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이 말했다.“현재 모은 증거를 볼 때 민사소송은 반드시 이길 수 있어요. 하지만 명예훼손죄의 경우 증거를 더 수집해야 해요.”“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면 승소할 확률이 높지 않은가요?”“그건 아니에요. 명예훼손죄를 입증하는 건 꽤 까다로운 일이라 증거에 조금 더 공을 들여야 단번에 깔끔히 처리할 수 있어요.”유현진은 궁금한 듯 물었다.“어떻게 공을 들여야 하죠?”주강운은 웃었다.“그건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에요. 당신이 고려해야 하는 건 그들이 어떤 심판을 받길 원하는지예요. 그들이 그냥 사과만 하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그들을 처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해 근본적으로 이 일을 해결할지, 잘 고민해 보세요.”유현진은 침묵했다.그녀는 1년 가까이 심한 악플과 의도적인 사이버불링에 시달렸다. 최악의 경우 핸드폰 번호까지 유출되어 직접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공격하기도 했다.한동안 유현진은 감히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지도 못했다. 분명 그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팬들도 많지만 악플을 무시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주위가 조용해지면 악랄한 저주와 욕설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됐다. 그리고 그런 소용돌이에 한 번 빠지게 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그래도 유현진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간 의기소침해졌었는데 차미주가 제때 그녀를 데리고 심리 상담을 받아 천천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사이버불링을 당한 사람들은 생사를 넘나들기도 하는 데 반해 사이버불링을 한 사람들은 스크린을 마주하고 키보드를 마구 두드린다. 심지어 일상생활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 정의의 사도인 척하면서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인터넷 또한 법의 제재를 받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으면서 처벌받지 않는 걸까?하지만 조금 전 전과 기록이 남을 수 있다는 주강운의 말에 유현진은 마음속으로 대가의 경중을 따졌다.주강운은 그녀의 머뭇거림을 보아내고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저
"모든 영상에서 암을 언급하는 건 트래픽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야?""참다못한 소녀가 의심하는 사람들의 캡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을 때, 사건은 도마 위로 오르게 됐어요. 소녀가 올린 사진 때문에 악플을 받게 되었다는 한 사람은 계정을 삭제하겠다고 하기도 했고요. 그러자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소녀한테로 돌렸어요. 영향력이 있는 인플루언서로서 평범한 사람을 자신의 계정에 올리는 것은 악플에 앞장서는 것이라며 말이에요.""의심과 악플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와중에 사람들은 소녀가 먹고 있는 약 리스트가 가짜라는 둥,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는 소녀를 모른다고 했다는 둥, 암에 걸린 소녀는 진작에 치료를 끝내고도 뜨기 위해 쇼를 한다는 둥, 집에 돈도 많으면서 몰래 사람들의 기부를 받고 있는다는 둥 폭로를 하기 시작했어요.""사건이 터지고 나서 사람들은 다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소녀의 계정은 오래도록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어요, 보름 후, 그 계정에는 소녀가 사망했다는 부고가 올라왔어요."이 말을 들은 유현진은 약간 멈칫했다.주강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커피를 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사인은 자살이었어요. 소녀는 병이 아닌 악플러들의 악플로 인해 죽게 되었죠.""소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유서와 병원 도장이 찍힌 차트, 그리고 그녀가 치료를 받고 있는 영상을 공개했어요.""이번 영상에서 고통에 시달리며 가슴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이전 영상에서 발랄하게 웃던 소녀와 완전히 달랐어요. 사람들은 치료를 끝낸 소녀가 어떻게 고통을 참아내며 메이크업을 하고 영상들을 찍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소녀가 하프 마라톤이 끝난 다음 ICU로 갔다는 사실 또한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이번 영상이 업로드된 후, 가해자들은 잇달아 계정을 삭제했어요.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은 계정을 삭제하기만 하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들은 다음 사건에서 계속 가해자의 역할을 하게 되겠죠."이야기를 듣고 난 유현진은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제가 그냥 사실대로 말할게요. 사실 저희 집안사람들은 제가 더빙 일을 하는 걸 몰라요, 제 개인 정보로 고소를 한다면 더 이상 숨기지 못할 거 아니에요."유현진이 한 말이 없는 말은 아니었기에 이 정도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주강운은 이해를 한다는 듯이 말했다."친구의 개인 정보로 고소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 친구가 모든 과정을 함께 해야 하고 또 재판도 출석해야 돼요.""그거라면 충분히 가능해요."유현진은 차미주한테 허락을 받은 후, 그녀의 개인 정보를 주강운한테 알려줬다."차미주?"주강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친구분이랑 성씨가 같네요?"유현진은 영혼 없이 웃으면서 대답했다."네."주강운은 따듯하게 웃으며 말했다."두 분이 참 인연 있네요."유현진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이따가 다른 할 일이 있어요?"주강운은 머리를 들면서 물었다."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요?""아니요."주강운은 실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그저 제가 밥이라도 살까 싶어서요."사실 유현진은 빨리 일을 해결하고 주강운과 헤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주강운이 먼저 밥을 사겠다고 말을 꺼낸 이상 그녀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좋아요, 하지만 밥은 제가 살래요. 강운 씨 오늘 아침 내내 저때문에 바빴고, 또 지난번에도 도움을 줬는데 감사의 뜻으로 밥을 살 때도 됐죠."주강운은 사양하지 않고 웃으면서 물었다."그럼 뭘 먹으러 갈까요?""그건 당연히 밥을 사주는 사람이 맞춰야죠, 저는 음식을 가리지 않으니까 뭘 먹어도 괜찮아요."주강운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그럼 한주 음식을 먹으러 갈까요?""좋아요."주강운은 자기주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이는 그의 직업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유현진이 식당 고르기를 포기하자 그는 신속하게 새로운 계획안을 제정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했다.카페에서 나온 두 사람은 걸어서 이동을 했다.주강운이 선택한 식당은 길 건너편의 대학로 부근에 있었다.대학로는 주차가 어려운 관계로 두 사람은 걸어
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러자 주강운은 이렇게 물었다."혹시 T대생이에요?"유현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이 부근에만 해도 대학이 6개나 있는데 왜 T대라고 생각했어요?""저희가 카페에서 만났을 때, 제가 패드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던 게 기억나나요?"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게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주강운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저는 더빙 작품들을 보고 있었어요, 더빙 테크닉이 아주 훌륭한 것으로 봐서 더빙을 전문적으로 배웠겠다 싶었죠. 그리고 이 부근에서 더빙을 배워주는 곳은 T대 예술대학밖에 없어요."유현진은 얼굴이 빨개졌다.스크린을 사이 두고 칭찬을 받는 것은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면전에 대고 직접 칭찬을 받자 약간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제 추측이 맞나요?"주강운은 웃으면서 물었다.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진짜 대단하네요. 그나저나 대학로에 있는 식당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혹시 강운 씨도 대학로에서 대학을 다녔어요?"주강운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한 가지 추측이 떠오른 유현진은 이렇게 떠보듯이 물었다."설마 강운 씨도 T대 출신이에요?"주강운은 피식 웃으면서 유현진한테 악수를 청했다."저는 T대 법대 11학번 주강운이에요."'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유현진은 반박자 느리게 악수를 받아줬다."... 선배님, 안녕하세요."유현진의 호칭을 들은 주강운은 웃으면서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이름으로 불러줘요."오후의 햇빛은 아주 뜨거웠다, 그 뜨거운 햇빛은 마침 식당 입구에서 줄을 서고 있는 유현진한테 비쳤다. 덕분에 유현진의 하얀 피부는 약간 발그레 해졌고 코끝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주강운은 잠깐 생각하다가 유현진이 손을 놓으려는 찰나 그녀를 힘껏 끌어당겨 자신과 자리를 바꿨다.주강운이 몸으로 만든 그늘을 유현진을 가리기에 딱 좋았다.넋이 나가버린 유현진과 달리 주강운은 자연
한성 그룹, 임원 회의실.부사장이 발표를 하고 있을 때, 강한서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자료들을 훑어봤다.이때 책상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문자가 왔다는 것만 확인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빨리 재미를 보고 싶었던 한성우는 강한서가 답장이 없는 것을 보고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그래서 그는 두 사람의 손이 잘 보이도록 사진을 확대해서 다시 강한서한테 보내줬다."네 와이프가 외간 남자랑 손을 잡았어."강한서는 마침내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클릭했다.사진을 멀리서 찍은 관계로 피사체의 이목구비가 약간 흐릿하기는 했지만 강한서는 옷만으로도 유현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와 손을 잡고 있는 남자는 길가에 있는 식물에 의해 얼굴이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한성우는 불이 제대로 타지 않을까 봐 계속 땔감을 넣으며 부추겼다."네 와이프는 새 애인이 생겨서 이혼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근데 저 새 애인 너무 수준 떨어지는 것 같아, 어떻게 여자를 데리고 구멍가게에 갈 수 있어? 네 와이프는 도대체 왜 저런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청순함 때문인가?"강한서는 한창 날뛰고 있는 들짐승을 무시하고 유현진한테 문자를 보냈다."너 어디야?"유현진은 주문을 하고 있다가 강한서의 문자를 봤다. 그녀는 휴대폰을 힐끔 보고는 바로 꺼버렸다.주문을 하고 나니 휴대폰에는 문자가 잔뜩 쌓여있었다."왜 답장 안 해?""문자 보면 답장 좀 해줘.""넌 눈이 멀었어?""유현진 너 일부러 내 문자를 씹는 거지!"유현진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예전에는 하루 종일 밖에 있어도 문자 한 통 보내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이상하리 만큼 말이 많아졌다.유현진이 다시 휴대폰을 끄려고 할 때, 강한서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이는 유현진이 어제 강한서한테 서명을 하게 한 재산 처리 동의 계약서였다.강한서가 계약서를 갖고 자신을 협박하는 것을 보고 유현진은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유현진은 바로 강한서한테 답장을
한성우는 차 유리를 내렸다, 그러자 교통경찰이 이렇게 말했다."차가 벤틀리네요."한성우 잠깐 멈칫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맞아요, 그건 왜요?"교통경찰은 그를 힐끔 보며 말했다."아무리 벤틀리라고 해도 여기서 주차하시면 안 돼요, 앞쪽으로 가주세요."한성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구경을 마저 하지도 못한 채 교통경찰한테 쫓겨나고 말았다.----"대학에서는 무슨 전공을 배웠어요?"주강운은 유현진한테 시원한 음료를 건네주며 물었다.유현진은 휴대폰을 끄고 머리를 들었다."저는 연극 영화과였어요."주강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는 당연히 더빙 전공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전공을 살려 일을 하지 않았어요?"다른 사람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유현진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그건 말하자면 좀 길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다시 말해줄게요."유현진이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깨달은 주강운은 웃으면서 말했다."좋아요.""그러고 보니 변호사 수임료는 많이 비싼가요?"유현진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유현진은 주강운과 몇 번 만나면서 그의 옷차림이 수수하고 크게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입고 있기는 하지만 손목시계와 넥타이 클립은 다 고가의 제품이었고 차도 2억이 넘는 모델을 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유현진은 연봉이 얼마나 되어야 이렇게 자유롭게 고급 브랜드를 살 수 있는지 궁금했다.주강운은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친구의 사무소에 다니고 있어서 수임료가 높지 않아요,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유현진은 멈칫하다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수임료는 받을 만큼 받으세요. 저는 그냥 단순히 변호사는 돈을 얼마나 버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값을 깎을 생각은 전혀 없어요."주강운은 웃으면서 말했다."변호사는 그래도 돈을 꽤 많이 버는 축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어떤 사건을 하는지에 따라 다르죠. 제 친구 중에 부자들의 이혼 소송을 주로 하는 애가 있어요. 재산분할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
안내원은 움찔 놀라더니, 내밀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얼른 거두어들였다.“강, 강 대표님...”유현진은 고개를 돌려보았다.강한서가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몰랐다. 마치 빚쟁이를 기다리듯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유현진은 그를 본 순간, 갑자기 움찔했고 생각에 잠겼다. 강한서가 설마 그녀를 볼 때마다 주머니에서 내놓아야 할 2000억을 떠올리고 그녀한테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그녀는 바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래 기다렸어?”강한서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오긴 오는 거였네!”유현진은 웃으며 대답했다.“원래는 30분 정도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옷 가지러 갔다가 신상들이 꽤 괜찮아 보이더라고, 너 주려고 셔츠 두 벌 사느라 조금 늦은 거야.”강한서는 가볍게 피식 웃었다.“이유는 그럴듯하구나.”말투는 조금 전보다 훨씬 다정해졌다. 이어서 그는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빨리 안 가고 뭐해?”유현진은 너그럽게 웃음 지으려 애를 썼다. 그녀는 그제야 안내원의 손에서 물건들을 건네받았고, 이어서 간식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방문안내원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사모님, 이건 제 일이니, 정말 괜찮습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일과 별개로 지난번에 촬영해 줬던 게 고마워서 드리는 겁니다.”방문안내원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그 일이 있은 뒤로, 매번 강한서가 안내 데스크를 지날 때마다, 그는 가시방석에 놓인 것 같이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최근 일주일은 무탈하게 지나가던 중이라, 그는 약간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결국 유현진이 찾아옴으로써 무탈한 시간은 종료되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는 강한서의 차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그만 좀 꾸물거려!”강한서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어휴, 또 트집을 잡는구나!’유현진은 간식을 건네고는 짐을 들고 강한서를 따라갔다.안내원은 간식을 들고 강한서가 떠나기 전 쳐다보
유현진은 눈을 찡긋했다.“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강 대표님께서 약속만 잘 지켜주면 돼! 한성 그룹을 손에 넣으면 약속대로 2000억 내어주고 이혼해 줘.”강한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차 한잔 타줘.”유현진은 새로 산 옷의 태그를 뜯느라 바빴다.“민 실장님 밖에 있잖아, 민 실장님한테 부탁해.”강한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2000억의 절반은 민 실장이랑 나눌 건가 봐?”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이쿠,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강 대표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그의 집무실에서 나온 유현진은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돈 몇 푼 가지고 감히 나를 도우미처럼 부려? 나중에 돈만 받으면 강한서 얼굴에 던질 거야. 무시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려줄 거야!’그의 집무실을 나간 뒤, 유현진은 바로 민경하를 마주쳤다. 민경하는 서류를 들고 잔걸음으로 빨리 걸어왔고 유현진한테 인사했다.유현진은 그를 불러 세우고 물었다.“민 실장님, 탕비실 어디예요?”“탕비실이요?”민경하는 흠칫 놀라더니 다시 물었다.“사모님 차 드시려고요?”“강한서 씨가 필요하대요, 근데 저는 탕비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요.”민경하는 일자로 입술을 꾹 닫고 생각에 잠겼다.‘비서실에 커피를 내리는 등 대표님의 일상생활을 돕는 비서가 따로 있는데, 게다가 집무실에 정수기도 있고... 대표님은 왜 사모님한테 직접 다녀오라고 시킨 걸까?’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했지만 더는 묻지 않고 유현진한테 탕비실 위치를 알려줬다.유현진이 떠난 후, 그는 발걸음을 대표님 집무실로 옮겼다.노크하고 들어가는 순간, 강한서는 휴대폰을 들고 소파 옆에 서서 쇼핑백에서 옷을 주섬주섬 꺼내고 있었다.그의 행동은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어색했다.“무슨 일이시죠?”강한서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진 않았고 그저 휴대폰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민경하는 담담하게 말했다.“대표님 장인 어르신... 유상수 대표님이 연현 테크에 투자를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