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설윤의 어머니도 이를 알고 있었다.“선생님이 초등부까지 가서 도움을 청하려 했어요.”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를 뽑아 리프트를 시켜도 동작이 예뻐야 하기에 손이 떨리지 않을 때까지 연습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민설윤의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결국 보다 못한 따님이 반 애들과 자주 하는 동작이라고 나섰어요. 연주를 들고 몇 바퀴를 돌아도 지치지 않더라고요.”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민설윤의 어머니 정고은은 한때 서경 극단에서 수석 무용수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전문가였지만 업계에서 정고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었다.그래서 햇님반 아이들이 춤 연습을 할 때면 선생님은 정고은을 불러 따로 지도를 부탁했다.강민아가 물었다.“윤정이한테 연주를 드는 동작을 맡긴 게 그쪽이에요?”보통 남자가 하는 동작인데 춤 선생님의 태도로 봤을 때 정이가 쉽게 반연주를 들어 올려도 무대에서 저런 동작을 시키진 않았을 것 같았다.정고은이 강민아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따님 재능이 있어요. 계속 지켜봐요.”강민아는 정이가 발끝을 세우고 공중에서 열두 바퀴나 도는 모습을 보았다. 크리스털이 박힌 스커트는 조명 아래에서 얼음 회오리를 만들어냈다.연이어 멈추지 않고 동작을 이어가니 발이 나무 바닥에 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냈다.열두번의 회전과 세 번의 큰 점프가 이어지며 정이의 뒷다리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몇 미터 밖에서도 들렸다.객석에 있던 부모들은 충격에 감탄을 질렀고 반진경은 얼굴이 확 일그러지며 소리를 질렀다.“왜 강윤정한테 저렇게 많은 고난도 동작을 시켜요? 우리 연주가 센터인데!”보다 못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고은에게 다가갔다.“이봐요! 그쪽이 강윤정한테 저런 동작 시켰죠? 전에 연습할 때랑 다르잖아요!”정고은은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윤정이가 워낙 재능이 많고 뭐든지 빨리 배워요. 능력이 있으니 고난도 동작을 맡기
춤 선생님의 이름은 허시연, 며칠 전 강민아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그녀의 연락처를 받아 정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아이들에게 신체적인 모욕을 주지 말라고 명확하게 말했지만 상대는 그저 건성건성 대답할 뿐이었다.나중에 이번 공연의 보조 교사를 맡은 정고은에게 연락해서 정이가 아주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강민아는 어느 정도 안심했다.하지만 지금 허시연이 이렇게 말하자 정이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이고 통통한 손으로 강민아의 옷자락만 만졌다.강민아는 딸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허 선생님, 이번 무대 사고는 나무 바닥이 갈라진 탓이에요. 무대를 지은 지 20년이 넘었고 구멍이 생겼다는 건 안에 벌레가 먹었다는 뜻이죠. 지금은 같은 사고가 벌어지지 않게 사람을 불러 바닥을 수리하는 게 먼저인 것 같은데요.”강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시연이 대꾸했다.“윤정이 엄마로서 아이가 무리에 어울리지 못한다는 생각은 안 하겠죠. 강윤정은 몸이 우둔해서 발레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설윤 어머님께도 턴을 시키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 열두번이나 빙빙 돌면 그게 뚱뚱한 팽이와 다를 게 뭐가 있어요?”허시연이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어이없다는 듯 얼굴에 드리운 한 가닥의 머리카락을 불어넘기자 정이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허 선생님이 저 싫어하는 거 알아요.”허시연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러운 얼굴로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윤정아, 선생님이 왜 널 싫어해? 네가 춤에 있어서 타고난 조건이 부족한 거야. 체형이 안 좋은 건 엄마한테 왜 다이어트를 시키지 않았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은 모두를 생각해서 너 하나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공연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정고은이 다가왔다.“제가 볼 땐 강윤정이 이 공연의 가장 큰 하이라이트인데요. 얘가 있으니 햇님반은 이번 축제에서 3등 안에 들 거예요.”허시연의 눈가에 경멸의 비웃음이 스쳤다.“설윤 어머님, 서경 극단의 에이스였지만 햇님반 아이들의 보조 교사를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뚜뚜뚜.전화기 너머로 귓가에 들려오는 신호음에 우경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강민아가 지금 내 전화를 끊은 거야? 감히?’감히 그녀의 전화를 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우경아는 강민아가 실수로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했다.‘강민아가 감히 어떻게!’그녀는 또다시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어 스피커로 돌렸다.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인 채 우경아의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했다.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대는 응답이 없었고, 휴대폰을 들고 있던 우경아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모두가 싸늘해진 분위기를 알아차렸고 미묘한 어색함이 그들 사이에 퍼져나갔다.“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감정 없는 기계음이 우경아의 휴대폰에서 울펴퍼지자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강민아 씨가 바쁜가 봐요.”“대표님, 제가 연락해 볼게요. 연락되면 대표님 뵈러 우영 그룹에 오라고 할게요.”살짝 흐트러진 곱슬머리 몇가닥이 얼음처럼 싸늘한 우경아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늘 먼저 공격하는 데 익숙했던 그녀는 기다리는 걸 싫어했고 무엇보다 지금은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그녀는 속에서 열불이 들끓으며 서둘러 우위를 점해 강민아를 제압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그때처럼 단번에 강민아를 내쳐서 그녀가 자신의 발밑에서 벌벌 기면서 마음껏 짓밟히게 하고 싶었다.우경아는 비서에게 명령했다.“강민아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우경아의 비서는 유능한 여성이었다. 연구팀이 강민아가 준 대형 모델을 개발할 때 그녀도 매일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으며, 지난주부터 강민아가 없으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대표님, 강민아 씨는 오후 3시에서 4시까지 승덕 어린이반에서 햇님반 공연 연습을 볼 겁니다.”비서는 이미 강민아의 움직임을 몰래 지켜보면서 우경아의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비서의 말에 우경아가 말했다.“차 준비해. 강민아가 전화를 안 받으니
어떤 학부모는 자리에 앉아 그들의 논쟁에 끼어들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방금 찍은 영상을 살짝 편집해서 인터넷에 올렸다.“강윤정이 그만두지 않는다면 무대에서 망신당하게 놔두죠.”“사람들도 보는 눈이 있는데 우리 딸 공연을 망치면 인터넷에서 엄청난 물매를 맞을 거예요.”자리에 앉은 몇 명의 학부모들이 속삭이고 있었다.“엄마.”정이가 나지막이 부르자 강민아는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을 감쌌다.아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 손으로 가슴 앞에 달린 크리스털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두 눈에는 물기를 머금어 투명한 빛이 반짝였다.“저... 그만할래요.”정이는 결심했다. 공연 의상을 입을 때 다른 애들이 몰래 웃어서 물어보니 아이들은 뚱뚱해서 웃었다고 했다.뚱뚱하지 않고 아주 좋은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대에서 실수하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강민아가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정아, 정말 그러고 싶어?”“네.”정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강민아는 늘 아이의 결정을 존중했다.정이는 손을 들어 머리에서 하얀 깃털 머리띠를 벗었다.긴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지자 강민아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뻗어 빗겨주었다.“비웃음당하고 싶지 않아요. 무대에서 춤을 출 때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불편해요.”그렇게 말하며 정이는 허시연을 바라보았다.“선생님, 제가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세요. 괜히 여우짓 하지 마시고요. 전 고작 다섯살이라 그런 거 모르거든요.”허시연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하얀 얼굴이 일그러졌다.“무슨 소리야? 그런 말은 누구한테 배웠어?”정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아저씨가 가르쳐줬어요. 남을 해치진 않아도 당하고만 살지는 말라고. 여우짓도 배워둬야 저같이 나라의 미래가 될 어린이들을 해치는 사람들을 상대한다고요.”강민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정이를 바라보았다.“정아, 포기하는 법과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배웠네. 하지만 그만두는 것과 물러서는 건 달라. 엄마가 학교 측에 네 단독 무대를 신청하고 싶은데 한번 해볼래?”강민아의 말에
강민아는 반진경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았기에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허공에 불꽃이 튀며 타는 냄새가 났다.반씨 가문에서도 반진경은 강민아에게 그다지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땐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강민아도 의식적으로 반진경을 피했다.그런데 여전히 자신을 저격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민아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편견이란 게 한번 자리 잡으면 사라지기 어렵고 재벌일수록 원래 외부인을 경멸하는 경향이 강하다.반진경 역시 반하준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진심으로 경멸했다.강민아가 반씨 가문으로 시집온 순간부터 반진경은 그녀가 쫓겨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민아야, 얼른 학교 측 담당자한테 가봐. 늦게 가면 공연 순서가 확정돼서 정이 이름을 넣을 수 없을 테니까.”반진경은 싸늘한 눈동자로 입꼬리만 피식 올렸다. 그때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이렇게 덧붙였다.“그런데 너와 백 청장님 친분이면 공연이 확정되어도 네가 말만 하면 네 딸 공연을 준비해 줄 거야. 안 그래?”반진경의 말에 다른 학부모들의 표정이 달라졌다.허시연의 젊은 얼굴에는 분노의 표정이 역력했고 그녀는 강민아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역겨웠다!반진경으로부터 강민아와 백강훈 사이가 두텁다는 걸 전해 들었다. 백강훈이 강민아를 이렇게 싸고도는 걸 보니 고연대에 있을 때 진작 침대에서 뒹굴었나 보다.고연대에 다닐 때 강민아는 고작 몇살이었던가. 졸업한 그해에 그녀는 겨우 성인이었다.허시연은 가슴속에 분노가 치밀었다. 강민아는 백강훈과의 관계를 믿고 축제에서 딸의 단독 무대를 계획했던 거다.“그게 무슨 말이지?”화려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우경아는 굽이 얇은 하이힐을 신고 꼿꼿한 등을 드러낸 채 마치 고문 기구 위를 걷는 것처럼 반듯하게 걸어왔다.걸을 때마다 부드러운 곱슬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화장은 화려하고 도자기 같은 피부엔 서늘한 광이 뿜어져 나왔다.반진경은 우선 그녀의 옷차림을 살폈다. 그녀의 시선이 우경아의 몸에 걸친 딱
무대에 있던 강민아도 순간 멈칫했다.반진경은 떨리는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감싸며 눈을 크게 떴다.부은 뺨을 만지자 머리카락보다 가는 수백만 개의 바늘이 혈관을 뚫고 피부를 찢는 것만 같았다.반진경은 그제야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왜 날 때려요?”반진경이 빽 소리를 지르자 우경아는 그저 웃었다.눈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풍성한 속눈썹은 눈가에 내려앉은 나비가 날갯짓하듯 펄럭거렸다.“때리는 거로는 부족하지. 머리에 구멍을 뚫어 구정물을 다 내보내야 하니까.”우경아가 키 172에 15센티 하이힐까지 신으니 그녀 앞에 있는 반진경은 난쟁이처럼 보였다.그녀가 손으로 반진경의 머리를 가리키자 반진경은 또 뺨을 맞을까 봐 황급히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머릿속에 더러운 것만 가득 찬 걸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고 누가 모를 줄 알아? 누구는 헛소리할 줄 몰라서 가만히 있나? 감히 강민아와 교육청 백 청장님을 엮어? 반씨 가문은 이 바닥에서 사업 계속할 생각이 없나 봐.”“아니야!”반진경이 빽 소리를 지르자 우경아는 곧바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아악!”그녀가 비명을 지르면 우경아는 반대쪽 뺨을 때렸다.하도 매섭게 때려 반진경의 두 뺨이 대칭을 이루며 부풀어 올랐다.“당신 누구야? 난 강민아한테 말한 건데 왜 날 때려?”반진경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면서 우경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혹시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백 청장님의 아내인가?’그건 아니다.그녀는 백강훈의 아내를 본 적이 있다.“그만해요!”옆에 있던 다른 학부모들이 말렸고 허시연이 서둘러 무대에서 내려왔다.“사람이 왜 그렇게 무례해요? 어떻게 바로 손을 댈 수가 있죠?”반진경은 반씨 가문 사람이니 지금 그녀를 감싸준다면 바로 반진경의 은인이 될 수 있었다.허시연은 그 생각에 반진경을 뒤로 보내며 감쌌다.짜악!우경아가 뺨을 때리자 허시연은 머릿속이 윙윙거렸다.무대에 있던 강민아는 조용히 손을 뻗어 정이의 눈을 가렸다.우경아의 전투력은 실로 대단했다.“당신이
반진경이 우경아를 보고 단번에 떠오른 생각은 예쁜 여자라는 거다. 큰 키에 작고 섬세한 얼굴,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처럼 얼굴 하나만으로 큰 임팩트를 주는 사람이 드물었다.“어느 학생 학부모든 감히 선생님을 때렸으니 학교 측에 알릴 거예요!”허시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우씨 성이 흔한 것도 아닌데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는 없었다.우경아와 강민아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살펴보니, 우경아가 지나치게 젊지만 않았어도 강민아의 엄마라고 해도 믿을 만큼 둘은 닮았다.반진경은 퉁퉁 부은 얼굴을 감싼 채 우경아를 향해 아부 섞인 미소를 지었다. 마치 볼에 견과류를 가득 채운 다람쥐처럼 보였다.“우 대표님, 전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우경아의 매서운 눈동자가 싸늘해지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더니 스스로 본인 뺨을 때렸다.“제가 잘못했어요. 홧김에 말실수했네요. 우 대표님,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허시연은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 빠르게 변하는 반진경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우경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반진경에게 물었다.“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인가요?”반진경은 꽉 깨문 잇새로 작게 말했다.“당신 월급을 주는 은행이 우씨 가문 거야.”이 한마디에 허시연은 얼굴 전체가 창백해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국내 5대 은행 중 하나가 우씨 가문 소유라면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부신 그룹보다 더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가 아닌가.순간 허시연의 이마에서 굵직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왜 나한테 사과하지?”우경아는 반진경에게 이렇게 말하며 강민아를 돌아보았다.반진경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과 함께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강민아가 반씨 가문으로 시집온 순간부터 강민아의 신분을 우습게 여긴 그녀였다. 강성진의 비열하고 역겨운 얼굴과 도민영의 멍청한 모습, 남자 무리에 섞인 강나현의 우스운 꼴을 봤었다. 게다가 강민아가 오랜 시간 시골 마을에 살면서 부신 그룹의 후원을 받아 겨우 대학을
정이가 두 손으로 강민아의 손을 잡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엄마한테 사과문 써요!”“어림도 없어!”반진경이 매서운 눈빛으로 말을 내뱉자 정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용감하게 나섰다.“축제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우리 엄마한테 쓴 사과문을 읽어요!”반진경은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웃다가 심호흡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소롭다는 어투로 정이에게 말했다.“그래, 내가 축제 무대에 올라 사람들 앞에서 사과문을 읽게 하려면 네가 1등을 해야 할 거야. 네가 무대에서 상을 받아야만 날 무대로 부를 자격이 있지 않겠어?”분노와 조롱이 뒤섞인 반진경의 머릿속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경아가 때리는 뺨은 맞을 수 있어도 사과문을 쓰라는 건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고만 느꼈다.이런 수치심을 잠자코 견딜 리 없었던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강민아에게 말했다.“강윤정이 축제에서 1등 하면 너희 모녀가 대단한 걸 인정하고 기꺼이 사과도 할게. 강민아, 사과문은 쓰겠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읽는 건 네 능력에 달렸어.”정이 혼자 축제에서 1등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렇듯 오만하게 말할 수 있었다.아이가 혼자 진행하는 공연이 무대에 오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니까.반진경은 하늘이 뒤집혀도 그럴 일은 없다는 생각에 오만방자하게 거들먹거리고 있었다.강민아도 그녀의 꿍꿍이를 알아차렸다. 사과문은커녕 반진경이 높게 쳐든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사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정이가 강민아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전 축제에 참여할 거예요. 축제에서 공연할 거라고요!”아이는 속으로 반드시 1등을 할 거라고 다짐했다.이번에는 엄마를 위해서 신념과 의지를 불태우련다.강민아의 손이 정이의 어깨를 살며시 누르며 반진경에게 말했다.“사과문 내용이 무척 기대되네요.”반진경의 호흡이 가빠졌다. 반씨 가문에서도 강민아는 늘 고고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출신이 비천한 게 날개를 달았다고 감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