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꼭 성공해야만 했다. 그래야 시연과 동생 우주가 사람답게 살 희망이 있다. “놔!!!” 소미는 가까스로 시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당연히 알지! 합격통지서가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니까 찢어서 버렸지!” ‘뭐?!’ 시연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하며 입술이 떨렸다. “...다시 말해봐.” “벌써 말했잖아.” 소미는 귀찮다는 듯이 귀 옆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하며, 독을 퍼부었다. “찢었어. 네 합격통지서, 내가 갈기갈기 찢어서 버렸다고.” 이어 그녀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너 공부 잘하는 거 알아! 그래서 뭐? 네 앞길, 내가 직접 망쳤어! 넌 평생 나한테 밟히게 돼 있어!” “...” 시연은 입을 벌렸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눈앞의 소미가 완전히 악마처럼 보였다. ‘이 악마는, 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배신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야!! 내 아버지를 빼앗고,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냈어!!’ ‘이제는 내 미래까지 짓밟으려 하고 있어!!’ ‘그리고 저 악마의 입술이 꿈틀거리면서, 또다시 독을 내뱉고 있어!!’시연이 두 주먹을 굳게 쥐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그러다, 그녀는 이성을 놓아버린 듯이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악!” 소미를 바닥에 눕혀 버렸다. 시연은 양손으로 소미의 목을 졸라 움켜쥐었다. 시연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지만, 눈빛은 메마른 듯했다. “네가 뭔데?! 은이가 그동안 보낸 편지를 가로채?! 우릴 3년이나 떨어뜨려 놓았잖아! 이제 와서 또 내 합격통지서까지?” “내가 왜 그랬냐고? 넌 너무 역겨우니까! 어릴 때부터 남자들한테 꼬리나 살살 치는 주제에 어디가 잘났다고 그래? 그러니까 노은범도 널 좋아했잖아!” 은범과 시연이 사귀었을 때, 소미는 질투로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간신히 내가 얻은 자릴, 또 네
경비원들이 앞으로 다가서서 시연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중 두 사람이 시연을 잡으려고 직접 손을 뻗자, 시연이 단호하게 외쳤다. “나한테 손대지 마!” 그녀는 다친 팔을 감싸 쥔 채, 휘청거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 조애린이 시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비웃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네가 사람을 폭행한 장면, 전부 CCTV에 찍혔어. 이미 경찰에 신고했다고!” 조애린은 원래 시연이 겁을 먹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상대방의 반응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었다. “그래? 좋아. 그러면 여기서 경찰이나 기다리지, 뭐.” 그렇게 말하더니, 시연은 바로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시연의 두려운 것 없다는 듯한 태연한 모습에 조애린은 당황했다. ‘...이 여자, 진짜로 미친 거 아냐?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소미는 근처 병원으로 바로 이송되었다.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의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연조직이 부어올라서 당분간 목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약 바르시고, 이틀 정도 말을 삼가세요.”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병실로 들어갔다. 소미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목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유건은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지시연과 장소미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는 거지?’ ‘단순하게 보자면 한 명은 내 법적인 아내고, 한 명은 내가 결혼을 약속한 여자라서? 하지만, 이건 우리 중 누구도 원했던 관계는 아니잖아.’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야.’ 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발신자는 주지한이었다. 유건은 병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형님, 큰일 났어요! 조애린 씨가 신고해서, 시연 씨가 경찰서로 끌려갔어요!]...유건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조애린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유건은 순간 얼어붙었고, 동공이 좁아졌다. ‘이게 뭐야...?’ 그리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가방을 뒤적였는데, 한눈에 봐도 전부 은범에서 온 가득 찬 연애편지였다! 유건은 차갑게 웃으며 편지를 힘껏 밀어 넣은 뒤, 가방 입구를 단단히 묶은 뒤 더 이상 볼 생각조차 없었다. ...유건은 차를 집 앞에 세우고, 시연이 밖으로 나오는 걸 보았다. 그는 시연에게 차에 타라는 신호로 경적을 한 번 울렸다. 하지만 시연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유건을 힐끔 보지도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유건은 찌푸린 눈썹을 하고 문을 열고 내렸다. “지시연! 지시연!” 두 번이나 불렀지만, 시연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유건은 그녀를 쫓아가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데? 타, 집에 가자.” “그 더러운 손 치워요! 나한테 손대지 마요!” 시연은 마치 유건이 전염병이라도 옮길 것처럼 격렬하게 반응했다.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더럽다고?” “그래! 당신 더러워요! 장소미랑 가까운 사람은 다 더러워요. 다 쓰레기들이에요!” 시연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친 욕설까지 내뱉었다. 하지만 유건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확신이 들었다. ‘둘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너랑 장소미, 원래 아는 사이였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시연은 코웃음을 쳤다. “알고 싶어요? 당신 여자 친구한테 물어봐요. 그 사람이 그걸 말할 용기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유건은 더욱 미간을 좁혔다. “너희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건 짐작했지만, 꼭 이렇게까지 독하게 말해야 해? 너도 곧 의사가 될 사람이잖아. 기본적인 예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시연은 또다시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예의? 그건 정말 정상적인 사람한테만 해당하는 거야.’ 하지만 굳이 유건에게 설명할 필요
“시연아!” 유건은 순간적인 공포에 휩싸이며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병원으로 가자!” 고통이 너무 심해, 시연은 더 이상 유건의 손길을 거부할 힘조차 없었다. 임신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혹시... 아이가 나보다 먼저 결정을 내린 걸까?’ ‘나는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도 이 아이의 존재조차 모르고, 그 사람이 알게 된다 해도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아이의 엄마인 나는... 너무나도 무력해.’ ‘나 혼자 살아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떠나려는 걸까?’ 갑자기 시연은 유건의 옷깃을 꽉 움켜잡았고, 힘이 들어가 목덜미에 핏줄까지 도드라졌다. “고유건 씨...!” 그녀는 힘겹게 유건의 이름을 불렀다. “말해.” 아마도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져서일까... 그 순간, 시연이 자기 눈앞의 남자가 놀라울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남자의 눈빛도, 목소리도... “...아기...” 시연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내 아이... 내 아이를 지켜 줘요...” 유건은 여자의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도, 아이도... 아무 일 없을 거야.” 의사인 시연의 입장을 고려해, 유건은 그녀를 강울대학교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데려갔다. “선생님!” 그는 응급실로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검사실로 데려가 주세요! 산부인과 오현철 과장님도 당장 호출해 주세요!” “네!” 간호사가 유건을 진료실 밖으로 안내하려 하자, 시연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보호자는 안에 계시면 안 됩니다.” 이 원칙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시연이었다. 하지만, 시연도 사람이라 감정이 무너져 원칙을 생각하지 못했다. “고... 유... 건... 고...” 그녀는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
시연은 긴 꿈을 꾸었다. 실은 하나가 아니라 끝도 없이 쭉 이어지는 꿈이었다. 그 모든 꿈이 악몽이었다. 그리고 숨 막힐 듯한 절망. “아...” 시연은 비명이 터지며 눈이 번쩍 떠졌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고, 차가운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시연아.” 낮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 시연은 자신이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는 따뜻하고 단단한 품에 안겨 있었는데,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시연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 자국조차 없이 말라버린 눈동자에는, 어젯밤의 그 연약함은 흔적도 없었다. “시연아.” 유건이 낮게 물었다. “괜찮아? 어디 불편한 데 없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여자의 이마를 만지려 했다. 어젯밤, 시연은 약간의 미열이 있었다. 그러나 시연은 정확하게 고개를 돌려 남자의 손길을 피했다. 유건은 순간 얼어붙었다. 마치 가슴 한가운데에 차가운 물을 들어부은 듯한 감각... 유건 역시 무안해진 손을 거두며, 식어버린 손끝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래. 내가 다치게 했으니까. 화내면서 나를 피하는 것도 당연하지.’ “...미안해.” 유건은 낮게,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날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그땐 내가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다친 건 사실이고... 내 잘못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시연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검고 깊은 눈동자에는 붉은 실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아주 냉정한 목소리. “고 대표님은 여자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신 거죠. 그건 아주 ‘올바른’ 선택이었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말에, 유건의 미간이 깊이 주름지면서 목소리도 단단하게 굳어졌다. “...꼭 그렇게 말해야 해?” 유건의 가슴이 묘하
다음 날 점심, 시연은 임진아와 약속을 잡고 함께 식사했다. 진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잔뜩 화가 나서, 거의 접시가 뚫어져라 젓가락을 찌르고 있었다. “진짜 말도 안 돼! 너한테 이런 일이 안 일어났다면, 세상에 이렇게 역겨운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걸 믿지도 못했을 거야!” 하지만 시연은 그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와서 화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활활 타오르던 분노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어차피 삶은 계속 흘러가야 한다. “진아야.” 시연이 조용히 말했다. “이 일은 너만 알고 있어. 절대 성빈이에게 말하지 마.” 진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성빈이 성격이 너무 직선적이고 다혈질이라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괜히 또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이네.’ 어쨌든 특별전형 석사 과정은 이미 물 건너갔다. 시연도 더 이상 성빈까지 이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밤이 되어서야 본가로 돌아온 시연은 번역 원고를 마감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바빴다. 비록 마감일은 모레였지만, 편집장이 내일 직접 오라고 해서 시연도 내일만 시간이 비어 있었다. 다음 날, 시연은 오전 근무를 마친 후, 수술을 끝내고 오후 네 시쯤 편집장을 만나러 갔다. “오, 시연 씨, 앉아요.” 편집장이 반갑게 웃으며 물 한 잔을 건넸다. “오늘 부른 건 두 가지 때문이에요. 하나는 앞으로 맡을 수 있는 원고 범위를 확인하려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고료 정산 때문이고.” “감사합니다, 편집장님.”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눈 후, 편집장은 시연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며 말했다. “앞으로 시연 씨에게 더 많은 원고를 맡길 생각이에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연은 기쁘게 고개를 숙였다. 편집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처음엔 지인 추천이라 걱정했어요. 근데 실력 있는 사람은 역시 다르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노은범...?” 강수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걸까?’ ‘우리 아들이랑 나란히 걸어가는 여자가... 지시연?’ 망설일 틈도 없이, 강수희는 곧장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 디저트 카페에 도착하자, 은범은 시연에게 초콜릿 브라우니와 생과일 오렌지 주스를 주문해 주었다. “괜찮아?” “응, 좋아.”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괜찮지. 은범이는 내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맛있어?” 시연은 천천히 초콜릿 브라우니를 스푼으로 떠먹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응, 맛있네.” “그러면 다행이고.” 은범은 가볍게 웃으며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던 중, 시연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네 여자 친구는?” 은범의 손이 순간 굳었다. “너희... 잘 만나고 있어?” “...” 은범은 급히 고개를 들고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었다. ‘...뭐?’ “잘 만나고 있어.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야?” 시연의 질문에 은범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시연은 디저트 스푼을 내려놓고, 잠시 은범을 바라보았다. 은범의 눈빛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시연의 눈가에 희미한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은범아.”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애초에... 여자 친구 같은 건 없지?” 은범은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알았지?’ 시연은 은범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은범은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상,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시연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의 정곡을 찔리자, 은범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안 거야?”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단단한 눈빛으로 은범의 시선을 정면으
시연은 손에 쥔 가방끈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안 돼... 이 정도로 흔들리면 안 돼.’ “사모님,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시연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 순간, 시연이 뒤에서 은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아!” “노은범!” 그러나 은범이는 강수희에게 팔을 세게 잡혀 그대로 멈춰 섰다. “어디 가려고? 설마... 저 애를 쫓아가겠다는 건 아니지?” 그제야 은범은 자신의 눈앞에 어머니가 있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어머니, 여기엔 어떻게...?” 순간적인 당혹감이 있었지만, 바로 이어진 건, 은범의 격한 분노였다. “혹시 시연이한테 뭐라고 했어요? 설마 또 엉뚱한 소리 한 거예요?” 강수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와 경멸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내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그러니?” 그녀는 혀를 차며, 기가 막힌다는 듯한 눈빛으로 아들을 쏘아봤다. “노은범, 넌 도대체 언제쯤 정신 차릴래? 저 여자 동생, 자폐잖아. 너 진짜 그 여자랑 엮이겠다고? 혹시라도 결혼이라도 해서 애 낳으면 어쩌려고? 자폐 유전되는 거 몰라?” ‘또 그 얘기야...’ ‘그 말투, 그 시선, 그 논리... 3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어머니!” 은범은 미칠 것 같았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우주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선천적인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무조건 유전된다는 보장도 없어요!” 순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그게 그렇게 걱정되면, 난 아이 없이 살면 돼요.” “너... 뭐라고?” 강수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번뜩 들렸다. 그리고... 짝! 매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수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지 알고나 있어?” 그러나 은범은 한 치도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