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미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소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네가 유건 씨의 곁을 떠난다면, 고소를 취하해 주지.” 순간, 시연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러나 그녀는 막상 직접 듣게 되니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소미는 매끄러운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여유롭게 덧붙였다. “잘 생각해 봐. 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가 될 거야. 한쪽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 한쪽은 어릴 적부터 함께한 소중한 친구.” “이제 선택해.” 둘의 시선이 서늘하게 맞부딪혔다. 하지만, 시연은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떠날게요.” ‘...뭐?’ 소미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약속 지켜요. 고소는 반드시 취하해줘요.” 그 말을 남기고, 시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소미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됐다. 이건 기회야. 절대 놓칠 수 없는 제일 좋은 기회!!’ ...병원을 나서자마자, 시연은 곧장 본가로 향했다. ‘약속했으니까, 최대한 빨리 떠나야 해.’ ‘고소 취하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바로 본가에서 나와야 할 것 같아.’ 다행히, 지금은 본가에서 조용했다. 시연은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가 옷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옷가지들을 하나둘 정리하며,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짐을 전부 옮기지 않았으니까.’ 시연의 짐은 기숙사에 대부분의 물건이 남아 있어, 많이 챙길 필요도 없었다. 유건이 사준 옷들은 그녀가 손끝 하나도 대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애초부터 그녀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연은 그렇게 약 30분 만에 모든 정리를 끝낸 뒤, 캐리어를 조용히 끌고, 1층으로 내려왔다. 혹시라도 집사 이호민이 눈치채고 고상훈
‘이혼이라니...’전화기 너머에서 그 말이 들려온 순간, 유건은 가슴을 순간적으로 움켜쥐었다. 숨이 턱 막히고, 한순간 귓가가 먹먹해졌다. ‘...또 이혼이야? 벌써 두 번째...’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처음과는 다르게, 이 여자... 이제 진짜 내 아내인데...’ ‘하지만, 이 여자 또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이혼 이야기를 입에 올리다니!’ ‘그래, 결국 너한테는 나도 다른 놈들이랑 똑같은 거지?’ ‘필요 없으면 버려도 되는, 가볍고 하찮은 존재.’ 분노, 억울함, 배신감...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이며 유건도 한순간 폭발했다. [지시연, 또 이혼하자고?] 남자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아졌다. [너 혼자 결정하면 끝이야? 내 허락도 없이?]시연은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그럼에도 목이 타들어 갔다. “...왜요?”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유건 씨도 장소미 좋아하잖아요. 우리가 이혼하면, 이제 제대로 함께할 수 있잖아요.”[...헛소리하지 마.]유건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참아왔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폭발했다. [이혼? 그럴싸한 핑계를 대면서 떠날 생각 하지 마.][대체 이유가 뭐야? 갑자기 이혼하자는 이유가 뭐냐고!]시연이가 대답하지 않으면, 유건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유를 알아낼 것이다. “...그게...” 순간, 시연이가 머뭇거렸다. 예전에 유건이 자신의 병원 실습을 중단시켰던 일이 떠올랐다 ‘고유건은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야.’ 그녀는 자세를 낮추고,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건에게 간절히 부탁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시연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장소미예요.” 그 순간, 유건의 눈빛이 위험하게 날카로워졌다. [장소미가 뭐라고 했는데?]시연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그가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내가... 장소미를 찾아갔어요.” “그 사
‘어쩌지?’시연은 막막했다. ‘결자해지라고 하잖아.’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장소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고유건이 그렇게 장소미를 사랑하는데, 만약 장소미가 직접 부탁하면 놓아주지 않을까?’ ‘어쨌든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 해.’ 한시가 급해서 시연은 곧장 강울대학교병원의 VIP 병동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굳어버렸다. ‘이게 뭐야...’ 그녀는 눈앞의 광경에 발이 묶여버렸다. 자신이 너무 급한 나머지 생각 없이 들어왔는데, 유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유건은 병상 옆에 앉아 사과 껍질을 정성스럽게 깎고 있었고, 소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무언가 나지막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미가 먼저 시연을 봤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그녀는 시연과 시선을 맞추더니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기분 좋은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진 선생님, 어서 와요.” “아... 네.” 시연은 발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옮겨가며 두 사람 앞에 섰다. 슬쩍 유건을 봤지만, 그는 마치 시연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사과 껍질을 끝까지 깎아낸 유건은 과육을 가지런히 잘라 접시에 담아 소미에게 건넸다. “자, 먹어.” “고마워요.” 소미는 자연스럽게 받아 한 조각을 입에 넣었고, 그러고 나서야 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그게...” 시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살짝 창백해지며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혹시... 소송은 이미 취하하셨나요?” “네?” 소미가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웃음기가 희미해졌다. “당연하죠. 왜요? 설마 제가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그런 뜻은 아니에요.” ‘어쩌지...’ 시연은 속으로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이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은 유건을 향해 어렵게 시선을
“아, 그래요.” 유건이가 떠나자마자, 소미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자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지고, 눈빛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고유건... 왜 그렇게까지 진성빈을 놓아주지 않는 거야?’ ‘정말... 나를 위해 복수를 하려는 거야?’ ‘진성빈과 지시연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고유건조차 봐주지 않는다면... 그 이유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는데...’ ‘아니면, 지시연의 이상한 행동들 때문에 고유건이 언짢아진 걸까?’ ‘하지만 나 역시 고유건에게 ‘특별한 존재’야...’ 소미는 유건이 정성껏 깎아준 사과를 한 조각 집어 들고 천천히 씹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니까 지시연, 결국 누가 웃게 될지는 모르는 거야.” ...VIP 병동 입구. 시연은 멍하니 서서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유건이었다. 그가 시연 옆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 시연은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아직 안 갔어? 날 기다린 거야?” 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미 결과가 뻔한 일을 가지고, 더 이상 당신을 귀찮게 하진 않을 거예요.” “뻔한 결과?” 유건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잠시 멈칫했다. 그는 시연이가 결국 자신에게 매달릴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이 여자, 여전히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군.’ 이렇게 생각하자 유건은 화가 치밀어 올랐고, 냉소하며 물었다. “그래? 네가 아는 게 뭔데? 한번 말해봐.” 시연은 손가락을 꼭 쥐었고, 입술을 떼며 조용히 말했다. “고 대표님은 사랑하는 여자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거잖아요.”“첫째, 장소미 앞에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싶으시죠? 둘째, 장소미가 다쳤으니 고 대표님도 가슴이 아파서... 그러니까 나도 다 이해해요.” “이해한다고?” 유건의 눈빛이 싸늘해졌고, 시
유건이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혼자만 돌아온 거냐?” 고상훈은 지팡이를 짚고, 이호민의 부축을 받으며 눈을 부라렸다. “하나만 물으마. 시연이는 어디 갔지?” 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벌써 할아버지가 아셨다고? 생각보다 빠른데.’ ‘뭐, 그럴 만도 했지. 한집에 살던 사람이 사라졌는데,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고상훈이 시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유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유건 자신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네, 떠났어요. 아마 다시는 안 돌아올 거예요.” “이놈!” 고상훈은 손에 쥔 지팡이를 번쩍 들었다. “어르신!!” 이호민이 놀라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할아버지!!” 다행히 유건도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 한 발짝 물러섰다. “이 녀석이 감히 날 피해?” 고상훈은 거친 숨을 내쉬며 씩씩댔다. “솔직히 말해라. 네가 시연을 내쫓은 거냐?” “제가요?” 유건은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대체 누가 손주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 배은망덕한 여자는 신경도 안 쓸걸?’ ‘떠날 때, 할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생각했을까?’ 그는 기분이 더러워져 굳이 변명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요, 제가 그랬다고 치죠.” “어처구니없는 놈!” 고상훈은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어 올리면서 손끝을 미세하게 떨었다. “결혼할 때부터 내키지 않아 하더니만, 이럴 줄 알았어!” “시연이한테 제대로 못 해준 것도 모자라, 결국 내쫓았다고?” 노인의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고상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 보고 있었다. “너, 결국 그 여배우 때문이지?” ‘...?’ 유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할아버지가 장소미까지 알고 계신다고?’ 그는 한순간 뜨끔했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할아버지, 이건 소미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헛소리 집어치워!” 고상훈은
시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나요?”전화기 너머에서 이호민이 고상훈의 상태를 전했다.“네, 집사님,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시연은 눈을 감고 깊이 생각에 잠겼는데, 손을 내렸을 때 눈빛은 한층 맑아져 있었다.‘그래... 이제야 알겠어.’‘고유건이 이혼을 원치 않는 이유는, 바로 할아버지 때문인 거야.’‘애초부터 우리의 결혼은 계약이었고, 그 계약의 중심엔 할아버지가 있었어.’‘그런데 나는 하필이면 할아버지가 큰 수술을 앞둔 시기에 이혼을 요구했고, 고씨 가문의 본가에서 나오려 했어...’‘할아버지가 이 상황을 아셨다면, 당연히 우리의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거야.’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어떻게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근데 답은 하나뿐일 것 같아... 바로 고유건을 만족시키는 것...’‘고유건이 만족해야만 성빈을 살릴 수 있으니까.’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진 듯했다. 시연은 지체할 겨를 없이 가방을 챙겨 본가로 향했다.본가 앞에 도착하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시연은 초인종을 눌렀고, 응답한 사람은 이호민이었다.[사모님! 돌아오셨군요?]시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네, 집사님.”...이호민이 문을 열려는 순간, 계단을 내려오던 유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가로막았다.“열지 마십시오.”“도련님?”이호민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요?”유건은 냉랭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열지 마세요.”“하지만... 알겠습니다.”이호민은 어쩔 수 없이 인터폰을 끊었다....밖에서 대화를 모두 들은 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쉽게 풀릴 일이 아니야.’그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뚜- 뚜-몇 번의 신호음 끝에 연결되었다.“유건 씨.”시연은 긴장한 듯, 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남자의 목소리는 무심하고 건조했다.[
비가 촘촘히 내렸다.유건은 우산을 들고 눈을 살짝 내리깔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시연을 향해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였다.시연은 온몸이 비에 젖은 채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유건 씨.”그 순간, 유건은 이성을 잃었고, 단숨에 시연에게 다가가 우산을 그녀 손에 쥐여 주었다.“이거 받아!”“네...”시연은 멍하니 우산을 잡았다.잠시 후, 유건은 자기 재킷을 벗어 여자 머리 위로 덮었다.“바보야! 우산도 없이 나왔어?”시연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깜빡했어요...”유건은 그녀를 흘깃 노려보더니, 거칠게 어깨를 감쌌다.“들어가!”그는 거의 시연을 반쯤 안은 채로 본가 안으로 데려갔다.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유건은 우산을 대충 한쪽에 던진 후, 시연을 바라보았다.“위층에 가서 씻어.”시연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녀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조용한 1층에 주방에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시연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곳에 있던 유건은 한 손에 컵을 들고 있었다. 그는 시연을 흘깃 보더니, 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앉아.”“네.”시연은 조용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유건도 그녀 옆에 앉으며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컵을 가리켰다.“마셔. 생강차야.”“고마워요.”시연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씩 마시면서도 마음이 불안했다.‘이 사람... 화가 풀린 걸까?’‘나에게 직접 생강차까지 끓여주다니.’유건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고, 시연이 거의 다 마신 걸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제 말해. 왜 온 거야?”시연은 잔을 내려놓고, 긴장된 얼굴로 남자를 마주 보았다.‘지금 이 사람이 화내지 않은 것은, 나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 것 같아.’“내가 잘못했어요. 함부로 이혼 얘기를 꺼낸 건 정말 내 실수였어요. 미안해요.”“잘못했다고?”유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비가 완전히 그치자, 유건은 말없이 차에서 내려 앞장서 걸었다.‘정말 기숙사까지 왔네.’시연은 남자의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갔다.갑자기 유건이 멈춰 서더니 돌아보았다.“뭐 해? 안 따라오고.”“아, 갈게요!”유건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조심스러웠지만, 시연은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기숙사 입구에 서서, 유건은 말없이 팔에 걸쳐 있던 재킷을 시연에게 내밀었다.시연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멍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여전히 말없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는 유건.하얀 셔츠 아래 드러난 단단한 남자의 팔뚝이 눈에 띄었다.유건이 시연을 바라보았다.“기숙사 관리인한테 말하고 와. 내가 들어가서 네 짐을 옮겨야 하니까.”‘아, 그 뜻이었구나.’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관리인에게 다가가 허락을 받은 후, 문 앞에서 손짓하며 말했다.“이제 들어와도 돼요!”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걸어왔는데, 오래된 기숙사는 어둡고 낡아 보였다.남자의 미간이 점점 깊어졌다.“계속 여기서 살았다고?”“네... 그런데 왜요?”시연은 유건이 왜 불만스러워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괜히 사람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 얼른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짐은 다 싸놨어요. 옮기기만 하면 돼요.”좁은 방 안에는 두 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가득 쌓인 짐들로 채워져 있었다.유건은 방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돌렸다.남자의 큰 키 탓인지 방이 더 비좁아 보였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낸 거야...’그는 짐을 살펴보더니 곧바로 캐리어를 들었다.“이게 다야?”“네, 다예요.”시연도 함께 짐을 들려 했지만, 유건이 날카롭게 말했다.“놔. 네 상태에서 짐 옮기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그 말에 시연은 움찔하며 손을 뗐다.‘맞다, 나 임신했잖아.’실은 이 사실에 시연보다 유건이 더 신경 쓰고 있었다.“내가 할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그는 단호하게 말하며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갔지만, 곧 다시 돌아와 남은 짐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