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성은 듣기조차 싫다는 듯,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장미리를 바라보았다.“내가 이런 배은망덕한 자식을 키웠다니!”“아니에요,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거예요.”그러나 지동성은 아내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고, 팔을 휙 뿌리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장미리는 초조함과 분노로 발을 굴렀다.“빚쟁이 같은 것들! 소미는 대체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의식이 서서히 돌아오자, 사방이 캄캄했다.장소미는 본능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입이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으음... 으음...!”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뿐이었다.‘또다시 납치당한 거야?’‘왜?! 또 고상훈인가?!’하지만 소미는 이미 고상훈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더 이상 고유건을 찾지도 않았는데, 대체 그 늙은이는 언제까지 날 괴롭힐 생각이지?!’“으음! 으으음!!”그녀는 몸부림쳤다. 결국 의자째로 바닥에 쓰러지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쾅!여자의 온몸이 아파서 눈앞이 번쩍했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소란이 컸던 탓인지,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희미한 빛이 비쳤다.소미가 빛을 통해 보니, 이곳은 창고처럼 보였다.그렇지만 이곳은 잘 정리된 상태였고, 폐건물처럼 보이진 않았다.그리고 바깥에서는 어렴풋이 파도 소리가 들렸다.‘여긴... 부둣가? 배 안 화물 창고인가?’“이런!”들어온 사람이 바닥에 쓰러진 소미를 보고 놀라서 다급히 달려왔다.“너, 왜 이렇게 됐어? 다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네 몸이 얼마나 귀한지 알기나 해?!”소미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이건 무슨 뜻이지? 혹시 장기 밀매 조직인가?’‘이젠 병원에서 대놓고 납치하는 게 가능해진 건가?’‘아니, 뭔가 이상해.’그녀는 생각해 보았다.‘납치범들이 처음에 내 이름을 불렀어.’‘즉, 처음부터 나를 목표로 삼았다는 뜻이야.’“으음! 으으음!!”소미는 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가만히 있어!”여자의 소란에 다급히 들어온 두 남자가
마른 남자와 통통한 남자는 2초가량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돼!”정신을 차린 마른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진짜예요!”소미는 필사적으로 해명했다.“저는 지금 두 분 손에 잡혀 있는데, 어떻게 감히 거짓말하겠어요? 두 분, 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신 거예요?” “흥.”마른 남자가 비웃으며 비꼬았다.“네 입으로 직접 고유건 대표님한테 임신했다고 말했다며!”‘고유건?!’소미의 눈이 커졌다.즉, 이들은 유건을 미행하다가 그녀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놈들이 왜 고유건을 미행하는 거지?’‘날 납치한 것도 고유건과 관련이 있는 걸까?’그러나 지금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고, 그녀애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안전이었다.“저는 임신 안 했어요. 맞아요, 고유건한테 임신했다고 말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소미는 체면도 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건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을 붙잡으려고 한 거짓말이었어요. 임신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뚱뚱한 남자와 마른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헛소리하지 마! 도망치려고 거짓말하는 거잖아?”“아니에요!”소미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임신 여부는 간단히 확인할 수 있어요. 지금 당장 병원에 가면 돼요. 피만 뽑으면 바로 결과가 나오니까요!”여자의 말에 두 남자는 순간 말을 잃었다.뚱뚱한 남자가 중얼거렸다.“거짓말 같지는 않은데.”마른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렇죠.”이를 본 소미는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두 분은 아이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요. 하지만 제 배 속에 아무것도 없다면요?”“괜히 헛수고하는 거 아닌가요? 힘들기만 할 뿐만 아니라... 고용주도 기분 나빠하지 않겠어요?”그 말이 핵심을 찔렀다.마른 남자는 이를 악물고 결정했다.“병원으로 가자!”“알았어.”그는 소미를 가리키며 경고했다.“얌전히 있어! 애가 없으면 놔주겠지만, 이상한 짓 하면 가만 안 둬!
‘이놈들이 대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납치범에게 신뢰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법이야!’소미의 눈가가 뜨거워졌고,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갑자기 뚱뚱한 남자가 차 문을 열었다.운전하고 있는 마른 남자를 흘끗 보며 물었다. “던질까?”“응.” 마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뚱뚱한 남자가 소미를 묶고 있는 밧줄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소미는 온몸이 굳어버렸다.‘고속도로에서 이 속도로 달리는 차에서 나를 던진다고?’‘죽지 않더라도 크게 다칠 게 분명해!’‘게다가 사방에서 차들이 오가니, 잘못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도 있어!’“자! 꺼져라!”“으윽...”예상했던 대로, 소미는 차 밖으로 내던져졌다. 낡은 헝겊 조각처럼 아무런 힘도 없이, 단숨에 멀리 튕겨 나갔다.차 안에서 뚱뚱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아! 생각도 못 했네. 고유건 같은 영리한 놈이 여자한테 속다니!”“아무리 영리해도 인간인걸. 사람이라면 다 약점이 있는 법이지.”...땅에 부딪히는 순간, 소미는 온몸으로 고통을 느꼈다. 땅에 쓸린 피부가 화끈거리고, 뼈마디는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으흑...”그녀는 온몸이 묶인 데다 입까지 막혀 있어서, 울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낼 수 없었다.이게 과연 다행일까, 불행일까?도로에 차가 많지 않았지만, 가끔 지나가는 차량은 소미를 피해 지나칠 뿐이었다.‘누가 좀 나를 도와줄 수 없을까?’그때, 전방에서 두 개의 강한 불빛이 다가왔다.자동차 전조등이었다.소미는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차가 멈춰 섰고,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내렸다.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윤이 나는 남성용 비즈니스 구두, 정교한 마감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소미는 천천히 눈을 떴다.노은범이었다.은범은 소미를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장소미 씨?”‘시연이의 이복언니?’두 사람은 서로 친하지 않지만,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였다.“왜 이 모양이에요?”“으윽, 으윽...”그제야 은범은 소미의 입이
장미리가 말하기를 꺼리니, 은범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별거 아니라는 듯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시간, 유건과 시연은 병원에서 고상훈을 문병하고 있었다.이호민도 함께 있었고, 고상훈은 손에 달력을 들고 날짜를 살피며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둘이 도착하자 고상훈이 손짓했다.“잘 왔다. 결혼 날짜를 보는 중인데, 이 집사도 점을 쳐봤다더라. 다음 달 9일로 정하자꾸나.”순간, 시연은 눈이 동그래졌다.유건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다음 달 9일? 고작 2주 후인데?’“이렇게 빨리요?” 시연은 난색을 보였다.“빨라?”고상훈과 이호민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전혀 안 빠르단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 2주면 충분하지. 걱정하지 마라.”고상훈은 달력을 이호민에게 건네며 시연의 배를 흘끗 보았다.“내 증손자가 아직 티가 나기 전에 서둘러야 해. 더 미루면 배가 불러올 테니까.”그 이유 앞에서 시연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그것뿐만이 아니야. 결혼식은 체력이 많이 드는 행사라, 배가 많이 나오면 네가 힘들까 봐서 걱정이구나.”여기까지 왔는데, 시연이 거절할 수 있을까?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할게요.”“역시 내 손녀 며느리가 가장 착하지.”고상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호민에게 당부했다. “바로 준비 시작해라.”“걱정 마세요, 어르신.”“다만...”고상훈은 한숨을 쉬었다.“내 몸 상태 때문에 시연이에게 미안하구나. 결혼식은 G시에서 해야 하고, 신혼여행도 당장은 힘들 테니.”“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너희 둘은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괜찮겠니?”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전 괜찮아요.”‘어차피 지금은 고유건이랑 어색하니까...’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무심코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유건은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정확히는, 시연이 돌아온 후로 줄곧 이런 태도였다.차갑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유건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가야 해.”그리고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너한테 말하는 건,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야.” ‘할아버지는 우리 두 사람이 함께한다고 믿고 있으실 테니까.’ “기환이가 너랑 동행할 거야.”시연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이 사람이 떠나는 걸 막을 수 없어.’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아무 말 없이, 그것이 곧 동의라는 듯.유건은 이를 악물었다. “고마워.”그는 차문을 열고 타더니, 곧바로 떠나버렸다.시연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형수님.”기환이 그녀의 뒤에 섰다. “차에 타세요.”“네.” 시연은 조용히 차에 올랐다.기환이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어디로? 본가로 돌아갈 수는 없고...’‘혼자 돌아가면, 할아버지께 고유건이 나를 버렸다는 걸 알리는 거나 다름없잖아.’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 데나, 그냥 드라이브나 하고 싶어요.”“네, 알겠습니다.”기환은 룸미러로 시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저렇게 연약해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 있을까?’...병원.유건이 도착하기 전에, 노은범은 이미 떠나 있었다.그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장소미는 이미 병실로 옮겨져 있었고, 장미리가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소미야, 많이 아프지? 아프면 참지 말고 울어도 돼.”“엄마, 으흑...”그 광경을 본 순간, 유건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고,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듯했다. “소미 씨.”소미가 고개를 들었다. 유건을 보는 순간, 눈물이 더 쏟아졌다.“유건 씨! 으아아...”유건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소미의 손을 꼭 잡았다.“유건 씨, 아기, 우리 아기...”소미는 흐느껴 울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결국, 장미리가 울면서 대신 말했다.“고 대표님, 소미가 아이를... 잃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유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가장 걱정했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어버렸다.납치,
유건의 눈빛이 깊고 어두웠다. ‘내가 반드시 답을 얻어야 해!’소미는 목이 메었다. “엄마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고상훈 어르신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이걸로도 부족하다고?” 장미리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분 말고 또 누가 네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데?!” “엄마...”언성이 높아졌다.유건은 눈을 감았다가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미 씨, 푹 쉬어.”그는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지금 당장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확인해야 해!’유건이 나가자, 장미리는 긴장한 얼굴로 소미의 손을 잡았다.“이래도 괜찮겠지?”소미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건 벼랑 끝에서 내딛는 한 걸음이었다.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고유건일 거예요.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은 평생 저를 잊지 못할 거라고요.” 그 말을 듣고 장미리마저도 가슴이 떨렸다....이호민은 고상훈의 발을 씻기고 있는데, 유건이 다시 돌아왔다.게다가 유건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고상훈은 힐끗 손자를 보더니 흥미로운 듯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할아버지.”유건은 빠르게 다가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소미 씨의 아이... 할아버지가 시킨 겁니까?”“뭐?”고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그리고 이내, 노인은 피식 웃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장소미가 그렇게 말하던가?”“할아버지!”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였다.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는 대답을 듣고 싶어요. 맞습니까, 아닙니까?”“도련님...”이호민은 당황하며 중재하려 했다. “어르신께 그렇게 따지듯이 묻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유건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아이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어?’‘장소미와 그 아이는 모두 내 가족인데, 할아버지가 대체 왜!!’“후후.”고상훈은 미소를 거두고 손을 흔들었다.“이 집사, 정말 눈치가 없구나. 내 목숨 따윈, 그 연예인보다 하찮지 않겠나?” 이 말은 유건의 가슴
유건은 서재에 들어가, 대형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순식간에 연기가 피어오르며, 남자의 또렷한 이목구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유건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새벽 세 시.기환은 뒷좌석에 앉은 시연을 힐끗 보았다. “형수님, 계속 드라이브하실 건가요?”드라이브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목적 없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시연은 창에 기대어 멍하니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아니면...” 기환이 제안했다. “이만 들어가시고, 형님한테 전화해 보실래요?”혹시 유건이 집에 돌아왔는지 묻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왜냐하면 밤새도록 이러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나는 남자라 괜찮지만, 형수님은 임산부니까...’“아니에요.”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그녀는 경험상 알고 있었다.유건이 소미와 함께 있을 때는 절대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건 한두 번이 아니라, 항상 그랬다.“여긴 어디죠?”“곧 G시를 벗어나, 옆 도시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기환 씨도 가끔은 바보처럼 귀엽다니까? G시 안에서만 맴돌면 될 것을, 굳이 여기까지 왔다니.’“다시 돌아가요.”어차피 돌아가는 길도 머니까.“알겠습니다.”기환은 바로 차를 돌려 시내로 향했다.심심했던 시연은 기환과 대화를 나누었다.“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가끔 친척 동생들이 유건 씨를 ‘둘째 오빠’라고 부르는 걸 들은 적 있어요.”시연은 원래 G시에서 제일 유명한 네 명의 명문가 도련님 중에서 유건이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부지하, 주정빈, 그리고 유강석 중 누구도 유건을 ‘형님’이라 부르지 않았다.즉, ‘둘째 오빠’라는 호칭은 오직 고씨 가문에서만 쓰이는 듯했다.“그건... 사실 유건 형님에게 친형이 한 명 더 있어요.”“뭐라고요?”시연은 더욱 궁금해졌다.“진짜 친형이에요?”“네.”“그런데 저는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죠?”“그게...”기환은 깊은
방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건은 2초간 기다렸다. 그리고 여자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들었다. ‘화난 건가?’ 그도 밤새 잠을 못 자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침대 곁으로 다가가서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고 자.” “네?” 시연이 눈을 떴다. 놀란 표정이었다. “아직 안 갔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나 안 먹어요. 그냥 잘 거예요.” 차 안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었던 그 허리와 등의 뻐근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물며 그녀는 임산부였다. ‘화났네.’ 유건은 확신했다. 시연은 원래 그랬다. 화가 나도 히스테리컬하게 소리 지르는 법이 없었다. ‘왜 화가 난 거지?’ ‘어젯밤, 나한테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가 끝내 떠나서 그런 걸까?’ 사정이 있었고, 유건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연을 혼자 남겨둔 건, 확실히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건은 다시 한번 참고 말했다. “한 번 더 말할게. 일어나서 뭐라도 먹어. 빈속으로 있으면 속 상해.”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숙여 이불을 들추고, 여자의 손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시연이 앉자, 긴 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먹는다니까요...!” “지시연!” 유건도 더는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어젯밤에 네 곁을 지키지 않긴 했지만, 너한테 사실을 숨기진 않았잖아. 그런데 고작 그것 때문에 밥도 안 먹고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시연은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이 지금 내가 ‘화를 낸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오해예요. 화 안 났고,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을 뿐이라고요.”“그럼 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데?” 유건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난 바람난 것도 아니고, 어젯밤에 서재에서 잤어.” ‘뭐라고?’침착했던 시연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태연할 수 없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