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는 갑자기 차가워졌다. 아니, 차가워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사실 한성우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다만... 차미주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조금 속상했다. 내일은 주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이 시간엔 한성우와 차미주는 밤을 새우며 게임을 해야 했다. 심지어 두 사람은 굳이 약속할 필요도 없이 매주 금요일 저녁 8시쯤이면 간신을 한 아름 안고 이곳에 모였다. 하지만 오늘은...차미주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곧 10시가 되어갔지만 한성우는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차미주는 요즘 한성우가 고백하던 말을 계속 곱씹었다. 생각할 때마다 그녀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설렜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그녀도 그 거절은 경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승낙은 더욱 경솔한 선택일 것 같았다. 차미주는 그 순간,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만약 그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면, 한성우는 내가 밀당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차미주에게는 몸에 문제가 있는 남자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아, 짜증나.’휴대폰을 집어 들고 유현진에게 카톡을 보냈다. 『현진아, 강한서 발기 부전은 어떻게 치료한 거야?』막 의 감독인 안창수와 통화를 끝낸 유현진이 차미주가 보낸 적나라한 카톡을 확인하고는 입에 있던 망고 주스를 휴대폰 액정에 뿜어버렸다. 사레가 들려 몇 번 기침하는 유현진에게 강한서가 종이를 몇 장 뽑아 입가의 주스를 닦아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뭔데 이렇게 흥분한 거야?”유현진이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숨기며 차미주에게 답장했다. 『그건 왜 물어?』차미주가 답장했다. 『개자식이... 안 돼.』유현진이 충격에 빠졌다. 유현진은 하마터면 개구리처럼 펄떡 튀어 오를 뻔했다. 『자세하게 얘기해 봐.』차미주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왜 이렇게 현진이가 잔뜩 흥분한 것 같지?’차미주가 답장했다. 『먼
차미주는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한성우는 술에 취한 것 같았고 그의 온몸에서도 술 냄새가 풍겨왔다. 셔츠는 절반쯤 단추가 풀려있었고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상반신을 전부 여자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한성우를 부축하고 있던 여자는 그의 집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잠시 당황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도우미... 세요?”“...”차미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뇨. 전 얘 이모에요.”여자가 놀라워했다. “이... 이모요?”“왜요? 안 닮았어요?”여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닮진 않았어. 너무 젊잖아.’차미주의 잠옷은 전부 귀여운 컨셉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키도 크지 않았고 심지어 동안 얼굴이기도 했으니, 기껏해야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하지만 한성우 집에서 같이 사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사이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 여자가 차미주를 훑어보고 있을 때, 차미주도 여자를 훑어보고 있었다. 170cm 정도 되는 키에 다리도 길쭉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버건디 롱스커트는 섹시한 몸매를 감싸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예쁘장했고 잘록한 허리와 애플 엉덩이를 갖고 있었다. 유현진 같은 절세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매력 넘치게 예쁜 여자였다. 차미주는 순간 한성우의 전여자친구들을 떠올렸다. 한성우와 차미주가 알고 지낸 지 이제 6개월 정도였지만, 차미주는 전부터 한성우에 대해 알고 있었다. 5대 엔터테인먼트 대표 중 제일 어리고, 여자친구가 바뀌는 속도가 자기 회사 연예인이 뜨는 것보다 빨랐으며 심지어 하나같이 전부 미녀였다. 이 여자의 미모는 딱 봐도 한성우가 전에 사귀었던 여자들과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딱 한성우가 좋아할 것 같은 스타일.차미주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는 입꼬리를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시선을 거두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 닮긴 했어요. 어려 보이시는데, 막 대학 입학하셨어요? 성우 오빠에게 이렇게 어린 이모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는데.”성우 오빠...‘나
‘개자식! 썩을 놈!’차미주는 화를 내며 수건을 꽉 짜고는 굳은 얼굴로 안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안방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차미주가 손을 뻗어 문고리를 틀었지만,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똑똑 차미주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모님, 먼저 주무세요. 여기도 화장실이 있어서 제가 하면 돼요.”“...”차미주는 어두운 얼굴로 수건을 화장실에 휙 내던지고는 문을 쾅 닫았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유현진이 보낸 카톡을 확인했다. 「그냥 안 서고 성욕이 없는 거야? 다른 증상은 없어?」「언제부터 알았어?」「너희 둘 해 봤어?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거야?」「네가 나한테 자세하게 얘기해줘야 내가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지.」「미주야.」「미주야, 자는 거야?」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차미주는 휴대폰을 들고 씩씩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유현진은 한참 동안 기다려도 차미주에게서 답장이 없자 조바심이 났다. 강한서는 휴대폰을 자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유현진을 보더니 물었다.“왜 그래?”입이 근질근질했던 유현진은 강한서가 묻자 바로 말해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달싹이던 입을 닫았다. ‘이 일은 아무래도 강한서에겐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비록 강한서가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리는 없었지만 어쨌든 강한서와 한성우는 친구였으니 생각만 해도 괜히 어색할 것 같았다.유현진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별거 아냐. 방금 인터넷에서 한 여자가 자기 의사 남편이 바람났다고 올린 저격글을 봤거든. 미주랑 그 얘기 좀 하려 했더니 답장이 없잖아.”그런 얘기엔 관심이 전혀 없었던 강한서는 다시 이메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유현진이 몸을 일으켜 소파를 딛고 강한서 등 뒤의 소파 등받이 위에 앉아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요즘 많이 힘들지?”유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매일 밤 늦게 자는 거 같던데.”요즘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을 갈 때마다 강한서가 거실에서 탁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강한서 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전에 엉망진창인 한성의 프로젝트를 처리하기 시작했을 때 민경하는 식사 자리라도 마련해 주주들의 체면을 지켜주도록 설득했었다. 나이가 제일 어린 주주도 강단해와 비슷한 또래였고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정인월과 또래였다. 결국은 모두 강한서에겐 어른이었다. 게다가 어른들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 일을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됐다. 강한서도 민경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한세 한식당을 예약해 식사 자리를 마련하려고 주주들에게 연락을 돌리도록 했다. 분명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던 주주들은 강한서가 한세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들은 하나둘 집에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하필 그날 일이 생길 우연이 있을까?어떻게 된 건지는, 너무 뻔한 일이었다. 주주들은 이미 모두가 이익공동체로 한 편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에게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끝까지 맞서는 수밖에.한성의 권력다툼은 이미 시작되었다. 강한서는 당연히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가 한성의 주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회사를 끌어 나가는 것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건 강한서는 줄곧 손에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아야만 지키고 싶은 사람과 일을 지킬 능력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유현진의 신분이 밝혀져 그녀가 송씨 가문의 보물이 된 지금,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만약 그가 한성을 손에 넣지 못하면 송민준에게 유현진과의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기 때문이었다. 회사도 지키지 못하는 놈이 어떻게 감히 송씨 집안의 딸을 가질 수 있겠는가.그런 이유를 알 리가 없는 유현진은 매일 잠잘 시간을 쪼개 일에 몰두하는 강한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조금 물러서야 할 땐 너무 그렇게 강압적으로 나가지 마. 정말 그만둘 수 없을 땐 천천히 해. 오늘은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마
1분 뒤.몸을 뒤척인 차미주가 오른쪽으로 누웠다. ‘그냥 한 방에 있는 거잖아. 개자식은 할 수도 없는데. 그 여자가 뭘 어쩌겠어?’30초 뒤.차미주는 또 몸을 뒤척여 왼쪽으로 누웠다. ‘꼭 서야 뭘 할 수 있는 건가?’10초 뒤.그녀는 아예 엎드려 버렸다. 한성우는 꽤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관건적인 것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었다. 3초 뒤.그녀는 또, 또 몸을 뒤척여 반듯이 누워 천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1초 뒤, 차미주는 벌떡 침대에서 튀어 오르며 앉았다. ‘젠장. 내가 왜 둘이 좋게 놔둬야 하는 건데.’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굳은 얼굴로 경비실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어떤 여자가 제 조카를 방에 가뒀어요. 오셔서 그 여자 좀 끄집어내 주세요.”경비원을 알겠다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곧 머뭇거렸다. ‘이미 집에 쳐들어갔는데, 이건 더 이상 경비실에서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그런 생각에 경비원은 “자상”하게도 차미주 대신 경찰에 신고했다. 십여 분 후.초인종이 울렸다. 차미주가 문을 열자 경비원이 두 명의 경찰을 데리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순간 멍해졌고 경찰은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주택 침입한 사람이 있다고 신고받고 왔습니다.”차미주가 입을 열기도 전에, 경비원이 먼저 말했다. “어떤 여자가 이분 집에 쳐들어와서 본인과 조카를 방에 가두고 그 짓거리를 한다고 해요. 미성년자인데, 너무 추악한 짓이에요.”“...”‘아저씨, 일을 너무 부풀려서 말했잖아요. 내가 언제 그 짓거리라고 했어요? 게다가 미성년자라니?’미성년자라는 말에 경찰은 더욱 진지해졌다. “어디 있죠?”차미주는 설명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방문을 가리켰다. ‘어떻게든 두 사람이 같은 방에만 안 있게 하면 돼.’그러자 경찰은 바로 안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먼저 문을 두드리고 안에 있는 사람에게
문이 완전히 열려서야 차미주는 방 안의 상황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성우는 자신이 방을 나서던 그때 자세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만 셔츠는 완전히 벗겨져 있었고, 머리맡엔 축축한 수건이 놓여있었다. 여자의 치마와 속옷은 전부 침대 위에 던져져 있었고, 그녀는 막 수건을 몸에 두른 채 안방의 화장실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그러더니 경찰을 보고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경찰 역시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조카가 미성년자라고?’‘침대에 누워있는 이 사람이 미성년자?’경찰이 막 차미주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려는데, 경찰 중 한 명이 그 여자를 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눈에 익은 거지?”여자의 표정이 당황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길을 피하며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 “생각났어!”어린 경찰이 말했다. “지난번 잡혔던 사람 중에 그쪽도 있었죠? 이름이 무슨 조 무슨 정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에요?”“아니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여자가 옷으로 얼굴을 가렸다. 출동한 경찰이 여자의 외모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럼 이름이 뭐예요? 주민등록증 확인할게요.”“안 가져왔어요.”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옷에 있던 지갑이 바닥에 떨어졌다. 경찰이 얼른 지갑을 주어 주민등록증을 꺼내더니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 맞네. 지난달 집단 음란죄로 잡혀 온 사람들 중에 그쪽이 있었잖아요. 지금은 또 무슨 상황이죠? 콜 서비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순간 잿빛으로 변했다. 차미주는 그만 멍해졌다. 이런 반전은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그저 경비원이 이 여자를 쫓아내 주길 바랐었는데, 경비원이 신고를 한 건 물론, 경찰은 이 여자가 성매매에 종사한다고 했다. 여자가 한성우와 함께 돌아왔으니 경찰은 당연히 두 사람이 사적으로 불법적인 거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한성우도 함께 서로 데려가려고 했다. 차미주가 얼른 경찰을 제지했다. “형사님, 얘가 이 여자분과
차미주의 행동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한성우는 차미주가 “얌전”하게 있자 참지 못하고 더 깊이 입 맞추었다. 전에 클럽에서 조준 앞에서 차미주에게 강제로 키스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때도 지금도 딥키스였지만, 그땐 놀란 것보다도 화가 더 많이 났었다. 하지만 이번엔, 차미주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고 오히려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은 쿵쾅쿵쾅 날뛰기 시작했다. 한성우는 차미주와의 키스에 심취했다. 그는 차미주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그녀를 놓아주며 목에 얼굴을 비볐다. “도둑아...”그의 행동에 바짝 긴장하던 차미주가 곧 긴장을 풀었다. 계속 신경 쓰이던 문제들이 이젠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안 되면 말지, 뭐. 천천히 치료하면 돼. 사실 키스도 짜릿하잖아. 기분도 너무 좋은걸.’이튿날 아침. 한성우가 드디어 천천히 눈을 떴다. 딱딱한 벤치에 밤새 누워있었더니 온몸이 배겨 아팠다. 그가 몸을 일으켜 앉았지만 여전히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확인해 보니, 그의 눈앞에는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었고 뒷면에는 ‘경찰 뒤에 위험은 없다’라고 쓰인 포스터가 있었다. “...”‘내가 왜 경찰서에 있는 거야?’이때, 문이 열리고 당직 경찰이 차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 한성우가 깨어난 것을 보더니 물었다. “세수하시겠습니까?”한성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찰이 자리에 앉았다.“그럼 시작하죠. 조이정 씨와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누가 소개해 준 거죠? 몇 번이나, 어디서 만났어요?”“... 죄송하지만, 조이정이 누구죠?”경찰이 멈칫했다. “어젯밤 한성우 씨가 조이정을 집으로 데려가 여자친구와 3P를 하려고 하셨잖아요. 두 여자분께서 한성우 씨를 두고 싸우다가 여자친구가 신고하셨고요.”“...”한성우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니.경찰의 “힌트”에 한성우는 간신히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차미주가 신고했다는 말에 한성우는 잠
한성우는 차미주가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했다. 확실히 여자친구는 아니었다. 전엔 그저 대외적으로 여자친구인 척 연기했었고, 나중엔... 차미주가 한성우의 고백을 거절했으니 여자친구일 리가 없었다. 한성우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사실이,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어젯밤 한성우는 차미주에게 키스하며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더니 모른 척하며 단지 친구일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차미주는 어젯밤에야 겨우 발기부전인 이 남자의 마음을 받아주기로 다짐했는데, 한성우는 아침이 되자마자 이런 일을 저질렀다. 게다가 한성우는 조이정 그 여자 편을 들기도 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내느라 차미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경찰은 이상하다는 듯 한성우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자기에게 여자친구가 그 장면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었냐며 묻더니, 차미주가 들어오니 또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했다.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건 경찰의 수사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한성우가 클럽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장면은 CCTV에 제대로 찍혀 있었다. 게다가 어제 현장에 있었던 친구들도 모두 증언했으니 사건의 경위는 너무도 분명해졌다. 한밤중까지 바삐 돌아쳤지만, 결국은 오해였다. 경찰은 참지 못하고 차미주에게 한마디 했다. “다음엔 제대로 확인하시고 신고하세요. 이게 지금 얼마나 뻘쭘한 상황입니까?”차미주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성우가 말했다. “제 친구도 제가 걱정되어서 그랬나 봐요. 괜히 저희가 폐를 끼쳤네요.”경찰은 한성우의 태도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경찰서에서 나온 한성우가 고개를 돌려 차미주에게 물었다. “어젠 일이 좀 커져서 놀랐지?”차미주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성우를 쳐다보았다. “아냐. 못 보던 여자라, 누군지 몰라서 신고했어. 너랑 친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차미주의
[부정행위 같은 건 내부 조사로 진행해봤자 무슨 결과가 있겠어요? 학교 입장에선 당연히 부정하겠죠. 창피하잖아요.][부정행위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여기로 모이세요!]...댓글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그때, 그 대학원생은 좋아요가 제일 많이 눌린 댓글에 다시 댓글을 달았다. [진윤 학생의 루머가 퍼진 그날, 전 바로 해명 글을 올렸었어요.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피드는 계속 비공개로 전환이 되었어요. 서버 문제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규정 위반이라는 이유로 피드를 업로드 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며칠 사이 계정을 바꿔가며 계속 피드를 작성했지만 결과는 똑같았어요. 계속 업로드가 되지 않더라고요. 실체가 없는 압박 때문에 전 진윤 학생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없었어요. 그더라 오늘 점심이 되어서야 계정이 정상적으로 활성화되었고요.][전 대학원 2학년생이에요. 솔직히 얘기하면 적지 않은 학생에게 과외를 해줬어요. 하지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대부분이었어요. 진윤 학생은 제가 가르쳤던 학생 중 유일한 대학생이었어요.][과외비도 많이 챙겨줬고 사교성도 좋아서 다른 과외는 전부 거절하고 진윤 학생 한 명만 했었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공대의 많은 수업은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진윤 학생은 기초도 좋은 편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노력을 많이 했어요. 새벽 2, 3시까지 공부하는 것도 기본이었어요. 그러니 그 정도 난이도의 시험은 통과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죠.][인터넷에선 다들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진윤 학생이 부정행위를 했다고 하던데 솔직히 얘기하면 만약 진윤 학생이 부정행위로 그 정도 성적을 받은 거라면 정말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제가 하고 싶은 말을 여기까지예요. 앞으로 악플에 더는 대응하지 않을 거예요.]그는 설명과 함께 캡처 여러 장을 함께 공개했다. 그 중에는 업로드에 실패했던 여러 개의 피드와 늦은 새벽 진윤과 문제집을 토론하던 대화기록 그리고 진윤이 그에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