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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6화

Author: 임공
시연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은범이는 내 첫사랑이에요. 외모도, 인품도, 집안도 빠지는 데가 없죠. 그 사람은 나만 사랑했어요. 오직 나만... 그리고 나도... 정말 사랑했어요.”

“그만해!”

유건은 잔뜩 굳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네 과거 연애사 따위,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아. 나는, 지금 너와의 미래가 필요해.”

“조급해하지 마요. 금방 끝나니까.”

시연은 유건의 시퍼런 얼굴을 모른 척하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미치도록 사랑했던 은범이랑 헤어지고 나서, 난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죠.”

‘듣기 싫어하는 얘기인 거 알지만, 이건 꼭 들려줘야 해.’

유건의 눈빛은 이미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 속에서 파랗고 어두운 불꽃이 일렁였다.

‘노은범... 네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나한텐 참을 수 없는 일이야.’

만약 살인이 허락된다면, 유건은 이미 은범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시연은 그쯤에서 ‘회상’을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층 가라앉히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살아남았어요. 잘 살아왔고, 지금은 은범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은 유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의 은범이는 나한테 그냥 평범한 친구일 뿐이에요.”

이어서 단단한 어조로 덧붙였다.

“은범이도 그런데, 당신은 어떻겠어요?”

은범도 이렇게 됐는데, 하물며 당신은 어떻겠어요?”

“우리가 이혼하면, 나는 금방 당신을 잊을 거고... 내 삶을 계속 살아갈 거예요. 어쩌면 언젠가는,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몰라요.”

시연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유건은 전부 들었지만, 반박할 말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속이 미친 듯이 아파져 왔다.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버겁네...’

그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눈발이 섞인 바람이 칼날처럼 스쳤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시연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단단히 웅크리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추워.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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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건은 레오의 손목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손 놔요.” 유건의 몸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레오는 그런 유건을 경계하며 시연을 지키듯 그녀를 뒤로 감췄다. “당신 누구예요? 시연 씨를 다치게 하지 마시죠.” 하지만, 유건은 레오의 말이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그래도 레오가 쉽게 손을 놓지 않겠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좋아요. 안 놓겠다 이거죠?” 유건은 싸늘하게 웃으며 천천히 오른손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시연이 놀라서 황급히 유건을 붙잡았다. “고유건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유건의 얼굴엔 먹구름처럼 어두운 기운이 드리웠다. “이 남자는 누구야? 왜 너를 데리러 온 건데?” 물론, 유건은 오늘이 시연의 동창회 날인 걸 알고 있었다. 시연이 직접 얘기해주진 않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비워서 같이 가려고 했다.그렇게 급히 달려온 유건과 달리, 시연은 연락 한번 없이 다른 남자와 동창회에 가려 했다. 게다가... 레오는... 아무리 봐도 꽤 나이 들어 보였다. ‘원한 게 결국 이런 거야?! 설마, 저런 아저씨랑 동창회에 가겠다는 거야? 무슨 사이길래?” 유건은 점점 화가 치밀고, 서글픔까지 몰려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지시연, 너 눈은 어디에다 두고 다니냐? 나 같은 건 싫고, 저런 아저씨는 괜찮아? 저 인간, 네 아빠뻘이야!” ‘뭐야...?’ 이 상황, 시연에게는 너무 익숙했다. 유건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게 누구든, 다른 남자가 시연의 옆에 있으면 바로 오해하고 화를 냈다. “그만해요!”시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예전의 그녀는 그냥 넘어가겠지만, 이젠 유건이 자신에게 참견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가운 눈빛으로 유건을 쏘아보며 말했다. “진짜 지긋지긋해요. 더 이상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요. 제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31화

    유건의 말은 분명 옳았다. 하지만 시연의 얼굴에는 차가운 웃음만 맴돌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술을 달싹였다. 유건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래요.” 시연은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장소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꺼냈다가는, 자신이 마치 질투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괜히 신경 쓰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 하지만 유건이 먼저 화두를 꺼냈다. 그래서 시연도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했다.“당신은 지금 포인트를 잘못 짚었어요. 난 우리가 이혼하기로 한 그 순간부터, 난 당신이 장소미한테 미련이 있건, 없건 전혀 신경 안 쓰게 됐어요.” 유건의 호흡이 순간 멎었고, 검은 눈동자 속에 짙은 어둠이 빠르게 번져갔다. 하지만 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난 정말 이해가 안 돼요. 당신, 장소미를 사랑했다면서요? 그럼, 지금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데... 깨진 걸 다시 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요. 아끼고, 잡아야죠.”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유건은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번도.” “그래요.” 시연은 담담하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예전엔 애써 외면했지.’ ‘당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예전엔 그런 생각 안 했겠죠. 당신이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인데... 결혼한 이상,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진 않았겠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 시연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그때 반대하던 할아버지도, 이제 허락했잖아요. 그러니까...” 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또렷하게 말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도 돼요.” ‘이제는, 아무도 당신을 탓하지 않을 거야.’ 시연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유건이 억지로 술을 들이켜던 모습을. 얼마나 결혼이 싫었고, 얼마나 장소미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를. 시연은 눈을 깜박이지 않고 유건을 바라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30화

    건강검진은 공복 상태에서 진행해야 해서,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지금 시각은 겨우 9시를 조금 넘긴 정도. 9시 반도 안 됐다. 시연이 괜히 핑계를 대며 거절할까 봐, 유건은 시연 대신 우주를 공략했다. “우주야, 뭐 먹고 싶어? 매형이 사줄게.” “히히.” 우주는 시연을 힐끔 쳐다보며, 웃음기를 감추지 못했다. “햄버거! 치킨!” 이런 우주를 보자, 유건과 시연은 ‘천재 소년’도 어쩔 수 없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런 건 건강에 안 좋아.” 하지만 우주는 영리했다. 누나랑 다투지 않고, 슬쩍 불쌍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봤다. ‘이 귀여운 걸 내가 어떻게 거절해...’ ‘게다가, 지금은 내 편인데...’ 유건은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매형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결국 셋은 ‘셀레스트’로 향했다. ‘햄버거도 치킨도, 넓게 보면 다 서양 요리잖아.’ 햄버거나 치킨은 원래 메뉴판에 없는 메뉴였기에, 유건은 메뉴판 따윈 보지 않고 곧장 주문했다. 주방엔 미슐랭 스타 세프들이 가득하니, 햄버거나 치킨쯤이야 뚝뚝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곧 테이블에 음식이 차려졌다. 우주는 두 손을 모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매형 최고!” 시연은 여전히 그런 음식에 관심이 없어서 담백한 빵과 베이컨, 계란을 따로 시켰다. 유건은 조심스럽게 시연의 빵에 스프레드를 발라주고, 계란 위에는 후추와 로즈 솔트를 솔솔 뿌렸다. “먹어.” 우주가 보는 앞이라, 시연은 버럭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근데 왜 이렇게 목이 막히는 거야.’ ‘입맛이 없네.’ 아침을 먹고 나니, 슬슬 시간이 애매해졌다. 별산장은 시내와 거리가 꽤 멀다. 유건은 고민 없이 민환을 호출했다. “우주는 민환이랑 같이 가고...” 시연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시연아, 넌 내 차 타. 집까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9화

    “네?” 시연은 유건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냥 만나는 김에 말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매일 장소미 보는데...” 그 말에, 유건은 숨이 턱 막혔다. ‘그래, 매일 장소미를 보긴 해. 하지만...’ ‘네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건 싫어.’ 시연의 한마디는, 마치 유건을 장소미 쪽 사람처럼 선을 그어버린 것 같았다. ‘우린 부부야. 장소미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가까운 사이인데.’ 유건은 답답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시연아, 나랑 장소미는...” 하지만 ‘장소미'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시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표정이었다. “나 화장실 좀...” 시연은 짧게 말하고, 가방을 최예민에게 건넸다. “가방 좀 부탁해요.” “네, 사모님.” 유건은 가늘게 눈을 좁히며 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구나.’ ‘이렇게까지 나를 밀어내야겠어?’ “고 대표님?” “왜요?” 최예민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유건은 심기가 불편한 탓에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딱딱해졌다. 우주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말했다. “매형, 누나 핸드폰 울려!” “그래?” 우주를 보며 살짝 표정을 풀고, 유건은 시연의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모르는 이름이 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상대방은 남자였다. 유건은 즉시 경계심을 세웠다. “누구세요? 이건 제 아내 핸드폰입니다. 지금 곁에 없어요.” 목소리에 자연스레 소유욕이 잔뜩 묻어났다. 상대 남자는 황급히 말을 바로잡았다. [아, 네! 혹시 고 대표님이신가요?]남자는 금방 눈치를 챘다. 고씨 가문의 결혼식이 조용했어도,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걸 모를 리 없었다. [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저는 지시연 씨의 대학 동기입니다.]‘지시연 씨'라는 딱딱한 호칭이, 유건의 마음을 조금은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8화

    “밖은 추워. 우주야 얼른 타.” “응!” 우주는 힘차게 대답하고 차에 올라탔다. 차는 강울대병원으로 향했다.이른 아침이지만, 건강검진 센터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시연은 미리 예약해 뒀고, 병원 소속 의사였기에, 우주를 데리고 직원 전용 통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시연은 유건에게 말했다. “당신까지 들어올 필요 없어요. 나랑 최 선생님이면 충분해요.” “알겠어.” 유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기다릴게.” 그러면서 최예민에게도 당부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줘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 대표님.” 대기실은 왁자지껄했다. 귀를 찢는 소음 속에 앉아 있으려니, 유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연이만 아니면, 이런 데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는데...’ “유건 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장소미가 간병인이 이끄는 휠체어에 탄 채 다가오고 있었다. 유건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여긴 왜 왔어?” 시연은 미리 신신당부했다. 장미리나 장소미, 우주 앞에는 절대 나타나지 말라고... 우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었으니 말이다. 장소미도 그 뜻을 알기에 급히 말했다. “우주가 안으로 들어간 거 보고 온 거예요. 우주한테 상처 주려고 온 거 아니에요. 우주도 내 동생이니까요...” 유건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눈썹을 좁게 모았다. “설마 시연이가 우주 데리고 안 올까 봐 걱정한 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시연이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한번 말하면, 반드시 지켜.” 그 말에, 소미는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람, 이렇게까지 지시연 편을 들다니...’ ‘지시연을 너무 잘 아는 거야? 아니면... 누구보다 믿고 있는 거야?’ 소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그냥... 엄마가 너무 긴장해서... 한번 보고 가면 엄마도 안심할 것 같아서요.” “됐고.” 유건은 딱 잘라 말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7화

    다음 날 아침, 유건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진아가 문을 열어줬다. “고 대표님.” 유건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집 안을 슬쩍 들여다본 그. “시연이는?” “어...” 진아는 침실 쪽을 가리켰다. “아직 자고 있어요. 안 깼어요.”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평소처럼 준비해 온 아침을 진아에게 건넸다. “너무 늦게까지 재우진 마. 식으면 데워도 맛이 떨어지고, 빈속으로 자는 건 몸에도 안 좋아.” “네, 알겠어요.” 진아는 아침을 받으며 형식적으로 물었다. “안에 들어와서 잠깐 쉬다 가실래요? 어쩌면 곧 일어날 수도 있는데요.” “괜찮아.” 유건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 있으면 시연이는 절대 안 나와.” ‘시연이 나를 피하고 있다는 거, 모를 리가 없지.’ ‘내가 아침마다 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임진아를 내세운 건, 결국 나를 직접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겠지.’“시연이 잘 부탁해.” “네.” 문이 닫히고, 진아는 아침을 식탁에 내려놓은 뒤 침실로 향했다. 시연은 이미 깨어 있었고,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고 대표 가셨어.” “응.”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진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렇게 피할 거야?” “응.” “쳇.” 진아는 혀를 차며 말했다. “고 대표 은근히 끈질겨 보이던데? 쉽게 포기할 사람 같진 않아.” 시연은 살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오래 못 버틸 거야.” ‘사람 마음이란, 결국 변하게 되어 있으니까.’ 며칠 동안 유건은 아침저녁으로 시연의 집에 들렀다. 하지만 매번 문을 열어주는 건 진아였고, 시연은 늘 자고 있거나, 화장실에 있거나 했다. 유건은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또 오고, 또 왔다. ‘괜찮아, 시연이라면 기다릴 수 있어. 얼마든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6화

    시연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은범이는 내 첫사랑이에요. 외모도, 인품도, 집안도 빠지는 데가 없죠. 그 사람은 나만 사랑했어요. 오직 나만... 그리고 나도... 정말 사랑했어요.”“그만해!”유건은 잔뜩 굳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네 과거 연애사 따위,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아. 나는, 지금 너와의 미래가 필요해.”“조급해하지 마요. 금방 끝나니까.”시연은 유건의 시퍼런 얼굴을 모른 척하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그렇게 미치도록 사랑했던 은범이랑 헤어지고 나서, 난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죠.”‘듣기 싫어하는 얘기인 거 알지만, 이건 꼭 들려줘야 해.’유건의 눈빛은 이미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 속에서 파랗고 어두운 불꽃이 일렁였다.‘노은범... 네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나한텐 참을 수 없는 일이야.’ 만약 살인이 허락된다면, 유건은 이미 은범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지도 모른다.다행히, 시연은 그쯤에서 ‘회상’을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층 가라앉히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결국 살아남았어요. 잘 살아왔고, 지금은 은범이를 사랑하지 않아요.”시연은 유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지금의 은범이는 나한테 그냥 평범한 친구일 뿐이에요.”이어서 단단한 어조로 덧붙였다.“은범이도 그런데, 당신은 어떻겠어요?” 은범도 이렇게 됐는데, 하물며 당신은 어떻겠어요?”“우리가 이혼하면, 나는 금방 당신을 잊을 거고... 내 삶을 계속 살아갈 거예요. 어쩌면 언젠가는,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몰라요.”시연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유건은 전부 들었지만, 반박할 말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속이 미친 듯이 아파져 왔다.‘아파... 숨 쉬는 것조차 버겁네...’그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눈발이 섞인 바람이 칼날처럼 스쳤다.유건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시연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단단히 웅크리고, 입술을 앙다물었다.“추워. 곧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5화

    “저기...”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 표정에는 긴장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시연아, 방금... 이혼 합의서 얘기한 거야?”너무 흥분한 나머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미의 시선이 유건과 시연 사이를 계속 오갔다.“유건 씨, 정말... 이혼하려는 거예요?”시연은 소미를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래.”“그게...”소미는 얼굴에 드러난 기쁨을 억누르려 애썼다. ‘이게 진짜라면... 드디어 기회가 오는 건가?’“시연아, 말도 안 돼. 유건 씨 할아버지 때문에 결혼한 거잖아? 유건 씨 할아버지가 이혼을 허락하실 리가 없잖아!”말끝마다, 소미는 시연에게 상기시키려 했다. 이 결혼은 유건의 진심이 아니었고, 강요된 거라는 걸.“소미 씨, 그만해!”유건도 그 속뜻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눈을 좁히며 음울한 기운을 터뜨렸다.‘아직은 여기서 터뜨릴 수 없어.’하지만 소미는 이미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유건 씨... 나한테 화내는 거예요? 내가 틀린 말 했어요?”유건은 말문이 막혔다. 분명 처음엔 소미 말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달라.’그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주변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당신... 왜 그렇게 굳어 있어요?”시연이 한발 먼저 나섰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주려는 듯, 덤덤히 말했다.“당신 여자 친구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시연은 소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맞아, 우리 결혼은 할아버지 때문이었어. 근데 걱정하지 마. 이혼도 할아버지 허락받은 거니까.”소미는 눈을 크게 뜨고,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진짜? 유건 씨 할아버지가 허락하신 거야?”“응, 진짜.”시연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그러니까, 축하해. 이제 곧 떳떳하게 사귈 수 있을 거야.”‘그래... 이제 네가 다 가질 수 있어.’‘응’하고 바로 대답할 뻔한 소미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슬쩍 유건을 살핀 후, 작게 말했다.“시연아, 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4화

    만약 검사 결과에 문제가 없다면, 시연은 우주에게 간 이식 얘기를 꺼낼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문제가 있다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오늘, 시연은 건강검진 중간 예약 때문에 병원에 왔다. 하지만 그녀가 도착하자, 지동성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미리와 장소미까지 같이 와 있었다.‘놀랍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시연아.”시연이 가까이 다가가자, 지동성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장미리도 덩달아 일어났다. 장소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에 예외였지만, 모두의 시선은 똑같았다.간절하고, 어딘가 초조한 눈빛.‘나를 향한 게 아니야. 우주의 간을 향한 거지.’“시연아.”장미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정말... 고마워.”“아니에요.”시연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차갑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소미도 연이어 말했다.“고마워... 그다음은 어떻게 하면 돼?”“나랑 한 약속을 기억하면 돼요. 우주 앞에서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시연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아예 당신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제일 좋고요.” 과거, 장미리가 우주를 납치하고 다치게 했던 기억이 스쳤다.“알겠어, 알겠어!”장미리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우린 잘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그럼 됐어요.”시연은 안쪽 진료실을 가리켰다.“그럼 장 여사님, 저는 서류 작성하러 들어갈게요. 그쪽 식구들, 더 이상 할 일 없으면 그냥 먼저 가보세요.”말을 끝내고, 시연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진료실로 향했다.“시연아, 나도 같이 갈게!”지동성이 급히 따라붙었다.잠시 후, 두 사람은 함께 진료실에서 나왔다. 시연의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니, 유건이었다.‘또 이 사람이야.’시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조용히 무음으로 돌려버렸고, 받지도, 답장하지도 않았다. 이미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말이다.“어떻게 됐어요?”나오자마자,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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