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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지추새
그녀는 자신의 출신이 너무나 보잘것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일 만한 배경을 날조해야 했다.

현재 그녀의 설정은 명문대를 졸업한 부잣집 딸로, 부모님은 해외에 거주하며 각각 대학교수와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사장 비서라는 직책에 지원한 이유는 그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어서였다.

주다현은 당연히 그런 평범한 배경으로는 재벌가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화려한 배경을 만들어내기에는 당시 그녀에게 그럴 만한 역량이 부족했다.

게다가 배씨 가문의 인맥을 고려했을 때 너무 과장된 배경을 내세우면 금세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이 있었다.

심사숙고 끝에 그녀는 눈에 띄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라하게 보이지도 않는 적절한 배경을 선택했다.

배준기는 손에 들린 사진들을 묵묵히 바라보았지만 마음속에는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내 비서였고 그러다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건가요?”

주다현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우리는 함께 일하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지만 신분 차이 때문에 관계를 공개할 수 없었어요.”

배준기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봤다.

주다현은 이미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강심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빤히 쳐다봐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태연하게 대처하며 오히려 물었다.

“준기 씨, 우리가 함께했던 소소한 추억들이 기억나세요?”

배준기는 사진첩을 넘기던 손을 멈칫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주다현은 일부러 실망한 듯 눈을 내리깔았지만 금세 다시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시간을 두고 되찾으면 돼요.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언젠가는 기억나겠죠.”

배준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다현은 냉담한 반응에도 화를 내지 않고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준기 씨, 저는 준기 씨가 지난 3년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정말 궁금해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요?”

배준기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말했다.

“별로 말할 것도 없어요. 다 지난 일이니까.”

주다현은 순간 그의 속마음을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벌써부터 내가 귀찮은 걸까? 아니면 김지안을 마음에 품고 있어서 일부러 나를 멀리하는 걸까?’

그녀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외딴 섬에서 3년이나 함께 지냈으니 은밀한 감정이 싹텄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먼저 그 얄팍한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녀는 배씨 가문의 적장손을 낳았지만 배준기와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기에 늘 불안했다.

그녀는 배준기가 기억을 잃은 틈을 타서 두 사람의 부부 관계를 확실히 해야 했다.

혼인신고를 하여 합법적인 부부만 된다면 그녀는 배씨 가문의 맏며느리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배준기가 그녀를 인정하든 말든, 첩을 몇 명 두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필요한 건 배준기가 아니라 배씨 가문의 재력이었으니까.

주다현은 재빨리 얼굴에서 불안한 기색을 지우고 능글맞게 대꾸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중요한 건 지금 우리의 삶이에요.”

그녀는 말하면서 희고 부드러운 손을 남자의 손등 위에 얹고 손가락을 천천히 그의 손가락 사이로 집어넣어 깍지를 끼려 했다.

“뭐 하세요?”

배준기는 깜짝 놀라며 손을 홱 빼냈다.

주다현은 잠시 당황한 듯 눈시울을 붉히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우리는 예전에 이마를 맞대고 손깍지를 자주 꼈었는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어요.”

“나는 남이 가까이 오는 게 싫어요.”

배준기는 옆으로 두 걸음 물러서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주다현은 서운한 듯 말했다.

“준기 씨, 우리는 남이 아니라 부부잖아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격렬한 사랑을 나누며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고요. 모든 건 천천히 해도 괜찮지만 당신과 가까워지는 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요. 그건 절대 안 돼요.”

그녀는 강경한 어조로 말했지만 끈적하게 늘어지는 끝음은 듣는 이의 마음을 낚아채는 듯했다.

배준기는 눈앞의 아름다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뽀얗고 매끄러운 피부는 은은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고 살짝 내민 앵두 같은 입술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촉촉했으며 그윽한 눈망울은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정말 요물 같은 여자였다.

그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알았어요. 노력해볼게요. 하지만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주다현은 적당히 물러서며 말했다.

“좋아요. 저도 당신을 향한 넘치는 사랑을 최대한 자제할게요. 피곤할 텐데 제가 따뜻한 물을 받아드릴게요. 시원하게 몸을 좀 푸세요.”

그러자 배준기는 거절했다.

“됐어요. 그런 건 혼자 할 수 있어요.”

주다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알았어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요. 저는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네.”

배준기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주다현은 허둥지둥 도망치듯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

호화로운 침실, 침대 머리맡에는 야간 조명만 켜져 은은한 노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킹사이즈 침대 위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여보?”

주다현은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요?”

배준기는 눈을 감고 규칙적으로 숨을 쉬며 잠든 듯했지만 속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굳게 다문 입술과 팽팽하게 긴장한 턱선으로 완벽한 ‘수면 자세’를 유지하려는 듯 애쓰고 있었다.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주다현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그의 속눈썹을 가볍게 쓸어 올렸다.

배준기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엄청난 인내심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숙여 그에게 바싹 다가갔고 뜨거운 숨결로 그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배준기의 속눈썹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떨렸다.

주다현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슬픔에 젖어 있었다.

“여보, 정말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너무 무서워요. 꿈에서 깨면 당신이 사라져 버릴까 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가슴에 기대어 손가락으로 그의 잠옷 단추를 천천히 매만졌다.

그녀의 손길은 매우 느렸다.

배준기의 몸은 팽팽하게 긴장했고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번쩍 뜨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강제로 그녀의 손길을 멈추게 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잠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타오르는 듯한 어두운 불꽃만이 일렁일 뿐이었다.

주다현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몸을 더 가까이 기울여 붉은 입술이 그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머물렀다.

“여보, 저는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너무 불안해요.”

“안심해요. 꿈이 아니에요.”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굳어 있었다.

“하지만 당신을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너무 불안해요.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요. 여보, 당신을 느끼게 해 주세요, 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유혹적으로 변해갔다.

배준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주다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그의 목울대를 살짝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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