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지 마!”“알았어요.”시연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너, 고유건의 아내지?”“네.”시연은 인정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고유건 때문인가?’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아, 고유건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아이! 몇 개월이야?”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사람, 고유건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어. 내가 임신한 것까지 알고 있으니까.’“4개월이에요.”오늘까지 정확히.“좋아!”청소부는 흡족한 듯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시연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그리고 손바닥에는 한 장의 수건이 있었다.하지만, 청소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시연은 이미 냄새를 맡았다.그녀가 의사로서, 냄새에 민감했다. ‘수건에서 강한 에테르 냄새가 나!’그 수건이 얼굴에 닿는 순간, 시연은 숨을 참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힘없이 쓰러졌다.청소부는 시연을 받아서 들고 신속하게 그녀의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이어서 준비한 밧줄로 그녀의 손과 발을 단단히 묶었다.그리고 시연이 들고 있던 가방을 구석에 내던졌다.마지막으로, 시연을 청소용 카트 아래의 수납공간에 밀어 넣고 커튼으로 덮었다.모든 과정이 계획된 듯 매끄럽게 진행됐다....시연은 눈을 떴다. 하지만 사방이 깜깜했다. 몸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그녀는 조금 전 숨을 참아 마취제를 들이마시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척한 건 도망칠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이 청소부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아이에 관해서 물었는데, 그렇다면 목표는 아이인가?’‘하지만 왜?’스스로 답을 찾기 어려웠다.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었다.‘도망쳐야 해. 무조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해. 침착하자. 당황하면 안 돼.’...그 시각, 화장실에 도착한 유건은 텅 빈 공간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직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사모님께서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고 계신 걸지도...?”매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순식간에 소란이 일었다.청소부로 위장한 사람은 순간 얼어붙었다.‘뭐야? 저 여자는 분명 에테르를 마셨을 텐데? 어떻게 뛰어내릴 수 있었지?’‘마취제도 안 통한다고?’“빨리 보안팀 불러!”누군가 다가와 시연을 부축하며 물었다.“괜찮아요? 납치범은 어디 있죠?”그때, 유건이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이 소란을 한눈에 알아차렸다.그리고 그 순간,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연을 발견했다.호텔 보안팀도 즉시 현장에 도착했다.“고 대표님!”유건은 그들을 한 번 쳐다보더니 차갑게 명령했다.“멍하니 서 있을 시간 없어. 당장 잡아!”“네!”“도망가지 마!!”청소부는 이를 악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숨어 있을 때는 유리했지만, 대놓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멈춰!”유건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곧장 시연에게 다가갔다.사람들을 밀어내며 시연의 입을 막고 있던 테이프를 단숨에 찢어냈다.“이봐, 당신은 누구야?”한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제 아내입니다.”아주머니는 순간 멈칫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잘 좀 챙겨요! 아내가 납치당할 뻔했잖아요!”유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는 묵묵히 시연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조금만 더 늦었다면...조금만 더 늦었다면, 유건은 숨이 멎을 뻔했다.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유건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어디 다친 데 없어?”이 자세 때문에, 시연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야 했다.“안 다쳤어요. 근데...”“근데 뭐?”유건은 긴장하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어디 안 좋아?”그는 조금 전 시연이 청소 카트에서 구르며 떨어지는 걸 직접 보았다.시연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갔다.“너무 피곤해요... 잠이 와요.”잠시 후, 유건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조
유건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고상훈은 아직 쉬지 않고 있었다. 손자를 보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너, 지금쯤 제남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시연이랑 같이.”“시연이는 잠들었어요.”유건은 시연을 언급할 때, 무심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조금 있다가 다시 가서 함께 있을 겁니다.”“무슨 일로 온 거야?”“할아버지, 시연이가 납치될 뻔했습니다.”유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시연이가 똑똑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고상훈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노련한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대담하네. 저질스러운 수법도 끝이 없고.”그 반응에, 유건은 확신했다. 지난번 장소미 사건은 고상훈의 소행이 아니었다.“할아버지, 그런데 왜 장소미 씨 사건을 인정하신 거예요? 혹시 아시는 게 있는 거예요?” 고상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 손자는 어릴 적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다신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은데...’유건도 뭔가를 알아챘다.‘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계셔. 로얄호텔 사건부터, 칼에 찔린 일까지...’‘할아버지는 분명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할아버지.”그는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그 사람들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CA국에서는 폭탄 테러를 당할 뻔했습니다! 이젠 말씀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지금까지 유건은 CA국 폭탄 사건을 일부러 고상훈에게 알리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고상훈은 그 말을 듣자, 매우 놀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놈들이 감히... 이럴 수가! 그 사람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그놈들이 누구입니까, 할아버지?”“그놈들은...”고상훈은 손자를 바라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런 추악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걸 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추악한 인간들...’유건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어렴풋이 감이 왔지만, 믿고 싶지 않
유건은 병원을 떠나 급히 제남도로 돌아갔다.가는 내내, 유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정기환은 느낄 수 있었다. 유건이 뭔가 깊이 상처받았다는 것을.유건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아버지가 차를 몰고 집을 떠나는 장면.어린 유건은 울며 필사적으로 쫓아갔다.“아빠, 제발 가지 마세요!”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그렇게 떠났고, 곧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그 후, 그는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차가운 겨울날 대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을 뿐이었다.겨우 나타난 건 가정부였다.아버지는 끝까지 만나 주지 않았다. 같은 핏줄인데도, 낯선 사람보다 더 차가웠다.어린 유건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조금만 움직여도 얼음이 깨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리고 지금, 다시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차갑고, 서늘하고, 깊숙이 스며드는 한기.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따뜻하게 해주길 바랐다....시연은 배고픔에 잠에서 깼다.배의 통증은 사라졌기에, 시연은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우리 아기, 정말 착하네.”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카디건을 걸치고,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섰다. 너무 배고파서 뭐라도 먹어야 했다....방에 돌아온 유건은 시연이 보이지 않자, 더욱 굳은 표정을 지었다.“사람은 어디 갔지?”기환이 재빨리 답했다.“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한 형이 같이 있어요. 형수님은 무사합니다.”그는 곧바로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 형, 형수님은 어디 있어요? 형님이 사람 없다고 화내고 있어요!”[형수님? 지금 식사하고 계셔.]“아, 다행이네.”기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아남았다고 느꼈다.유건 앞에서 시연이 사라진다면, 마치 죽음의 문턱을 넘는 기분을 느낄 터였다.지금 그는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었다.“형님, 형수님은 지금 식사 중입니다.”유건은 더 이상 말없이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넓은 연회장, 여러 개의 테이
다음 날, 시연은 늦잠을 잤다. 창밖은 이미 환히 밝아 있었고, 시간을 보니 벌써 오전 10시였다.‘어제 그렇게 오래 잤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피곤하지?’서둘러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유건은 주지한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시연이 나오자, 그는 자연스럽게 식탁을 가리켰다.“뭐라도 먹으면서 조금만 기다려. 곧 끝나.”“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늦잠을 잤는데도, 오히려 그가 기다리라고 하니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유건도 일을 끝냈다.그는 다가와 시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성애 이모님이 요즘 네 식욕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진짜였네?”어제저녁도, 오늘 아침도 제법 많이 먹었다.시연은 입에 넣은 꼬마 호빵을 씹으며 물었다.“언제 돌아가요? 지금 가요?”“서두를 필요 없어.”유건은 그녀에게 새우 딤섬을 하나 집어 주며 말했다.“우리 요트인데,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 없잖아.”‘그건 그렇지만, 고유건은 바쁘지 않나?’시연은 어제 납치 사건 이후 유건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전까지는 유건이 자신에게 잘 대해준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어딘가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라 느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유건은 예전처럼 젠틀하고 배려심 깊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결국 핵심은 ‘납치’ 사건이었을까?’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어제 나를 납치하려던 사람들... 누구예요?”유건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신경 쓰지 마. 그냥 잘 먹고 잘 쉬면서 신부 역할이나 해.”그는 시연에게 사실을 숨기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주제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남자가 말하기 싫어하는 걸 알기에, 시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호텔을 떠나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요트에 올랐다.아침을 든든히 먹은 탓인지, 요트에 타자마자 시연은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객실에서 유건과 나란히 앉아 있던 그녀는 어느새 몸을 기울여
“목말라?”곧바로 보온병이 그녀의 손에 건네졌다.“따뜻한 배즙이야, 조금 마셔.”“고마워요.”시연은 감사하며 받아 들고, 뚜껑을 열어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곧 시내에 도착해. 어디로 갈까?”“병원에 좀 들러야 해요.”유건이 미간을 좁혔다.“오늘도 일이 있어?”“아니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정리한 자료만 전달하면 돼요.”“알았어.”유건의 얼굴이 살짝 부드러워지더니, 운전기사에게 강울대병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차는 곧 외과 건물 앞에 도착했다.“여기서 기다릴게.”“네.”시연은 서둘러 올라가 자료를 정리하고, 빠르게 일을 마쳤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유건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유건을 둘러싼 사람들은 조용했지만,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처럼 잘생기고 기품 있는 남자는 현실에서 보기 드문 존재였다.심지어 몇몇 여성들은 핸드폰을 꺼내 몰래 사진과 영상을 찍고 있었다.“와, 저 사람 진짜 잘생겼다. 키도 엄청나게 커. 한 190은 될까?”“봐봐, 어디가 아픈 사람 같아? 잘생긴 사람도 병문안 올 수 있잖아.” “나도 아프고 싶어! 저 오빠가 문병 와줬으면 좋겠다!”“...”이 대화를 들은 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할까...?’그녀는 관심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러나 유건은 여자의 속마음을 전혀 읽지 못하고, 몇 걸음 다가오더니 시연의 손을 잡았다.순간,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헉! 저 오빠 싱글 아니었어?!”“이제 잘생긴 남자들은 다 임자가 있는 거야?”“여자 친구도 예쁘다! 역시 왕자는 공주랑 이어지는 법이지.”“...”시연은 유건을 째려보았다. ‘이 남자, 정말 문제야.’“왜?”유건은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화난 것 같긴 했지만,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여자의 손을 놓고, 대신 그녀를 품에 안았다.“손잡는 거 싫어? 안아 줄까?”“와아아아!”“둘이 아주 달콤하네!”‘이 사람, 일부
시연과 진아를 맞춤 드레스 숍에 내려주고, 유건은 바로 떠나려 했다.그는 바빴다. 특히 최근엔 결혼식 준비로 인해 일이 겹쳐 모두 미리 처리해야 했다.숍 매니저는 진아를 먼저 안내해 사이즈를 재러 갔다.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우주는 네가 데리고 올 거야, 아니면 누군가를 보내는 게 편할까?”남자아이의 정장은 맞추기 어렵지 않았다. 사이즈만 맞으면 충분했다.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여전히 우주를 결혼식에 참석시키려는 거야?’그녀의 미묘한 찡그림을 보고, 유건이 말했다.“그날, 전담 인력을 붙여서 우주를 챙길 거야. 우주는 착한 아이니까 문제없을 거야. 누나가 결혼하는데, 하나뿐인 동생이 빠질 수 있겠어?”그는 시연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정식으로 참석해야 마땅했다.“게다가, 임진아 씨가 들러리잖아. 진성빈도 올 거고. 네 가장 친한 친구들이 옆에 있으니, 우주를 잘 돌봐 줄 거야.” 이렇게 말했는데도 시연이 거절하면 괜한 고집처럼 보일 터였다.“그래요, 알겠어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정장은 따로 준비할 필요 없어요. 우주 사이즈는 내가 알아요. 맞춰서 가져가서 입히면 돼요.”“좋아.”유건은 옅게 미소 지었다.“그럼 난 가볼게. 천천히 골라.”시연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핸드폰... 차에서 메시지 보느라 꺼내 뒀다가 좌석에 두고 내렸나 봐요.”“그런 것도 네가 직접 가야 해? 나한테 시키면 되잖아.”유건은 그녀의 어깨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내가 가져올게.”“아, 고마워요.”시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문 앞까지 배웅했다....“지시연!”유건이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배웅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젊은 여성 두 명이 다가왔다.시연은 미간을 좁혔다.“우리, 아는 사인가요?”그녀는 두 사람을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역시 네가 지시연이구나!”시연은 어리둥절했다.“제가 지시연인데, 무슨 일이시죠?”“흥!”한 여자가 뾰족
‘내가 의료진까지 붙여 줬잖아. 이 사람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유건은 조애린을 질책했다.“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소미 씨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걸 몰라서 그래?”“그게, 고 대표님...”“애린 언니의 잘못이 아니에요.”소미는 눈물을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나오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냥 집에만 있으면 계속 안 좋은 생각만 하게 되니까요.”그 말을 듣자, 유건은 순간 멈칫했다.‘결국, 내가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든 거야.’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너무 무리하진 마.”“네, 알고 있어요.”“이제 가려는 거야?”소미는 미소를 지었다.“네, 바로 돌아갈 거예요.”두 사람은 마침 같은 방향이라 함께 이동했다....고급 맞춤 드레스 숍 앞.“G시에서 고유건 대표가 소미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이런 결혼을 하겠다는 건 여자 체면을 다 구기는 거라고! 여자라면 여자를 도와야 하는 거 아냐?”‘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논리네.’시연은 분노를 억누르며 더 이상 이 두 사람을 봐주지 않으려고 했다.“이거 놔요. 저는 두 사람이랑 할 말 없어요.”“어떡할까?”두 여자가 눈빛을 주고받더니, 한 명이 가방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지시연, 기회를 줬을 때 받아들였어야지. 이제 우린 봐주지 않을 거야!”그러고는 병뚜껑을 열어 시연을 향해 뿌리려 했다.시연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다른 여자가 팔을 꽉 붙잡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도망가려고? 왜, 이제야 무서운 거야? 솔직히 말할게, 이건 황산이야.”‘뭐...?’시연의 동공이 커졌다. ‘광적인 팬들, 너무 무섭네!’“너, 그 예쁜 얼굴로 고유건을 유혹했지? 그 얼굴이 망가져도 고 대표가 계속 널 원할까?!”“꺄악!”“으악!”연달아 두 번의 비명이 울리고, 무언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시연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녀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