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은 지한의 말을 들을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뭐 하러 왔냐? 할 말 없으면 나가.”딱 봐도 발끈한 상태였다. 지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받아쳤다. “좀만 기다려봐. 사과 아직 덜 깎았거든.”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천천히 말했다. “근데 말이야, 진짜 어떻게 할 건데?”“뭘 어떻게 해?” 유건은 째려보듯 눈을 흘겼다. ‘뭔 헛소리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지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시연 씨가 화내는 거, 솔직히 이해돼. 너는 정말 과거를 다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장소미만 문제였으면 말을 안 해. 근데 지금은 나비 공주 일까지 겹쳤잖아? 그 사람은 네가 몇 년이나 마음에 품어온 첫사랑이야. 그런 감정을, 진짜 시연 씨를 위해 놓겠다고?” 그 말에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과를 다 먹은 지하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생각해 봐. 만약 못 놓겠으면, 친구로서 한마디만 할게. 시연 씨, 그냥 놔줘.”이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던 지한을 유건이 불러 세웠다. “지하야.”“응?”유건은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혼할 생각 없어. 시연이랑 헤어질 마음도 없고.”지하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오케이. 알았어.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말만 해.”...밤이 되자, 시연은 임진아와 저녁을 약속했다. 고상훈이 병원에 있기에 집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에, 마침 잘 됐다 싶어 외식을 포기하고 배달 음식을 시켰다. 진아의 자취방엔 이미 샤부샤부, 꼬치, 치킨까지 전부 세팅되어 있었다. 진아는 닭날개를 오물거리며 말했다.“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 아니, 아예 집에 가지 마. 그 두 사람은 그냥 묶어놔야 해. 세상에 나와서 민폐나 끼치고 말이야...”“응, 그래.” 시연은 소리 없이 웃으며 소고기 완자를 입에 넣었다.그때,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이번엔 밀크티다!” 진아는 닭날개를 내려놓고 손을 닦으며
“됐거든요! 저 남자 친구 있어요!”“뭐...?” 지하는 순간 멍해졌다.그 틈을 타, 진아는 드디어 자기 밀크티를 낚아채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잠깐만!” 지하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 사람, 누군데?”“누가요?” 진아는 한 박자 늦게 그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남자 친구 말하는 거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누구긴 누구겠어요? 부 대표님도 아는 사람이죠. 진성빈이요!!”‘진성빈...? 아, 그놈!’ “쳇.” 지하는 혀를 차더니, 손을 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러더니 갑자기 진아의 집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하지만 입으로는 계속 중얼댔다. “그 어린애? 취향 진짜 별로네.”“뭐라고요?!” 진아는 깜짝 놀라며 지한을 노려봤다. “성빈이가 뭐 어때서요? 그리고... 잠깐...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누가 들어오래요?! 당장 나가라고요!!!”하지만 지하는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진아는 다급히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나가라니까요! 못 들었어요?!”지하는 여자의 손을 내려다봤다. ‘오? 얼굴은 통통한데 손가락은 엄청 가늘잖아?’ ‘얼굴에 있는 건 그냥 젖살이었네.’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목 안이 간질거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진아 씨, 지금... 나한테 손댔잖아. 책임져야지.”“뭐, 뭐라고요?!” 진아는 흠칫 놀라며 다급히 손을 뗐다.“푸하하하하!!!” 지하는 또다시 박장대소했다. ‘아, 진짜 너무 재미있다니까? 미치겠네.’하지만 그는 자기가 왜 왔는지를 기억하고, 더는 장난치지 않고 안으로 걸어갔다.테이블 쪽에 있던 시연이 샤부샤부 국물에서 고기를 건져내며 말했다.“진아야, 너 아까 배달원한테 뭐라고 했어? 잘생겼다고? 넌 진짜 잘생긴 얼굴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오? 얘 꽃미남 수집가였어?’지하는 고개를 숙여 진아를 쳐다봤다. 진아는
지하는 병실 문을 두어 번 상징적으로 두드렸다.“유건아, 나 들어간다.”문을 열고 시연을 휙 끌고 들어갔다.“사람 데려왔다!”곧장 침대 앞으로 가서 손을 놓자, 시연은 앞으로 확 밀렸다.“꺅...”발이 헛디뎌 중심을 잃은 시연은 침대로 고꾸라졌다. 넘어질까 봐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본능적으로 기대버린 사람은, 유건이었다.유건은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 “괜찮아?” 그리고는 지하를 노려보며 말했다.“행동 좀 조심해! 시연이는 임신 중이라고!”지하는 눈썹만 슬쩍 올리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난 이만 간다.”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다가, 문득 다시 뒤를 돌아 시연을 가리켰다.“아, 맞다. 시연 씨, 밥 먹다 말고 따라온 거라 아직 배고플 거야.”그 말을 끝으로 그는 진짜로 나갔다.복도엔 정민환과 정기환이 좌우로 서 있었다. 마치 병실 수호신처럼.그들은 지하를 보자 바짝 서며 인사했다.“지하 도련님.”“응.” 지하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따 형수님이 좀 날뛸 텐데, 잘 보고 있어. 절대 도망 못 가게.”“네, 도련님.”“그럼, 수고들 해.”...병실 안.시연은 유건 품에서 빠져나가려 팔을 밀었다. 하지만 유건은 꽤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와줬네?”‘뭐래...?’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하... 그 말, 당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아요?”“내가 어떻게 왔는지, 당신이 모를 리 없잖아요?”그녀는 손목을 들어 유건의 눈앞에 들이댔는데, 하얀 팔목에 붉게 남은 자국이 선명했다.지하는 손이 워낙 거칠었는데, 시연에게 사심이 없기에 더더욱 거침없었다. 하지만 이런 시연의 손을 본 유건은 마음이 아주 아팠다. 유건은 시연 손목을 조심스레 감싸 쥐고 쓰다듬었다.“많이 아파? 약이라도 바를까? 내가 지한한테 약국 좀...”“됐어요.”그는 한 손만 자유로
“안 되는 거예요?”시연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수저를 들었다.“알겠어요. 난 당신과 달리 입맛에 안 맞는 식사 한 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바로 반찬을 집은 후, 죽을 떠먹으며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유건은 차마 말을 끊지 못하고, 평소처럼 말없이 반찬을 덜어주었다.밥 먹을 땐 말이 없는 법이라 시연은 금세 배를 채웠다.오히려 유건은 그녀 챙기느라 두어 숟갈밖에 못 먹었다.입을 닦은 시연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이제 가도 돼요?”유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시연을 자극할 수 없어 조심스레 팔로 그녀를 감쌌다.“여기서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돼?”‘같이 있긴, 뭐가 좋아서...’시연은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여긴 잠 자기 불편하거든요.”보호자 침대를 가리켰다.“너무 작아요. 나, 요즘 뒤척임이 심해졌단 말이에요.”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밤에 잠들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보호자 침대는 안 돼.”유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 침대는 넓으니까 충분히 잘 수 있을 거야. 네가 뒤척여도 내가 안고 잘 테니까, 떨어질 걱정은 없어.” 두 사람이 같이 자자는 얘기였다.시연은 잠시 멍해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은 것처럼, 피식 웃음이 터졌다.“내가 뭐라고 말했길래, 아직도 우리가 한 침대에 누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유건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었다.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시연의 말투를 따라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내가 언제 허락했길래, 네가 방을 나가서 자는 게 당연한 줄 아는 거야?”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신경전.“나 말싸움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시연은 황당하다는 듯 잘라 말했다.“어쨌든 난 당신이랑 같이 안 잘 거니까... 못 나가게 할 거면, 난 여기 소파에서 밤새 앉아 있을 거예요.”그 눈빛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타협은 없다는 듯.결국, 유건이 물러섰다.“좋아, 같이 자자고 안 할 테니까 나
거칠게 시연에게 키스하는 유건의 행동에는 분명히 어떤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이건... 내 분풀이야...’ 그는 불쾌함을 발산하듯 시연을 깨물었다. 물론, 세게가 아니라 살짝이었다. 시연은 원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물리기까지 하니,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바로 입을 열어, 그대로 되물었다. 남자는 가볍게였지만, 시연은 제대로였다. 아프게, 확실하게. “읍...” 고통을 느낀 유건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깊어지고, 거칠어졌다. ‘미쳤나, 이 남자...?’ 시연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유건이 얼마나 거칠게 키스하든, 그녀도 그만큼 세게 물었다. 결국 입 안에 금세 피비린내가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놓았다. 시연이 고개를 들자, 유건의 입가에 피가 맺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웃고 있었다. 이어서 손끝으로 피를 닦았고, 손에 붉은 자국이 묻었다. “진짜 독하다. 사람을 이 정도로 문다고?” 시연은 순간 당황했다. 이 정도로 세게 물 줄은 몰랐다. ‘내 잘못인가...?’ 하지만 곧 눈을 부릅떴다. “누가 먼저 키스하래요? 자업자득이죠.” “뭐?” 유건의 가늘어진 눈엔 모호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이젠 내 아내한테 키스하는 것도 자업자득이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난 듯한 말을 남기고 욕실을 나가버렸다. “옷은 밖에 있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골라.” 밖으로 나온 시연은, 그제야 유건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아 이 바보... 내 짐을 통째로 보냈네.’ 시연은 한숨을 쉬며 캐리어 앞으로 다가갔고, 옷을 골라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병실로 나오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돌리니, 발코니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옆모습이 어딘가 쓸쓸하고 지쳐 보였다. 시연은 아무 말 없이 보호자 침대로 가서 앉았다. 머리는 아
유건은 숨이 턱 막혔다. 마치 이빨을 드러낸 들고양이가 가슴팍을 사정없이 할퀸 듯, 마음에 생채기가 그대로 남았다. ‘이 기분, 진짜 최악이다.’ 표정이 굳어졌지만, 여전히 잘생긴 남자의 얼굴에 억지 미소가 걸렸다. “내 아내한테 잘해주는 게 왜 시간 낭비야? 그리고 당신, 내 아내인 이상 단 하루도 도망 못 갈 줄 알아. 알아서 하면 뒷일은 감당해야 할 거야.” ‘허...?’ 시연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손해 보는 건 내가 아니니까...” 그리고 말을 툭 끊고, 시선을 돌렸다. “머리 다 말렸어요? 나 이만 잘 거예요.” “응, 다 말렸어.” 유건은 수건을 옆에 내려놓고 시연을 번쩍 안아 올렸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팔은요...? 팔 망가지게 하려고요?”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힘써도 돼요?” “괜찮아.” 유건은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피부만 좀 까진 거라 괜찮아. 그리고 내가 안 안아주면, 당신이 혼자 알아서 침대에 누울 수 있을 것 같아?” 말하는 사이, 그는 시연을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당신...!” 시연은 눈을 부릅떴다. “같이 안 잘 거라고 했잖아요!” “진정해.” 유건은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당신이 싫어하니까 약속한 거고, 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보호자 침대는 싫다며? 당신은 여기서 자. 나는 보호자 침대에서 잘게.” ‘뭐...?’ 시연은 어이가 없었다. ‘나는 환자 침대에서 자고, 환자인 고유건 씨는 보호자 침대에서 잔다고?’ “장난치지 좀 마요!” “여보, 내 말 좀 들어.” 유건은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당신이 편히 못 자면, 나도 편히 못 자. 그러니까 그냥 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시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면 내가 마음이라도 돌릴 줄 아나?’ “그럼 알아서 해요.” 이제 할 말은 다 한 듯, 시연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
시연은 민환을 바라보며 말했고, 민환은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정말 땅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겠지.’ 하지만 그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즉, 시연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얼른 가 봐요.” 시연은 가방을 들었다. “나도 출근해야 해서요.”“여보!”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화났어?”“그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시연은 차분하지만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화났다고 하면, 그 여자 만나러 안 갈 거예요?” “여보... 장소미 씨가 지금 많이 힘들어...” 유건은 난감한 얼굴이었다.“알아요. 그래서 나도 당신이 가는 거 안 막았잖아요.” 시연은 유건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나는 내 일이 있고, 내 일을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당신이 내 일을 방해하면... 나, 당신이 미워질 거예요.” ‘미워질 거라고?’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유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곧이어 그는 여자의 손을 놓았다.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사무실에 도착한 후, 인수인계를 마치고 잠시 앉았는데, 유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 “무슨 일인데요?” [지금 회사로 가는 중이야.] ‘회사? 장소미는? 그럼 팔은?’ 시연은 잠깐 놀라 물었다. “수액은 안 맞아도 돼요?”[맞아야지. 낮엔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에 병원에서 맞을 생각이야.] ‘정말 일에 미친 사람.’ 시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지난번에도 칼을 맞고 병실에서조차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때 유건이 덧붙였다. [오늘 퇴근하고 데리러 갈게.] 시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당신은... 당신이나 잘 챙기세요.”[그렇게 정했어. 병원 앞에서 기다릴게.] 그 말을 끝으로 유건은 전화를 끊었다. 시연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걸로 다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조 선생님, 그런 뜻이 아니라...” 시연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팀도 아니고, 조한나가 맡은 환자 상태는 시연이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진료차트를 정리하란 말인가?“그럼 입 다물고 하라는 대로 해!” 조한나는 차트를 시연 손에 억지로 쥐여주며 말했다. “빨리 처리해. 난 약속 있어서 가봐야 해!”“아, 조 선생님...” 시연이 불렀지만, 조한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시연은 진료차트를 품에 안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어. 그냥 해야지...’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유건이었다.[여보. 나 지금 병원 앞이야. 내려올래?]시연은 손에 들린 진료차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일 안 끝났어요. 좀 더 있어야 해요.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요.”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유건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표정은 어두워졌고,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렀다. ‘안 내려온다고? 그럼 내가 올라가야지.’‘남자는 융통성 있어야 하니까... 뭐 이런 일쯤이야.’그는 외과 병동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리고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조한나가 나왔다.그녀는 전화 중이었다. “나 출발했어. 근데 나오기 직전에 누군가 진료차트를 처리하라고 하길래, 지시연한테 맡겼어. 어, 그 재벌 며느리 말이야.” “맞지? 나도 걔 되게 유난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잘났으면 그냥 집에서 살림이나 살지, 뭐 하러 여기 와서 일을 해? 너 그거 알아? 양석현 교수가 걔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난 걔네 둘 뭐 있는 줄 알... 아악!”순간, 핸드폰이 손에서 확 낚아채졌다. 조한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누, 누구...!!!”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손을 들어, 그녀의 핸드폰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쾅!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꺄아악!” 조한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유건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