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이 물에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휴대폰을 옆에 놓는 강한서를 보며 민경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강한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마 뒷담화 당사자에게 들킨 것 같아요.”민경하: ...‘어쩐지 좋아하시는 것 같은 건 착각인가?’“주씨 가문은 요즘 어때요?”강한서가 민경하에게 물었다. 민경하는 곧바로 강한서는 주강운에 관해 묻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주 변호사님은 얼마 전 장씨 가문 따님과 맞선을 보셨어요.”멈칫한 강한서가 물었다. “장준이 외동아들 아니었어요?”민경하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실은 사모님 조카분이세요.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셔서 한 달 전 장준 씨의 본가로 호적을 옮기셨어요. 아마 그분을 이용해 정략결혼을 맺을 생각인 것 같아요. 양쪽 가문에서 모두 적극적으로 두 분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어요.”그 말에 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운이는 누구보다 장씨 가문의 작태를 싫어해요. 걔는 절대 그 인간들과 어떤 관계로도 엮이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입술을 짓이기던 민경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대표님. 납치 사건의 모든 디테일까지 신경 쓴 사람이에요.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라고요. 정말 그런 사람에 관한 대표님의 판단이 정확할 거라고 생각하세요?”멍해진 강한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한서는 민경하가 하려는 말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엔 줄곧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납치범은 강한서를 주강운으로 착각을 한 걸까. 그러다 기억을 회복한 강한서는 강으로 뛰어내리기 직전까지 내몰던 납치범이 귓가에 속삭이던 말을 떠올렸다. “내 탓 하지 마. 그러게 누가 너더러 이 정장을 입으래?”강한서도 처음엔 정장과 납치가 대체 무슨 상관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날 강한서가 입은 화이트 정장은 한현진이 선물한 것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현진에게 직접 왜 그날 그 슈트를 입으라고 한 건지 물었다. 그러자 한현진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손주며느리에 대한 애정을 잔뜩 드러내고 나서야 정인월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서야, 내가 법사님에게 민 실장과 민서 사주팔자를 봐달라고 했어. 연말쯤이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제일 좋은 시기라고 하는데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서 마음이 불안하구나.”눈을 파르르 떨던 강민서가 무의식적으로 민경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민경하는 강민서를 향해 씩 웃어 보였고 저도 모르게 빨갛게 귓불을 물들인 강민서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강한서가 웃으며 물었다. “할머니가 왜 불안하세요.”정인월이 말했다. “민 실장처럼 좋은 애가 민서 성격에 못 이겨 도망갈까 봐 그러지. 두 사람이 금방 서로를 알아가면서 민서가 조금이라도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착한 척할 때 아예 결혼을 시켜버리려고 그랬지. 나중에라도 본성이 드러난다고 해도 이미 결혼을 한 이상 민 실장이 후회해도 소용없잖아. 하지만 길일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으니 차라리 약혼이라도 해서 일단 임자가 있다고 못이라도 박아서 못 가게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야.”강한서: ...강민서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할머니! 할머니한텐 제가 얼마나 눈엣가시 같아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휴대폰 너머로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어색한 정인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민서야, 네 오빠 곁에 있었니? 밀 실장과 데이트 안 갔어?”민경하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직 퇴근 전이라서요.”정인월: ...“하하, 다 같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시끌벅적하네. 하하.”정인월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요망한 손자 놈이, 정말! 할머니를 이렇게 놀려먹어!’어차피 모두 들었다고 하니 정인월은 아예 대놓고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민 실장, 약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할 생각 있어?”강민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하던 민경하가 입을 열었다. “아가... 민서 씨가 원한다면요. 전 상관없어요.”강민서의 심장이 세차게 뜀밖질했다. 쿵쾅쿵쾅. 마치 주변은 온통 자신의 심
민경하가 멍한 얼굴로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본인 마음을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일할 땐 누구보다 확실한 사람이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모르겠다고요?”민경하가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난감할 때 나오는 그만의 습관이었다. 강한서는 민경하를 다그치는 대신 그저 조용히 그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민경하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민서 씨 오빠시니까 화가 나실 수 있겠지만 전 정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 단지 약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아가씨는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사실 설레는 감정은 그리 많지 않아요. 저도 아가씨와의 만남이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직은 대표님이 사모님을 대하시는 것처럼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강한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할머니께서 물어보실 때 왜 거절하지 않았어요?”민경하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회장님 건강이 옛날 같지 않으신데 그렇다고 큰 사모님을 믿을 수는 없으니 본인이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민서 씨가 의지할 만한 사람을 찾아주고 싶으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으로 절 선택하셨으니 저도 그 마음을 받들어 회장님이 마음 놓으실 수 있게 민서 씨를 잘 보살피고 싶어요.”“마음을 놓긴 개뿔!”강한서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못 찾으면 못 찾는 거지, 한성이 민서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할까 봐 그래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거절하지 않는 건, 일단 결혼했다가 이혼이라도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민경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사랑까지는 아니라는 얘기죠. 그리고 저도 이혼할 생각은 없어요. 민서 씨가 강력하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않는다면요.”민경하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풋풋한 청년이 아니었다. 그도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러니 어린아이들처럼 열렬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연애가 아닌
이런 만남이 민경하에게는 연애보다는 직장 상사가 분부한 업무를 보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 결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민경하가 무리하게 맞추려 한다는 말은 오히려 강한서가 꽤 에둘러 표현해 준 것이었다. 민경하 역시 그 일을 본인의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민경하의 희생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민경하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강민서와는 다른 본인의 신분을 신경 쓰면서 괜한 자존심을 부린 탓에 솔직한 마음으로 강민서를 대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강한서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민경하는 부끄러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건 본인에게 무책임했을 뿐만 아니라 강민서를 전혀 존중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회장님께서 이미 저희 어머니께 연락하셨을 것 같은데.”민경하가 나지막이 강한서에게 도움을 청했다. “민 실장이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난 누구한테 물어볼까요?”어이가 없다는 듯 불퉁하게 대답하던 강한서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민 실장이 직접 민서에게 잘 얘기해요. 민서에게 이성으로써의 감정이 없어서 약혼하고 싶지 않다고요. 먼저 민서 마음을 끊어내고 나서 다시 할머니께 잘 말씀드려요.”민경하가 조금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요?”강한서가 냉소 지었다. “왜요, 민서 어장 관리라도 하게요?”민경하: ...사무실에서 쫓겨난 민경하는 한참 동안 고민을 거듭한 후 결국 강민서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강민서의 사무실 문이 비스듬히 열려있었다.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강민서의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민경하의 귀에 흘러들었다. “아마 이번 달이면 약혼할 것 같아. 할머니가 어떤 날로 잡을지 봐야겠지. 그럼, 당연하지. 날 정해지면 너희들한테 제일 먼저 얘기해줄게.”“외모는 그럭저럭 생겼어. 우리 오빠 정도는 아니지만 봐줄 만해.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데 일할 땐 말이 엄청 많아. 아줌마처럼 이것저것 다 신경 쓴다니까. 처음엔 귀찮았는데 지내다 보니
완전히 몰입해 설명하고 있던 민경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한서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강한서를 똑똑히 본 강민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민경하가 바로 뒤에 있다는 사실을 깜박한 강민서는 그대로 머리를 민경하의 턱에 부딪혔고 그 탓에 혀를 씹은 민경하는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다. 강민서는 허둥지둥거리며 뻘쭘한 듯 강한서를 채근하며 다친 민경하를 살폈다. “오빠, 왜 노크도 안 하는 거야!”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강한서가 생각했다. ‘민서에게 얘기한 거야? 그렇다기엔 민서가 너무 얌전한데.’“노크했어. 네가 못 들은 거지.”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민경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얘기 잘 끝났어?”민경하는 턱을 움켜쥔 채 어쩐지 마음에 찔려 시선을 돌렸다. 강한서: ?민경하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강민서는 강한서에게 물었다. “오빠, 왜 왔어?”만약 조금 전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따도남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비서 성격상, 아마 강민서에게 파혼하자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너 말고, 민 실장 찾으러 온 거야.”말하며 그는 민경하를 째려보았다. “안 나와요? 업무시간에 누가 마음대로 자리 비우래요?”민경하가 턱을 움켜쥔 채로 다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강민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가 민 실장님에게 업무 가르쳐주라고 했잖아. 이게 어떻게 함부로 자리를 비운 거야. 오빠 갑질하지 마.”‘내가 갑질이라고?’강민서의 머리를 열어 정신 차리라고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강한서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의 무력함에 빠져들었다. 역시 눈에 씐 콩깍지는 쉽게 벗겨지지는 않는 법이었다. 강한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껏 가르쳐줘도 네가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사수가 능력 미달인 거야. 정 아닌 것 같으면 사수 바꿔줄게.”“민 실장님이 뭐가 능력 미달이라는 거야
강한서는 이번만큼은 민경하의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가 코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기회는 이번뿐이에요. 오늘이 지나면 나중은 없어요.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불만이어도 꾹 참고 얌전히 데릴사위가 되어야 할 거예요.”강한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였다. 통화 버튼을 누른 강한서가 날카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공격적인 말에 상대방이 멈칫했다. 그리고 곧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왜 이렇게 화가 많아?”멍해진 강한서가 곧 말투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현진아, 네가 왜 다른 번호로... 누구 휴대폰이야?”한현진이 말했다. “휴대폰 가게 점장님 거야. 내가 연락이 안 돼서 네가 걱정할까 봐 전화했어. 그나저나 넌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무슨 일 있었어?”“아냐.”강한서는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본인의 비서를 힐끔 쳐다보며 나가라고 손짓했다. 민경하는 큰 은혜라도 입은 사람처럼 곧바로 사무실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은 강한서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겠어. 민 실장이랑 민서 일 때문에 그러지.”“두 사람이 왜?”“할머니께서 두 사람에게 약혼하라고 하셨는데 민 실장은 민서를 좋아하지는 않나 봐. 좋아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도 약혼하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민서에게 가서 똑바로 얘기하라고 했더니 얘기는커녕 민서랑 데이트 약속을 잡은 거야. 저렇게 우유부단한데 내가 화가 안 나?”강한서의 얘기를 들은 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 너 정말 연애 경험이 전혀 없네. 민 실장님은 전혀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 민 실장님이 주저한다는 건 네 동생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란 얘기잖아.”강한서는 자신의 편에 서지 않는 아내에게 불만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왜 민 실장 편을 들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민서 오빠야. 아빠가 아니라고. 네가 모든 일에 개입할
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을 바로잡았다. “두 사람 사귄 적 없어. 네 오빠의 짝사랑이었지.”한현진이 말했다. “만약 오늘 만나지 않았다면 네 말을 믿었을 거야. 하지만 채영 언니 모습을 보면 오빠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야.”문채영은 서해금이 스카우트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약속 장소에 갈 때만 해도 한현진은 문채영이 자신을 떠보거나 일부러 가까워지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었다. 하지만 문채영은 일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은 채 한현진과 송민준의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눴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요절한 줄 알았던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송민준은 두 눈으로 직접 분만실에서 안겨나오며 울음을 터뜨리던 동생을 봤었다. 하지만 결국은 차가운 시체로 변한 동생은 그에게는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그는 늘 동생이 살아있는 것만 같았고 죽은 그 아이는 동생이 아니라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송민준은 너무도 어렸고 아버지나 다른 가족들은 아내와 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아무도 5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부정당하는 회수가 많아질수록 확고하던 그의 확신도 점점 흔들렸다. 등의 모반은 단지 그의 꿈속 상상이었던 걸까?비록 점차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긴 했어도 여동생 말이 나올 때마다 송민준은 늘 말했었다. “만약 그게 꿈이 아니라면, 만약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는 날, 난 바로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을 거야.”문채영은 한현진을 보며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민준이는 틀리지 않았어. 걔는 정말 한눈에 널 알아봤어.”한현진은 송민준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동안의 빈자리를 얼마나 채워주고 싶어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채영 입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문채영은 마치 송민준이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한현진을 찾은 건지, 대신 변명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불만을 품기라도 할까, 걱정인 사람처럼. 강
하지만 만약 한현진과의 세력 다툼은 그저 재산 이전을 위해 주의력을 분산시키려는 허상에 불과하다면?“너 회사 재무에 접근할 수 있어?”그 말에 한현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마. 재무팀은 아예 철벽통이야. 전부 아주머니 사람이라 입사 초기 가져간 선물도 은서하 씨를 제외하면 가진 사람도 없었어.”“그럼 네가 말한 그 은서하라는 사람은? 그 사람은 너에게 주 기사님을 조심하라고 귀띔하기도 했잖아.”한현진이 말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난 은서하 씨를 너무 믿지 못하겠어. 서하 씨는 아주머니 돈을 받았어. 집에서 아픈 할머니도 계시고. 약점이 있는 사람은 너무 나약해. 작은 압력만 넣어도 무너지니까. 서하 씨를 이용했다가 아주머니 꼬투리를 잡기도 전에 먼저 내 밑바닥까지 전부 아주머니한테 이르진 않을까 걱정이야.”말하던 한현진이 잠시 멈칫했다. “아, 맞다. 네가 준비한다던 주혁 씨 몽타주는 어떻게 됐어.”“몽타주는 완성됐지만 없는 사람이라고 나와.”실망하던 한현진은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강한서, 아주머니와 관련된 사람들부터 하나씩 조사해 봐.”잠시 멍해진 강한서가 물었다. “뭐라도 발견한 거야?”“사실 아직 알아낸 건 없어. 기사님은 손을 다친 후 송가람의 기사로 전근됐어. 그러다 갑자기 내가 맨 처음 기사님을 전근시킨 것도 송가람이 날 어떡해보려다 마지막엔 기사님이 나서서 본인이 깨뜨린 거라고 얘기한 거였잖아. 그래서 어쩐지 절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했었어. 조사해 봐. 만약 아주머니 주변 사람이 아니라면 내 의심도 하나 풀 수 있는 거니까.”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쪽으로 알아볼게. 아주머니 해외 자산도 내가 알아볼게. 회사는 어떡할 생각이야?”한현진이 씩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엔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향 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로 해외 진출을 노리는 거라면 절대 뜻대로 되게 놔두진 않을 거야.”하지만 문채영의 등장은 한현진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2년 연속 우승을 거머쥔 문채영의 도움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