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의심이 한 번 싹트고 나자, 진아는 태권에게 자연스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의식적으로 더 주의 깊게 보게 됐고, 그러다 보니 이상한 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몇 번이나 태권이 전화받을 때 유난히 사람을 피해 다니는 모습을 봤다.회사에 직접 찾아간 적도 있었는데, 정상적인 근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허탕을 쳤다.이상했다.그것도 아주 많이.진아는 여러 번 태권에게 직접 물어봤지만, 그때마다 태권은 얼버무리기만 했고,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끝내 하지 않았다.그러다 결국 진아는 결정적인 단서를 붙잡게 됐다.그날은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은 날이었다.식사가 끝나자 태권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받으러 갔다.진아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웠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태권의 뒤를 따라갔다.태권은 베란다에 서 있었다.동생이 바로 뒤에 있는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왜 또 전화하는 거야? 돈은 이미 줬잖아!”전화기 너머에서 누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태권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 갔다.눈에 띄게 당황했고, 분노도 감추지 못했다.“뭐? 또 달라고? 너희 진짜 끝이 없네?”잠시 침묵이 흘렀다.태권은 상대의 말을 듣고 있었다.“하아... 알았어.”결국 체념한 듯, 태권이 입을 열었다.“이번엔 얼마야?”이를 악물듯 말하더니, 곧바로 덧붙였다.“좋아, 알겠어. 그런데 이번엔 반드시 원본이랑 모든 백업 파일 다 넘겨줘야 해.”전화를 끊는 순간, 태권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렸다.그때 바로 뒤에 서 있던 진아와 눈이 마주쳤다.태권은 온몸이 굳은 채, 흠칫 놀랐다.“진아?!”“오빠.”진아는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돌려 말하지 않았다.“누구 전화야?”“아니야...”태권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고개를 저었다.“그냥 친구야.”“친구?”진아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내가 듣기엔 아니던데.”잠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던 진아가 조심스럽게, 그
채숙희의 중재와 정리 덕분에, 태권은 직접 집을 찾아가 중매자와 약속을 어겼던 여자 양쪽에 모두 사과했다.그런데 뜻밖에도, 며칠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중매자가 전화를 걸어왔다.여자 쪽에서 태권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그에 대한 인상도 꽤 괜찮았다는 이야기였다.[여자분 말씀이요, 태권 씨랑 한 번 만나 보면서 교제해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사모님, 아드님한테도 그럴 생각이 있는지 한 번 물어보시겠어요?]채숙희는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얼굴에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곧바로 그 뜻을 태권에게 전했다.“아들, 네 생각은 어때? 그 여자분 직접 봤잖아. 느낌은 어땠어?”태권은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입을 열려는 듯하더니,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말 좀 해!”채숙희는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사람 애간장 좀 태우지 마! 내가 돌덩이를 낳았나?”“풉...”진아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하하...”진아는 어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얼굴이 발그레한 오빠를 바라봤다.“엄마, 아직도 모르겠어요? 오빠 얼굴 저렇게 빨개진 거, 본 적 있으세요?”태권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오빠, 그 여자분 마음에 들었지? 맞지?”‘마음에 들었던 게 분명해! 딱 보면 알지.’남매라서 더 그런 걸까?젊은 사람의 마음은 젊은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었다.사실 태권에게도 이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사과하러 찾아갔을 뿐인데, 여자분을 처음 본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마음이 생겼어도, 내가 무슨 낯으로 그런 말을 해.’약속을 어긴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찾아간 목적도 사과였지, 소개팅이나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사과하러 간 자리에서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래서 태권은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여자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왔다.그런데, 그걸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엄마...”태권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
임병지는 진아를 한 번 흘끗 보더니 말했다.“당신이 안 쉬면 진아도 못 쉬잖아. 진아는 밤새우면 안 돼.”채숙희는 딸이 안쓰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만 잡시다. 진아, 너도 얼른 자.”‘임태권 이놈, 잠깐은 도망칠 수 있어도 평생 집에 안 들어올 수는 없지.’모두는 각자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눈을 뜬 사람은 진아였다.계단을 내려가던 중, 현관 쪽에서 뭔가 인기척이 들려왔다.가서 보니 밤새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태권이었다.“오빠?”진아는 눈을 크게 뜨고 태권을 바라봤다.“이제야 들어와? 분명히 말하는데, 오빠는 완전히 끝났어!”진아는 태권의 팔을 잡아끌어 거실 소파에 앉혔다.“어제 소개팅은 왜 안 갔어?”“나...”태권은 잠시 멈칫했다가 말했다.“갔어.”안 갔으면, 밤새 집에 안 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됐거든!”진아는 오빠를 노려봤다.“거짓말까지 해? 소개해 준 분한테 전화 왔어. 오빠가 여자분과의 약속 펑크 냈다고!”태권의 표정이 굳었다. 얇은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진짜 오빠는...”진아는 태권의 이마를 콕 찔렀다.“배짱도 좋다, 진짜. 처음부터 말했잖아. 그냥 밥 한번 먹는 거라고. 당장 결혼하라는 것도 아닌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나...”그때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채숙희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태권이야? 태권 돌아온 거야?”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숙희는 거실로 뛰어 내려왔고, 한눈에 태권을 발견했다.“엄마...”태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 그래.”채숙희는 비웃듯 웃었다.“집에 올 줄은 아네? 너 거기 가만있어.”그녀는 몸을 돌려 창고로 향하더니, 이미 사용한 지 오래된 닭털 먼지떨이를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태권을 향해 그대로 휘둘렀다.“아!”한 대가 내려꽂히자 태권은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움츠렸다.“엄마! 아파요,
임씨 집안에서 채숙희의 말은 곧 ‘따라야 하는 명령’이었다.태권은 투덜투덜 불만을 늘어놓다가도 결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진아가 슬쩍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목소리를 낮춰 말했다.“그렇게 죽을상 하지 마. 맞선이잖아, 꼭 잘돼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서 보고,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밥 한 끼 잘 사 주고 예의 차리면 되잖아. 그렇지?”“응...”태권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밖에 없지.”어쨌든 그날 밤, 태권은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얌전히 맞선 자리에 나갔다.태권에게는 첫 번째였다.여자와 단둘이 만나는 것도, 게다가 ‘교제’나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도.그래서 집안 전체가 괜히 긴장했다.그중에서도 가장 긴장한 사람은 단연 채숙희였다.채숙희는 밤이 새도록 수시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묻고 싶었다.잘 진행되고 있는지.여자분은 어떤지.태권이 마음에 들어 하는지.“엄마.”진아가 그 낌새를 눈치채고 재빨리 말렸다.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지금 전화하면 안 돼요. 참으세요, 제발.”“왜?”“오빠 맞선 중이잖아요.”진아는 진지하게 말했다.“이때 부모가 끼어들면, 상대방이 싫어해요. 잘못하면 오빠한테 ‘마마보이’ 딱지 붙는다고요.”“그렇게까지?”채숙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그렇다니까요.”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나 같아도 싫어요. 미래 시어머니가 아들의 일거수일투족 다 챙기는 거요.”“아, 맞다 맞다.”채숙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원래 아들에게 집착하는 타입은 아니었다.다만 오늘만큼은 너무 긴장됐을 뿐이었다.“네가 말해 줘서 다행이다.”채숙희는 한숨을 쉬었다.“괜히 전화할 뻔했네. 에휴... 난 그냥 걱정이야. 네 오빠는 정말 백지장 같은 애잖아. 말도 잘 못 하고, 여자한테 점수 따는 스타일도 아니고.”“우리 오빠가 뭐가 그렇게 못났다고 그래요...”진아가 바로 반박했다.“네 오빠니까 네 눈엔 멋있어 보이
“고마워.”진아는 거절하지 않고 커피를 받아 들었다.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당신 돈 없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럼 나도 사양 안 할게... 잘 가!”진아는 커피 봉투를 들고 돌아섰다.지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그러다 문득 진아는 그가 아직 거기 서 있다는 걸 아는 듯, 뒤돌아보지 않은 채 팔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나 간다!”“하...”지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리고 불현듯 떠올랐다.그해, 바로 이 자리에서 그가 처음으로 진아를 봤던 날이.커피숍 앞에 서서 무슨 맛을 고를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던 얼굴.이제는... 같은 장소에서 작별하고 있다.지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햇빛이 눈꺼풀 위로 쏟아지며 따끔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그날 밤, 지하는 곧바로 제남도를 떠나 G시로 돌아왔다.“이렇게... 끝난 거야?”강석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유건과 정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지하를 바라보는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그럼 어쩌겠어?”지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쓴웃음이 스쳤다.“그 사람이 친구로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난 그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 아니면... 또 억지로 붙잡을까?”그는 강제로 붙잡는 일을, 이미 한 번 해봤다. 두 번은... 감히 할 수 없었다.더구나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유건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지하와 잔을 부딪쳤다....같은 시각, 시연도 소식을 들었다.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지난 1년 동안의 일을 다 알게 됐는데도... 결국 헤어진 거야?]“응.”진아는 침대에 엎드린 채 턱을 괴고 있었다.“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알고, 고맙기도 해. 근데...”잠시 말을 고른 뒤, 조용히 덧붙였다.“나랑 그 사람은 시작이 너무 불순했어.” [그 말은...]시연은 곧바로 이해했다. 지하가 진아에게 관심을 가졌던 첫 이유가... 오설아와 닮은 얼굴이었으니까.하
지하의 긴장한 얼굴을 보며 진아는 잠시 멍해졌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괜히 한두 마디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스쳤지만, 말이 입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삼켜졌다.진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용서할게.”지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그토록 기다렸고, 심지어 꿈속에서도 수없이 되뇌던 대답이...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너무 쉽게 나와 버렸다.지하는 현실감이 없었다. 꿈보다도 더 비현실적이었다.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지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진아야... 그 말, 진짜야?”“응.”진아는 손에 든 커피잔을 천천히 돌리며 웃었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용서 안 할 거였으면 그냥 당신이랑 또 싸웠겠지. 우리... 싸워 본 적 없었던 것도 아니잖아?”그 말은 섬에서의 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 진아는 마음과 말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했고, 단순했고, 감정에 정직했다.하지만 지하는 바보가 아니었다.그는 진아의 표정에서 그녀 마음의 일부를 읽어 냈다.결국 지하는 시선을 천천히 내려갔다가 마치 한숨처럼 말이 흘러나왔다.“나를 용서하기만 한 거지... 다시 나랑 엮일 생각은 없는 거지?”진아는 잠시 멈칫했다.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고개 끄덕임 하나에 지하의 가슴이 찌르듯 아팠다.“진아야, 나...”“다 지난 일이야.”진아는 강하지도, 차갑지도 않게 그를 끊었다.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눈빛도 온화했다.그런데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더 단단해 보였다.“나도 알아. 다 지난 일이야.”지하는 알고 있었다.오설아와의 일도, 그 후의 모든 것도... 이미 완전히 과거가 되었다는 걸.진아는 밝게 웃었다.“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과거로 보내 줘.”지하는 말을 잃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진아의 흔들림 없는 눈을 마주하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자...”진아는 이미 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