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미는 애절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동자에는 넘칠 듯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유건 씨도 아직 저를 잊지 못한 거죠? 그렇죠?”유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한 뒤, 소미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그 순간, 마치 무너지는 듯한 표정이 된 소미는 힘없이 속삭였다. “유건 씨?”유건은 단 한마디만 남겼다. “소미 씨, 나 결혼했어.”과거가 어떻든, 유건은 이제 아내에게 충실해야 했다.“흑...”소미는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꼈다.유건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앞으로 소미 씨 일은 지한에게 맡겨. 지한에게 연락하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이제 두 사람이 직접 연락을 주고받을 이유는 없다는 뜻이었다.“유건 씨.”소미는 손을 내려놓고, 유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한테... 단 한 번이라도 마음이 있었어요?”유건은 순간적으로 굳어졌고, 곧 시선을 피했다. “지금 와서 그걸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있어요! 저는 유건 씨의 대답이 필요해요.”소미는 붉어진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있었어요? 없었어요?”하지만 유건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남자의 침묵 속에서, 소미의 마음은 점점 재가 되어가는 듯했고, 입술이 떨렸다.“없었던 거네요... 그렇죠?”유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도 좋을 것이 없었다.“내가 미안해. 앞으로 무슨 일이든, 소미 씨 부탁이라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그렇게 마지막으로 소미를 바라본 뒤, 그는 돌아섰다.“흑... 흑...”남자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소미는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유건은 뒤돌아보지 않았고, 심지어 두 걸음 정도 빠르게 걸었다.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시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런데, 시연은 이미 밖에 서 있었고, 우산을 접으며 빗물을 털고 있었다.유건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철렁했다. ‘언제부터
시연은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장소미를 아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정한 남편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혹시... 정말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건가? 그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거야?’시연은 자신에게 물었다. 그녀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묻고 싶지도 않았다.계속 이 문제를 들추는 것도 무의미했다.“조금만 기다려줘요.”시연은 결국 타협했다. “이 페이지만 다 읽고요.”“그래.”유건은 그녀의 책을 힐끗 보았다. 몇 줄 남지 않은 페이지였다.“천천히 봐. 기다릴게.”그는 한쪽으로 몸을 돌려, 책장에 꽂힌 책들을 무심히 훑어보았다.시연이 마지막 문장을 읽고 다가왔다. “다 읽었어요.”“응.”유건은 들고 있던 책을 덮고 책장에 도로 꽂으려 했다. 그 순간, 책 사이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책갈피처럼 보였다.“뭐예요?”시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그것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만있어.”유건이 단호하게 제지하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배도 점점 커지는데, 왜 자꾸 허리를 숙여? 우리 애 엄마가 이렇게 덜렁대서야 되겠어? 다행히 아빠는 믿음직하지만 말이야.”그는 한 손으로 시연을 부축하며 다른 손으로 책갈피를 주웠다.시연은 잠시 멍해졌다‘방금 뭐라고 했어? ‘아빠’...? 자기 자신을 가리킨 거야?’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어?”유건이 주워 든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책갈피가 아니라, 보석 감정서였다.“이게 여기 끼어 있었네.”“뭔데요? 나도 볼래요.”시연이 궁금해하며 손을 내밀었고, 유건은 거리낌 없이 내주었다.“보석 감정서야.”서류에는 사진도 포함되어 있었다.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다운 나비 모양이었다.당연히 진짜 나비가 아니라,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었다.시연은 기억력이 좋았고, 금세 떠올렸다.“나비 머리핀?”며칠 전, 유건이 시연에게 말했던 바로 그 머리핀이었다.나비를 좋아하는 여자, 심지어 머리핀까지 나
“잠깐만...”시연은 손을 흔들며 한참을 웃다가 간신히 멈췄다.그리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가끔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혹시 그 여자애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뭐?”유건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일 없어. 돌아오지 않아.”“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시연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남자의 가슴을 툭 눌렀다.“우리 유건 씨가 몇 살이죠? 스물여섯? 스물일곱? 그렇다면, 그 ‘나비 아가씨’는 더 어리겠네요? 인생은 긴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요?”유건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조금 전까지는 웃고 있었으면서...”시연은 또다시 태연하게 남자의 가슴 위에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나비 아가씨’가 돌아오면 우리 유건 씨는 얼마나 곤란할까요?”시연은 지금도 장소미와 자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유건의 모습을 보자 하니, 미래의 혼란이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더 이상했다. “난 ‘나비 아가씨’를 본 적도 없지만, 그냥 느낌이 그래요. 나랑 장소미를 합쳐도 ‘나비 아가씨’만큼은 아닐 것 같아요. 당신이 고민하는 건 누구를 선택할지가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 지겠죠? 안 그래요?”“그만 웃어.”유건은 시연의 손을 단단히 잡아 멈춰 세웠다. “하나도 안 웃겨.”남자의 갑작스러운 진지함에 시연은 순간 움찔하며 손을 빼냈다.“그냥 한 말이에요. 장난인데, 왜 그렇게 정색해요?”시연이 손을 빼자, 유건은 대신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런 농담, 난 싫어. 앞으로는 하지 마.”그는 이런 말이 정말 싫었다. 왜냐하면 시연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여자와 엮으려는 게 너무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지시연에게 나는 정말 아무 상관 없는 존재일까...?’시연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알았어요.”‘이 사람, 왜 이렇게 오버하는 거야?'그런데 잠시 후, 시연은 갑자기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유건의 눈빛이
“시연아?”“정말 끈질기네요.”시연은 지동성의 약한 태도를 무시하고 단호하게 말했다.“강압적으로 해도 안 되니까 이젠 감성팔이를 하려고요? 아버지가 이렇게 하면, 제가 마음이 약해져서 간을 내줄 거라고 생각하세요?”“아니야, 그런 의도가 아니라...”“그만 좀 하세요!!”시연은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소리를 크게 지르진 않았지만, 시연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리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목소리를 낮췄다.“아버지의 말, 단 한 마디도 믿을 수 없어요. 내가 간을 줄 것 같으세요? 꿈 깨세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시연의 손이 배 위로 갔다.원래 배가 크지 않았고,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어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녀가 살짝 원피스를 펴자 약간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지동성은 경악했다.“이, 이게... 시연아, 너...”“흥.”시연은 냉소를 지었다. “보셨어요? 이제 좀 이해가 되세요? 그래요, 저 임신했어요. 그러니까 간 기증? 절대 불가능해요. 제가 미쳤다고 한들, 어떤 정신 나간 의사가 그 수술을 하려고 하겠어요?”그녀는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우주요? 손댈 생각도 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그 애한테 손끝이라도 댄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니까요!!”우주는 시연에게 단순한 동생이 아니었다. 직접 키운 자식과도 같았다.“아, 아냐. 그런 일 없을 거야...”지동성은 당황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의 말에 놀란 건지, 아니면 딸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건지 알 수 없었다.그는 계속해서 침을 삼키며, 시연의 배를 바라보았다.“아이는... 고유건의...?”시연은 눈을 굴리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걸 아버지가 왜 궁금해하시죠?”딸의 반응에 지동성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몇 개월 됐어? 언제 가진 거야? 혹시...”“그만 좀 하세요!!”시연은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아버지한테 그걸 대답할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걸 따질 자격이나 돼요?”“알
“형님, 지동성 사장님께서 형수님을 찾아오셨어요... 그런데요, 형수님이 울고 계세요. 저한테도 화를 내셨고요...”유건은 조용히 끝까지 들었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네, 형님.”전화를 끊자마자, 유건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자칫하면 핸드폰이 부러질 뻔했다.‘지, 동, 성... 간 이식이 필요하다며?’ ‘병세가 심각해서 죽기 일보 직전이라더니, 시연이를 찾아갔다고?’ ‘난 불안해서 시연이의 과거를 캐는 게 아니야.’‘우리는 결혼한 사이라고. 그런 인간과의 일은 이미 끝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시연이가 울었다고?’ ‘아직도 그 인간을 신경 쓰는 건가?’‘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눈물을 흘릴 만큼 가치 있는 관계였나?’머릿속이 복잡해진 유건은 일찍 퇴근해 강울대병원으로 시연을 데리러 갔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시연이 급히 내려왔다. 유건은 시연을 유심히 바라봤는데, 여자의 눈이 약간 부어 있었다. 시연은 확실히 울었다. 그것도 꽤 심하게. 유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여자의 손을 잡았다. “오늘 바빴어?” “그럭저럭이요.” 시연은 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일을 얘기해봤자, 유건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 유건은 무심한 듯 물었다. “오늘은 누구를 만났어?” 이 질문은 너무 티가 났기에, 시연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환 씨가 말해줬나 보네.’ “기환 씨가 말했줬어요?” “응.” 유건은 숨기지 않았고, 시연의 손을 천천히 주무르면서 말했다. “그 인간 만나서 무슨 얘기 했는데?” 그리고 한 손으로 시연의 긴 머리를 쓸어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환 말로는 당신이 울었다던데, 그 인간 때문이야?” 시연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얘기를 꼭 해야 해요?” 순간, 유건의 얼
서재.유건은 심란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시연이는 임신 중이잖아. 담배 냄새를 맡기 싫어서...’‘나한테 집 안에서는 담배 피우지 말라고 했었는데...’ ‘정 피우고 싶으면 베란다나 마당에 나가서 피우라고 했어.’ 이렇게 생각한 유건은 괜히 더 답답해져서, 손에 든 담배를 대충 던져버렸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주지한이었다. “무슨 일이야?” [형님.]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쯧.” 유건은 이미 짜증이 쌓인 상태였고, 질질 끄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안 할 것 같으면 전화는 왜 했어?” [네, 형님.] 지한은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만,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형님, 그 ‘머리핀’ 기억하세요?] ‘머리핀?’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에 쥔 라이터를 굴렸다. “설마... 나비 머리핀?” [네, 형님.] 그때, 유건은 경매에서 낙찰받아 ‘나비 공주’에게 ‘나비 머리핀’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나비 머리핀’은, ‘나비 공주’와 연락이 끊긴 뒤, 유건이 유일하게 그녀를 찾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포기한 적 없지만, ‘나비 공주’에 대한 흔적은 물론, 그 ‘나비 머리핀’조차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시간이 지나면서, 유건은 어쩌면 두 사람의 인연이 거기까지였다고 체념했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 일은 언급하는 거지? 혹시...?’“계속 말해.”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형님,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그 ‘나비 머리핀’... 흔적을 찾았어요.] 유건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어디서?” [얼마 전에, 그 머리핀이 암시장에 나왔습니다.]“흥!” 유건은 가볍게 코웃음
시연은 상황을 파악하고 왕성애에게 말했다. “제가 부를게요.” “그럼 저는 먼저 내려가서 준비할게요.” “네.” 시연은 몸을 돌려 서재 문 앞에 선 후,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문 안 잠갔어!” 낮고도 분명한 남자의 목소리... 그 안에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문을 밀고 들어갔다. 책상 뒤쪽, 유건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두 다리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채. 그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뭔가를 보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쁜 업무 중일지도 몰라서 시연은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직도 바빠요? 밥은 먹어야죠.” 그러나 유건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안 먹어.” “왜요?” 시연은 유건의 고약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밥을 거르는 건... 정말 너무 유치하지 않나?’ “밥부터 먹어요.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그 말에 유건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들었다. “오, 그럼 우리 지 선생님도 내가 떼쓴다는 걸 아는 건가?” “알죠.” 시연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모시러 온 거잖아요.” “그게 다야?” 유건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더 어떻게 해야 해요?” ‘이 사람,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시연의 태도에 자극받은 유건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안 먹는다니까! 나가!” 그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고함쳤다. 그 소리에 시연은 두 걸음 물러섰지만, 곧바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 먹으면 말든가! 대체 뭔데 이 난리야?’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밥 먹을 거예요, 말 거예요?” 이번에 유건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아예 무시했다.‘그래... 알아서 해라.’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단호하게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갔다. 심지어 문까지 살짝 닫아주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유건은 한 초 정도 멍하니 굳
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모님, 제가 한 번 더 가볼게요. 그런데 장담은 못 해요.” “당연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 유건 도련님, 지금도 사모님이 오셔서 달래주길 기다리고 계실 거라니까요!” 시연은 마지막 한 숟갈까지 국을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똑같이 문을 두드렸다. “또 무슨 일이야!!” 안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거칠고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시연은 잠시 주저했지만,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안을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짧은 사이에 방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난 거예요...?” 책상은 엉망이었고, 바닥엔 컴퓨터, 서류, 책, 재떨이, 장식품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 유건은 소파에 몸을 기댄 상태였다. 왼손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고, 오른손엔 라이터를 쥐고 있었다.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반복하면서. ‘담배 피우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건가...?’시연은 문득 깨달았다. ‘이 남자, 단 한 번도 내 앞에서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것 같아.’ 이 생각이 드는 순간,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불편한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고유건 씨의 성질이 더러운 건 맞지만, 그만큼 세심한 면도 있는 건 인정해야 해.’ 시연은 조용히 다가가 남자 앞에 섰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밥 먹어요, 네?” “오?” 유건이 비웃듯 낮게 웃었다. “뭘 잘못했는데?” “아이고...” 시연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말했다. “나랑 지동성,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앞으로도 그런 관계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고요.” 그녀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유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예요. 대체 뭘 더 묻고 싶은 건데요?” 시연은 쓰게 웃었다. “그 사람, 그냥 내 오랜 지인일 뿐이에요. 당신이 생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