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장소미를 아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정한 남편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혹시... 정말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건가? 그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거야?’시연은 자신에게 물었다. 그녀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묻고 싶지도 않았다.계속 이 문제를 들추는 것도 무의미했다.“조금만 기다려줘요.”시연은 결국 타협했다. “이 페이지만 다 읽고요.”“그래.”유건은 그녀의 책을 힐끗 보았다. 몇 줄 남지 않은 페이지였다.“천천히 봐. 기다릴게.”그는 한쪽으로 몸을 돌려, 책장에 꽂힌 책들을 무심히 훑어보았다.시연이 마지막 문장을 읽고 다가왔다. “다 읽었어요.”“응.”유건은 들고 있던 책을 덮고 책장에 도로 꽂으려 했다. 그 순간, 책 사이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책갈피처럼 보였다.“뭐예요?”시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그것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만있어.”유건이 단호하게 제지하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배도 점점 커지는데, 왜 자꾸 허리를 숙여? 우리 애 엄마가 이렇게 덜렁대서야 되겠어? 다행히 아빠는 믿음직하지만 말이야.”그는 한 손으로 시연을 부축하며 다른 손으로 책갈피를 주웠다.시연은 잠시 멍해졌다‘방금 뭐라고 했어? ‘아빠’...? 자기 자신을 가리킨 거야?’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어?”유건이 주워 든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책갈피가 아니라, 보석 감정서였다.“이게 여기 끼어 있었네.”“뭔데요? 나도 볼래요.”시연이 궁금해하며 손을 내밀었고, 유건은 거리낌 없이 내주었다.“보석 감정서야.”서류에는 사진도 포함되어 있었다.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다운 나비 모양이었다.당연히 진짜 나비가 아니라,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었다.시연은 기억력이 좋았고, 금세 떠올렸다.“나비 머리핀?”며칠 전, 유건이 시연에게 말했던 바로 그 머리핀이었다.나비를 좋아하는 여자, 심지어 머리핀까지 나
“잠깐만...”시연은 손을 흔들며 한참을 웃다가 간신히 멈췄다.그리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가끔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혹시 그 여자애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뭐?”유건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일 없어. 돌아오지 않아.”“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시연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남자의 가슴을 툭 눌렀다.“우리 유건 씨가 몇 살이죠? 스물여섯? 스물일곱? 그렇다면, 그 ‘나비 아가씨’는 더 어리겠네요? 인생은 긴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요?”유건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조금 전까지는 웃고 있었으면서...”시연은 또다시 태연하게 남자의 가슴 위에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나비 아가씨’가 돌아오면 우리 유건 씨는 얼마나 곤란할까요?”시연은 지금도 장소미와 자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유건의 모습을 보자 하니, 미래의 혼란이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더 이상했다. “난 ‘나비 아가씨’를 본 적도 없지만, 그냥 느낌이 그래요. 나랑 장소미를 합쳐도 ‘나비 아가씨’만큼은 아닐 것 같아요. 당신이 고민하는 건 누구를 선택할지가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 지겠죠? 안 그래요?”“그만 웃어.”유건은 시연의 손을 단단히 잡아 멈춰 세웠다. “하나도 안 웃겨.”남자의 갑작스러운 진지함에 시연은 순간 움찔하며 손을 빼냈다.“그냥 한 말이에요. 장난인데, 왜 그렇게 정색해요?”시연이 손을 빼자, 유건은 대신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런 농담, 난 싫어. 앞으로는 하지 마.”그는 이런 말이 정말 싫었다. 왜냐하면 시연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여자와 엮으려는 게 너무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지시연에게 나는 정말 아무 상관 없는 존재일까...?’시연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알았어요.”‘이 사람, 왜 이렇게 오버하는 거야?'그런데 잠시 후, 시연은 갑자기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유건의 눈빛이
“시연아?”“정말 끈질기네요.”시연은 지동성의 약한 태도를 무시하고 단호하게 말했다.“강압적으로 해도 안 되니까 이젠 감성팔이를 하려고요? 아버지가 이렇게 하면, 제가 마음이 약해져서 간을 내줄 거라고 생각하세요?”“아니야, 그런 의도가 아니라...”“그만 좀 하세요!!”시연은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소리를 크게 지르진 않았지만, 시연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리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목소리를 낮췄다.“아버지의 말, 단 한 마디도 믿을 수 없어요. 내가 간을 줄 것 같으세요? 꿈 깨세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시연의 손이 배 위로 갔다.원래 배가 크지 않았고,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어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녀가 살짝 원피스를 펴자 약간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지동성은 경악했다.“이, 이게... 시연아, 너...”“흥.”시연은 냉소를 지었다. “보셨어요? 이제 좀 이해가 되세요? 그래요, 저 임신했어요. 그러니까 간 기증? 절대 불가능해요. 제가 미쳤다고 한들, 어떤 정신 나간 의사가 그 수술을 하려고 하겠어요?”그녀는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우주요? 손댈 생각도 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그 애한테 손끝이라도 댄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니까요!!”우주는 시연에게 단순한 동생이 아니었다. 직접 키운 자식과도 같았다.“아, 아냐. 그런 일 없을 거야...”지동성은 당황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의 말에 놀란 건지, 아니면 딸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건지 알 수 없었다.그는 계속해서 침을 삼키며, 시연의 배를 바라보았다.“아이는... 고유건의...?”시연은 눈을 굴리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걸 아버지가 왜 궁금해하시죠?”딸의 반응에 지동성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몇 개월 됐어? 언제 가진 거야? 혹시...”“그만 좀 하세요!!”시연은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아버지한테 그걸 대답할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걸 따질 자격이나 돼요?”“알
“형님, 지동성 사장님께서 형수님을 찾아오셨어요... 그런데요, 형수님이 울고 계세요. 저한테도 화를 내셨고요...”유건은 조용히 끝까지 들었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네, 형님.”전화를 끊자마자, 유건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자칫하면 핸드폰이 부러질 뻔했다.‘지, 동, 성... 간 이식이 필요하다며?’ ‘병세가 심각해서 죽기 일보 직전이라더니, 시연이를 찾아갔다고?’ ‘난 불안해서 시연이의 과거를 캐는 게 아니야.’‘우리는 결혼한 사이라고. 그런 인간과의 일은 이미 끝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시연이가 울었다고?’ ‘아직도 그 인간을 신경 쓰는 건가?’‘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눈물을 흘릴 만큼 가치 있는 관계였나?’머릿속이 복잡해진 유건은 일찍 퇴근해 강울대병원으로 시연을 데리러 갔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시연이 급히 내려왔다. 유건은 시연을 유심히 바라봤는데, 여자의 눈이 약간 부어 있었다. 시연은 확실히 울었다. 그것도 꽤 심하게. 유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여자의 손을 잡았다. “오늘 바빴어?” “그럭저럭이요.” 시연은 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일을 얘기해봤자, 유건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 유건은 무심한 듯 물었다. “오늘은 누구를 만났어?” 이 질문은 너무 티가 났기에, 시연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환 씨가 말해줬나 보네.’ “기환 씨가 말했줬어요?” “응.” 유건은 숨기지 않았고, 시연의 손을 천천히 주무르면서 말했다. “그 인간 만나서 무슨 얘기 했는데?” 그리고 한 손으로 시연의 긴 머리를 쓸어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환 말로는 당신이 울었다던데, 그 인간 때문이야?” 시연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얘기를 꼭 해야 해요?” 순간, 유건의 얼
서재.유건은 심란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시연이는 임신 중이잖아. 담배 냄새를 맡기 싫어서...’‘나한테 집 안에서는 담배 피우지 말라고 했었는데...’ ‘정 피우고 싶으면 베란다나 마당에 나가서 피우라고 했어.’ 이렇게 생각한 유건은 괜히 더 답답해져서, 손에 든 담배를 대충 던져버렸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주지한이었다. “무슨 일이야?” [형님.]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쯧.” 유건은 이미 짜증이 쌓인 상태였고, 질질 끄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안 할 것 같으면 전화는 왜 했어?” [네, 형님.] 지한은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만,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형님, 그 ‘머리핀’ 기억하세요?] ‘머리핀?’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에 쥔 라이터를 굴렸다. “설마... 나비 머리핀?” [네, 형님.] 그때, 유건은 경매에서 낙찰받아 ‘나비 공주’에게 ‘나비 머리핀’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나비 머리핀’은, ‘나비 공주’와 연락이 끊긴 뒤, 유건이 유일하게 그녀를 찾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포기한 적 없지만, ‘나비 공주’에 대한 흔적은 물론, 그 ‘나비 머리핀’조차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시간이 지나면서, 유건은 어쩌면 두 사람의 인연이 거기까지였다고 체념했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 일은 언급하는 거지? 혹시...?’“계속 말해.”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형님,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그 ‘나비 머리핀’... 흔적을 찾았어요.] 유건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어디서?” [얼마 전에, 그 머리핀이 암시장에 나왔습니다.]“흥!” 유건은 가볍게 코웃음
시연은 상황을 파악하고 왕성애에게 말했다. “제가 부를게요.” “그럼 저는 먼저 내려가서 준비할게요.” “네.” 시연은 몸을 돌려 서재 문 앞에 선 후,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문 안 잠갔어!” 낮고도 분명한 남자의 목소리... 그 안에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문을 밀고 들어갔다. 책상 뒤쪽, 유건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두 다리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채. 그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뭔가를 보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쁜 업무 중일지도 몰라서 시연은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직도 바빠요? 밥은 먹어야죠.” 그러나 유건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안 먹어.” “왜요?” 시연은 유건의 고약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밥을 거르는 건... 정말 너무 유치하지 않나?’ “밥부터 먹어요.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그 말에 유건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들었다. “오, 그럼 우리 지 선생님도 내가 떼쓴다는 걸 아는 건가?” “알죠.” 시연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모시러 온 거잖아요.” “그게 다야?” 유건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더 어떻게 해야 해요?” ‘이 사람,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시연의 태도에 자극받은 유건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안 먹는다니까! 나가!” 그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고함쳤다. 그 소리에 시연은 두 걸음 물러섰지만, 곧바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 먹으면 말든가! 대체 뭔데 이 난리야?’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밥 먹을 거예요, 말 거예요?” 이번에 유건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아예 무시했다.‘그래... 알아서 해라.’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단호하게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갔다. 심지어 문까지 살짝 닫아주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유건은 한 초 정도 멍하니 굳
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모님, 제가 한 번 더 가볼게요. 그런데 장담은 못 해요.” “당연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 유건 도련님, 지금도 사모님이 오셔서 달래주길 기다리고 계실 거라니까요!” 시연은 마지막 한 숟갈까지 국을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똑같이 문을 두드렸다. “또 무슨 일이야!!” 안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거칠고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시연은 잠시 주저했지만,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안을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짧은 사이에 방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난 거예요...?” 책상은 엉망이었고, 바닥엔 컴퓨터, 서류, 책, 재떨이, 장식품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 유건은 소파에 몸을 기댄 상태였다. 왼손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고, 오른손엔 라이터를 쥐고 있었다.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반복하면서. ‘담배 피우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건가...?’시연은 문득 깨달았다. ‘이 남자, 단 한 번도 내 앞에서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것 같아.’ 이 생각이 드는 순간,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불편한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고유건 씨의 성질이 더러운 건 맞지만, 그만큼 세심한 면도 있는 건 인정해야 해.’ 시연은 조용히 다가가 남자 앞에 섰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밥 먹어요, 네?” “오?” 유건이 비웃듯 낮게 웃었다. “뭘 잘못했는데?” “아이고...” 시연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말했다. “나랑 지동성,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앞으로도 그런 관계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고요.” 그녀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유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예요. 대체 뭘 더 묻고 싶은 건데요?” 시연은 쓰게 웃었다. “그 사람, 그냥 내 오랜 지인일 뿐이에요. 당신이 생
마치 홀린 듯, 시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손끝이 자연스레 유건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천천히 그에게 응답했다.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화르르 불타올랐다.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시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배 안 고파요? 밥부터 먹어요, 네?” “응...” 유건 역시 더 이상 참을 자신이 없었다. 더 가면, 선을 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그는 그대로 시연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문을 열고 나섰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왕성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그녀는 한참이 지나도 시연이 내려오지 않길래, 혹시 두 사람이 싸우는 건 아닌가 걱정돼서 올라와 본 참이었다. ‘아니, 이건 대체 뭐야?!’ 하지만 곧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유건 도련님, 사모님... 저녁 준비 다 됐어요. 어서 내려가세요.” 시연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유건의 어깨를 치며 내려가려 했다. “내려줘요!” 하지만 유건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고생 많았어요, 이모님.” 그러면서도 품 안의 시연을 놓을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대로 그녀를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가만히 좀 있어. 부부가 집에서 좀 안고 있겠다는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해?” “됐어요! 난 당신처럼 뻔뻔하지 않다고요!!” 왕성애는 조용히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서재 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얼어붙었다. “어머나, 세상에!”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들, 바닥에 떨어진 컴퓨터와 의자, 깨진 재떨이... ‘유건 도련님의 성질, 정말 장난 아니네...’ ‘저 난리를 치고도 꼭 껴안고 있다니...’‘젊은 부부, 참 다이내믹하네.’ 다음 날. 시연은 늦잠을 잔 뒤, 오후가 돼서야 강울대병원으로 출근했다. 오전에 쉬었던 만큼, 진료 시간이 되자 예약된 환자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손짓하며, 컴퓨터에서 환자 정보를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