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홍혜림은 룸으로 돌아가 가방을 들고 도도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얼굴을 감싸 쥔 송가람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강한서가 송가람에게 휴지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아?”송가람은 코끝이 찡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던 서해금은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강한서를 밀쳤다. 중심을 잃은 강한서는 휘청하더니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그의 얼굴이 통증으로 하얗게 질렸다. 울컥 화가 치민 송가람이 입을 열었다. “엄마, 뭐하는 거야!”“마침”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던 민경하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얼른 달려가 강한서를 부축했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모님,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송가람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강한서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송가람이 강한서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서해금이 같은 자리에서 송가람의 뺨을 때렸다. “그쪽으로 가기만 해. 그럼 우린 오늘 모녀 관계를 끊는 거야. 앞으로 다신 내 눈 앞에 띄지마.”서해금은 온 몸의 힘을 다 해 송가람을 때렸다. 그녀는 예전에도 송가람를 때린 적이 있었다.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을 때, 그림을 못 그렸을 때 심지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실수를 했을 때에도 매를 든 적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힘을 실은 적은 없었다. 뺨을 얻어맞은 송가람은 귀가 윙윙 울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해금을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순간 눈물이 가득 고였다. 강한서는 마치 송가람이 맞고 있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듯이 민경하의 부축을 받으며 나지막이 해명했다. “아주머니, 가람이도 이젠 성인이에요. 가람이에게도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권리가 있어요. 이렇게 몰아붙이시면 안 되죠.”서해금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내 딸을 어떻게 가르치든 그건 강 대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미안하지만 앞으로 우리 딸에게서 좀 떨어져줬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든 가람이에게 부탁 같은 것도 하지 말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희망도 주지 말란 말이야!”
이쯤이면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강한서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한현진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거야?’생각하며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는 연결이 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경하였다. “사모님, 저예요.”민경하의 목소리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강한서는요?”“대표님은...”잠시 말이 없던 민경하는 노려보는 강한서의 눈빛에 못이겨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더 그럴듯하게 연기 하시려고 술을 두어 잔 더 마셨다가 지금 취하셨어요.”한현진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요?”민경하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미 숙취해소제도 마셨고 두 시간 정도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계획했던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어요. 사모님들께서는 전부 언짢아하시며 돌아가셨고요. 자세한 건 나중에 대표님께서 깨어나시면 대표님께 직접 들으세요.”한현진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쥐똥만한 주량의 소유자인 남편이 걱정되었다. “강한서 지금 어디 있어요? 제가 가볼게요.”“아뇨. 서 대표님께서 가실 때 대표님을 보시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어요. 의심을 사 대표님을 감시할 수도 있어요. 사모님께서는 대표님이 깨어나셔서 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말에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걱정되는 마음을 추스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저 대신 강한서 잘 챙겨줘요. 옆으로 누워서 자게 해요. 술 많이 마시면 자꾸 토하거든요. 옆에 물도 한 잔 떠주고요.”민경하가 웃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전화를 끊은 민경하가 고개를 돌려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병약한 고양이 같은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만약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본인 몸을 바쳐가며 송가람이 약을 탔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했고 제가 대표님을 도와 사모님께 그 사실을 숨겼다는 걸아시면 아마 전 앞으로 사모님께 빌붙을 수 없을 지도 몰라요.강한서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허약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
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엄마는? 심원 모자를 불러놓고 나랑 맞선 보는 얘기는 왜 나한테 하지 않은 건데? 엄마 사업을 위해서, 엄마 고객을 위해서라면 딸도 팔겠다는 거야?”서해금은 화나 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정말 대체 어떤 뇌를 갖고 있는 건지 네 머리를 열어서 보고 싶을 지경이야! 그냥 만나서 식사 한 번 하는 것뿐이잖아. 누가 너더러 결혼하래? 지금이 어떤 세월인데, 싫다는 네 목에 내가 칼이라도 들이대면서 협박이라도 할까봐 그래?”“내가 그렇게 얘기를 안 하면 네 생각엔 홍혜림이 약속 자리에 나오기나 했을 것 같아? 홍혜림 씨와 채지윤 씨는 어렸을 적부터 있다면 오랜 친구야. 심원은 홍혜림 씨에겐 친아들 같은 존재라고. 심원이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네가 그 아이 마음만 잘 잡고 있다면 내가 홍혜림 씨 마음을 다시 되돌리는 게 어려울 것 같아? 오히려 네가 한 짓을 봐! 한 번 두 사람 모두에게 미움을 샀어. 우리 회사가 진씨 가문과 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지 네가 알기나 해? 지금 홍혜림 씨가 사업 파트너로 한현진을 지정했어. 그것 때문에 내 손실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알아?”송가람이 훌쩍이며 말했다. “아무리 파트너가 한현진이라고 해도 협업하려면 회사 절차는 걸쳐야 하잖아. 수익도 전부 회사로 들어오는 거고. 엄마에게 떨어지는 돈이 줄어들 진 않잖아.”서해금이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병X을 보는 듯 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냉소를 흘리더니 더는 말이 없었다. 서해금에게 병원에 갔다고 속이고 강한서에게 갔던 일에 대해 잘못을 인지하고 미안함을 느낀 송가람이 나지막이 서해금에게 사과했다. “엄마, 미안해. 내가 엄마를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한서 오빠는 이제 막 건강을 회복해서 술을 마시면 안 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너무 걱정되어서 오빠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가 간 거야. 엄마, 아까 한서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됐어.”서해금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실소를
‘한서 오빠... 한서 오빠...’송가람은 갑자기 멈춰 섰다. 마음속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송가람은 눈물을 쏟으며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경하였다. 민경하는 이렇게 말했다. “강 대표님께서는 술에 취해 지금 회사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러더니 잠시 망설인 후 덧붙였다. “가람 씨, 오늘 가람 씨가 떠난 후, 대표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는 가람 씨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요. 다만 정말 급한 일이 있다면 저를 통해 연락하시라고 하셨습니다. 가람 씨께서 대표님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대표님은 자신으로 인해 가람 씨와 어머님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답니다.” 그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송가람이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송가람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람 씨, 혹시 우셨어요?” 송가람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누구시죠? 할 말 없으면 끊을게요.” 그 말을 듣자 남자는 급하게 답했다. “저... 저, 저 주혁입니다.” 송가람은 이름을 들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서둘러 설명했다. “저는 한 대표님의 운전기사입니다. 예전에 식당 카드를 만들 때 가람 씨께서 직접 저를 카드 만드는 곳까지 데려가 주셨잖아요.” 그제야 그녀는 떠올렸다. 약간 너저분한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고, 왜 전화했어요?” 주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차장에서 열쇠고리를 하나 주웠는데, 프런트 데스크에서 가람 씨의 것이라고 하더군요. 오늘 마침 시간이 있어서, 가람 씨가 어디 계신지 알려주시면 직접 가져
그가 차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가람 씨.” 송가람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운전 중인 싸구려 카롤라를 본 송가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차를 타고 온 거예요?” 주혁이 설명했다. “이건 제 차입니다. 오늘 한 대표님께서 쉬시는 날이라, 그분 차는 두고 왔습니다.” 송가람은 약간 불쾌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뒷좌석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차 안은 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공간이 좁아 약간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차 안에는 차량용 방향제가 뿌려져 있었는데, 그 방향제는 그들의 회사 제품으로, 가격이 저렴하지 않다. 마침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였다. 송가람은 주혁을 유심히 살폈다. ‘이 초라한 사람이 이런 걸 쓸 수 있다고? 한현진 같은 여자가 사람 마음을 사려고 준 게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현진에 대한 이미지는 한층 더 위선적이라는 딱지를 얻게 되었다. 주혁은 앞 좌석 수납함에서 작은 선물 가방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가람 씨, 이거 가람 씨의 물건입니다.” 그가 말하는 순간, 송가람은 마스크를 벗었다. 주혁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남은 선명한 뺨 자국과 부어오른 흔적을 보게 되었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누가 때렸어요?” 송가람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그쪽이 알 바 아니에요.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마세요.” 그녀는 주혁이 건넨 가방을 받아 열어보았다. 가방 안에는 자신의 열쇠고리와 상자에 담긴 진주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송가람은 열쇠고리만 꺼내고는 가방을 다시 주혁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건 그쪽 물건이죠.” 주혁은 억지로 그녀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고 조용히 말했다. “그건 가람 씨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송가람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혁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선물
차가 송가람이 말한 회원제 클럽에 도착했고, 그녀가 내리려던 순간 주혁이 그녀를 불렀다. “가람 씨.” 송가람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주혁은 잠시 망설이며 물었다. “기다려 드릴까요?” 송가람은 안전벨트를 풀며 무심히 말했다. “아니요, 가도 돼요.” 그러다 잠시 생각하더니 지갑을 꺼내 돈 한 장을 뽑아 주혁에게 내밀었다. “차비예요.” 주혁은 깜짝 놀라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 “가람 씨, 저는 그런 의도로 태워드린 게 아닙니다.” “알아요.”송가람이 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난 빚지고 싶지 않아요. 만약 이게 불편하다면...”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럼 한현진을 혼내주든가요. 정말 꼴도 보기 싫거든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돈을 좌석에 던져 놓은 뒤 차에서 내렸다. 주혁은 그녀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자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한편, 진윤은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가 아래층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깜짝 놀라 아빠가 온 줄 알고 얼른 게임기를 끄고 뛰어나갔다. 하지만 내려가 보니 엄마였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엄마는 이모랑 밥 먹으러 갔다면서요.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진윤의 엄마는 신발을 벗으면서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말도 마라, 생각만 해도 재수 없으니까!” 그러더니 오늘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아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진윤은 이야기를 듣고 잠시 멍해졌다. 그날 아침 한현진의 전남편이라는 사람이 문자로 물어왔다. [너희 엄마가 오늘 점심에 누구랑 약속했어?]그는 이상해서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자세히 말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엄마한테 부탁해서‘한세 한식당’을 '히비스커스 호텔'로 바꿔봐. 그러면 여신님 앞길이 밝아질 거야.]그는 여신 팬클럽의 열혈 멤버로서, 고민
‘요즘 애들은 정말 이렇게 현실감이 없는 건가?’‘이 정도까지 눈치를 줬는데도 왜 못 알아듣는 거지?’진윤은 핸드폰으로 주저리주저리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죄다 한현진을 치켜세우는 말뿐이었다. 강한서는 그걸 읽는 게 귀찮아 바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진윤은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누나 팬클럽이 아직 공식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잖아요. 근데 요즘 영화 때문에 누나 인기가 꽤 높아졌잖아요. 이 기회에 팬클럽을 정식으로 설립하려고요. 전에 누나가 햇살 유치원 일로 인터넷에서 욕먹었을 때도, 제대로 된 팬클럽이 없어서 도와줄 사람이 없었잖아요. 해명글 하나 올려도 도와주는 사람이 몇 명 없고요. 팬클럽을 만들면 다음에 누가 또 온라인에서 깽판 치려 하면 우리가 끝장내버릴 수 있잖아요!”“...”그는 갑자기 자신의 아내가 의외로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 전에는 한열, 이제는 진윤. 진윤은 그를 팬클럽 단톡방에 초대했는데, 거기엔 소년, 소녀 팬들이 가득했다. 매일 ‘내 남편!’,‘내 아내!’라며 난리가 났다. 강한서는 물었다. “팬클럽은 뭘 하는 거지?” 진윤이 말했다. “형님, 팬클럽이 뭘 하는지도 모르면 어떻게 덕질을 하셨대요?” “말 안 할 거면 끊는다.” 진윤은 곧바로 팬클럽의 역할을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설명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결국 끊고 말했다. “간단하게 설명해 봐.” “누나가 싸울 때 사람 모으는 조직이요.”“...”“형님, 혹시 형님 SNS 팔로워 많아요? 많으면 홍보 좀 해주세요. 나중에 누나가 대박 나면 우리는 팬클럽 원조 멤버가 되는 거예요!” 강한서는 차분히 말했다. “현진이는 대중성으로 승부하지 않아. 그런 팬클럽 문화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게다가...” 그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앞으로 1년, 아니 2년 안에도 주연작은 맡지 않을 거야. 최대한 특별 출연이나 연극 정도만 할 거라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학
강한서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먼저 공부를 해서 내 인생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그다음에 덕질을 시작했어.” “넌 어때? 지금은 먹고사는 거 다 부모님께 의지하는 나이잖아. 부모님이 너의 덕질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해도, 언젠가 네가 우상이랑 같은 무대에 설 기회가 온다면, 넌 어떤 신분이고 싶어?” “현진이는 단순히 네 눈만 밝혀주는 게 아니라, 네 앞길도 비춰줘야 해. 넌 현진이 빛에 가려져 묻히고 싶어? 아니면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빛나고 싶어?” 진윤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집에는 뛰어난 형이 있어서, 자신은 그저 인생을 즐기는 한량으로 지내면 된다고 여겼다. 집안 형편이 좋으니, 덕질에 돈을 써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성적이 안 좋다고 부모님께 잔소리를 들어도, 결국 졸업 후에는 돈을 써서 해외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도금된 학벌로 가문의 회사를 물려받으라는 게 부모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돈으로 산 학위는, 결국 종이 한 장에 불과했다. 속은 여전히 놀고먹는 한량일 뿐이었다. 언젠가 우상 앞에 선다면, 진씨 집안 차남이라는 타이틀은 충분히 대단했지만, 그 타이틀 외에 자신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강한서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 생각엔 팬이 대단해야 우상이 대단해 보이는 걸까? 아니면 우상이 대단해야 팬이 대단해 보이는 걸까?” 그 말은 마치 찬물을 끼얹는 듯한 깨달음을 주었다. 팬이 뛰어나면 사람들은 우상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뛰어난 사람끼리 서로 끌리기 마련이니까. 반대로 팬이 보잘것없다면, 아무리 우상이 대단해도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게 본다. 왜냐하면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별 볼 일 없으니까. 진윤은 점점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형님, 혹시 선생님이세요? 공부하라고 설득하는 기술이 우리 선생님들보다 훨씬 낫네요. 제가 학교 다닐 때 형님 같은 선생님을 만났다면, 제가 수능을 그렇게 쳤겠어요? 적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