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가봐야 할 것 같아.”한성우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무슨 일인데?”차미주는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말했다.“상사가 만난 사람이 유부남이었대. 지금 그 유부남 가족이 찾아와서 못 나가게 막고 집안의 물건을 부수고 있대. 내가 그래서 상사를 데리고 경찰에 신고하러 가려고.”한성우는 바로 따라갔다.“왜 직접 신고 안 하고 이 늦은 시간에 널 불러?”“그 사람들이 상사 옷을 전부 찢었대. 지금 입을 옷이 없대. 아마 그래서 신고 못 한 거겠지. 경찰들이 오면 알몸인데 어떻게 해.”한성우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나직하게 말했다.“그럼 나도 같이 가. 만약 아직 그 사람들이 안 갔으면 어떡해. 너 혼자 위험하잖아.”“괜찮아. 너 배고프잖아. 그러니까 넌 밥 먹고 있어. 내가 얼른 갔다가 올게.”말을 마친 그녀가 현관으로 다 신발을 신으려고 할 때 한성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시 집안으로 끌어당겼다.“네 손아귀 힘이 대단한 거 알아. 그 사람들 상대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남친인 나에게도 표현할 기회를 주면 안 돼? 안 그러면 나 너무 존재감 없는 사람인 것 같잖아.”차미주는 그의 몸을 훑어보곤 말했다.“방해된다면 난 널 신경 쓰지 않을 거야.”한성우는 혀를 찼다.“쯧, 정말?”차미주는 코웃음을 치곤 재촉했다.“그럼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두 사람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차미주 직장 상사의 집으로 향했다.난동을 피우던 사람들은 이미 가고 없었지만,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차미주는 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상사를 찾았다. 한성우는 휴대폰을 꺼내 현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고 나중에 경찰이 오면 잃어버린 물건이 없나 확인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안방에선 여자의 울음소리와 위로하고 있는 차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성우는 현관에서 경찰에 신고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다. 조사가 거의 끝나자 두 사람은 직장 상사에게 인사를 한 후 나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차미주는 직장 상사가 만
한성우는 담담하게 말했다.“돈이 되지 않는 대본에 아무리 인맥을 동원했다고 해도 누구도 자선 사업을 하려 하진 않을 거야.”차미주는 그의 뜻을 다소 알아챈 듯했지만, 여전히 애매모호하여 직설적으로 물었다.“그냥 알아듣게 말해.”한성우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까 그 아파트도 말이야. 우리가 사는 클라우드보다 가격이 조금 낮을 뿐이야. 그런데 그 상사가 썼던 대본 중에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도 없었다며? 집안 형편도 그냥 일반인이던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아파트를 살 수 있었겠어?”순간 차미주는 뭔가 알아버린 듯했다.그 아파트는 절대 작지 않았다. 대충 봐도 100평은 훌쩍 넘은 것 같았고 한 평당 가격이 2000만 원은 넘을 것이었다. 그렇게 계산해 보면 몇십억은 족히 되는 아파트란 소리였다. 확실히 상사가 살 수 있는 아파트는 아니었다.“조강지처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보안도 좋은 고급 아파트로 들어왔는데 보안 요원들이 왜 그냥 들여보내 줬을까? 혹시 다른 가능성은 생각 안 해봤어? 예시를 들면 그 아파트가 원래부터 그 부부의 명의로 되었다는 거 말이야. 심지어 그 작품 예약도 전부 유부남 남친이 인맥을 써서 가져다준 거라면?”차미주의 표정이 엄숙해졌다.“그러니까 네 말은, 유부남인 걸 알면서도 만났다는 거야?”한성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처음부터 알고 만났는지는 난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저렇게 비싼 아파트가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그리고 또...”한성우는 뜸을 들이며 말했다.“네가 그 상사랑 안방에서 나올 때 내가 신고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상사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어. 경찰에 신고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았어. 하지만 내가 있으니까 아마 아무 말도 못 한 거지.”게다가 경찰이 온 후 조사차 물어보던 질문에도 그 여자는 애매모호한 대답만 했다. 마치 재산과 신변 위협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급하게 스스로 정당한 이유를 찾는 모습이 더욱 이상했다.차미주는 다시 곰곰이 그녀의 상사에 대
“뭐라고?”차미주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지 못했다.“아무것도 아니야.”한성우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이런 때에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밝힌다면 아마 큰일 날 것 같으니 그는 일단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하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는 사실에 한성우는 마음이 불편했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입맛이 없어졌다.차미주도 상사의 일로 입맛이 없었다. 평소라면 둘이서 가뿐하게 해치웠을 생선구이는 가득 남았다.밥을 먹고 난 뒤 산책을 하고 돌아온 한성우는 간단한 샤워를 마친 뒤 바로 안방으로 들어왔다.차미주는 대본을 고쳐야 했기에 밤을 새울 생각이었다.한성우가 노곤노곤 잠에 빠지려고 할 때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은은한 바디로션 향기에 눈을 감은 채 몸을 틀어 습관적으로 그 사람을 품에 안았다.차미주의 몸이 순간 굳어버리더니 이내 다시 긴장을 풀었다.한성우는 그의 머리칼에 얼굴을 비비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중얼했다.“잠옷 바꿨어?”“응.”한성우는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귓가에 뽀뽀했다.“잠옷이 뭔가 전보다 부드-”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손에 닿는 부드럽고 물컹한 감촉에 한성우는 그대로 눈을 확 뜨게 되었다.침대 머리맡 등은 아직 끄지 않은 상태였다. 은은한 노란 불빛 아래 한성우는 차미주가 아주 얇은 잠옷을 입고 있다는 걸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차미주가 잠옷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얇은 잠옷 덕에 그녀의 몸매 굴곡은 더 선명했고 보자마자 한성우는 어딘가 들끓는 기분이었다.항상 느긋한 모습이던 사람이 보기 드물게 당황하게 얼어붙은 모습을 보였다.그는 한참 지나서야 이성을 되찾고 이를 빠득 물면서 말했다.“오늘은 왜 이렇게 입은 거야?”그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던 차미주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내가 이렇게 입고 싶어서 입은 줄 알아? 네가 나한테 널 자극하라며. 근데 왜 그런 표정인 건데?”“...”한성우는 사실 그냥 해본 소리였다. 애초에 행동으로 옮길 생각은
“...지금 치료받고 있잖아. 나을 수도 있고. 안 그래?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차미주는 여전히 울적한 얼굴이었다.“부정적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잖아. 그날 밤엔 난 정말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고.”그러면서 다소 의심하는 듯한 눈빛으로 한성우를 보았다.“너 혹시 전부터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다가 내가 부항을 떠준다고 하니까 나한테 뒤집어씌운 거지?”한성우는 어처구니가 없어 이를 빠득 갈았다.“난 정상이거든?”그리고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보탰다.“그전엔.”차미주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왜 난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건데? 아무리 그대로 어딘가는 아픈 느낌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날 내가 피도 흘렸다면서. 그런데 난 왜 아무것도 못 느꼈던 건데.”한성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 문제에 대해선 그도 답답했다.왜냐하면, 그도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일이었던 그날, 정말로 술을 많이 마셨던 터라 CCTV로 그저 자신과 차미주가 어깨동무를 한 채 비틀대며 방으로 들어간 것을 본 게 전부였다. 그리고 방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차미주에게 몰래몰래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한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이렇게까지 필름이 끊긴 적은 처음이었다.게다가 그날 차미주가 피를 흘리긴 했지만, 차미주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고 했다...한성우는 나직하게 말했다.“도둑아, 우리 혹시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거 아닐까?”차미주의 눈썹이 꿈틀댔다.“그럼 그 피는 누구 피인데? 네 피야?”한성우는 침묵했다.그의 몸에는 당연히 상처가 없었고 차미주 몸에도 상처가 없었다. 하지만 그 피는 차미주 허벅지 가까운 근처에 있었다.한성우는 원래 병원에 가서 한번 확인해 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그렇게 그는 고민하던 와중에 차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잠자리 기술이 좋다고 하기엔 내가 피를 많이 흘렸고, 아니라고 하기엔 난 처음이었는
머리 위에서 질투 섞인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칫하던 한현진이 곧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라이브 본지 오래됐거든.”강한서가 콧방귀 뀌며 한현진 옆에 앉았다. “바빠서 볼 시간이 없었던 거겠지.”한현진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네가 질투할까 봐 그런 거잖아. 내가 춤추는 것만 봐도 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보겠어?”한현진의 변명에 강한서가 코웃음 쳤다. “허리랑 골반만 놀리는 게 정상적인 춤이야?”한현진이 쯧 혀를 찼다. “너 그건 너무 편견이야. 몸매가 좋다고 해서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강한서는 여전히 한현진의 헛소리를 믿지 않으며 반문했다. “그럼 내가 다른 여자 춤추는 거 보면 어때?”한현진이 순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인터넷이 얼마나 어지러운 곳인데, 넌 감당 못 할 거야.”내로남불의 정석을 보여주는 한현진을 보며 강한서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다른 여자 보는 건 싫고, 넌 다른 남자건 괜찮아?”“나 정말 안 봤어.”쪼잔하게 구는 남자친구를 보며 한현진이 휴대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진작 언팔로우 했거든?”강한서는 빠르게 한현진이 보여주는 리스트를 훑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 인플루언서의 아이디는 보이지 않았다. 강한서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그럼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었던 거야?”한현진이 다른 어플로 들어가 강한서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매출이 엄청나거든. 내가 전에 얘기했었잖아. 매달 남는 자투리만 몇백만 원어치야. 자투리를 잘 이용해 액세서리를 만들면 가격이 최소한 10배는 뛸 텐데, 너무 낭비잖아. 그래서 생각한 건데, 라이브 커머스로 판매하면 어떨까?”강한서가 멈칫했다. “스트레인지 이름으로 판매하려고?”“그럴 리가. 스트레인지는 명품 주얼리 브랜드잖아. 내가 스트레인지 이름으로 그런 상품을 판매할 리가 없잖아.”“그럼 라이브 커머스 하는 인플루언서와 협력할 생각이야?”“방금 몇 인플루언서와 연락해 봤어. 몸값이 너무 비싸서 그
강한서가 침묵했다. 강민서는 냉혈한 같은 강한서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엄마가 오빠에게 무슨 짓을 했든, 낳고 길러주신 분이야. 지난번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도 안 하더니, 이번엔 계단에서 떨어졌는데도 안 가 볼 생각이야? 이젠 엄마가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거야? 아빠가 돌아가실 때 한 약속 잊었어?!”강한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네가 이래라저래라할 자격 없어.”얼굴을 일그러뜨린 강민서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한현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강한서를 쳐다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가 봐. 안 가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거야.”강한서가 숨을 들이쉬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둘 사이엔 더 이상 할 얘기 없어. 어차피 엄마가 원하는 건 내 관심이 아니니까.”한현진이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가야 해. 회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어. 이번 일로 불효자라는 낙인이 붙으면 주주들 마음 사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숙여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주주 총회에 전혀 영향 주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이 회장을 뽑을 땐 그런 것보다 능력이나 업적, 그리고 인맥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한현진은 그저 그에게 핑계를 찾아주는 것일 뿐이었다. 강한서가 한현지을 안고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그럼 나랑 같이 가.”거절하려는 한현진에게 강한서가 말했다. “넌 올라가지 말고 차에서 기다려. 내가 나오면 우리 할머니랑 밥 먹으러 가자. 요즘 계속 너 데리고 오라고 잔소리했었거든.”그러니 한현진은 거절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강한서가 병원에 도착했을 땐 신미정의 수술이 끝난 뒤였다. 다리에 깁스한 신미정은 창백한 얼굴로 병실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강민서는 침대맡에 앉아 붉어진 눈으로 귤을 까고 있었다. 병실 문 앞에 도착한 강한서의 귀에 신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오빠는 너랑 같이 안 온 거야?”강민서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강민서가 흥분하며 말했다. “뭐가 괜찮아요? 의사가 조금만 늦게 병원으로 호송됐으면 다리가 정상으로 회복될 수 없었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녀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보살피는 사람도 없이 밖에서 혼자 지내니까 그렇죠. 이번엔 운이 좋게 이웃이 발견했다지만 만약 운이 나빠 엄마를 발견한 사람이 없었다면 전 어떡하라고요...”신미정이 손을 뻗어 강민서의 눈물을 닦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얘가. 이렇게 멀쩡하잖니.”“멀쩡하긴 뭐가...”강민서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 흰머리도 이렇게 많이 나고. 이런데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그러더니 강민서는 참지 못하고 원망의 말을 늘어놓았다. “삼촌은요? 엄마가 평소 삼촌을 얼마나 잘 해줬는데, 삼촌은 대체 뭐 하는 거예요?”신미정이 멈칫 몸을 굳히더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네 삼촌도 가족이 있잖니. 괜히 폐 끼치지 마.”“삼촌네가 일이 생겼을 땐 늘 엄마가 도와줬잖아요. 엄마가 필요할 땐 조그마한 일에도 살뜰하게 살피더니, 이젠 엄마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으니까 이렇게 다쳤는데도 보러 오지 않는 거예요?”신미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만해.”그녀라고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친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그녀가 강씨 가문에서 쫓겨나자 동서라는 여자는 바로 등을 돌렸다. 동생은 더 못난 놈이라 자기 와이프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일이 생기면 역시나 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도 없었다. 그는 차갑고 냉정하며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신미정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어색하기도, 익숙하기도 했다. “한서야, 너 현진이와 다시 만나니?”신미정이 나지막이 물었다. 강한서가 무덤덤하게 신미정을 쳐다보며 내뱉은 말은 냉랭하고 무정했다. 그 말은 그대로 신미정의 심장
그럴 리가.신미정의 모든 변화는 전부 송씨 가문 친딸이라는 한현진의 신분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과거 자신이 한현진에게 했던 모든 짓이 괜히 마음에 찔렸다. 그녀는 그저, 송씨 가문에서 그 일로 자신에게 따질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한현진이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강한서는 한현진에게 이 일로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몸이 망가진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강한서는 그 일을 얼마든지 솔직하게 가족에게 얘기해도 괜찮고, 송씨 가문에서 어떻게 처리하든 그는 절대 나서지 않겠다고 했었다. 한현진은 비록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가족에게는 그 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한서라고 한현진이 그 일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은 가족들이 그 일을 알게 된 후 강한서에게 화풀이할까 두려웠다. 아무래도 그 일은 강한서가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었고 한현진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은 강한서였다. 한현진은 비록 직접 복수하겠다고 했지만 혈연관계인 강한서와 신미정을 생각해 이미 많이 봐주고 있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한현진은 더 이상 신미정을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도 한현진에게는 이 관계를 위한 양보였다. 하지만 신미정은 송씨 가문이 한현진의 신분을 공개하기 전엔 어떻게든 강한서를 송가람과 이어주기 위해 약을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현진이 송씨 가문의 친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신미정은 다시는 송가람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매번 한현진을 돈밖에 모르는 속물이라며 그녀가 강한서의 돈을 노리는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사실 강한서의 돈으로 누리고 살면서 강한서를 제대로 보듬지 않은 것은 신미정이었다. 그런 신미정이 변했다?그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련하던 강한서의 눈빛이 점점 냉담하게 변하자, 신미정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전에 내가 유씨 가문 때문에 현진이에게 편견이 있었어. 게다가 그땐 네가 현진이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책임감으로 사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