 사로잡힌 듯 시뻘건 눈으로 심은호를 노려보았다.“구슬 넣어서 뭐 하려고? 미쳤어?”반하준은 고함과 다름없는 소리를 뱉었다.모를 리가 있나. 심은호가 구슬을 꽂아 뭘 하려는 건지 잘 알았기에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당연히 민아 씨에게 더 좋은 경험을 선사해 주려고 그러지.”심은호가 당연하다는 듯 진지하고 당당하게 말하자 그런 그의 모습에 놀란 건 육성민이었다.‘민아에게 좋은 거였구나.’육성민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심은호에 대한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강민아에게 좋은 일이라면 그도 뭐든 다 좋았다.강민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그녀가 나지막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어느... 어떤 구슬이요?”심은호는 잠겨 죽어도 좋을 만큼 그윽하고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지난번에 우리 집에 왔을 때 민아 씨가 골라서 팔찌로 만들고 남은 구슬 하나요.”강민아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을 등 뒤로 보냈다.심한기를 만나러 갔을 때 우연히 서재에 놓여 있는 구슬 상자를 보게 되었다.구슬이 별 가치도 없는 거라 강민아가 먼저 구슬로 팔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두 사람은
강민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심은호는 예쁜 눈을 가늘게 뜬 채 핏줄마저 튀어나온 반하준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반하준, 왜 안 웃어? 원래 잘 안 웃나?”강민아는 자신의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 눈앞에 반하준의 몸이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닌지 의아했다.전남편은 적잖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육성민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라 오히려 침착하게 한 손에는 심은호의 진료기록을, 다른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검색하고 있었다.[구슬 넣는 좋은 점]‘아, 거기에 구슬을 넣는 거구나! 이게 가능해?’이미 모든 면에서 태생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심은호도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니!검색을 마친 육성민은 심은호를 감탄하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저런 근면 성실함은 따라 배워야 한다.그때 육성민의 귀에 반하준의 욕설이 들렸다.“천박하긴!”반하준은 심은호를 경멸했다.“태산 그룹의 후계자가 업소 제비처럼 고작 여자의 마음이나 얻으려고 구슬을 넣을 줄이야.”반하준의 욕설에도 심은호는 더더욱 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질투 나서 욕하는 거야? 넌 민아 씨한테 잘 보일 자격도 없잖아.”반하준의 심장이 철렁하며 거대한 충격에 폭탄이 몸속에서 터진 듯 영혼까지 송두리째 파괴당한 것 같았다.그의 눈에 심은호의 미소는 그토록 비열해 보여 목구멍에서부터 차가운 경멸의 비웃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이혼만 안 했어도 네가 나설 자리는 없었어.”심은호는 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더욱 얄밉게 웃었다.“이제 내 차례가 됐네. 반하준, 고마워.”반하준의 얼음장 속에 갇힌 것 같았다.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다.그가 강민아에게 소홀히 하고 그녀의 감정까지 전부 차갑게 식게 만들었다.반하준은 자신이 강민아를 밀어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히 알았다.육성민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구슬 넣으려고 비뇨기과에 온 겁
강민아가 심은호와 함께 떠나는 것을 보는 순간 반하준은 밀려오는 상실감에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강민아!”반하준은 고함을 질렀다. 주위의 공기가 끈적끈적하고 무거워져 숨쉬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심하게 들썩거리며 얼굴마저 점차 창백한 종잇장처럼 변해갔다.“다시 한번 모든 걸 되돌릴 기회를 줄게. 넌 여전히 내 아내고 민이의 엄마야. 강승에 투자해서 계속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도와줄게. 난 그냥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가면 돼.”반하준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그가 말할 때마다 몸의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여전히 오만하고 고고한 태도였지만 눈가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말로는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는 데 몸은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었다.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강민아의 두 눈에는 무심함과 냉정함, 짜증 섞인 혐오만 가득했다.“반하준, 후회돼?”그녀의 말에 허를 찔린 남자는 입술만 달싹였고 강민아는 말을 이어갔다.“난 당신 아내가 된 것도, 민이의 엄마가 된 것도, 모든 걸 버리고 떠난 것도 후회하지 않아. 난 이제 더 이상 당신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니까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심은호가 손을 내밀어 길고 힘 있는 손가락으로 강민아와 깍지를 꼈다.맞물린 두 손을 본 반하준의 동공이 급격히 움츠러들었다.지금 이 순간 다른 남자와 두 손을 맞잡는 게 반하준에겐 치명타가 될 거다.강민아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반하준을 불렀다.보이지 않는 실이 남자의 심장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강민아의 말에 그가 황급히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한때 당신에게 수없이 실망한 후 혼자서 되뇌던 말이 있는데 이젠 그걸 당신에게 해야 할 것 같네. 열리지 않는 문을 자꾸 두드리는 건 무례한 짓이야.”강민아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고 심은호는 뒤를 돌아보며 가만히 서 있는 반하준과 육성민을 향해 승리자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반하준이 그렇게 못난 표정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