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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먹빛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2 16:59:22

달아나면 안 된다.

풀비가 종이를 다 바르기도 전에, 운설의 몸이 먼저 그 이치를 알았다. 파장하는 장터에서 등을 보이며 뛰는 자는, 방에 무엇이 적혔든 방이 가리키는 사람이 된다. 그녀는 침통을 개키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 땀 한 땀, 어제와 같은 속도로 은침을 닦아 꽂았다. 손끝의 일에 마음을 묶어 두는 것 — 그것이 그녀가 아는 유일한 부동심이었다.

사람들이 방 아래로 모여들었다. 글을 아는 목소리 하나가 이윽고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북막 삭월부의 남은 핏줄로서, 강호에 재앙을 끼칠 씨인 바 —"

장터의 소음이 한 겹 걷혔다. 국밥 김 너머로, 지게 너머로, 사람들의 귀가 일제히 그 목소리를 향해 열렸다.

"— 나이는 열여덟. 낯이 심히 희어 추위에도 붉어지지 아니하고, 머리는 옻같이 검다. 의술에 능하여 침과 약초로 행세할 것인즉 —"

닦던 침이 손끝에서 잠깐 멎었다.

의술로 행세할 것인즉. 그 한 줄이 그녀의 하루를 통째로 뒤집어 놓았다. 해 질 녘까지 이 나무 그늘에서 침을 놓은 손님이 몇이었나. 얼굴을 보인 눈이 몇이었나. 방은 종이 한 장으로 그녀의 밥벌이와 그녀의 이름을 한 줄에 묶어 버렸다. 살기 위해 하는 일이 그대로 그녀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도록.

읽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이지러진 달을 새긴 쇠 패를 지녔을 것이니, 패를 함께 거두는 자는 상을 배로 하리라."

소매 속에서 신패가 문득 무거워졌다. 쇠붙이가 무게를 바꿀 리 없으니, 무거워진 것은 그것을 감춘 팔이었다. 배로 하리라. 맹이 원하는 것이 사람인지 패인지, 그 한 줄이 스스로 답하고 있었다.

"— 산 채로 맹에 넘기는 자에게는 황금 쉰 냥을 상으로 내린다."

쉰 냥, 하고 누군가 낮게 되뇌었다. 그 두 글자가 장터를 지나가는 소리를 운설은 들었다. 쉰 냥이면 소가 몇 마리인가, 밭이 몇 마지기인가. 저녁거리를 사 들고 섰던 손들이 저마다의 셈을 시작하는 소리. 사람의 눈빛이 값을 매기는 눈빛으로 바뀌는 데는 숨 한 번이면 족했다.

그리고 얼굴이 있었다.

방 한가운데, 먹으로 그린 여인의 얼굴. 운설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곁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화공은 그녀를 본 적이 없을 것이었다. 코도 입도 남의 것이었다. 그런데 눈이 — 눈만은 이상하게 닮아 있었다. 물러서지 않는 눈. 누구에게 들어 그렸는지, 먹빛 눈동자가 종이 밖의 그녀를 똑바로 건너다보고 있었다. 낯선 얼굴에 박힌 제 눈과 마주치는 일은, 벼랑 끝보다 서늘했다.

열여덟. 방에 적힌 제 나이가 낯설었다. 종이 속의 여자는 재앙의 씨였고, 나무 그늘의 그녀는 하루 종일 남의 아픈 데를 눌러 준 손이었다. 같은 나이, 같은 얼굴을 두고 세상은 종이 쪽을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종이는 목소리가 크고, 손은 말이 없으므로.

"곱게도 그렸네." 국밥집 여자가 웃었다. "이런 낯이면 눈에 띄어도 벌써 띄었지."

"모르는 소리." 소금 장수가 받았다. "흰 낯이야 두건 하나면 감추지. 침통은 못 감춰."

침통, 이라는 말에 몇 개의 고개가 무심코 돌아갔다. 나무 그늘, 그녀 쪽으로.

운설은 마지막 은침을 통에 꽂고 뚜껑을 닫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파장하는 사람들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등 뒤의 시선들이 살갗에 낱낱이 만져졌으나 걸음은 저자 사람의 걸음이었다. 두근거림을 걸음에 싣지 않는 법을, 그녀는 이 며칠 사이에 배웠다.

성문을 셈해 보았다. 이 마을에 문은 둘. 방이 붙었으니 저녁부터 문지기의 눈이 달라질 것이다. 오늘 밤을 마을 안에서 나면 내일은 나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어두워지기 전에, 사람들이 아직 제 저녁에 바쁜 동안에 빠져나가야 했다.

저자 어귀, 약재전 좌판 앞을 지날 때였다.

마른 약초 냄새가 훅 끼쳤다. 당귀, 감초, 진피 — 의원의 약장 냄새. 저도 모르게 걸음이 반 박자 느려진 그 찰나, 좌판 안쪽의 늙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낮에 그녀에게서 지혈초를 사 간 약재상 노파였다. 그때는 스치던 눈이, 지금은 멎어 있었다. 노파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서 장터 벽 쪽으로 — 벽에서 다시 그녀의 얼굴로 돌아왔다.

노파가 좌판을 돌아 나왔다. 마른 약초 단을 든 채, 곧장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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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39화 — 왕이 없는 겨울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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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36화 — 혈비의 이름

    네 성문이 열린 뒤에도 혈비는 빈 문서 앞에 앉아 있었다.황실이 내민 종이에는 왕명을 찍을 자리만 남았다. 그녀는 붓을 들어 맨 위의 삭월왕 세 글자를 지웠다.대신들이 숨을 삼켰다.“무엇을 쓰시려는 겁니까?”“내가 한 일.”혈비는 첫 줄에 효월을 썼다. 왕호도 성도 없는 어린 이름이었다. 여덟 살에 야란을 고르고 하진을 두고 온 일, 기억을 잃었다는 말로 월계단을 열지 않은 일, 왕이 된 뒤 묵할멈 침묵을 충성으로 받은 일을 차례로 적었다.사백은 여덟 살 선택까지 죄로 적지 말라고 했다. 소맥의 아비는 반대로 아이였다는 말을 함께 쓰면 변명이 된다고 했다. 혈비는 둘의 말을 한 줄씩 여백에 붙였다.“어느 쪽이 맞는지 제가 정해야 합니까?” 성문을 연 궁녀가 물었다.“아니다. 내가 한 일과 그대들이 본 것을 함께 남겨라.”혈비의 고백은 깨끗한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죄라 부르는 사람과 강요받은 선택이라 부르는 사람의 글이 같은 종이 가장자리에서 부딪쳤다.“전하, 이 문서는 황실이 가져갑니다.”“그러니 더 적어야지.”“개인의 허물과 나라의 죄를 섞으시면 안 됩니다.”혈비가 붓을 멈췄다.“그 말로 왕들은 언제나 자기 손을 나라 뒤에 숨겼다.”그녀는 삭월왕이 된 뒤 우물 기록을 찾지 않은 일을 더했다. 무너진 나라를 세우느라 몰랐다는 까닭도 함께 적되 변명으로 앞세우지 않았다. 자기 선택과 알 수 없던 일을 다른 줄에 놓았다.하진은 두 걸음 밖에서 그 글을 지켜봤다. 야란 손바닥에 내 이름을 왕의 죄 아래에 쓰지 말라고 썼다. 혈비는 하진 이름을 지우고 빈칸을 남겼다. 당한 사람이 원할 때 자기 줄을 붙일 자리였다.황실 사자가 재촉했다.“수결 시각이 지났소. 왕인을 찍지 않으면 제안은 거둔다.”“거둬라.”혈비가 왕인을 집었다. 대신들이 막아서자 사백이 길을 열었다. 활 없이 두 팔만 벌리고 왕과 신하 사이에 섰다.“저분은 왕좌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이 외쳤다. “나라를 버리려는 것이다!”혈비는 망치를 들었다.“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35화 — 한 치를 돌려주는 사람

    성문 안쪽 빗장을 뽑은 것은 수레꾼들이었다.밤새 서쪽 길을 달려온 공동 소금길 수레가 문 앞에 늘어서 있었다. 설로상단 깃발은 없었다. 흑마장, 약재 창고, 길 식솔 모임의 작은 표식들이 수레마다 따로 걸렸다.연도하가 맨 앞 수레에서 내렸다. 왼손에는 장부, 불편한 오른손에는 고삐 한 줄만 들려 있었다. 하란주가 검은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봤다.“저 사람에게 지휘를 맡긴 적 없습니다.”문지기가 물었다.“그럼 누가 수레를 움직입니까?”“각 수레 주인이요.”연도하는 겨울 궁까지 오는 길과 황실군 빈틈을 설명했을 뿐, 어느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지 않았다. 수레꾼들은 네 성문 앞에서 스스로 멈췄다.황실 장수가 성 밖에서 소리쳤다.“군량을 들이면 반역에 가담한 것으로 친다!”첫 수레의 늙은 마부가 소금자루를 열었다.“팔러 왔소.”“누구 허락으로?”“내 물건 파는 데 누구 허락이 필요하오?”수레에는 군량만 있지 않았다. 왕가 명부 사본과 황실 열여덟 이름이 소금자루 사이에 들어 있었다. 한 대를 붙잡으면 다른 문으로 세 대가 움직였다.혈비가 연도하를 왕좌 앞으로 부르려 했다. 그는 가지 않았다.“길 식솔들과 계산부터 끝내야 하오.”“왕명이면?”“그 말로 부르면 문밖에 있겠소.”혈비는 왕명을 거두고 장터 빈 상으로 내려왔다. 왕과 전 상단주가 사람들 사이에서 같은 장부를 들여다봤다.연도하는 성 안 창고 열쇠를 요구하지 않았다. 수레 주인들이 어느 집에 얼마를 내릴지 정하게 했다. 황실군에 가족이 징집된 사람에게도 곡식을 팔았다. 적군 가족이라는 까닭으로 굶기면 열린 성의 뜻이 첫날부터 거짓이 될 터였다.운설은 장터에서 그를 만났다. 연도하의 얼굴은 사흘 잠을 못 잔 사람처럼 거칠었다.“왔네요.”“내 길이 여기까지 닿았소.”“당신 길이요?”“벌써 틀렸군. 내가 함께 낸 길.”그가 웃었다. 오래전이면 운설이 웃어 준 한 번을 마음의 빚으로 적었을 사람이었다. 이제는 웃음이 지나가도록 두었다.“그대에게 남겨 달라던 한 치를 기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34화 — 닫히기 전의 밤

    닫힌 문 너머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밤새 갈라졌다.운설은 그 문밖에서 돌아섰다.문 안에서는 대신들과 우물 유족이 밤새 다투고 있었다. 자신이 들어가 어느 한쪽 손을 잡으면 혈비가 그 온기를 답으로 삼을 것 같았다.선우현은 빈 겨울 처소에서 창문을 막고 있었다. 찬바람이 종이를 들썩일 때마다 못 대신 부러진 화살대를 끼웠다.“언니한테 안 갔어요.”“보았다.”“잘한 건지 모르겠어요.”“나도 모른다.”운설은 그의 등 뒤로 다가가 허리를 안았다. 선우현의 손이 창틀에서 멎었다.“도망가고 싶어요.”“나도 그렇다.”“같이 갈까요?”선우현은 뒤돌아 그녀 얼굴을 보았다.“지금 나가면 새벽 전에 산길에 닿을 수 있어.”운설은 그가 말뿐인 위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원하면 함께 갈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오래 망설였다.“단이 있는 집까지?”“그보다 멀리도.”“그리고 언니 소식은 평생 묻지 않고?”“네가 할 수 있다면.”운설이 이마를 그의 가슴에 댔다.“못 해요.”“나도 네가 못 할 줄 알았다.”“그런데 왜 끝까지 물어봐요?”“네가 남는 일이 내 명령이 되지 않게.”“당신이 가자고 했으면 잠깐은 원망했을 거예요.”“평생은?”“아마 따라가 놓고 매년 겨울마다 언니 탓을 했겠죠.”“그러면 나는 그 탓까지 들었을 거다.”“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마요.”“아무렇지 않지 않아.”선우현은 운설의 손을 자기 목에 댔다. 긴장할 때마다 굳는 맥이 손가락 아래에서 뛰었다. 그 역시 도망치자는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운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내일 성문이 닫히거나 황실 화살이 날아들 수 있었다. 마지막 밤처럼 굴지 않기로 했지만, 살아 있는 지금을 아껴 두고 싶지도 않았다.“오늘도 물어봐요.”“나와 함께 있겠느냐.”“오늘은 끝까지.”운설이 입맞춤으로 답했다. 선우현은 한 번 받아들인 뒤 그녀 뒷목을 감싸 더 깊이 끌어당겼다. 추위에 굳은 입술이 금세 뜨거워졌다.“하아…….”숨을 빼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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