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괜찮아?” 시연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는데, 이건 명백한 저혈당 증상이었다. 그녀는 보통은 배가 너무 고플 때만 발작했지만... ‘오늘은 다르네.’ ‘아마... 임신 때문일지도...’ 은범은 그녀의 체질을 알고 있어서 바로 한 손을 주머니로 넣었다. 곧, 남자의 손끝에 닿은 작은 사탕이 나타났다. 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아직도 이걸 챙기고 다닌다고?’ “자, 시연아.” 은범은 조용히 포장을 벗기고, 시연에게 내밀었다. 시연은 사탕을 받아 들고 입에 넣었다. 여자의 입안에서 퍼지는 단맛과 달리, 마음은 너무도 씁쓸했다. “좀 괜찮아?” 은범은 여전히 시연을 반쯤 안은 채, 온 신경을 그녀에게 쏟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증상이 비교적 심각했기에 시연도 나아지는 걸 느끼지 못했다.은범은 망설임 없이 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병실로 데려다줄게!”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녀가 은범의 품에 안긴 채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정민환은 병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 말까지 더듬었다. “이... 이보세요! 당장 우리 형수님 내려놔요!” 은범이 날카롭게 노려봤다. “몸이 안 좋아서 걷지도 못하는데, 내려놓으라고요?” “아, 그건...!” 민환은 할 말을 잃었고,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 은범은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시연이 힘겹게 손끝으로 보호자 침대를 가리켰다. “응.”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내려놓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좀 괜찮아?” “응...” 시연의 목소리는 작았고, 아직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은범은 테이블 위에서 티슈를 뽑아, 그녀의 이마와 뺨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더 필요한 거 있어?” “아니, 됐어...” “괜히 사양하지 마.” 그는 주변을 훑어보다가 깨달았다. ‘그 남자는 여기 없네.’ ‘고유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은범의 말이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유건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여보, 노 사장님이 묻잖아? 대답을 안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아?”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투였다. 시연은 굳은 표정으로 은범을 향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난 괜찮아.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이제 가.” “지시연!” 하지만 은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짙은 눈매에 어둠이 드리웠다. 시연을 도망가지 못하게 막듯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줘. 이 시람과 함께해서... 행복해?” 다시 한번, 시연은 침묵했다. 하지만 은범은 시연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연이는 행복하지 않은 거야.’오랜 시간 함께했던 사람이었기에, 은범은 시연이 행복할 때 어떤 모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범은 가슴이 미어졌고, 지금 당장 시연을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연아, 행복하지 않다면... 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어?” 그가 손을 놓은 건, 시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길 수 없는 권력을 상대하고 있는 건 알겠지만...’시연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너까지 날 걱정하면, 더 피곤해져. 늦었으니까 이만 돌아가.” “시연아...” “노 사장님.” 은범이 더 말하려 하자, 이번엔 유건이 끊어버렸다. 유건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속에 감춰진 분노는 차갑게 서려 있었다. “내 아내가 가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어요?”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덧붙였다. “노 사장님, 우리 와이프를 데려다준 건 고맙지만, 계속 옆에 붙어 있는 건... 엄연한 스토킹입니다. 보안팀 부를까요?” 유건은 이런 말을 장난으로 하지 않는다는 걸 은범도 알고 있었다. 결국, 은범은 깊은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시연아, 잊지 마. 난
그 말을 끝으로, 시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할 말 다 했어요. 이젠 좀 쉬고 싶어요.” 하지만, 유건이 시연을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가볍게 입을 뗐다. “네가 말하는 공평이라는 게 뭔데? 내가 어떤 여자랑 만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너도 어떤 남자를 만나든 내버려두라는 뜻이야? 그 남자랑 팔짱 끼고, 다정하게 지내도 된다는 의미냐고.” 시연은 순간 굳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던가?’ ‘아, 그렇구나.’ ‘이 사람은 애초부터 날 그런 사람으로 봤던 거야.’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건이 다시 말했다. “안 돼. 난 허락 못 해.”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네 과거는 신경 안 쓰겠다고 했으니까, 정말 신경 안 쓸 거야. 하지만 앞으로는 안 돼. 다시는 그 남자 만나지 마.” 은범이 시연을 바라보던 눈빛, 유건은 그것만 떠올려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러나, 시연은 피식 웃었다. “당신은 괜찮고, 난 안 된다는 거예요?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남기고, 시연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훅-하지만 곧바로 유건이 담요를 잡아채 버렸고, 시연은 기어코 포기했다. ‘됐어. 그냥 덮지도 말자.’ “말 다 안 끝났어. 자지 마.” 그 순간, 유건은 두 손이 허리를 감싸며 시연을 거칠게 끌어올렸다. 힘이 실린 손길, 강압적인 태도. “고유건 씨!!!” 시연은 버티려 애쓰며 유건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강하게 붙잡았다. “더 말할 거 있어요? 난 할 말 다 했어요. 놓으라고요!!” 그녀가 더 강하게 밀쳐내려 하자, 남자의 손은 더 깊어졌다. 시연은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난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장소미는 못 놓겠으면서, 왜 그 사람한테 가지 않는 거예요? 왜 나까지 붙잡아두는 건데요?!” 순간, 유건의 눈빛이 변했다. ‘나 없이 살고 싶은 거야?’ ‘이 여자가 원하는 삶... 그게
시연의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그 한 대가 유건의 인내심에 불을 붙였다. ‘이틀 동안, 나는 장소미의 임신 소식에 휘둘리면서도 머리로는 장소미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속으로는... 이 여자를 놓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여자는? 웨딩드레스 선택도 미루고, 전 남자 친구와 만나고.’ ‘그 어디에도 나를 신경 쓰는 모습은 없었잖아.’ ‘내가 이렇게 애쓰는 게... 다 의미 없는 거였나?’ 결국 남자의 분노가 이성을 삼켰다. 유건은 고개를 숙여, 시연의 입술을 덮었다. “고유건, 윽...” 여자가 몸부림치고, 울며 애원해도 그는 끝까지 외면했다. 눈물마저 메마른 시연은, 텅 빈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이 사람이... 날 이렇게까지 짓밟다니.’ ‘이젠 정말 끝이야.’ 예전과 달리, 유건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놓았다. 그는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담배를 꺼내긴 했지만, 시연을 배려하는 듯이 발코니로 나갔다. 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씻어야 해.’ 그녀는 욕실로 향하려고 했지만, 몸이 너무 무거웠다. 쾅! 큰 소리와 함께, 시연이가 문 앞에서 쓰러졌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돌아봤고, 손에서 담배와 라이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연아!” 그는 단숨에 달려갔다. 시연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이마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유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까부터... 계속 아프다고 했잖아.’ 여자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는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그저, 분노에 눈이 멀어 시연을 몰아붙였을 뿐이다. 유건은 즉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선생님! 빨리 선생님을 불러!” ...시연의 상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검진 후, 의사는 입원 조처가 내려졌다. “원래 저혈당 병력이 있으셨죠?” “네.” “검사 결과, 임신 합병증이 나타났습니다. 다행히 심한 상태는 아니니, 꾸준히 관리
“와.” 부지하는 어이없다는 듯, 주지한에게 손짓했다. “야, 창문 좀 열어라. 냄새 장난 아니다.” 지하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향했다. 꽉 찬 재떨이. ‘대체 얼마나 피운 거야?’ 지하는 다시 유건을 바라보았는데, 유건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지하는 혀를 찼다. “몸 버릴 일 있어? 네 와이프가 그냥 잠시 연락 안 된다고, 무슨 세상이 끝난 것처럼 이러고 있냐?” 유건은 아무 말 없이, 연기만 길게 뿜어내면서 등받이에 기대어 무겁게 눈을 감았다. 그런 유건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하는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너, 도대체 네 와이프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지한이 말로는, 아직 몸도 제대로 회복 안 됐다던데.” 유건은 묵묵히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난 진짜 개X끼야.” 지하의 눈썹이 올라갔다. “너 설마, 손댄 거 아니지?” 유건은 대답이 없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유건의 침묵이 모든 걸 대변했다. 지하는 황당함에 머리를 긁었다. “야, 미쳤냐?” 그리고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를 상대로 그건 아니지.” “알아.” 유건은 반박하지 않은 채 오히려 더 깊은 후회의 빛이 띠었다. “내가 죽일 놈이야.” 이미 스스로를 자책하는 유건에게, 지하는 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아이고... 됐다. 어차피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시연의 행방은 묘연했다. 모두가 시연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다 뒤졌다. 시연의 생활 반경은 넓지 않았다. 학교, 강울대학교병원, 그리고 태산요양병원에 있는 동생. 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도 이제 유건뿐이었다. 시연의 친구들? 진성빈과 임진아도 이미 주지한이 확인했다. 하지만 두 사람도 시연의 행방을 알진 못했다. 아마 모든 것을 예상한 시연이 일부러 연락을 피했을 테니 말이다. ‘그럼 대체 어디
병실 안은 숨소리마저 무겁게 가라앉았고, 유건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그대로 내던졌다. 탁! 무겁게 떨어진 핸드폰과 함께, 유건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는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저 쓰레기, 당장 찾아.” “네, 형님!” 정민환은 황급히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지하 도련님 쪽에서도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곧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유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아무 말 없이 발코니로 걸어갔다. 이어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모든 걸 장소미는 조용히 지켜봤다. 애초에 소미는 대화에 낄 틈조차 없었지만,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지시연이 사라졌구나.’ ‘설마... 고유건이 이별을 고해서 그런 건가?’ 그리고 속으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면 참, 영리한 애네.’ ‘실종이랍시고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건가?’ ‘그래, 보란 듯이 고유건의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거야.’ ‘제법이야. 그 효과는 지금 고유건이 보이는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잖아?’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이걸로 내가 물러설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소미는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가서 유건의 두 번째 담배를 가로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소미 씨?” 그 순간, 유건의 눈빛에 스친 건, ‘넌 왜 아직 여기에 있지?’라는 의문이었다. 소미는 순간 미소를 거두었지만, 곧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담배 좀 줄여요.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잖아요.” “응.” 유건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멀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미의 가슴이 불편하게 꿈틀거렸다. ‘또 지시연 생각이야?’ 그녀는 질투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소미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을 잡았다.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요. 밥은
유건의 분노가 지금 극에 다다랐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유건을 오래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이건 진짜로 ‘끝’까지 간 상태라는 걸. “나... 나는 정말 몰라요...” 남자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털썪! 유건이 손에 힘을 풀자, 남자는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윽!” 남자의 가슴이 먼저 바닥에 부딪혔다. “컥, 컥...”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퍽!어떻게든 일어나려 했지만, 유건의 발이 남자의 등을 밟았다. 그리고 완전히 짓눌린 채, 남자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유건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안에 서린 살기는 차가웠다. “살고 싶으면, 당장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 여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면, 넌 끝이야.” “저, 저...” 남자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기 시작했다.하지만 모르는 일을 어떻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제, 제발... 저, 저는 아무것도몰라요! 제발 살려주십쇼!” 순간, 방 안이 얼어붙었다. 쾅! 남자가 생각할 틈도 없이, 의자가 날아와 등을 강타했다. “윽!” 이어서 그 남자는 온몸이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 충격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면서 이마에 몇 가닥 내려앉았다. 유건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느릿하게 넥타이를 풀었고, 혀로 어금니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 입을 다문 대가야.” 유건은 다시 의자를 들어 올렸다. “말할래, 안 할래?” “아, 아...” 남자는 더 이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좋아. 아주 좋아.” 유건은 낮게 웃으며, 다시 힘을 주었다. “그럼 네 뼈가 얼마나 단단한지 끝까지 확인해 보자고.” “유건 씨!” “형님!” “하지 마세요, 유건 씨!” 그 순간, 몇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는데, 장소미는 유건을 뒤에서 안았고, 지한과 민환이 서둘러 유건의 손에서 의자를 빼앗았다. “형님,
“유건 씨, 그렇게 말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소미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물었다. “혹시 오늘 일... 나 때문이에요?” 유건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입술은 단단하게 다물어졌다. “아니야. 소미 씨 탓이 아니야. 그냥... 내 탓이야.” 그는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소미를 임신시킨 것도, 시연에게 상처 입힌 것도...’‘모두 내가 한 일이었어.’ ‘책임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시연을 놓지 못한 건, 나였어.’ ‘내가 내 욕심을 못 버려서.’ 그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유건은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따릉-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부지하에서 온 메시지였다. 유건은 짧게 한숨을 쉬고,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소미를 힐끗 본 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아요.” 소미가 잔잔하게 웃었다. “저요, 지금 뭐가 중요한지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요. 지금 가장 급한 건, 지 선생님을 찾는 거잖아요. 그 외의 일들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저는, 유건 씨가 저한테 한 말을 믿어요.” “고마워.” 그 순간, 유건은 미안함과 감사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는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 “말해.” 지하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게, 유건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알겠어. 바로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소미가 먼저 말했다. “전 괜찮아요. 가야 한다면 빨리 가요.”하지만 유건이 곧장 자리를 뜰 리는 없었는데, 유건이 소미의 손에서 약봉지를 가져오며 말했다. “아니, 일단 소미 씨를 집에 데려다주고 갈 거야.” 시연이 아직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소미까지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었다. “그래요.” 소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를 쉽게 버릴 순 없겠지.’ 소미를 집에 데려다준 뒤, 유건이 병원으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