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 “아니, ‘만약’이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게요. 난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 시연은 유건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진아야, 가자.” “그래!” 그 순간, 유건은 얼어붙었다. “유건 씨, 이게 다... 미안해요. 저 때문이에요...” “소미 씨 잘못 아니야.” 유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연이가 소미 씨한테 너무 심한 말을 했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오늘 밤엔 정말 미안했어. 난 먼저 가볼게.” “유건 씨!” 남자를 더 이상 붙잡을 수도 없어서 소미는 그저 유건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쓸쓸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 속엔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둘이, 싸웠네.’ ...주차장에서 유건은 시연을 따라잡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환아, 진아 씨를 데려다줘.” “네, 형님.” 시연은 순식간에 다른 차에 태워졌다. 그리고 남자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화를 내려고 하는 건가?’ ‘...’“오늘 일은 내 잘못이야.” 뜻밖에도, 유건이 먼저 사과했다. “당신이 알면 기분 나빠할 거 같아서 숨겼어. 그런데도 결국 들켜버렸네.” 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 유건은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숨긴 건 내 잘못이야. 하지만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 장소미한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고. 오늘 밤, 나랑 그 사람은 단둘이 있는 시간조차 없었어.” 그는 계속 설명하려고 했지만, 시연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유건 씨, 내가 장소미한테 한 말, 당신한테도 그대로 돌려줄게요.” “친구라는 명목으로 미련을 남길 행동은 하지 마요.” 이 날카로운 일침 때문에 유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그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나랑 장소미가 한때 결혼까
유건은 혼자 남아 있는 것이 지루했고, 아까 일도 계속 신경 쓰였다. 결국 시연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재로 향했다. 그는 여자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또 책 보고 있어? 아까 깜빡했는데, 저녁은 제대로 먹었어?” 가까이 다가가자, 시연은 남자에게서 은은한 여성 향수를 맡을 수 있었다. ‘난 향수 안 쓰는데...’ 그렇다면 이건 장소미한테서 묻어온 향기였다. “먹었어요. 진아랑 같이.” 시연은 태연하게 유건을 밀어내고, 다시 펜을 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간간이 필기를 이어갔다. 너무나 성의 없는 대답. 시연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유건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할 말은 다 했으니까.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가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함부로 약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늦었어.” 유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슬슬 잘 준비해야 하지 않아?” “먼저 자요. 이 두 장만 보고 들어갈게요.” 시연은 여전히 남자를 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몇 초간 지켜보던 유건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어서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유건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시연은 이미 침대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시연 옆에 누우며 팔을 뻗어 그녀를 안으려 했다. 그러나 시연은 조용히 몸을 틀어 피하며, 핸드폰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고,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잠을 청했다. 여자의 등을 바라보며, 유건의 미간은 더욱 깊게 주름졌다. 결국 그날 밤, 유건은 쉽게 잠들지 못했고, 한참 뒤에야 간신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다음 날, 그가 눈을 떴을 때 시연은 먼저 일어나 있었다. 시연은 이미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유건은 식사를 끝낸 후, 그녀를 찾아갔다. “여보, 같이 나갈까? 오늘은 몇 시에 끝나? 그 시간에 맞춰
근처 두 블록에 걸쳐 차들이 멈춰 서 있었고, 차량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럼 어떡해요? 차 안에 다친 사람도 있는데, 빨리 병원 가야 할 거 아니에요!” 운전기사가 급히 다가와 승객들을 진정시켰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현재 교통경찰이 정리 중이고, 구급차도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맞아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우리보다는 앞쪽이 더 심하게 부딪혔대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시연은 이마를 누르며 실소했다. ‘하... 앞으로 외출할 땐 진짜 길일을 확인하고 나가야 하나.’ 다행히도, 곧 경찰이 도착해 승객들을 한 명씩 차에서 내리게 했다. “일렬로 서서 이쪽으로 이동하세요. 교차로에 구급차가 대기 중이니 병원까지 태워 드릴 겁니다.” 승객들은 하나둘씩 차에서 내려 구급차를 기다리며 줄을 섰다. “시연아!” 시끌벅적한 인파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노은범이 서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아닌 줄 알았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까 정말 너였네!” 은범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이마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다 이마가 이렇게 된 거야?”“별거 아니야.” 남자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시연은 일부러 가볍게 웃어 보였다. “좌석에 부딪힌 거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곧바로 되물었다. “넌 괜찮아?” “멀쩡해.” 은범이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길게 늘어선 차들이 멈춰 서 있었다. “내 차는 저쪽에 있어. 사고엔 휘말리지 않았지만, 꼼짝없이 막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중이야.” “앞쪽 사람들! 빨리 좀 움직여요! 구급차를 타야 한다고요!” 뒤쪽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연도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은범아, 나 구급차 타야 해...” “같이 가자.” 시연이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은범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는 시연이 혹시라도 거부할까 봐, 덧붙
핸드폰 너머로 전해지는 시연의 말에, 유건의 감정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아내에게 사고가 났다면, 자신은 남편으로서 당연히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시연은 기가 막히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유건을 미치게 했다. 특히 시연의 입에서 나온 ‘바쁘면 안 와도 된다’는 그 한마디.‘도대체 지시연 눈에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남편이었길래, 아내와 아이의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도 무관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분노가 극에 달한 순간, 유건은 오히려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나한테 말은 왜 한 거야?]예상치 못한 반응에, 시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중에 집에 갔을 때, 내가 없으면 찾을 것 같아서요...” ‘하. 참나...’ 유건은 소리 없이 비웃었다. ‘그래, 당연히 찾겠지.’ ‘하지만 내가 너한테 ‘그 정도 의미’밖에 안 되는 거야?’ 이 순간, 남자의 감정이 폭발했다. [지시연, 일부러 그러는 거지?][어제 일 때문인가? 일부러 날 엿먹이려고?] “뭐라고요...?” 시연은 어리둥절한 듯 반문했지만, 유건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이 여자, 지금 나를 벌주고 있는 거야!!’ ‘그래, 인정하지. 처음 잘못한 건 나니까.’ 유건은 겨우 분노를 억눌렀지만,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기다려. 곧 갈 테니까.] “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시연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왜 저렇게 화를 내지? 내가 귀찮아서 그런 건가?’ ‘그럼 안 오면 되잖아. 난 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 ‘...’ “시연아.” 은범이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잠시 밖에서 통화하느라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었다. 은범이 의자를 당겨 앉자, 시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너 바쁘지 않아?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 은범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 나서, 태연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이 오면 갈게. 아마 곧 도착하시겠지?”
시연은 순간 당황했다. ‘벌써 도착했다고?’ 은범도 기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봉지를 손에 쥔 채,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 오셨네. 그럼 난 가볼게.” “오늘... 고마웠어.” 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는 약봉지를 등 뒤로 숨기듯 들고 있었다. 마치 시연이 보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무심한 척 한마디 더 했다. “은범아, 몸 잘 챙겨. 건강이 제일이야.” “알지.” 은범은 살짝 미소 지으며, 순간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췄다. 대신,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난 간다. 잘 있어.” “응... 잘 가.”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유건과 은범.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짧지만 묘한 기류가 흐르는 사이, 은범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표님.” 이어서 간결하게 설명했다. “사고가 난 곳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거기 있더라고요.” 그 한마디로,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설명을 끝냈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유건을 지나쳐 병실을 빠져나갔다. 유건은 무표정하게 은범을 보내고, 천천히 시연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시연은 시선을 피한 채, 문 쪽을 향해 있었다. 은범이 나가는 순간, 그녀는 남자의 손에 들린 약봉지를 확인했다. 어렴풋이 그 물체가 보였다. ‘수면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거야? 그 정도로 심한 건가?’ 시연이 잠시 생각에 빠진 순간, 유건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허.” 이것이 비웃음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아쉬워? 한참 바라보네.” “기환이한테 다시 불러오라고 할까? 아직 멀리 못 갔을 텐데.” 유건의 말투에는 짙은 조롱이 묻어 있었다. 그 순간, 시연은 천천히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웠다. ‘하... 진짜 피곤하다.’ 유건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상황에서 대놓고 무시?’ ‘어제까지는 화
“지시연!!!” 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붉어졌다. “정말 죽고 싶어?” “뭐라고요?” 하지만 시연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장소미를 만날 수 있는데, 나는 은범이를 만나면 안 돼요?”“그래! 유건이 고함쳤다. “난 해도 되지만, 당신은 안 돼!” 남자의 목소리가 병실을 뒤흔들었다. 순간, 공간이 얼어붙었다. 시연의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난 안 된다고?’ ‘너무나도 뻔뻔한 이중잣대...’ 순간,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참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단숨에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의자에 걸쳐둔 가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기환이 당황하며 길을 막아섰다. 그러나 유건이 차갑게 명령했다. “놔둬.”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해.” “나한테 마음도 없는 여자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좋아, 가서 전 남자 친구나 만나보라지. 딱 잘 어울리는 커플이잖아.’ 이 말을 듣자, 시연은 차갑게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면서,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인 척. 그녀도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기환을 피해 몸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갔다. ...“하...” 유건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시연이 병실에서 나가며 가방을 꼭 쥐고 있는 걸 보니,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기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진짜 안 따라가실 겁니까?”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유건은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따르릉— 그때, 병실 한쪽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시연의 핸드폰이었다. 그녀는 너무 급히 나가면서 핸드폰을 두고 갔다. 유건은 무심코
유건은 순간 해명할 말을 잃었다. 시연이 어젯밤 일을 꺼내자, 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 여자 말이 맞았어. 내가 잘못했어.’ ‘난 변명할 여지도 없어.’ 유건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체념한 듯 팔을 뻗어 시연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예요?!” 시연이 놀란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내가 잘못했어.” 유건은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병원부터 가자. 정밀검사하고, 영양수액도 맞아야지.”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연을 품에 안고 병실을 나섰다. 산부인과. 오늘은 원래 검진일이 아니었지만, 유건은 사고까지 겪은 시연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시연이 반대할 틈도 없이, 강제로 정밀검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는 결과지를 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게 영양수액을 맞아야 하는 이유였어?’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위해 보충해야 할 필수 영양소...’ ‘시연이는 알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어...’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시연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시연은 조용히 침대에 누웠고, 유건은 침대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시연은 유건이 무엇을 묻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1, 2주 정도 됐어요.” “그럼 우리가 결혼하기 전부터였네.” 유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시연이 검진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결과에 관해 묻지 않았다. 시연도 말이 없었으니, 당시의 유건은 당연히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야 알게 됐다. 시연 배 속의 아이가, 주수보다 작다는 사실을. 그래서 시연에게는 영양 공급이 필요했던 거다. 하지만, 시연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를 신뢰하지 않아서인가?’ 유건은 씁쓸한 기분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나한테 말 안 한 이유가, 내가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그래요.” 시연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이 병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방금... 저 남자, 뭔가 힘들어 보였어.’ ‘혹시... 내가 아이가 작다는 걸 말하지 않아서?’ ‘하지만, 본인의 아이가 아니잖아?’ 병원 밖. 유건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고, 주지한과 통화했다. 신강대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가 단순한 사고인지,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형님, 겉으로 보기엔 그냥 사고로 보입니다. 하지만 더 철저히 조사해 볼까요?] “그래. 이 일은 네가 직접 챙겨.” [네, 형님.]사실, 유건이 괜한 의심을 하는 건 아니었다. 사고가 난 그 시간에, 하필이면 시연이 버스에 타고 있었다. 너무 기막힌 우연 아닌가? CA국 쪽에서 시연을 노리고 있다는 걸 유건도 알고 있었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두 번째 시도를 안 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형님, 그리고...]지한이 머뭇거렸다. “할 말 있으면 해.” [예...] 그는 다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집사님께 확인했는데, 사모님께서 오늘 하루 종일 집에 계셨고, 점심을 드신 후에야 외출하셨다고 합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유건의 눈빛이 변했다. ‘점심 먹고 나가서, 바로 사고?’ 즉, 시연이 외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를 당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유건은... 시연이 은범과 함께 있었다고 단정 지었다. 유건은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한심해졌다. “알겠어.” 유건은 짧게 대답하고,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미묘한 기분으로 병실로 돌아섰다. 병실 안. 영양수액이 거의 다 떨어져 갈 무렵, 간호사가 와서 바늘을 빼주었다. 그리고 그때, 유건이 병실로 들어왔다. 조용히 침대 곁에 앉아, 시연의 손을 잡고 솜뭉치를 눌렀다. “앞으로 외출할 땐, 기환이를 데리고 다녀.”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화났다고
“고, 유, 건!” 시연의 인내심이 결국 터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유건은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너 샤워 다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그때 갈게. 욕실 바닥 미끄럽잖아. 그 생각하니까 그냥 여기 있는 게 마음이 편해서 그래.” ‘아주 지극정성이네, 진짜.’시연이 숨을 꾹 참고 머리를 홰 젖히며 돌아서자, 긴 머리카락도 그녀를 따라 허공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방에서 나왔을 때, 유건은 이미 마른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건이 선수를 쳤다. “머리만 말려주고 갈게. 팔 오래 들고 있으면 어깨 아프잖아.” ‘와... 이 사람 진짜 각 잡았네.’ “당신...” 시연은 유건을 날카롭게 흘겨봤다. “지금 완전 딱 쫀득한 엿 같은데요? 질척거리는 게, 떼도 안 떨어질 것 같아요.” “고마워, 나 그런 칭찬 좋아해.” 유건은 오히려 웃으며 수건을 펼쳤다. “칭찬...?” 시연은 어이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정신력은 또 뭐야...’ “자, 머리 말리자. 머리 다 말리고 자야 감기 안 걸리지.” 결국 시연은 눈을 감았다. ‘됐어... 그냥 못 본 척하자. 말하면 뭐 해? 안 먹힐 텐데.’ ...그런 날들이 계속됐다. 유건은 하루에 두 번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아침엔 아침밥 들고 등장. 점심엔 직접 못 오면 민환을 통해 도시락 배달. 저녁엔 꼭 나타났다. 빠르면 같이 저녁, 늦으면 야식. 그리고 샤워 후엔 늘 자연스럽게 등장해 머리를 말려주기까지. 시연은 정말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봤다.차갑게도 말해봤고, 내쫓으려 해본 적도 있었고, 문 앞에 세워두기도 해봤다. 하지만 유건은 마치 그 자리가 제자리라도 되는 듯, 늘 시연 곁을 지켰다.마치 떠날 줄 모르는 그림자처럼.어느 날 오전. 시연은 오랜만에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잠깐 들릴 생각이
“놓아달라고?” 유건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긴 속눈썹 아래로 감춰진 눈빛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널 좋아한다고 말한 게, 널 못 놔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 ‘또 그 말이지. 좋아한다, 좋아해.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데...’ 시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래?” “왜 그러냐고요?” 시연은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쉬었다. ‘진짜... 말이 안 통해.’ 머리는 온통 유건이 감아준 목도리로 덮여 있었다.겉으로는 따뜻해 보였지만 마음은 너무도 답답했기에, 약간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알잖아요. 나... 당신을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는 거...” “응, 알아.” 유건은 고개를 숙이며 낮게 웃었다. “아직 기억해.” “그럼 지금 이건 다 뭐예요?” 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린, 그거 때문에 헤어진 거잖아요?”두 사람은 명확하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진 않았다.하지만 그동안의 긴 냉전은 이미 서로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서로 말은 안 했지만, 끝난 거나 다름없었어. 할아버지 때문에 그냥 참고 있었던 거지.’ ‘이젠 할아버지조차 이혼을 허락했는데... 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 “나도 알아.” 시연은 말끝을 질끈 씹듯 말했다.“당신이 그랬잖아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의미 없다고. 세상에 여자가 한둘도 아닌데, 그런 사람한테 매달릴 필요 없다고요...” 유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말, 정확히 그렇게 했었다. ‘참 잘 기억하네. 근데 내가 했던 행동들은 왜 기억 안 하지...?’ 유건은 얇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그냥 아무 말이나 뱉은 거야.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어?” “뭐라고요...?” 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말 바꾸는 거야?’ ‘이 인간, 진짜 뻔뻔하네.’ “우린 말 안 통해요. 난 당신처럼 무책임한 사
“고마워요.” “천만에요.” 우주는 과일 접시를 힐끗 보더니,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켰다. “누나, 이 귤, 진짜 달아.” “그래?” 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우주는 먹어봤어?” “응.” 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아저씨가 준 거야.” 그 말에, 시연의 웃음이 그대로 멈췄다. ‘아저씨...’ 우주의 입에서 나오는 그 ‘아저씨’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당연히 지동성이었다. “그 사람이...” 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가 널 보러 왔었어?” “응.” 우주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오후에 왔어.” ‘어제...’ ‘퇴원한 바로 다음 날?’ ‘그럼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우주를 보러 온 거야...?’ ‘이게 진심일까, 아니면 또 쇼일까?’ 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까지 애써야 할 이유가 대체 뭐지...?’ “누나.” “응?” 시연이 정신을 가다듬고 우주를 바라보자, 우주는 조금 머뭇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저씨... 이제 괜찮아진 거야?” ‘뭐...?’ 시연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우주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아저씨가 그랬어.” 우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동안 날 보러 못 온 건, 아팠기 때문이라고.” ‘왜 그런 말을 우주한테 했지...?’ 시연의 가슴이 조여왔다. “아저씨가 또 뭐라고 했는데? 무슨 병이라고 했어?” “아... 뭐라고 했냐면...” 시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진짜 말한 거야? 설마...’ “뭐라고 했는데?” 우주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감기래.” “감기...?” 그 말에 시연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그 정도로만 말했구나...’ ‘정말... 그 사람, 아직도 이중적인 사람이네.’ “누나.” 우주가 다시 입을 열었
해가 채 뜨기도 전, 시연은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아는 이불 속에서 눈을 겨우 떠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몇 시야...?” “아직 이른 아침이야.” 시연은 진아의 통통한 볼을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나 우주랑 아침 먹기로 해서 좀 일찍 나가. 너는 더 자.” “응...” 진아는 듣자마자 바로 순하게 눈을 감았다. 시연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별산장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문을 연 건 최예민이었다. “우주 도련님은 지금 세수 중이에요. 아침에 깨우지도 않았는데, 누나 온다고 혼자 벌떡 일어나서 준비하더라고요.” 최예민은 환하게 웃으며 시연을 안으로 안내했다. “사모님, 여기 앉으세요. 아침은 다 준비됐고, 곧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아이고, 뭘요. 당연한 일인데요.” 조금 뒤,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이 놓이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 “누나!” 우주가 얼굴에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뛰어왔다. 그러고는 시연의 옆에 착 붙어 앉으며 해맑게 웃었다. “조심해!”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만둣국 한 그릇을 우주 앞에 놓아줬다. 조금 전 살짝 식혀둔 국이었다. 그래도 시연은 당부했다. “천천히 먹어. 국물 뜨거우니까.” “응! 누나 걱정하지 마. 나 조심할게!” 우주는 아주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나도 같이 먹자!” “그럴까?” 시연도 조심히 젓가락을 들며 미소 지었다. ...그 시각, 시연의 아파트. 띠링- 초인종 소리에 진아는 부스스 일어나 문으로 갔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문을 열었는데, 눈이 순간 커졌다. “고, 고 대표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진아는 아직 잠옷 차림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등장에 머리도 제대로 못 가다듬은 상태였다.유건은 짧게 진아를 본 후, 바로 시선을 돌려 옆으로 몸을 틀었다. “시연이는 일어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