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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풍문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2 17:01:07

흰 무복의 손이 두건 자락을 걷었다.

등불이 얼굴에 닿았다. 운설은 눈을 내리깐 채 견뎠다. 볼이 화끈거렸다. 골목을 돌기 전, 봇짐 속 마른 잇꽃을 침으로 개어 볼과 콧등에 문질러 두었다. 연지의 원료가 되는 꽃이었다. 의녀의 손은 화장을 배운 적 없으나 약초의 성질은 알았다. 추위에도 붉어지지 않는 낯 — 방이 적어 놓은 그 한 줄을, 꽃물 한 겹이 지우고 있었다.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필요한 것보다 오래였다. 값을 매기는 눈길과 다른,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듯한 머묾이었다. 운설은 저자에서 배운 대로 낯을 무덤덤하게 두었다. 함지 인 아낙들의 얼굴. 익숙해진 수모의 얼굴.

"약초꾼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눈 그치기 전에 재를 넘어야 합니다."

곁의 무사가 봇짐을 창끝으로 헤집었다. 마른 당귀 냄새가 눈발 속에 퍼졌다. "약초다." 그가 말했다. "낯이 붉잖나. 방의 계집은 흰 낯이라 했다." 두건을 쥔 손이 미적지근하게 풀렸다. 눈보라가 등불을 흔들었고, 저녁은 짧았고, 줄 뒤에는 아직 아낙이 여럿이었다.

"가라."

쪽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운설은 이십 걸음을 걷고 나서야 숨을 바꿔 쉬었다. 마을의 불빛이 눈발에 뭉개질 즈음, 볼의 꽃물을 눈으로 씻어 냈다. 언 뺨이 다시 희어졌다. 제 낯을 지우고 남의 낯을 그려야 지나갈 수 있는 문. 그런 문이 앞으로 몇이나 남았는지 그녀는 세지 않기로 했다.

그날 밤은 재 너머 주막 헛간에서 났다. 봇짐을 진 몸은 봉놋방 대신 헛간 검불 위가 편했다. 헛간은 소와 나귀의 온기로 미지근했다. 나귀가 낯선 사람 냄새에 두어 번 코를 불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짐승은 방을 읽지 못한다. 값을 매기지 않는 눈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등이 조금 풀렸다.

벽 하나 너머 봉놋방에서 보부상들의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장사치의 밤은 소문으로 길었다. 어느 관문이 매워졌는지, 어느 다리가 끊겼는지 — 그리고.

"청하 운씨 말인데."

검불을 여미던 손이 멎었다.

"가주가 갇혔다더군. 제 집에, 제 식솔들 손으로." 목소리가 국물을 훌쩍였다. "맹이 문죄를 미루고 있다데. 폐문이다, 삭탈이다 말은 많은데 목은 아직 붙였다더군."

"열여덟 해를 재앙의 씨를 품었으니 살아도 산 게 아니지."

"한데 이상한 말이 돌아. 맹이 가주의 목숨을 저울에 얹어 놓고 값을 부른다는 거야." 목소리가 낮아졌다. 운설은 벽에 귀를 대었다. "그 값이 — 딸이라데. 계집이 제 발로 맹 앞에 서면 가주는 살려 준다고. 방방곡곡 방을 붙인 것도 그래서라더군. 쉰 냥은 미끼고, 진짜 그물은 그 계집의 효심이라는 게지."

"모진 셈이군." 누군가 혀를 찼다. "한데 그 계집이 그 소문을 들으면 어쩌누."

"어쩌긴. 오면 잡고, 안 오면 가주 목으로 본을 보이고. 맹은 어느 쪽이든 밑지지 않는 장사지."

말소리는 이내 딴 고을의 곡가로 흘러갔다. 소문은 장사치들에게 안주 한 접시였다. 씹고, 삼키고, 다음 접시로 넘어가는.

운설은 어둠 속에 오래 앉아 있었다. 살아 있다. 그 세 글자가 먼저 왔다. 목은 아직 붙였다더군 — 밥이 넘어가듯 그 말이 넘어갔고, 그다음에 나머지가 왔다. 저울. 값. 효심이라는 그물. 아버지의 목숨과 그녀의 발걸음이 한 저울에 얹혀, 그녀가 북으로 한 걸음 갈 때마다 반대편 접시가 기우는 셈법.

효심이라는 그물. 그 말이 제일 오래 남았다. 맹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얼굴도 코도 입도 몰랐다. 그런데 그 마음 하나는 알았다. 열여덟 해 길러 준 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것이 사람을 어느 문 앞까지 끌고 가는지. 칼로 못 잡는 것을 정으로 잡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것을 그물코로 쓰는 사냥이었다.

소문이었다. 장사치의 안주였다. 참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고, 알 길이 없다는 것이 이 셈법의 가장 모진 대목이었다.

아버지는 갇힌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화로 앞에 앉아 있을까. 검은 거두어졌을까. 가라, 하던 목소리는 딸이 어디쯤 갔으리라 짐작하고 있을까. 물음은 벽 하나 너머의 소문보다 멀리 있었고, 닿을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헛간 틈으로 눈발이 들이쳤다. 검불 위에 웅크린 그녀의 손이, 소매 속 신패를 쥔 채 밤새 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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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은 마른 약초부터 먹었다.월계단 아래 연기가 차오르자 운설은 하진 들것부터 밖으로 밀었다. 야란이 명부를 향해 돌아서자 운설이 팔을 잡았다.“몸부터 나가요.”“저 이름이 또 타면 묵할멈과 저만 기억합니다.”“사본이 있어요.”“사본에 없는 몸이 아래 있어요.”야란은 지하 약방 북쪽 벽을 가리켰다. 하진이 나온 우물 말고도 아이들이 옮겨진 배수로가 있었다.묵할멈이 젖은 천을 머리에 쓰고 불 속으로 들어갔다. 야란도 뒤따랐다. 운설은 막는 대신 두 사람 허리에 밧줄을 묶었다. 선우현과 사백이 밖에서 줄을 잡았다.혈비도 줄을 잡겠다고 했다. 야란이 허락할 때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안에서 밧줄이 한 번 울리자 운설이 물었다.“세 번째 자리에 언니 손을 보태도 됩니까?”두 번 당기는 답이 왔다. 혈비는 선우현 뒤에서 줄을 잡았다. 예전처럼 맨 앞을 차지하지 않고도 사람을 끌어낼 힘을 보탰다.“세 번 당기면 나옵니다.” 운설이 말했다.야란이 고개를 저었다.“세 번은 더 들어오라는 뜻으로 하죠. 나올 때는 제가 이름을 부르겠습니다.”이번에는 구조받는 사람이 신호를 정했다.지하 약방 안에서 묵할멈은 왕가 명부를 물통에 던졌다. 종이는 젖었지만 불길은 피했다. 야란은 북쪽 벽에 매달린 아홉 쇠패를 떼었다. 각 패 뒤에 약이 끝난 뒤 몸을 옮긴 곳이 새겨져 있었다.연기 속에서 늙은 사내가 나타났다. 우물 간수 복장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불붙은 횃불이 들려 있었다.묵할멈이 그를 알아봤다. 왕가가 무너진 뒤에도 겨울 궁 지하를 떠나지 않은 간수 마도였다. 하진의 쇠사슬을 당겨 맥을 확인한 사람도 그였다.야란이 물었다.“왜 살려 두었습니까?”“문을 열 명이 돌아올까 봐.”“왜 직접 열지 않았지요?”“나는 명이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마도는 횃불을 내려다봤다. 이번에도 황실 장수의 명을 받고 원본을 태우러 왔다. 평생 반대되는 명을 기다리며 자기 손을 남의 것으로 살았다.“지금은 누가 명했습니까?”“황실이.”“따를 겁니까?”마도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37화 — 열린 성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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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36화 — 혈비의 이름

    네 성문이 열린 뒤에도 혈비는 빈 문서 앞에 앉아 있었다.황실이 내민 종이에는 왕명을 찍을 자리만 남았다. 그녀는 붓을 들어 맨 위의 삭월왕 세 글자를 지웠다.대신들이 숨을 삼켰다.“무엇을 쓰시려는 겁니까?”“내가 한 일.”혈비는 첫 줄에 효월을 썼다. 왕호도 성도 없는 어린 이름이었다. 여덟 살에 야란을 고르고 하진을 두고 온 일, 기억을 잃었다는 말로 월계단을 열지 않은 일, 왕이 된 뒤 묵할멈 침묵을 충성으로 받은 일을 차례로 적었다.사백은 여덟 살 선택까지 죄로 적지 말라고 했다. 소맥의 아비는 반대로 아이였다는 말을 함께 쓰면 변명이 된다고 했다. 혈비는 둘의 말을 한 줄씩 여백에 붙였다.“어느 쪽이 맞는지 제가 정해야 합니까?” 성문을 연 궁녀가 물었다.“아니다. 내가 한 일과 그대들이 본 것을 함께 남겨라.”혈비의 고백은 깨끗한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죄라 부르는 사람과 강요받은 선택이라 부르는 사람의 글이 같은 종이 가장자리에서 부딪쳤다.“전하, 이 문서는 황실이 가져갑니다.”“그러니 더 적어야지.”“개인의 허물과 나라의 죄를 섞으시면 안 됩니다.”혈비가 붓을 멈췄다.“그 말로 왕들은 언제나 자기 손을 나라 뒤에 숨겼다.”그녀는 삭월왕이 된 뒤 우물 기록을 찾지 않은 일을 더했다. 무너진 나라를 세우느라 몰랐다는 까닭도 함께 적되 변명으로 앞세우지 않았다. 자기 선택과 알 수 없던 일을 다른 줄에 놓았다.하진은 두 걸음 밖에서 그 글을 지켜봤다. 야란 손바닥에 내 이름을 왕의 죄 아래에 쓰지 말라고 썼다. 혈비는 하진 이름을 지우고 빈칸을 남겼다. 당한 사람이 원할 때 자기 줄을 붙일 자리였다.황실 사자가 재촉했다.“수결 시각이 지났소. 왕인을 찍지 않으면 제안은 거둔다.”“거둬라.”혈비가 왕인을 집었다. 대신들이 막아서자 사백이 길을 열었다. 활 없이 두 팔만 벌리고 왕과 신하 사이에 섰다.“저분은 왕좌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이 외쳤다. “나라를 버리려는 것이다!”혈비는 망치를 들었다.“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35화 — 한 치를 돌려주는 사람

    성문 안쪽 빗장을 뽑은 것은 수레꾼들이었다.밤새 서쪽 길을 달려온 공동 소금길 수레가 문 앞에 늘어서 있었다. 설로상단 깃발은 없었다. 흑마장, 약재 창고, 길 식솔 모임의 작은 표식들이 수레마다 따로 걸렸다.연도하가 맨 앞 수레에서 내렸다. 왼손에는 장부, 불편한 오른손에는 고삐 한 줄만 들려 있었다. 하란주가 검은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봤다.“저 사람에게 지휘를 맡긴 적 없습니다.”문지기가 물었다.“그럼 누가 수레를 움직입니까?”“각 수레 주인이요.”연도하는 겨울 궁까지 오는 길과 황실군 빈틈을 설명했을 뿐, 어느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지 않았다. 수레꾼들은 네 성문 앞에서 스스로 멈췄다.황실 장수가 성 밖에서 소리쳤다.“군량을 들이면 반역에 가담한 것으로 친다!”첫 수레의 늙은 마부가 소금자루를 열었다.“팔러 왔소.”“누구 허락으로?”“내 물건 파는 데 누구 허락이 필요하오?”수레에는 군량만 있지 않았다. 왕가 명부 사본과 황실 열여덟 이름이 소금자루 사이에 들어 있었다. 한 대를 붙잡으면 다른 문으로 세 대가 움직였다.혈비가 연도하를 왕좌 앞으로 부르려 했다. 그는 가지 않았다.“길 식솔들과 계산부터 끝내야 하오.”“왕명이면?”“그 말로 부르면 문밖에 있겠소.”혈비는 왕명을 거두고 장터 빈 상으로 내려왔다. 왕과 전 상단주가 사람들 사이에서 같은 장부를 들여다봤다.연도하는 성 안 창고 열쇠를 요구하지 않았다. 수레 주인들이 어느 집에 얼마를 내릴지 정하게 했다. 황실군에 가족이 징집된 사람에게도 곡식을 팔았다. 적군 가족이라는 까닭으로 굶기면 열린 성의 뜻이 첫날부터 거짓이 될 터였다.운설은 장터에서 그를 만났다. 연도하의 얼굴은 사흘 잠을 못 잔 사람처럼 거칠었다.“왔네요.”“내 길이 여기까지 닿았소.”“당신 길이요?”“벌써 틀렸군. 내가 함께 낸 길.”그가 웃었다. 오래전이면 운설이 웃어 준 한 번을 마음의 빚으로 적었을 사람이었다. 이제는 웃음이 지나가도록 두었다.“그대에게 남겨 달라던 한 치를 기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34화 — 닫히기 전의 밤

    닫힌 문 너머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밤새 갈라졌다.운설은 그 문밖에서 돌아섰다.문 안에서는 대신들과 우물 유족이 밤새 다투고 있었다. 자신이 들어가 어느 한쪽 손을 잡으면 혈비가 그 온기를 답으로 삼을 것 같았다.선우현은 빈 겨울 처소에서 창문을 막고 있었다. 찬바람이 종이를 들썩일 때마다 못 대신 부러진 화살대를 끼웠다.“언니한테 안 갔어요.”“보았다.”“잘한 건지 모르겠어요.”“나도 모른다.”운설은 그의 등 뒤로 다가가 허리를 안았다. 선우현의 손이 창틀에서 멎었다.“도망가고 싶어요.”“나도 그렇다.”“같이 갈까요?”선우현은 뒤돌아 그녀 얼굴을 보았다.“지금 나가면 새벽 전에 산길에 닿을 수 있어.”운설은 그가 말뿐인 위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원하면 함께 갈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오래 망설였다.“단이 있는 집까지?”“그보다 멀리도.”“그리고 언니 소식은 평생 묻지 않고?”“네가 할 수 있다면.”운설이 이마를 그의 가슴에 댔다.“못 해요.”“나도 네가 못 할 줄 알았다.”“그런데 왜 끝까지 물어봐요?”“네가 남는 일이 내 명령이 되지 않게.”“당신이 가자고 했으면 잠깐은 원망했을 거예요.”“평생은?”“아마 따라가 놓고 매년 겨울마다 언니 탓을 했겠죠.”“그러면 나는 그 탓까지 들었을 거다.”“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마요.”“아무렇지 않지 않아.”선우현은 운설의 손을 자기 목에 댔다. 긴장할 때마다 굳는 맥이 손가락 아래에서 뛰었다. 그 역시 도망치자는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운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내일 성문이 닫히거나 황실 화살이 날아들 수 있었다. 마지막 밤처럼 굴지 않기로 했지만, 살아 있는 지금을 아껴 두고 싶지도 않았다.“오늘도 물어봐요.”“나와 함께 있겠느냐.”“오늘은 끝까지.”운설이 입맞춤으로 답했다. 선우현은 한 번 받아들인 뒤 그녀 뒷목을 감싸 더 깊이 끌어당겼다. 추위에 굳은 입술이 금세 뜨거워졌다.“하아…….”숨을 빼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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