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참을 기다리던 시연은 결국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생각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그 순간, 시연은 멍해졌다.“하... 뭐야 이건...”그녀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메시지 옆, 새빨간 느낌표 하나. 그 아래, 시스템 문구.[사용자가 메시지를 수신하지 않도록 설정했습니다.]“하...”시연은 한숨이 자동으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심장이 짧게 쿡 하고 찔리는 듯했다.‘차단했네. 진짜... 나를 완전히 지워버린 거구나.’잠시 벽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던 시연은, 스스로를 다잡듯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됐어. 그 사람은 날 밀어냈어도, 나는 할아버지를 속일 수 없어.’...고상훈 병실.“할아버지.”노크 후 들어선 시연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고상훈은 침대에 앉아 난 화분을 다듬고 있었다.“왔구나, 우리 시연이.”노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병색은 여전했지만, 오늘은 확실히 상태가 좋아 보였다.“와... 꽃 진짜 예쁘네요.” 시연은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할아버지, 저... 이렇게 핀 건 처음 봐요.”“그래? 그럼 잘 왔다.”시연 뒤를 슬쩍 본 고상훈이 물었다.“유건이는?”“일이 좀 있어서요.” 시연은 사전에 준비해둔 말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일보러 가기 전에, 저한테 할아버지를 잘 챙기라고 몇 번을 당부했는지 몰라요.” “허허, 사내놈이란 게 참, 아내만 고생시키고.”고상훈이 팔을 내밀자 시연이 곧장 팔짱을 껴 잡았다.“식당으로 모실게요.”...병원 내 특실 전용 식당.깔끔하게 차려진 밥상에 둘이 마주 앉았다. 식기는 조용히 부딪혔고, 식사 내내 고상훈은 시연의 접시에 반찬을 수차례 덜어주었다.“아가, 천천히, 많이 먹어라. 난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이 녀석, 할아버지한테 무슨 감사야.”잠시 고요가 흐르다가, 고상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서류입니까?”지한이 건네받은 파일 위에 적힌 문구를 보자마자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강울대병원 양석현 교수팀/2차 연구지원 요청서]‘하필 이 타이밍에...’그 병원, 그 과, 그 교수... 모두 시연과 연결돼 있었다. 원래 유건이 직접 약속한 후원이었다. GP그룹에서 첫 회분을 지급했고, 이제 2차 분기 정산이 올라온 상황.‘하지만... 지금은...’“실장님, 제가 한번 올려볼게요.”...대표실. 지한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고, 서류를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형님, 사인 한 번만 주시면 됩니다. 강울대병원 외과... 전에 약속하셨던 그건데요, 이번 분기 분...”“설명은 간단하게 해.”유건은 차트를 넘기던 손을 멈추지 않으며 대꾸했다.그는 수많은 업무를 일일이 확인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따라서 일반적인 건은 지한이 먼저 검토하고, 중요한 부분만 보고를 올리는 방식이 정착되어 있었다.“형수님 쪽입니다.”“하...”유건의 손이 멈췄다. 잠시 후, 책상 위의 서류 파일이 허공을 날아 지한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내가 뭐라고 했지?”“죄송합니다.”“지, 시, 연! 그 이름! 앞으로 내 앞에서 입 밖에 꺼내면, 너도 예외 없어.” “네, 알겠습니다.”지한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어... 지한 씨? 그거... 어떻게 됐나요?”비서실장은 급하게 물었다.“일단... 보류로...” 지한은 파일을 다시 건넸다.“그쪽에선 뭐라고 해요?”비서실장은 난감하게 웃으며 말했다.“병원에서 재촉이 심해요... 어떻게 답을 드려야 할지...”지한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저도 모르겠네요... 지금 형님 상태라면, 무슨 말을 꺼내도 폭발할 상태라서요.’ ...며칠 뒤, 강울대병원 외과 회의실.양석현 교수와 팀원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공기엔 은근한 긴장감이 감돌았다.“2차 지원금... 아직인가요?” “GP 쪽에서 답변이 없어요.” “지 선생님은 고 대표님
과장실 문을 나서자, 시연의 표정엔 피곤함과 난처함이 가득했다.‘괜히 수락했어... 지금 그 사람 앞에 어떻게 서지...’“시연아.”하은이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정히 시연의 팔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배가 좀 더 나왔네. 조심 좀 해.”“고마워.”“아냐, 내가 해야 할 일이야.”‘고 대표님이 부탁했으니까... 지켜줘야 하니까...’하은은 시연의 얼굴을 흘깃 살폈다.“요즘... 너랑 고 대표님... 정말로 싸운 거야?”시연은 걸음을 멈칫했고, 잠시 뜸을 들이다 애써 담담히 말했다.“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정확히 말하면, 싸움이 아니라... 끝...’하은은 한숨을 내쉬며 억울해했다.“역시... 장소미 때문이지? 그 여자... 진짜 너무 뻔뻔하잖아! 결혼한 사람한테 아직도 들러붙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아니야...”뜻밖에, 시연이 조용히 말을 끊었다. 하은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 사람 때문 아니야. 우리 사이 문제는, 우리 둘 사이에 있어.”시연은 짧게 웃었다.“물론 누구 탓으로 돌리면 편하긴 하겠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거든.” ‘장소미는 단지 내가 그 사람한테 얼마나 의미 없는 존재였는지 보여주는 증거였을 뿐이야.’ “진짜... 넌 너무 침착해.”하은은 놀라움과 안쓰러움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보통 사람이라면... 다 뒤집고도 남았을 텐데...”“괜찮아.”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 먼저 갈게. 오늘은 좀 피곤하네.”“그래...”하은은 뭔가 떠오른 듯 중얼거렸다.“고 대표님이랑 시연이... 진짜 싸우기라도 한 거가? 설마... 둘이...”‘혹시... 이혼이라도...?’그 생각에 하은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괜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한편, 퇴근했다고는 하지만, 시연은 곧장 쉴 수 없었다.그녀가 향한 곳은 집이 아닌 고씨 가문 본가였다.‘그 사람이 날 차단했으니까 직접 가서 말할 수밖에 없어. 이건..
“그런데... 꼭 가셔야 해요?” “이모님, 제가 여기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시연은 끝내 본가를 떠났다. 밤이 늦어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왕성애는 운전기사를 불러 시연을 데려다주게 했다. 시연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차를 탔다. 집에 도착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오늘도 못 봤어... 이모님 말로는 요즘 그 사람이 본가에도 아예 안 간다던데...’‘그럼, 대체 어디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회사? 그래, 회사라면... 밤에는 어디서 뭘 하든 상관없지만, 낮엔 어차피 회사에 나갈 테니까.’마침 다음날이 휴무일이었기에, 결심한 시연은 다음 날 아침 곧장 GP그룹을 향했다.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부부로 지냈던 시간이 있었던지라, 시연은 대충 이 시간쯤이면 유건이 아침 회의를 마쳤을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사모님!”프런트 직원은 당연히 시연을 알아봤고, 평소처럼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군요. 고 대표님, 이 시간이면 회의가 끝나셨을 거예요. 지금 올라가시면 딱 좋을 거예요...”직원은 이 말을 끝으로 재빠르게 카운터 밖으로 나와 시연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하려 했다.“저기요...”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망설이다 말했다. “고 대표님을 뵈러 오긴 했는데요. 직접 올라가는 건... 좀 그렇네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대신 말씀 좀 전해주실래요?”GP그룹 직원들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시연은 아주 아무렇지 않게 대표실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유건의 기분이 더 언짢아진다면, 그건 너무 손해였다.‘난 지금... 부탁하러 온 거니까.’“네? 아...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직원은 당황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데스크로 돌아가, 대표실 비서실 내선 번호를 눌렀다.“사모님 오셨습니다. 고 대표님 지금... 시간 괜찮으실까요?”비서실 쪽 반응도 프런트와 비슷했다.[사모님
이런 결과는, 예상 밖은 아니었다. 오기 전에 시연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건을 쉽게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인제 어쩌지? 그냥 돌아가야 하나?’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로비 한쪽 대기 구역을 가리켰다. “저기서 고 대표님을 기다려도 될까요?”“아... 네, 괜찮습니다.” 직원은 막지 않았다. 애초에 대기 구역은 그런 용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사모님, 편히 계세요.”“감사합니다.” 시연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대기 구역의 소파에 조심스레 앉았다. 가방을 옆에 놓고, 숨을 한번 고르는데, 곧 직원이 다가와 물 한 잔을 건넸다. “사모님,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네, 감사해요.” 시연은 따뜻한 물컵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지만, 웃음은 쓰게만 느껴졌다. ‘기다릴 수밖에 없지. 방법이 없어.’점심쯤 되면, 고유건이 식사하러 나올지도 몰랐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정오에 가까워졌다.직원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연을 힐끗 보더니 조용히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고, 주지한을 찾았다. [무슨 일이죠?]“사모님이 계속 안 가고 기다리고 계세요. 곧 점심시간인데...”지한은 몇 초간 말이 없더니, 이내 조용히 지시했다. [사모님 식사 하나 주문해 주세요. 총괄실 쪽 비용으로 처리하시고요.]“알겠습니다.”점심이 지나도, 유건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연은 조용히 배를 문질렀다. ‘나도 이렇게 배가 고픈데... 그 사람... 배도 안 고픈가?’‘혹시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전용 엘리베이터로 나간 건 아닐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 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셉션에 가보려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직원이 다가왔다. 이번엔 직원이 도시락까지 들고 있었다. “사모님, 아직 식사 안 하신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면, 이 도시락 드세요.”“감사합니다.” 시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
지한이 보기엔, 시연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간 듯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하지만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막 나온 시연은 멀리서 유건과 지한이 정문을 지나 계단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기 있다...!’더는 생각할 틈이 없어서 시연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유건 씨!”문 앞에서 유건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놀란 듯 고개를 돌리자, 시연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여자의 걸음은 빨랐고, 숨이 찰 정도로 다급했다. 유건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저 여자... 아직도 안 갔던 거야?’“유건 씨! 잠깐만요!”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거의 뛰다시피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건은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배가 저렇게 불렀는데도... 뛰고 있어?’ 하지만 곧 속으로 비웃듯 생각했다.‘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유건 씨...” 시연은 겨우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잠깐이면 돼요. 몇 분이면 되는데... 시간 좀 줄 수 있어요?”맑은 눈망울이 간절히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유건은 잠시 목이 메는 듯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비웃듯 느릿하게 말했다.“신기하네. 네가 먼저 날 찾을 줄은 몰랐거든.”“그게 아니라, 나...”그러나 시연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유건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근데 난, 너한테 줄 시간이 없어. 단 1분도.”차가운 눈매, 건조한 말투. 남자의 입꼬리는 비쭉 올라갔지만, 표정엔 온기가 없었다.그러고는 단호히 돌아섰다. 그 차가운 뒷모습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닫혀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식으로, 날 밀어내던 사람...’유건의 본모습을,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시연의 몸속으로 한기 같은 게 퍼지며, 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멍하니 유건이 차에 올라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안 돼...
단 한 마디. 그 말에 시연은 마치 얼음물에 던져진 듯 몸이 굳었다.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따갑지?’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따가운 말이 그녀를 후려쳤다.“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건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냉소가 담긴 웃음이었다.“내가 왜 양석현 교수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것 같아?” “내가 마음이 약해서? 돈이 남아돌아서? 밤에 잠이 안 와서?”순간,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건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아니, 다 아니야. 널 위해서였어. 널 아끼니까, 널 좋아하니까, 돈을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던 거야.”그 말을 끝내고, 유건은 웃었다. 이번엔 대놓고,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근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또 돈을 써야 하지? 지금의 네가, 그럴 가치가 있나? 차라리 그 돈으로 비둘기 밥이나 주는 게 더 낫겠는데?” 시연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건은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제 가고,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너랑 엮이는 거, 진심으로 지긋지긋해. 너랑 관련된 모든 일은 다 끝났어.”그는 돌아섰다. 단호하고 차가운 걸음이었다.“유...” 시연은 반사적으로 불러보려 했지만, 목에 걸린 그의 이름은 한 글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 해...’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심장도, 생각도, 감정도 전부 마비된 채로.그 순간, 유건이 다시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저 등을 보인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일부러 찾아왔고, 부부였던 정은 있으니까... 지원금은 지한이 통해서 처리하도록 할게. 하지만 이번뿐이야. 다음은 없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차로 향했고, 조용히 문을 열고 올라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그대로 떠나버렸다.그리고 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가을 오후의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여자애는 두 손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진짜 살짝만, 살짝만 만져볼게요.”말처럼, 여자애의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와... 아기가 있는 배는 이런 느낌이구나! 선생님, 진짜 대단해요. 엄마 되는 거, 완전 힘든 일인데...”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누굴 찾는 건가요?”“저요?”여자애는 손을 거두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깨에 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혹시 변이준 있어요? 저 보고 오라 그랬거든요.”‘이준 선배님?’“수술 들어가셨어요.”“헉, 진짜요?”여자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아싸, 잘됐다!”그 말과 동시에,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멨다.“선생님, 나중에 변이준이 오면 전해주세요. 저 왔다 갔다고, 없어서 먼저 간다고요!”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벌써 휙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이었다.“어... 네...”시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여기가 무슨 호랑이굴이라도 되는 건가? 저렇게까지... 도망갈 일인가?” 그래도, 궁금했다. ‘저 친구... 선배님이랑 어떤 사이지?’‘여동생일까? 닮은 구석은 없었는데...’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눈에 띄게 수려했다는 정도?’오후 2시쯤, 변이준이 수술을 마치고 내려왔다.머리는 아직 축축했지만, 얼굴은 늘 그렇듯 환했다.시연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선배님, 의뢰하신 처방은 이미 내려놨어요. 환자도 약을 복용 중이고요.”“역시, 고마워!”이준은 환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훑었다. 그때, 시연은 문득 오전 일을 떠올렸다.“아, 맞다. 오늘 오전에 어떤 여자분이 선배님을 찾아왔었어요. 근데 안 계셔서 그냥 간다고 하시던데요?”“그냥... 갔다고?”그 말을 들은 이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하... 그 녀석, 말을 좀 듣고 살면 어디 덧나나...”이준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더 이상 머리를
“고, 유, 건!” 시연의 인내심이 결국 터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유건은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너 샤워 다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그때 갈게. 욕실 바닥 미끄럽잖아. 그 생각하니까 그냥 여기 있는 게 마음이 편해서 그래.” ‘아주 지극정성이네, 진짜.’시연이 숨을 꾹 참고 머리를 홰 젖히며 돌아서자, 긴 머리카락도 그녀를 따라 허공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방에서 나왔을 때, 유건은 이미 마른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건이 선수를 쳤다. “머리만 말려주고 갈게. 팔 오래 들고 있으면 어깨 아프잖아.” ‘와... 이 사람 진짜 각 잡았네.’ “당신...” 시연은 유건을 날카롭게 흘겨봤다. “지금 완전 딱 쫀득한 엿 같은데요? 질척거리는 게, 떼도 안 떨어질 것 같아요.” “고마워, 나 그런 칭찬 좋아해.” 유건은 오히려 웃으며 수건을 펼쳤다. “칭찬...?” 시연은 어이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정신력은 또 뭐야...’ “자, 머리 말리자. 머리 다 말리고 자야 감기 안 걸리지.” 결국 시연은 눈을 감았다. ‘됐어... 그냥 못 본 척하자. 말하면 뭐 해? 안 먹힐 텐데.’ ...그런 날들이 계속됐다. 유건은 하루에 두 번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아침엔 아침밥 들고 등장. 점심엔 직접 못 오면 민환을 통해 도시락 배달. 저녁엔 꼭 나타났다. 빠르면 같이 저녁, 늦으면 야식. 그리고 샤워 후엔 늘 자연스럽게 등장해 머리를 말려주기까지. 시연은 정말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봤다.차갑게도 말해봤고, 내쫓으려 해본 적도 있었고, 문 앞에 세워두기도 해봤다. 하지만 유건은 마치 그 자리가 제자리라도 되는 듯, 늘 시연 곁을 지켰다.마치 떠날 줄 모르는 그림자처럼.어느 날 오전. 시연은 오랜만에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잠깐 들릴 생각이
“놓아달라고?” 유건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긴 속눈썹 아래로 감춰진 눈빛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널 좋아한다고 말한 게, 널 못 놔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 ‘또 그 말이지. 좋아한다, 좋아해.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데...’ 시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래?” “왜 그러냐고요?” 시연은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쉬었다. ‘진짜... 말이 안 통해.’ 머리는 온통 유건이 감아준 목도리로 덮여 있었다.겉으로는 따뜻해 보였지만 마음은 너무도 답답했기에, 약간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알잖아요. 나... 당신을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는 거...” “응, 알아.” 유건은 고개를 숙이며 낮게 웃었다. “아직 기억해.” “그럼 지금 이건 다 뭐예요?” 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린, 그거 때문에 헤어진 거잖아요?”두 사람은 명확하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진 않았다.하지만 그동안의 긴 냉전은 이미 서로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서로 말은 안 했지만, 끝난 거나 다름없었어. 할아버지 때문에 그냥 참고 있었던 거지.’ ‘이젠 할아버지조차 이혼을 허락했는데... 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 “나도 알아.” 시연은 말끝을 질끈 씹듯 말했다.“당신이 그랬잖아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의미 없다고. 세상에 여자가 한둘도 아닌데, 그런 사람한테 매달릴 필요 없다고요...” 유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말, 정확히 그렇게 했었다. ‘참 잘 기억하네. 근데 내가 했던 행동들은 왜 기억 안 하지...?’ 유건은 얇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그냥 아무 말이나 뱉은 거야.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어?” “뭐라고요...?” 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말 바꾸는 거야?’ ‘이 인간, 진짜 뻔뻔하네.’ “우린 말 안 통해요. 난 당신처럼 무책임한 사
“고마워요.” “천만에요.” 우주는 과일 접시를 힐끗 보더니,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켰다. “누나, 이 귤, 진짜 달아.” “그래?” 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우주는 먹어봤어?” “응.” 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아저씨가 준 거야.” 그 말에, 시연의 웃음이 그대로 멈췄다. ‘아저씨...’ 우주의 입에서 나오는 그 ‘아저씨’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당연히 지동성이었다. “그 사람이...” 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가 널 보러 왔었어?” “응.” 우주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오후에 왔어.” ‘어제...’ ‘퇴원한 바로 다음 날?’ ‘그럼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우주를 보러 온 거야...?’ ‘이게 진심일까, 아니면 또 쇼일까?’ 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까지 애써야 할 이유가 대체 뭐지...?’ “누나.” “응?” 시연이 정신을 가다듬고 우주를 바라보자, 우주는 조금 머뭇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저씨... 이제 괜찮아진 거야?” ‘뭐...?’ 시연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우주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아저씨가 그랬어.” 우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동안 날 보러 못 온 건, 아팠기 때문이라고.” ‘왜 그런 말을 우주한테 했지...?’ 시연의 가슴이 조여왔다. “아저씨가 또 뭐라고 했는데? 무슨 병이라고 했어?” “아... 뭐라고 했냐면...” 시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진짜 말한 거야? 설마...’ “뭐라고 했는데?” 우주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감기래.” “감기...?” 그 말에 시연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그 정도로만 말했구나...’ ‘정말... 그 사람, 아직도 이중적인 사람이네.’ “누나.” 우주가 다시 입을 열었
해가 채 뜨기도 전, 시연은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아는 이불 속에서 눈을 겨우 떠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몇 시야...?” “아직 이른 아침이야.” 시연은 진아의 통통한 볼을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나 우주랑 아침 먹기로 해서 좀 일찍 나가. 너는 더 자.” “응...” 진아는 듣자마자 바로 순하게 눈을 감았다. 시연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별산장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문을 연 건 최예민이었다. “우주 도련님은 지금 세수 중이에요. 아침에 깨우지도 않았는데, 누나 온다고 혼자 벌떡 일어나서 준비하더라고요.” 최예민은 환하게 웃으며 시연을 안으로 안내했다. “사모님, 여기 앉으세요. 아침은 다 준비됐고, 곧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아이고, 뭘요. 당연한 일인데요.” 조금 뒤,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이 놓이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 “누나!” 우주가 얼굴에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뛰어왔다. 그러고는 시연의 옆에 착 붙어 앉으며 해맑게 웃었다. “조심해!”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만둣국 한 그릇을 우주 앞에 놓아줬다. 조금 전 살짝 식혀둔 국이었다. 그래도 시연은 당부했다. “천천히 먹어. 국물 뜨거우니까.” “응! 누나 걱정하지 마. 나 조심할게!” 우주는 아주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나도 같이 먹자!” “그럴까?” 시연도 조심히 젓가락을 들며 미소 지었다. ...그 시각, 시연의 아파트. 띠링- 초인종 소리에 진아는 부스스 일어나 문으로 갔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문을 열었는데, 눈이 순간 커졌다. “고, 고 대표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진아는 아직 잠옷 차림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등장에 머리도 제대로 못 가다듬은 상태였다.유건은 짧게 진아를 본 후, 바로 시선을 돌려 옆으로 몸을 틀었다. “시연이는 일어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
유건의 말에 시연은 멍해졌다. ‘뭐...?’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장소미 때문에 애쓸 필요 없다고...” “장소미 때문이 아니야!” 유건이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장소미 얘기 좀 그만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은 너야. 근데 넌 계속 장소미 얘기만 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날 포기하게 하려고?” ‘포기...?’ ‘무슨 포기?’ 순간 얼어붙은 시연의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만해요. 듣기 싫어요.” 시연은 급하게 말을 끊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찾았다. 하지만 열쇠를 꺼내기도 전에, 손목이 따뜻한 손에 붙잡혔다. 유건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날 벌주려고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마음인 줄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요?”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설마... 아니겠지.’ “좋아해.” 짧은 세 글자가 공기 속에 맴돌며 터졌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시연은 입술을 벌린 채,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눈동자엔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겹쳤다. 유건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시연. 나 너 좋아해.”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지시연,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마음을 너만을 향한다고.”27년 인생, 유건에게 고백이란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볼 안쪽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떨릴 일이야...?’ ‘이런 게 고백이라는 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고유건 대표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연애 초
그날 갑자기 셋이 자리를 뜰 때, 성빈한테는 제대로 설명도 못 하고 나왔다. ‘좀 미안하긴 했는데...’ “아냐.” 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평일이잖아. 성빈이 일하는 날이야. 우리처럼 백수들이랑은 다르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시연은 더 고집하지 않았다. 진아는 시연을 위해 산모 요가 클래스에 함께 들어갔다. 영화는 그냥 그랬다. 극장을 나오자 둘 다 하품만 연발.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는 G시. “으, 춥다...” 진아는 시연의 팔짱을 끼고, 발을 구르며 입김을 불었다. “우리 샤부샤부 먹자! 얼큰한 걸로!” “평소 가던 데로 가자.” “좋아!” 마침 그 식당은 클럽 근처에 있었다. 클럽 쪽으로 들어서자, 진아가 걸음을 멈췄다. “왜?” 시연은 고개를 돌려 진아가 보는 쪽을 따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클럽 안에서 나오는 성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곁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빈은 여자의 어깨에 여성용 외투를 살포시 걸쳐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세심하고, 약간 고개를 숙인 그 눈빛은... 분명히 다정했다. “진아야.” 시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진아는 시선을 거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봐봐, 오늘 성빈 안 부르길 잘했지. 바쁘잖아, 저렇게.”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성빈이... 연애 안 한다더니. 그럼 저 여자는 뭐지?’ ‘이건 좀 아니잖아?’ 뭔가 기분이 상한 시연은 진아를 살짝 당겼다. “가서 인사나 할까?” “야야...” 진아는 손을 급히 잡아당기며 막았다.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우리가 가면 민폐지.” “진아야...” “가자니까!” 진아는 배를 가볍게 감싸며 투정을 부렸다.“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너는 안 배고파? 얼른! 밥 먹자고.” 결국 시연은 한숨을 쉬며
시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동성이 그런 걸 물어올 줄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다고?’ ‘이게 걱정이라고? 참...’ 시연은 코웃음이 나올 뻔했다. ‘죽을 날 다 돼가니까, 양심이라도 생긴 건가? 완전 새사람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시연아... 고 대표 좋아하니?” 시연이 침묵하자, 지동성은 조급해졌다. 장미리가 약을 가지러 갔던 참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아니요. 안 좋아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건 그냥 과거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얘길 굳이 이 사람한테 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지동성이 쥐고 있는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제... 가도 될까요?” “응, 그래.” 지동성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고, 시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 멀리서 장미리가 약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국 줄이 엄청 길더라고요.” 장미리는 다가와 지동성을 부축했다. “다 받아왔어요. 이만 가요.”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딸 장소미에게 들를 예정이었다. “그래...” 지동성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리에게 이끌려 외과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하지만 머릿속에는 시연의 말만이 맴돌았다. ‘안 좋아해요...’ ...병실 안, 장소미는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소미야, 오늘은 좀 어때?” 장소미가 약 봉투를 내려놓으며 병상 옆에 앉았다. “뭐가 어때요?” 소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맨날 약 바르고, 주사 맞고, 치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거즈로 감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데 봐봐요. 그렇게 해도 맨날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 얘야!” 장미리는 깜짝 놀라 급히 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다 상처 다시 터지면 어떡해? 조심 좀 해.” 지동성도 진정시키듯 말했다.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