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멧을 벗은 송민준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너 말한테 약이라도 먹였어?”강한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트집 잡지 말고, 빨리 형이라고 불러.”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내기는 내기니까. 네, 알겠어요. 형.”강한서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주강운을 보더니 물었다.“녹음했어?”주강운이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똑똑히 다 녹음됐어.”송민준이 입술을 씰룩거렸다.“왜 그렇게 유치하게 굴어?”강한서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주강운에게 말했다.“나한테 보내.”송민준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갑자기 물었다.“현진 씨는?”강한서는 그제서야 유현진이 사라졌다는 걸 발견했다. 그의 옷가지는 덩그러니 벤치에 놓여 있었다.주강운이 유현진의 말을 전했다.“해가 너무 비친다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어.”송민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오늘은 구름이 많아서 해가 그렇게 내리쬐지 않았다. 심지어 먹구름이 몰리면서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기세였다.누가 들어도 해가 비친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여자들이 다 그렇지, 뭐. 내 동생은 흐린 날에도 탈까 봐 양산을 쓰고 다닌다니까.”강한서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이 돌아올 때 유현진은 정인월을 도와 음식을 내오고 있었다.정인월은 돌아온 세 사람을 보며 얼른 손을 씻고 밥을 먹으라고 했다.정인월은 젊은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나 그들의 어릴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쭉 옆에서 지켜봤으니 애정이 더 많이 갔다. 그래서인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아 밥맛도 더 좋아졌다.식사를 마친 후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옛날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그들의 어릴 적 일들을 모르고 있었기에 얘기에 끼지 않고 과일 깎는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그녀는 주방에 있다가 거치적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곧 가정부에게 쫓겨났다.거실로 돌아가기 싫었던 유현진은 베란다로 에돌아가 잠시 머물기로 했다.목적
유현진이 멈칫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왜 그렇게 물어요?”주강운이 악플러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이 손을 봐봐요. 송민영 씨의 손 같지 않아요?”유현진에게 지속적으로 악플을 단 사람은 오른손으로 버블티를 들고 있는 프로필 사진을 사용했다.하지만 유현진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에게 악플을 남긴 대부분 사람이 송민영의 팬이라 프로필 사진으로 송민영의 사진을 써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그런데요?”“제가 이쪽 분야의 전문가인 친구한테 물어보니 그 어떤 플랫폼에서도 이 사진이 공유되지 않았대요. 사진 속의 각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버블티를 든 사람이 직접 찍은 사진 같거든요. 게다가 인스타그램이나 다른 플랫폼에서도 이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어제 송민영 씨가 사인을 해줄 때 제가 유심히 손을 관찰해 봤어요. 사진에 찍힌 손과 똑같이 손아귀에 점이 있더라고요. 손이 가늘지 않은 관계로 송민영 씨는 촬영을 할 때 손을 클로즈업해야 하는 부분에서 대역 써요. 그래서인지 송민영 씨의 손 사진은 특히나 찾기 어렵죠.”주강운이 어제 송민영에게 사인을 받은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손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유현진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챘다.“그러니까 이 계정이 송민영 씨 본인 거라고요?”“본인은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의 계정이겠죠. 아니면 어떻게 송민영 씨가 직접 찍은 사진을 갖고 있을 수 있겠어요?”차미주와 주강운 빼고 그 누구도 ‘선셋 스타’가 유현진의 계정이라는 걸 몰랐다. 주변 사람들도 모르는 걸 송민영은 더욱 알 길이 없으니 개인적인 원한 때문은 아닌 듯했다.그렇다면 이유가 더빙 일 말고는 없을 것이다.송민영과 유현진이 함께 한 작품은 대박을 터트렸다. 하지만 캐릭터를 제대로 살린 유현진의 더빙이 이슈가 된 덕분에 송민영이 받아야 할 관심을 가로채버렸다.송민영은 더빙 배우가 주목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팬들을 이끌고 몇 달 동안이나 악플을 달았다. 연예계에 몸 담근 지 한참 된 송민영은 물론 이번 일
유현진은 깜짝 놀랐다.‘양말 하나 갖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래?’그녀는 다급하게 설명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주머니 두 개가 거의 똑같게 생겨서 내가 잘못 봤어.”강한서는 여전히 유현진한테 쌀쌀맞게 굴었다.“그럼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해.”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어떻게 그래? 이미 다 선물이라고 줬잖아. 그리고 2만 원짜리를 창피하게 어떻게 돌려달라고 해?”“선물한 걸 다시 가져가면 안 된다는 걸 너도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 왜 나한테 준 선물을 다른 사람한테 줘?”유현진은 강한서가 일부러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본가에 있을 때부터 예민하게 굴더니 그에게 양말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차에 진씨도 있었기에 유현진은 애써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나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양말이 무슨 대수라고, 하나 더 사주면 되잖아.”강한서는 무성의한 그녀의 태도에 더 울화가 치밀어올랐다.“하나 더 산다고 될 일이야? 너 전혀 양말을 챙기려고 하지 않았잖아!”유현진도 더는 이대로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진씨가 차에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버럭 화를 냈다.“그래, 난 챙길 생각이 없었어. 그러니 네가 알아서 챙기지 그랬어? 선물을 했는데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고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굴어? 네가 양말을 챙기려는지 안 챙기려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른 사람한테 선물하니까 이제 와서 트집이야? 양말은 핑계고 나랑 싸우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강한서는 분노가 끓어올라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다.“네가 잘못해놓고 왜 성질이야!”유현진이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내가 제일 잘못한 건 너한테 그 양말을 사준 거야. 싸움 걸 핑계만 만들어주고 말이야!”“아저씨, 차 좀 세워주세요!”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유현진이 고개를 휙 돌리면서 말했다.“네가 날 내쫓기 전에 내가 알아서 꺼져줄게!”강한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내가 언제 너한테 꺼지라고 했는데?”유현진은 이때다 싶어 옛날 일들을 들추어냈다.“강 대표님, 기
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얼마 후면 강한서와 이혼한다고 이실직고할 수도 없었다.“사모님. 큰사모님께서 받으시라고 하셨으니까 편하게 받으세요. 큰사모님이 알아서 답례를 하실 겁니다.”끝내 차 키는 유현진이 잠시 가지고 있기로 했다.별장으로 돌아간 후, 강한서는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있었다.가정부가 짐을 건네받으며 물었다.“사모님, 혹시 도련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얼굴색이 말이 아니에요.”유현진도 아직 화가 나 있었기에 덤덤하게 대답했다.“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가정부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다.유현진도 위층으로 올라갔다.다행히 강한서는 안방에 없었다. 안 그러면 유현진은 또 게스트 룸에서 자야 하는데 게스트 룸의 침대는 안방의 침대보다 불편했기에 그녀는 가기가 싫었다.그녀는 머리를 풀고 마른 옷을 챙기더니 욕실로 향했다.뜨거운 물이 머리부터 흐르며 온몸을 녹이자 스트레스가 저절로 풀릴 것만 같았다.강한서는 즐길 줄 아는 남자다. 그는 안방 화장실에 스파 욕조를 설치했는데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더없이 안락했다. 하지만 물을 받는 데에 20분이나 걸렸기에 유현진은 차마 기다릴 수가 없었다.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긴 그녀는 샴푸를 짜내 거품을 내고 부드러운 손길로 두피를 주물렀다.피부가 하얀 사람들은 보통 머리카락 색도 연한 편이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검고 풍성했다. 물에 젖힌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미역처럼 부드러웠다.유현진이 머리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고 있을 때, 욕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그녀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타월을 찾았다. 하지만 발이 미끄러운 탓에 그녀는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지려고 했다.강한서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주려고 했지만 유현진이 먼저 그의 팔을 덥석 잡는 바람에 두 사람은 같이 중심을 잃으며 바닥에 넘어졌다.강한서의 등이 바닥에 닿으면서 ‘쿵’ 소리가 났다.유현진은 발가벗은 채로 그의 몸 위로 넘어졌고 무릎도 까지고 말았다.하지
”대본이 통과됐어!”유현진이 샤워를 마치자마자 차미주가 잔뜩 신난 채로 전화를 걸어왔다.유현진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결과가 이렇게 빨리 나왔어?”어제까지만 해도 차미주는 대본을 수정하고 있었는데 단번에 통과될 줄이야!“그래, 나도 엄청 놀랐어. 아침에 제출할 때도 퇴짜맞고 다시 수정할 준비를 했다니까. 그런데 방금 대본이 통과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지 뭐야. 다음 주에 와서 계약하래.”유현진이 머리를 묶으며 물었다.“얼마에 팔릴 수 있대?”“아직 정해진 건 아닌데 많아서 2억 정도 받지 않을까? 첫 권은 다 그렇게 받더라고.”“만약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작가가 될 수 있어?”“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보통 제작사에서 대본을 쌓아둔단 말이야. 내 대본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려면 기회가 딱 들어맞아야 가능해. 잘 나가는 작가들은 보통 계약하고 길어서 2년이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우리 같이 이름 없는 사람들은 저작권이 만료될 때까지도 그런 기회가 흔히 주어지지 않아. 작가는 꿈도 못 꾸지.”그녀의 말을 들은 유현진은 아쉬워했다.하지만 차미주는 꽤 긍정적이었다.“대본이 팔린 게 어디야. 난 아직 젊으니까 그렇게 급하지도 않아. 언젠간 내 대본도 방송되겠지.”유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그때면 신인이든 베테랑이든 다 네 작품에 출연해달라며 줄을 설 거야.”차미주도 히쭉 웃으며 말했다.“그럼 널 여자 주인공으로 발탁하고 슈퍼스타로 만들어줄게. 그때면 강한서도 너한테 쩔쩔맬걸?”유현진의 얼굴에 담긴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 사람 얘기하지도 마. 짜증 나니까.”차미주는 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왜, 둘이 또 싸웠어?”울분에 차 있던 유현진은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차미주에게 얘기했다.그러고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그 사람이 양말 때문에 그러겠어? 내가 만만해 보인 거겠지! 나도 문제야, 왜 괜히 양말을 사서 이 고생을 해?”“잠깐, 내가 소개해준 변호사가 강한서 친구라고? 전에
신미정이 되물었다.“모르고 있었어?”유현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 파티가 끝나고 나서 저는 바로 어머니를 보러 가서 나중에 있었던 일은 잘 몰라요. 한성우 씨가 민서를 집에 데려다줬을걸요?”신미정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나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아침에 민서가 울면서 나한테 오더니 한서가 자기를 화장실에 가뒀다가 아침이 돼서야 풀어줬대. 민서한테 물어봐도 얘기를 잘 안 하고. 어젯밤에 너도 있었으니까 네가 알 줄 알았지.”유현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강한서가 강민서를 화장실에 하룻밤 내내 가뒀다니. 미친 거 아니야?유현진은 강한서가 자신을 위해 화풀이를 했을 거라는 김칫국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낮에 송민준이 본가로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을 때도 강한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마 송가람이 갇힌 걸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송민준은 전혀 강민서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아마 강한서가 먼저 강민서에게 벌을 내린 걸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송가람 때문에 강한서가 강민서를 가뒀다고 해도 유현진은 속이 후련했다.유현진은 어리둥절한 말투로 말했다.“저도 모르겠어요. 한서가 저한테 아무 얘기도 안 했거든요. 어머님, 민서는 어때요? 괜찮아요?”“별일 없어. 감기에 걸렸는지 약 먹고 바로 잤어.”‘쌤통이다!’속이 후련한 유현진이 능청스럽게 말했다.“제가 한성우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요? 어젯밤에 계셨으니 잘 아실 거 아니에요?”“아니야.”신미정은 모르는 사람한테 집안일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유현진과 내일 오후의 약속을 잡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서는 저녁에 서재에서 잔 듯 했다.다음 날 아침, 유현진이 잠에서 깨어날 때 강한서는 이미 집을 나섰다.가정부는 그가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았다며 걱정을 했다.그 모습을 본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다 큰 성인이 혼자 밥을 못 챙겨 먹겠어?’그녀가 집을 나서려던 찰나 가정부가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도시락을 건네주며 말했다.“사모님, 가는
만약 유현진이 신미정을 몰랐다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직장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미정의 나이를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젊은 얼굴에 유현진은 깜짝 놀라곤 했다.하지만 ‘젊은’ 시어머니는 그렇게 상대하기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그녀가 손주를 보려는 집착은 숨 막힐 정도였다.차 시동이 걸리자 신미정이 덤덤하게 말했다.“피 검사해야 하는데 뭘 먹진 않았지?”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한서도 알고 있어? 내가 널 데리고 검사하러 간다는 걸?”“얘기 안 했어요.”두 사람은 한참 냉전 중이라 유현진은 강한서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먼저 말을 건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유현진은 강한서와 얘기할 마음도 없었다.신미정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차는 곧 상제 병원 앞에 멈춰 섰다.상제 병원은 사립 병원으로서 한주시에서 엄청 유명한 병원이었다. 비싼 만큼 의료 기기도 최고급이고 의사도 전문적이니 연예인이나 상업 거물 같은 사람들은 이 병원만 찾아다녔다.그리고 다른 병원보다 사람이 적어서 검사 같은 건 줄을 서지 않아도 되었다.대기 번호를 받고 의사와 진찰한 후 유현진은 신미정에게 말했다.“어머님,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검사는 모두 다른 병동에서 한다네요. 검사를 다 마치고 제가 이쪽으로 다시 찾아올게요.”신미정은 원래 그녀와 함께 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는 바람에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유현진은 피 검사, 소변 검사를 마치고 또 초음파실 밖에서 대기했다.사람이 많은지 그녀는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초음파실로 향했다.그녀에게 검사를 해주는 의사는 꽤 젊어 보였다. 의사는 한참 보다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혹시 전에 수술하신 적 있으세요?”“몇 년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작은 수술을 했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선생님?”“교통사고요?”젊은 의사가 한참 고민하더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자세한 건 주치의한테서 들으세요.”그러고는 검사 결과에 사인을 하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유현진은 검사 결과를 한참이나
강한서는 민경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유현진을 알아봤다.유현진은 덤덤한 얼굴로 그의 손에 든 머리띠를 힐끔 보고는 다시 시선을 강한서에게로 옮겼다.그는 저도 모르게 머리띠를 더 꽉 쥐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유현진에게 다가갔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유현진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너를 미행할 정도로 내가 심심하진 않으니까.”그러고는 손에 든 검사 결과를 흔들며 말했다.“어머님이랑 검사하러 왔어.”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엄마랑 같이 왔어?”“응.”강한서의 표정은 아주 복잡했다.하지만 유현진은 그의 기분을 알아챌 겨를이 없었다. 아침부터 병원에서 강한서를 만난 것도 기분이 꺼림칙했다.‘이 시간에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누구겠어? 강한서를 아침 6시에 서둘러 병원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참 대단해. 얼씨구, 머리띠까지 챙기고.’그녀는 애써 화를 억눌렀다.“강 대표님은 계속 일을 보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유현진이 이 말을 남기고는 강한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그러자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잠깐만.”그러고는 머리띠를 민경하에게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똑같은 거로 사다 줘.”그러고는 유현진을 끌고 입원 병동을 나섰다.유현진은 화를 꾹 참고 있던지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는 강한서의 손목을 꽉 깨물었다.강한서는 극심한 고통에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손목에 난 이빨 자국을 보며 강한서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유현진, 너 미쳤어?”“너나 미쳤겠지.”유현진이 버럭 화를 냈다.“강한서, 우린 지금 계약 관계야. 필요할 때만 서로 돕고 다른 때는 나에게 손도 대지 마.”강한서가 그녀를 힐끔 보며 말했다.“손목을 잡는 것도 손을 댄 거야? 그럼 술에 취하고 나한테 키스한 건 뭐야? 성추행?”유현진은 분노가 끓어올랐다.“내가 언제 키스했다고 그래? 말 조심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버릴 수도 있으니까.”강한서는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부정행위 같은 건 내부 조사로 진행해봤자 무슨 결과가 있겠어요? 학교 입장에선 당연히 부정하겠죠. 창피하잖아요.][부정행위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여기로 모이세요!]...댓글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그때, 그 대학원생은 좋아요가 제일 많이 눌린 댓글에 다시 댓글을 달았다. [진윤 학생의 루머가 퍼진 그날, 전 바로 해명 글을 올렸었어요.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피드는 계속 비공개로 전환이 되었어요. 서버 문제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규정 위반이라는 이유로 피드를 업로드 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며칠 사이 계정을 바꿔가며 계속 피드를 작성했지만 결과는 똑같았어요. 계속 업로드가 되지 않더라고요. 실체가 없는 압박 때문에 전 진윤 학생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없었어요. 그더라 오늘 점심이 되어서야 계정이 정상적으로 활성화되었고요.][전 대학원 2학년생이에요. 솔직히 얘기하면 적지 않은 학생에게 과외를 해줬어요. 하지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대부분이었어요. 진윤 학생은 제가 가르쳤던 학생 중 유일한 대학생이었어요.][과외비도 많이 챙겨줬고 사교성도 좋아서 다른 과외는 전부 거절하고 진윤 학생 한 명만 했었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공대의 많은 수업은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진윤 학생은 기초도 좋은 편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노력을 많이 했어요. 새벽 2, 3시까지 공부하는 것도 기본이었어요. 그러니 그 정도 난이도의 시험은 통과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죠.][인터넷에선 다들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진윤 학생이 부정행위를 했다고 하던데 솔직히 얘기하면 만약 진윤 학생이 부정행위로 그 정도 성적을 받은 거라면 정말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제가 하고 싶은 말을 여기까지예요. 앞으로 악플에 더는 대응하지 않을 거예요.]그는 설명과 함께 캡처 여러 장을 함께 공개했다. 그 중에는 업로드에 실패했던 여러 개의 피드와 늦은 새벽 진윤과 문제집을 토론하던 대화기록 그리고 진윤이 그에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