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의 생각대로만 한다면, 그는 지금 당장 본가를 떠나고 싶었다. ‘단 1초라도 지시연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밖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내일 아침에는 할아버지의 아침 식사 자리에 동석해야 했다. 유건은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거칠게 두 모금 빨아들이고는 그대로 객실로 향했다. ‘다행히 본가는 늘 예비 객실을 정리해두는 습관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밤 어디서 자야 할지 몰랐을 텐데.’ 소파에 몸을 던지자 눅눅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다 지시연 때문이야. 그런데 정작 저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잖아.’ ... 이른 아침, 이호민은 부부가 따로 잔 것을 눈치채고 곧바로 고상훈에게 알렸다. 고상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놔둬. 젊을 때 안 싸우고 언제 싸우겠나?” 이호민은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근데 제 생각에는 도련님이 사모님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신경 쓰는 티가 확 나던데요?” “고개 숙인다고 머리카락 안 보이나?” 고상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싸우는 건 싸우는 거고, 적절한 순간엔 도와줄 필요도 있지.” “알겠습니다, 어르신. 제가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 시연은 씻고 내려와 왕성애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이모님, 할아버지 식사 준비됐을까요? 제가 가지고 올라갈게요.” “괜찮습니다.” 왕성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께서는 집사님이랑 이야기할 게 있어서 같이 드신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요. 저는 아침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시연이 계단 쪽으로 향하는 순간, 이호민이 식판을 들고 내려왔다. “집사님.” “사모님.” 이호민은 고상훈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 혹시 도련님과 다투셨나요?”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어른에
어렵게 맞이한 휴일이었지만, 시연은 여전히 바빴다. 이미 맡아둔 번역 원고는 모두 마무리했고, 오늘은 편집장을 만나러 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 이 아르바이트도 그만둬야겠어.’ 이제 은범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된 이상, 시연은 은범의 마음을 끊어내기 위해 더 이상 그의 호의를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곧 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양 교수님 쪽 일까지 맡으면 더 바빠질 테니까.’ 편집장은 아쉬워했고, 시연이 찾아간 임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아가 신경 쓰는 부분은 좀 달랐다. “노은범 쪽은, 진짜로 아무 희망도 없는 거야?” 이 일에 대해, 진성빈이 진작에 진아에게 말해주었다. 그제야 진아도 알게 되었다. 바로 은범이 지난 몇 년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시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 집안에서 날 받아줄 리 없어. 똑같은 아픔을 이미 한 번 겪었어. 두 번 겪고 싶진 않아.”이 말의 무게를 진아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 시절, 시연이 어떻게 버텨냈는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진아였다. “그래, 우리 일에 집중하자. 장래의 지시연 교수님!” “헤헤, 좋아!” 하지만, 지금 공부가 우선이기 전에 해결해야 할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시연의 배 속의 아이... 여러 번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시연은 결정을 내렸다. ‘이 아이는 지우자. 아이에게 미안함은 있지만, 이대로 남겨두는 게 꼭 좋은 일일까?’ ‘건강할지 아닐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마 이 아이도, 세상에 태어나길 원하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의 상황은 유건이 강제로 임신중절수술을 강요하던 그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시연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 병원도 직접 알아보고, 사전 예약도 마쳤다. 오늘은 우선 검사를 받아야 하고 검사 결과는 당일 안에 바로 나온다. 시연은 진료실 앞 긴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그 시각, 병원 복도
시연이 고개를 들었는데, 정말 유건이었다. 그녀는 두 눈에 의문을 가득 담은 채 남자를 바라봤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유건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 어디 있어?” ‘응?’ 시연은 더욱 당황했다. ‘그 사람? 누굴 말하는 거지?’ 주변을 살폈지만,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건의 심장은 더 격렬하게 타올랐다. “이런 일에 노은범은 안 따라왔어?” ‘아...’ 시연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유건은 시연이 임신한 아이가 은범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기요, 내 말 좀 들어봐요...” “뭘 듣는데?” 유건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시연이 무슨 말을 하든, 그의 신경을 자극할 뿐이었다. “노은범이 싫어해서 그래? 우주처럼 될까 봐? 그래서 네 몸 상태도 무시하고 억지로 지우라고 한 거야?” “아니에요...” “아니, 뭐가 아니야?” 시연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내가 스스로 결정했어요.” “확실해?” 유건은 단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우면, 넌 평생 다시는 엄마가 되지 못할 수도 있어.” 유건의 시선이 시연의 아랫배로 향했다. “만약, 이 아이가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라면?” 시연의 온몸이 굳어버렸다. ‘...어떻게 알았지? 검사 결과는 오늘 오후에 나왔을 텐데...’ 시연이 얼어붙은 사이, 유건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자.” ...차 안, 시연은 창문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이 사람이 막으러 올 줄은 몰랐어.’ ‘이번에 못 하면, 다음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내 배도 점점 불러올 거고, 그때가 되면 더 이상 포기할 수도 없을 텐데...’ 본가에 도착한 후, 시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을 닫았다. 그런데, 유건은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돌려 떠나버렸
이달 근무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수술을 내가 있는 동안 확실히 마무리해야 해.’ 그렇게 결심한 시연은 곧장 양석현 교수에게 부탁했고, 다행히도 그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고맙습니다, 교수님.” 기쁜 마음으로 본가로 돌아온 시연은 이 소식을 고상훈에게 알렸다. 마침 유건도 집에 있었다. 그는 고상훈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고상훈이 일부러 전화를 걸어 손자를 일찍 불러들였다고 했다. 시연의 말을 들은 고상훈이 말했다. “할아버지, 시연이가 수술 준비 다 해뒀어요. 최대한 이른 날짜로 정하죠.”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지.” 고상훈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호민이 팔에 뭔가를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 마치 화보 같기도 하고, 잡지 같기도 한 책자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르신, 여기 있습니다.” 그러고는 유건과 시연을 한 번씩 쓱 바라봤다. “두 분이 잘 살펴보세요.” ‘두 분...?’‘뭐지?’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리둥절했다. 고상훈은 빙긋이 웃으며 설명했다. “여기 웨딩드레스 스타일이랑 결혼식 장소 후보들이 있으니까 둘이 잘 골라봐.” 그러더니, 손짓하며 덧붙였다. “특히 시연이가 원하는 걸로 고르면 돼. 유건이, 넌 옆에서 잘 도와주고.” 한 마디 한 마디, 시연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의 뜻은...’ 그녀는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1초, 2초... “할아버지.” 유건이 눈썹을 찌푸리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혹시... 저희 결혼식을 치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당연하지!” 고상훈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다 정해진 일이잖아. 새삼스럽게 물어볼 게 뭐 있어?” 그는 시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 둘, 혼인 신고한 지도 꽤 됐는데, 내 건강 때문에 결혼식을 미뤘잖아. 그동안 시연이 맘고생 많았지.
유건이 아침부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전화기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은 바로 ‘장소미’였다. 유건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유건 씨.] 소미의 목소리는 한껏 나긋했다. “우리 엄마가 오늘 저녁에 집으로 초대하고 싶대요. 시간 괜찮으세요?”거절당할까 봐,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사실 오늘이 엄마 생신이에요. 유건 씨가 와주면 엄청나게 좋아하실 거예요. 응? 와줄 거죠?” 유건은 핸드폰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알겠어. 갈게.” ...저녁, 장소미의 집. “엄마, 진짜 괜찮을까?” 긴장한 소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장미리는 그런 딸을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런 것도 못 참고 이렇게 조바심 내서 어쩌려고? 그렇게 정신없어서야 나중에 고씨 가문의 사모님 소리나 듣겠어?” “알았어요...” 소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향로를 가리키며 조용히 물었다. “엄마, 근데 이거... 정말 효과 있어?” 그녀가 말한 것은 장미리가 직접 구해온 특제 향이었다. 장미리가 이걸 구하기 위해 돈도 꽤 들였고, 여러 사람을 통해 어렵게 손에 넣었다. 장미리는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걱정하지 마. 이건 옛날에 궁에서 전해 내려오던 비법이야. 몸에 해롭지도 않고, 서양 약보다 훨씬 강력하지.” 그녀는 향을 피운 후, 뚜껑을 덮고 코를 막았다. “자, 이제 우리 나가자. 아주머니들도 다 휴가 줘서 내보냈으니까, 잠시 후엔 이 집에 너랑 고 대표 둘뿐이겠네. 엄마가 장담하는데, 오늘 밤, 고 대표는 널 그냥 두지 않을걸?” “엄마!” 소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부끄러워하긴.” 장미리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당장 지난번 로얄호텔 일만 봐도, 하룻밤 사이에 고 대표가 바로 청혼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네가 잘만 하면, 고 대표도 네 손아귀에서
소미는 유건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효과가 있네!’ 여자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 물었다. “유건 씨, 덥죠?”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외투라도 벗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소미는 유건 옆으로 다가간 뒤, 자연스럽게 그의 셔츠 깃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이 단단하게 붙잡혔다. 깊은 눈매 속에서 강렬한 열기가 일렁였고, 유건이 내뱉는 숨조차 뜨거웠다. “뭐 하려고?” 남자의 묵직한 저음이 공간을 울렸다. 소미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됐어,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녀는 일부러 몸을 가까이 붙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외투 벗는 거 도와주려고요.” 여자의 손목이 더욱 세게 조여졌다. “아야...” 소미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남자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결국, 소미는 유건의 다리 위에 앉게 되었다. ‘이거야! 완벽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소미는 곧바로 두 팔을 남자의 목에 감았다. 부드러운 살갗이 살짝 닿자, 유건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 그러자 목젖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유건 씨...” 눈앞의 여자가 붉은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유건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소미의 턱을 받쳤다. 손끝이 여자의 입술에 닿았다. ‘이상하다... 너무 두꺼운데?’ 남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유건의 손가락을 떼어, 다시 한번 여자의 지문을 확인했다. ‘진한 립스틱 자국... 이런 거, 정말 싫어.’ 하지만, 소미는 이미 기쁨에 들떠 있었다. 유건의 반응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유건 씨, 키스해 줘요.” 너무나 직설적인 말. 그녀는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제야, 유건도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시선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남자여도, 밥 먹다
말로 해도 안 듣는다면, 힘으로라도 떼어내는 수밖에. 유건은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며 팔을 뻗었다. 남자의 움직임에 소미는 중심을 잃었고, ‘턱’ 소리와 함께 의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그녀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황급히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날 떼어냈다고?' 유건은 억눌린 듯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목젖이 한 차례 위아래로 움직였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를 가지고 노는 건 절대 용서 못 해.” 차가운 한마디를 남긴 채,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유건 씨!” 소미는 황급히 일어나 뒤따르려 하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의자 다리에 발이 걸려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유건 씨, 유건 씨!!” 그녀는 바닥을 치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까지 됐는데... 방금 분명... 반응했잖아? 그런데도 끝까지 버틴다고?' ...시연은 BLUE 앞에서 핸드폰을 쥐고 서 있었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한 거지?” 통화 상대는 장미리였다. [쓸데없는 질문 말고, 부명주의 유품이 필요하지 않아?]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필요하면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들어와.” 뚝- 전화가 끊겼다.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 장미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네 엄마의 유품이 아직 우리 집에 남아 있어. 가져갈래?] 만약 그냥 자신의 물건이었다면, 시연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유품은 다르다. 이미 어머니를 잃었고, 남겨진 물건들은 시연이 가진 엄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자 유품이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냥 물건만 받으면 돼. 설마 장미리가 날 어쩌기야 하겠어?’ 결국, 시연은 클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속한 VIP 룸 앞에 도착하자, 시연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살짝 불안해진
유건은 화가 나면 날수록, 겉으로는 더욱 차분해졌다. 그는 비웃듯 짧게 웃으며 낮게 말했다. “지한아, 속도 올려.” “네, 형님.” 지한이 즉시 액셀을 밟으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 차창 넘어, 유건은 시연이 진광수의 차에 타는 모습을 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내가 네 밥을 굶겼어? 아니면 돈이 부족했어?’ ‘왜 또 남자를 끌어들이는 거지?’ ‘설마 돈이 필요해서?’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면 될 거 아니야!’ 그리고 남자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 ‘그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아, 맞다. 내가 막지 않았으면, 벌써 없앴겠지.’ ‘지시연은 자기 몸속에 있는 생명을 그렇게까지 없애고 싶어 했던 사람이잖아.’ ‘그러면ㅎ, 이다음은...?’ 유건의 머릿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진광수 같은 늙고 더러운 놈이, 지시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단순히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아!’운전석에서 지한이 눈치를 살폈다. 한순간도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유건의 얼굴.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이거 뭔가 이상합니다.” “...뭐?” 유건은 싸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지시연 편드는 거야? 그러면 어디 한번 말해봐. 뭐가 이상한데?” 지한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진광수 나이가 몇인데요?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돈? 형님보다 많을 리도 없잖아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유건은 더 화가 났다. ‘결혼식은 거부하면서, 고작 그런 놈한테 안기는 건가?’ 순간...‘아니, 뭔가 이상해.’ 유건의 머릿속이 다시 맑아졌다. 남자는 질투 때문에 흐려진 시야가,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지한 말이 맞네. 지시연이 지금 저럴 이유가 없는데?’ ‘나를 싫어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노은범도 있는데, 왜?’ “지한, 차 돌려. 당장 따라가!” “네, 형님!” 그러나, 차를 돌려 돌아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