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순식간에 소란이 일었다.청소부로 위장한 사람은 순간 얼어붙었다.‘뭐야? 저 여자는 분명 에테르를 마셨을 텐데? 어떻게 뛰어내릴 수 있었지?’‘마취제도 안 통한다고?’“빨리 보안팀 불러!”누군가 다가와 시연을 부축하며 물었다.“괜찮아요? 납치범은 어디 있죠?”그때, 유건이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이 소란을 한눈에 알아차렸다.그리고 그 순간,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연을 발견했다.호텔 보안팀도 즉시 현장에 도착했다.“고 대표님!”유건은 그들을 한 번 쳐다보더니 차갑게 명령했다.“멍하니 서 있을 시간 없어. 당장 잡아!”“네!”“도망가지 마!!”청소부는 이를 악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숨어 있을 때는 유리했지만, 대놓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멈춰!”유건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곧장 시연에게 다가갔다.사람들을 밀어내며 시연의 입을 막고 있던 테이프를 단숨에 찢어냈다.“이봐, 당신은 누구야?”한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제 아내입니다.”아주머니는 순간 멈칫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잘 좀 챙겨요! 아내가 납치당할 뻔했잖아요!”유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는 묵묵히 시연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조금만 더 늦었다면...조금만 더 늦었다면, 유건은 숨이 멎을 뻔했다.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유건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어디 다친 데 없어?”이 자세 때문에, 시연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야 했다.“안 다쳤어요. 근데...”“근데 뭐?”유건은 긴장하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어디 안 좋아?”그는 조금 전 시연이 청소 카트에서 구르며 떨어지는 걸 직접 보았다.시연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갔다.“너무 피곤해요... 잠이 와요.”잠시 후, 유건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조
유건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고상훈은 아직 쉬지 않고 있었다. 손자를 보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너, 지금쯤 제남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시연이랑 같이.”“시연이는 잠들었어요.”유건은 시연을 언급할 때, 무심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조금 있다가 다시 가서 함께 있을 겁니다.”“무슨 일로 온 거야?”“할아버지, 시연이가 납치될 뻔했습니다.”유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시연이가 똑똑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고상훈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노련한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대담하네. 저질스러운 수법도 끝이 없고.”그 반응에, 유건은 확신했다. 지난번 장소미 사건은 고상훈의 소행이 아니었다.“할아버지, 그런데 왜 장소미 씨 사건을 인정하신 거예요? 혹시 아시는 게 있는 거예요?” 고상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 손자는 어릴 적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다신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은데...’유건도 뭔가를 알아챘다.‘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계셔. 로얄호텔 사건부터, 칼에 찔린 일까지...’‘할아버지는 분명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할아버지.”그는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그 사람들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CA국에서는 폭탄 테러를 당할 뻔했습니다! 이젠 말씀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지금까지 유건은 CA국 폭탄 사건을 일부러 고상훈에게 알리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고상훈은 그 말을 듣자, 매우 놀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놈들이 감히... 이럴 수가! 그 사람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그놈들이 누구입니까, 할아버지?”“그놈들은...”고상훈은 손자를 바라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런 추악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걸 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추악한 인간들...’유건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어렴풋이 감이 왔지만, 믿고 싶지 않
유건은 병원을 떠나 급히 제남도로 돌아갔다.가는 내내, 유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정기환은 느낄 수 있었다. 유건이 뭔가 깊이 상처받았다는 것을.유건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아버지가 차를 몰고 집을 떠나는 장면.어린 유건은 울며 필사적으로 쫓아갔다.“아빠, 제발 가지 마세요!”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그렇게 떠났고, 곧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그 후, 그는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차가운 겨울날 대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을 뿐이었다.겨우 나타난 건 가정부였다.아버지는 끝까지 만나 주지 않았다. 같은 핏줄인데도, 낯선 사람보다 더 차가웠다.어린 유건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조금만 움직여도 얼음이 깨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리고 지금, 다시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차갑고, 서늘하고, 깊숙이 스며드는 한기.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따뜻하게 해주길 바랐다....시연은 배고픔에 잠에서 깼다.배의 통증은 사라졌기에, 시연은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우리 아기, 정말 착하네.”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카디건을 걸치고,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섰다. 너무 배고파서 뭐라도 먹어야 했다....방에 돌아온 유건은 시연이 보이지 않자, 더욱 굳은 표정을 지었다.“사람은 어디 갔지?”기환이 재빨리 답했다.“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한 형이 같이 있어요. 형수님은 무사합니다.”그는 곧바로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 형, 형수님은 어디 있어요? 형님이 사람 없다고 화내고 있어요!”[형수님? 지금 식사하고 계셔.]“아, 다행이네.”기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아남았다고 느꼈다.유건 앞에서 시연이 사라진다면, 마치 죽음의 문턱을 넘는 기분을 느낄 터였다.지금 그는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었다.“형님, 형수님은 지금 식사 중입니다.”유건은 더 이상 말없이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넓은 연회장, 여러 개의 테이
다음 날, 시연은 늦잠을 잤다. 창밖은 이미 환히 밝아 있었고, 시간을 보니 벌써 오전 10시였다.‘어제 그렇게 오래 잤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피곤하지?’서둘러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유건은 주지한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시연이 나오자, 그는 자연스럽게 식탁을 가리켰다.“뭐라도 먹으면서 조금만 기다려. 곧 끝나.”“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늦잠을 잤는데도, 오히려 그가 기다리라고 하니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유건도 일을 끝냈다.그는 다가와 시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성애 이모님이 요즘 네 식욕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진짜였네?”어제저녁도, 오늘 아침도 제법 많이 먹었다.시연은 입에 넣은 꼬마 호빵을 씹으며 물었다.“언제 돌아가요? 지금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유건은 그녀에게 새우 딤섬을 하나 집어 주며 말했다.“우리 요트인데,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 없잖아.”‘그건 그렇지만, 고유건은 바쁘지 않나?’시연은 어제 납치 사건 이후 유건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전까지는 유건이 자신에게 잘 대해준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어딘가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라 느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유건은 예전처럼 젠틀하고 배려심 깊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결국 핵심은 ‘납치’ 사건이었을까?’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어제 나를 납치하려던 사람들... 누구예요?”유건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신경 쓰지 마. 그냥 잘 먹고 잘 쉬면서 신부 역할이나 해.”그는 시연에게 사실을 숨기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주제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남자가 말하기 싫어하는 걸 알기에, 시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호텔을 떠나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요트에 올랐다.아침을 든든히 먹은 탓인지, 요트에 타자마자 시연은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객실에서 유건과 나란히 앉아 있던 그녀는 어느새 몸을 기울여
“목말라?”곧바로 보온병이 그녀의 손에 건네졌다.“따뜻한 배즙이야, 조금 마셔.”“고마워요.”시연은 감사하며 받아 들고, 뚜껑을 열어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곧 시내에 도착해. 어디로 갈까?”“병원에 좀 들러야 해요.”유건이 미간을 좁혔다.“오늘도 일이 있어?”“아니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정리한 자료만 전달하면 돼요.”“알았어.”유건의 얼굴이 살짝 부드러워지더니, 운전기사에게 강울대병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차는 곧 외과 건물 앞에 도착했다.“여기서 기다릴게.”“네.”시연은 서둘러 올라가 자료를 정리하고, 빠르게 일을 마쳤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유건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유건을 둘러싼 사람들은 조용했지만,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처럼 잘생기고 기품 있는 남자는 현실에서 보기 드문 존재였다.심지어 몇몇 여성들은 핸드폰을 꺼내 몰래 사진과 영상을 찍고 있었다.“와, 저 사람 진짜 잘생겼다. 키도 엄청나게 커. 한 190은 될까?”“봐봐, 어디가 아픈 사람 같아? 잘생긴 사람도 병문안 올 수 있잖아.” “나도 아프고 싶어! 저 오빠가 문병 와줬으면 좋겠다!”“...”이 대화를 들은 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할까...?’그녀는 관심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러나 유건은 여자의 속마음을 전혀 읽지 못하고, 몇 걸음 다가오더니 시연의 손을 잡았다.순간,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헉! 저 오빠 싱글 아니었어?!”“이제 잘생긴 남자들은 다 임자가 있는 거야?”“여자 친구도 예쁘다! 역시 왕자는 공주랑 이어지는 법이지.”“...”시연은 유건을 째려보았다. ‘이 남자, 정말 문제야.’“왜?”유건은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화난 것 같긴 했지만,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여자의 손을 놓고, 대신 그녀를 품에 안았다.“손잡는 거 싫어? 안아 줄까?”“와아아아!”“둘이 아주 달콤하네!”‘이 사람, 일부
시연과 진아를 맞춤 드레스 숍에 내려주고, 유건은 바로 떠나려 했다.그는 바빴다. 특히 최근엔 결혼식 준비로 인해 일이 겹쳐 모두 미리 처리해야 했다.숍 매니저는 진아를 먼저 안내해 사이즈를 재러 갔다.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우주는 네가 데리고 올 거야, 아니면 누군가를 보내는 게 편할까?”남자아이의 정장은 맞추기 어렵지 않았다. 사이즈만 맞으면 충분했다.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여전히 우주를 결혼식에 참석시키려는 거야?’그녀의 미묘한 찡그림을 보고, 유건이 말했다.“그날, 전담 인력을 붙여서 우주를 챙길 거야. 우주는 착한 아이니까 문제없을 거야. 누나가 결혼하는데, 하나뿐인 동생이 빠질 수 있겠어?”그는 시연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정식으로 참석해야 마땅했다.“게다가, 임진아 씨가 들러리잖아. 진성빈도 올 거고. 네 가장 친한 친구들이 옆에 있으니, 우주를 잘 돌봐 줄 거야.” 이렇게 말했는데도 시연이 거절하면 괜한 고집처럼 보일 터였다.“그래요, 알겠어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정장은 따로 준비할 필요 없어요. 우주 사이즈는 내가 알아요. 맞춰서 가져가서 입히면 돼요.”“좋아.”유건은 옅게 미소 지었다.“그럼 난 가볼게. 천천히 골라.”시연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핸드폰... 차에서 메시지 보느라 꺼내 뒀다가 좌석에 두고 내렸나 봐요.”“그런 것도 네가 직접 가야 해? 나한테 시키면 되잖아.”유건은 그녀의 어깨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내가 가져올게.”“아, 고마워요.”시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문 앞까지 배웅했다....“지시연!”유건이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배웅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젊은 여성 두 명이 다가왔다.시연은 미간을 좁혔다.“우리, 아는 사인가요?”그녀는 두 사람을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역시 네가 지시연이구나!”시연은 어리둥절했다.“제가 지시연인데, 무슨 일이시죠?”“흥!”한 여자가 뾰족
‘내가 의료진까지 붙여 줬잖아. 이 사람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유건은 조애린을 질책했다.“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소미 씨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걸 몰라서 그래?”“그게, 고 대표님...”“애린 언니의 잘못이 아니에요.”소미는 눈물을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나오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냥 집에만 있으면 계속 안 좋은 생각만 하게 되니까요.”그 말을 듣자, 유건은 순간 멈칫했다.‘결국, 내가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든 거야.’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너무 무리하진 마.”“네, 알고 있어요.”“이제 가려는 거야?”소미는 미소를 지었다.“네, 바로 돌아갈 거예요.”두 사람은 마침 같은 방향이라 함께 이동했다....고급 맞춤 드레스 숍 앞.“G시에서 고유건 대표가 소미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이런 결혼을 하겠다는 건 여자 체면을 다 구기는 거라고! 여자라면 여자를 도와야 하는 거 아냐?”‘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논리네.’시연은 분노를 억누르며 더 이상 이 두 사람을 봐주지 않으려고 했다.“이거 놔요. 저는 두 사람이랑 할 말 없어요.”“어떡할까?”두 여자가 눈빛을 주고받더니, 한 명이 가방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지시연, 기회를 줬을 때 받아들였어야지. 이제 우린 봐주지 않을 거야!”그러고는 병뚜껑을 열어 시연을 향해 뿌리려 했다.시연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다른 여자가 팔을 꽉 붙잡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도망가려고? 왜, 이제야 무서운 거야? 솔직히 말할게, 이건 황산이야.”‘뭐...?’시연의 동공이 커졌다. ‘광적인 팬들, 너무 무섭네!’“너, 그 예쁜 얼굴로 고유건을 유혹했지? 그 얼굴이 망가져도 고 대표가 계속 널 원할까?!”“꺄악!”“으악!”연달아 두 번의 비명이 울리고, 무언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시연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녀
‘불륜녀?’시연은 비웃으며 유건을 바라보았다.“들었어요?”이 한마디에 유건이 드디어 두 여자를 쳐다보았다.“허위 사실 유포, 명예훼손, 황산 테러 미수, 고의적 상해죄. 내가 신고하면 너희들 끝나는 거 알지?”두 여자는 순간 몸을 굳혔다.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여전히 강한 척하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고 대표님, 저 불륜녀를 감싸면서 소미 언니 생각은 안 해봤어요? 소미 언니가 얼마나 상처받겠어요? 바로 옆에서 보고 있잖아요!”원래 가게 앞에 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이 워낙 유명한 맞춤 드레스 숍인 데다, 유명 여배우가 등장하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유건은 귀찮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신고하려 했다.그제야 두 여자는 당황하며 장소미에게 도움을 청했다.“소미 언니...!”소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머뭇거리다 유건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유건 씨, 경찰까지 부를 필요는 없잖아요. 아직 어린애들이 철없이 그런 거예요. 게다가, 지 선생님도 다친 데 없잖아요.”그녀가 나섰으니, 유건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그러나 이번 사건의 당사자는 시연이었다. 유건이 대신 용서할 자격은 없어서 핸드폰을 든 채 신고는 잠시 미루고, 시연을 향해 물었다.“시연아, 어떻게 할래?”시연은 순간 헛웃음을 지었다.‘내 의사가 중요한가?’ ‘장소미가 한마디 하니까, 앞서 강경했던 태도도 다 사라졌잖아.’‘그런데 이 사람이 내 뜻을 진심으로 존중해 줄까?’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넘어가요.”소미는 얌전하게 미소를 지었다.두 여자는 기뻐하며 그녀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소미 언니, 정말 고마워요!”“맞아요. 소미 언니가 아니었으면 고 대표님이 절대 우릴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소미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앞으로는 이렇게 무모한 행동하지 마요.”이 모든 것이 완벽한 연극이었다.시연은 더 이상 보고 있을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몸을 돌려 가게로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