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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약초꾼

Autor: moominkiller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7-02 16:59:36

노파는 그녀의 소매를 잡지 않았다. 다만 스쳐 지나며,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흘렸다. "지혈초가 더 있으면 뒤꼍으로 오시게."

약재전 뒤꼍은 처마가 낮고 어두웠다. 마른 약초 두름이 발처럼 드리워, 골목의 눈들로부터 한 뼘의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운설이 들어서자 노파는 새끼줄로 약초 단을 묶으며,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낮에 자네가 판 지혈초, 볕에 말린 게 아니라 그늘에 말린 것이더군. 성한 의원에서 배운 손이야." 새끼줄이 매듭지어졌다. "방(榜)의 그림은 코가 글렀어. 허나 눈은 옳게 그렸데."

부인할 길을 그녀는 찾지 않았다. 이 뒤꼍에 불러들인 것부터가 이미 답이었다. 노파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늙은 눈이 그녀의 얼굴을 오래, 값을 매기는 법 없이 들여다보았다.

"세상이 재앙이라 부르는 것치고," 노파가 말했다. "아픈 데를 종일 눌러 주고 다니는 재앙은 내 평생 처음일세."

노파는 좌판 밑에서 낡은 봇짐 하나를 꺼내 왔다. 약초 두름과 마른 뿌리들이 삐죽 나온, 어느 산이든 어울릴 행상의 짐이었다. "약초꾼은 침통을 져도, 흰 낯을 해도, 산길을 밤에 타도 이상할 게 없지. 의녀는 못 감춰도 약초꾼은 감춰지네."

봇짐은 보기보다 무거웠다. 미숫가루 주머니와 부시, 기름 먹인 밀랍 초 두 자루가 약초 밑에 눌러 담겨 있었다. 하루 이틀에 꾸린 짐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 짐이 여기서 누군가를 기다렸는지, 노파의 세월 어디에 이런 짐을 꾸리게 된 사연이 있는지 — 물으면 안 되는 것들만 자꾸 늘어났다.

"어찌 나를 —" 운설은 말을 맺지 못했다.

"묻지 마시게. 나도 안 물을 테니." 노파가 봇짐을 그녀의 등에 지웠다. 지우고 나서, 끈을 고쳐 매 주며 지나가듯 덧붙였다. "그보다 급한 소문이 있네. 오늘 방을 바른 관원들이 주막에서 하는 말을 들었어. 맹이 토벌 수장을 세웠다더군."

봇짐 끈이 어깨를 조였다.

"젊은 검객이라데. 이름이 높아. 검신(劍神)이라고들 부른다지." 노파의 손이 매듭을 지었다. "선우현. 그 사람이 자네를 잡으러 북으로 온다네."

이상한 일이 몸에서 일어났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는데, 그 서늘함이 두려움의 온도와 달랐다. 눈 내리던 골목, 한 걸음 비켜서던 그림자. 북으로 가시오, 하던 낮은 목소리. 길을 열어 준 손이 이제 그 길의 끝을 막으러 온다. 세상은 어찌하여 하필 그 사람을 — 물음은 거기서 얼어붙었다. 답 대신, 골목의 눈발 속에 서 있던 그의 마지막 눈빛만이 떠올랐다. 그 눈빛의 뜻을 그녀는 아직 한 번도 풀지 못했다.

"아는 이름인가." 노파가 물었다.

"모르는 이름입니다." 절반은 참이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오늘 처음 들었다.

"모르는 이름에 낯빛이 그리 바뀌나." 노파는 더 캐지 않고 등을 돌렸다. "서문은 버리게. 방 붙은 날은 큰 문이 먼저 매워져. 북쪽 물문(水門)으로 가면 빨래터 아낙들이 드나드는 쪽문이 있네. 문지기가 눈이 어둡지."

운설은 허리 숙여 절했다. 노파는 받지 않고 약초 단만 뒤적였다. 그 굽은 등이, 어젯밤 잿불을 뒤적이던 농가 노파의 등과 겹쳐 보였다. 온정은 어디서나 등을 돌린 채로 왔다. 얼굴을 마주치면 서로가 위험해지는 세상의 온정이었다.

물문으로 가는 골목은 좁고 질척했다. 빨래 함지를 인 아낙들 틈에 섞여 모퉁이를 도는데 — 젖은 돌담 너머로 물문 곁 쪽문이 보였다.

쪽문 앞에 흰 무복 둘이 서 있었다.

문지기 대신이었다. 지나는 아낙마다 세워 놓고, 두건을 걷어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함지를 인 여인 하나가 막 두건을 벗는 참이었다. 줄은 짧았다. 그녀 앞에 셋. 돌아서면 등이 보이고, 나아가면 얼굴이 보였다.

운설은 줄 끝에 섰다.

줄이 줄어드는 동안 운설은 젖은 돌담의 이끼를 세었다. 함지의 물 듣는 소리, 언 빨래가 뻣뻣하게 부딪는 소리. 흰 무복의 손이 두건을 걷을 때마다 아낙들은 군말 없이 낯을 들었다. 익숙해진 수모는 수모의 얼굴을 벗는다. 며칠 사이 이 마을이 겪은 일들이 그 무덤덤한 낯들에 적혀 있었다.

셋이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었다.

앞의 여인이 함지를 내리고 두건에 손을 올렸다.

다음은 그녀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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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50. 설야(雪夜)

    대전은 비어 있었다.도열한 무사도, 시립한 시녀도 없었다. 화로 여남은 개가 굴 벽을 따라 낮게 타며 바위 결에 붉은 그늘을 던질 뿐, 산의 심장을 파 낸 넓은 어둠 속에 사람의 기척은 상석 쪽 하나뿐이었다. 독대였다. 백 사람의 눈을 거느린 이가 단둘의 자리를 골랐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운설은 문턱을 넘으며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생각으로 건널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화로 빛이 비추는 것들을 보았다. 굴 벽에 걸린 낡은 활 한 자루와 부러진 창 하나. 그 아래 돌 선반에 나란히 놓인 흰 사기 위패들 — 글자 없는 위패가 수십이었다. 잿마을 사당의 빈 단이 떠올랐다. 거두어 간 이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이름을 아는 이는 이름을 부르며 모셨고, 모르는 이는 빈 위패로 모셨을 것이다. 이 대전은 알현의 자리이기 전에 제(祭)의 자리였다.상석은 어둠에 잠겨 윤곽뿐이었다. 높은 등받이의 돌 좌(座), 그 위에 앉은 사람의 형체. 화로 빛이 미치는 곳까지 걸어가 운설은 멈추어 섰다. 절은 하지 않았다. 눈도 내리지 않았다. 어둠 속의 형체가 그런 그녀를 오래, 아주 오래 바라보았다.그리고 어둠 속에서 소리가 났다.가늘고 낮은, 세 음이 오르내리는 가락. 뼈피리였다. 사백의 것보다 낡고 깊은 소리가 굴의 어둠을 천천히 채웠다. 삭월의 아이들이 업혀서 듣던 가락. 몸이 먼저 기억하는 가락. 운설의 안에서 강이 그 가락을 따라 순하게 일렁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그녀는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가락이 그쳤다."그 가락에 우는 것을 보니,"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왔다. 낮고, 갈라진 데 없이 매끄럽고, 어딘가 운설 제 목소리를 닮은 목소리였다. "피는 속일 수가 없구나."형체가 일어섰다.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돌바닥을 쓸며 다가왔다. 화로 빛 속으로 먼저 들어온 것은 옷이었다. 먹빛 바탕에 핏빛 실로 이지러진 달을 수놓은 긴 옷. 그다음이 손이었다. 뼈피리를 쥔 손등에 가늘고 오랜 흉 하나가 달빛처럼

  • 설야팔부 (雪夜八部)   49. 전야

    이튿날 아침의 두 사람은 서툴렀다.회랑에서 마주치자 그는 반 박자 늦게 목례를 했고, 그녀는 반 박자 빠르게 눈을 내렸다. 스무날을 나란히 걸어온 사이에 새삼스러운 인사였다. 어젯밤의 못가가 두 사람 사이에 그대로 있었다. 치우지도 못하고 들여놓지도 못한 채, 눈처럼 쌓여 있었다.어젯밤, 못가에서 돌아온 뒤의 일을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처소에 누워 그녀는 제 안의 고요에 오래 귀를 대고 있었다. 강이 멎어 있던 그 완전한 침묵. 그의 팔이 풀리고 반 시진쯤 지나자 물소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왔지만, 한 번 들은 고요는 지워지지 않았다. 노인이 준 힘이고 삭월의 피가 기른 힘인데, 그 힘이 멎는 자리가 하필 선우가의 팔 안이라는 것 —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했다. 다만 위험한 이름이 되리라는 예감만 있었다."감추라 했더니." 지나치던 사백이 혀를 찼다. "궁 안의 눈이 백이 넘는다. 어제 노천에 든 것이 너희 둘뿐이었을 것 같으냐."운설의 걸음이 멎었다."본 자는 없다. 봤으면 내 귀에 먼저 왔지." 사백은 앞을 본 채 말을 이었다. "한데 볼 것도 없어. 오늘 아침 너희 낯이 방(榜)이다. 마님 앞에서는 그 방을 찢어라. 사흘째 밤이 내일로 당겨졌다. 마님께서 — 오늘 밤 초승이 뜨면 보자 하신다."오늘 밤. 준비할 사이도 없이 하루가 접혔다.저녁부터 유민 여인들이 처소로 들었다. 더운 물과 향유와, 그리고 옷이 들어왔다. 눈빛 바탕에 먹색 선을 두른 삭월의 예복이었다. 십팔 년 묵은 옷이라 했다. 달무리 부인의 것은 아니고, 그 아래 항렬 여인의 것이라 했는데, 그 말을 하는 늙은 여인의 눈이 젖어 있어서 운설은 더 묻지 않았다.여인들의 손이 그녀를 빚어 갔다. 머리가 빗기고, 기름이 발리고, 옷고름이 여며졌다. 벽감의 나전 빗이 그녀의 머리를 지나갈 때, 등 뒤에서 늙은 시녀가 소리 죽여 울었다. 부인께서 쓰시던 빗이라고, 우는 대신 누군가 말해 주었다.향유 냄새 사이로 문득 마른 약초 냄

  • 설야팔부 (雪夜八部)   48. 더운 물

    말 없는 늙은 시녀가 이튿날 저녁 그녀를 데려간 곳은, 바위 굴 깊숙이 숨은 탕이었다.굴 안쪽에서 더운 물이 솟아 돌로 짠 탕을 채우고, 넘친 물은 물길을 따라 굴 밖 노천의 작은 못으로 흘러 나갔다. 등잔 두 개가 물낯에 흔들렸다. 왕족 여인들의 탕이라 했다. 십팔 년 동안 물만 홀로 솟고 흘렀을 자리였다.옷을 벗으며 운설은 제 몸을 보았다.거울 없이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갈라진 손끝, 물레방아의 밤이 남긴 발가락의 검붉은 자국, 활대처럼 여윈 허리. 스무 날 넘는 눈길이 몸에 적어 놓은 글이었다. 의녀의 눈은 그것을 읽고, 여인의 눈은 그 글이 부끄러웠다. 두 눈이 한 몸에 사는 것이 새삼 낯설었다.물에 잠기는 순간, 몸이 낮게 소리를 냈다.뼈까지 스몄던 겨울이 물속에서 풀려나가는 소리였다. 발끝에서 무릎으로, 허리로, 굳은 것들이 마디마디 녹았다. 머리를 풀자 검은 머리카락이 물 위에 부챗살로 펴졌다. 김이 등잔 빛을 안고 굴 천장으로 올랐다. 몸속의 강이 더운 물에 화답하듯 순하게 뒤척였다. 물이 물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이 물에 어머니도 잠겼을 것이다.이 돌턱에 팔을 얹고, 이 김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배가 불렀을 때는 조심스럽게 들어와 아이에게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저인지 언니 쪽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운설은 어머니가 보았을 굴 천장을 오래 올려다보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물속에서는 눈물도 물이 되는 모양이었다.탕에서 여인의 눈과 의녀의 눈이 다투는 동안 미뤄 두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몸을 씻고 나면 사람은 제 몸과 화해하게 된다. 화해한 몸은 정직해진다. 눈길 스무 날 동안 접어 두었던 것들이 물속에서 하나씩 펴지는 것을 그녀는 느꼈고, 그중 어떤 것은 펴진 채로 접히지 않았다.몸을 덥히고 나오는 길에, 눈을 쐬고 싶어졌다.노천의 못가는 비어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김 오르는 물낯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으며 지워지는 것을, 그녀는 홑옷에 겉옷 하나를 걸친 채 서서 바라보았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듣

  • 설야팔부 (雪夜八部)   47. 안뜰

    겨울 궁의 문은 두 사람을 따로 삼켰다.선우현은 창을 든 여섯에 둘러싸여 대전 쪽 돌계단으로 올라갔고, 운설은 사백을 따라 옆문으로 들었다. 헤어지며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그녀를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 등이 계단 위 어둠에 잠기는 것을 그녀는 끝까지 지켜보았다."걱정은 넣어 두어라." 사백이 말했다. "마님은 값을 매기기 전에는 물건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물건.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백도 알면서 하는 말이었다.궁은 성이라기보다 산 자체였다. 바깥에서 본 문루와 성벽은 얼굴일 뿐, 몸은 바위산 속으로 뻗어 있었다. 회랑이 굴이 되고 굴이 다시 마당이 되는 길을 사백은 등불도 없이 걸었다. 더운 물이 벽 속 어딘가를 흐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산이 통째로 숨을 쉬는 소리 같았다. 십팔 년 전 그 밤, 이 산까지는 토벌대가 닿지 못했다고 사백이 말했다. 길을 아는 자도 여기까지는 몰랐다고. 그 말끝이 잠깐 어두워졌다.안뜰은 뜻밖에 사람의 온기로 붐볐다. 바위를 파고 지은 회랑마다 등불이 켜지고, 더운 물이 도는 돌바닥에서 김이 올랐다. 아이들이 뛰다가 멈춰 서서 그녀를 보았다. 물동이를 인 여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늙은이들이 문가로 나왔다. 백여 개의 눈이 그녀를 따라왔다.절반은 절을 했다. 무릎을 꿇는 이도 있었다. 달무리 부인의 낯을 아는 늙은 눈들이 그녀의 낯에서 죽은 이를 찾아내고 젖었다. 늙은 여인 하나는 그녀의 소맷자락을 두 손으로 받들고 이마를 대었다. 무어라 말릴 새도 없는 일이었다. 받들어지는 일은 쫓기는 일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무겁게 했다.절반은 절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소문 속의 요녀와 그 곁에 왔다는 선우가의 핏줄을 셈하는 눈들. 그 눈들 중 하나가 지나가며 낮게 뱉은 말을 운설은 들었다. 늦게도 왔군. 다 죽고 나서야.늦게도 왔군. 처소에 들어 문이 닫힌 뒤에도 그 말은 벽에 남아 있었다. 열여덟 해를 어디서 무엇으로 살았는지 이 사람들은 모르고, 알

  • 설야팔부 (雪夜八部)   46. 아침

    파내는 소리로 아침이 왔다.눈벽 너머에서 삽과 손 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운설은 밤새 갈아 댄 찬 수건을 그의 이마에서 거두었다. 열은 새벽 고비를 넘겼다. 눈을 뜬 그는 제가 어젯밤 무슨 말을 흘렸는지 모르는 낯이었고, 그녀는 굳이 알려 주지 않았다. 그 방에는, 아무도 — 끊긴 말은 그녀의 안에 접어 두었다. 열이 지어낸 헛것일 수도 있었다. 헛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눈벽이 뚫리고 아침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맨 먼저 들어온 것은 사백의 얼굴이었다. 매의 눈이 굴 안을 한 바퀴 돌았다. 타다 남은 초, 널린 옷가지, 꿰맨 어깨, 한 뼘 사이로 나란히 앉은 두 사람. 눈으로 셈을 끝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 운설부터 끌어올렸다."포로라 했지." 눈 위로 올라선 뒤에야 사백이 말했다. 그녀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묶은 줄이 꽤 튼튼하더구나."운설은 대꾸할 말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볼이 붉어지지 않는 낯이 평생 처음으로 아쉽지 않았다.부대의 셈은 다행히 가볍지 않게 끝났다. 말 셋을 잃고, 기수 둘이 뼈를 다쳤으나 목숨은 다 붙어 있었다. 강이 눈을 가른 자리 덕에 매몰이 얕았다고 했다. 기수들이 그녀를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두려움 반, 다른 것 반. 뼈피리 가락에 울던 여자가 눈 벌판을 갈랐다. 겨울 궁에 닿기 전에 이야기가 먼저 닿을 것이었다.사백은 두 기수를 데리고 벼랑 위를 살피고 내려왔다. 손에 검게 탄 헝겊과 끊어진 노끈, 그리고 쇠 부스러기를 들고 있었다."화뢰(火雷)다." 여자가 그것들을 운설의 손바닥에 부렸다. "눈시렁 밑동에 묻고 심지를 태웠어. 두 군데. 눈이 저절로 내려온 게 아니라 내려앉힌 거다.""맹의 것입니까.""맹의 화뢰에는 낙인이 있다. 이건 민짜야." 사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맹이 낙인을 지웠거나, 맹이 아니거나. 어느 쪽이든 — 협곡에 우리가 드는 날과 시각을 안 자다."또 새는 곳. 나루에 이어 두 번째였다. 운설은 쇠 부스러기를 쥐었다. 누군가 그물을 짜고 있었다. 맹의 그물도

  • 설야팔부 (雪夜八部)   45. 눈굴

    강이 갈라 놓은 눈의 틈은 사람 둘이 들 만한 굴이 되어 있었다. 운설은 그 안으로 그를 끌어들이고, 무너진 눈으로 입구를 반쯤 막아 바람을 죽였다. 밖은 이미 저물어, 협곡 어딘가에서 기수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가 눈벽 너머 아득하게 오갔다. 목청껏 답해 보았으나 눈은 소리를 먹었다. 구조는 아침의 일이 될 것이었다.봇짐에서 밀랍 초가 나왔다. 약재상 노파가 눌러 담아 준 두 자루 중 하나였다. 부시를 치자 좁은 눈굴에 노란 불이 앉았다. 눈벽이 그 빛을 되쏘아, 굴 안은 뜻밖에 환했다."옷을 벗어야겠습니다." 운설이 말했다.반쯤 의식이 돌아온 그가 눈을 떴다."등의 상처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젖은 옷은 이 추위에 수의(壽衣)입니다." 그녀는 의녀의 목소리를 꺼내 썼다. 꺼내 쓴다고 꺼내지는 목소리가, 오늘은 어딘가 삐걱거렸다. "돌아누우세요."그는 잠깐 그녀를 보다가, 순순히 몸을 돌렸다. "……환자요." 낮게 그 한마디를 하면서였다. 언젠가 환자가 아니라고 두 번 우기던 사람의 항복이, 하필 이런 데서 나왔다.찢긴 옷을 어깨에서 걷어 내렸다.촛불 아래 등이 드러났다. 낙석에 맞은 왼 어깻죽지가 검붉게 부어오르고, 그 아래로 손바닥 길이의 열상이 벌어져 있었다. 운설은 상처부터 보았다. 상처를 보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그런데 상처를 다 보고 난 눈이, 일 없이 그 곁의 것들에 가 닿았다.흉터들이었다. 어깨에서 허리까지, 오래된 흉이 저마다의 세월을 지고 흩어져 있었다. 살이 아문 결을 보면 상처의 나이를 알 수 있다. 열둘이나 열셋의 것, 스물의 것, 작년의 것. 검신이라 불리기까지의 세월이 등 하나에 지도처럼 그려져 있었다. 함부로 산 몸이 아니라, 함부로 살도록 내몰린 몸이었다.손끝이 지혈초를 개다가 한 번 떨렸다.수없이 본 남자의 등이었다. 의원에서, 장터에서, 뼈를 맞추고 고름을 짜며 본 등이 백이 넘었다. 떨린 적은 없었다. 살은 살이고 상처는 상처였다. 그런데 지금 이 등 앞에서 침을 쥔 손이 낯선 박자를 탔다. 살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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