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베른하르트의 말에 하겐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엘리시아는 보고서를 받아 마지막 문장을 확인했다.현 황제 닻 직접 연결 없음.그 아래에는 칼릭스의 이름도, 엘리시아의 이름도 영웅처럼 적히지 않았다.로스테 시설팀.왕핵관리국 원격 자문.법무청.평의회 승인.각자가 한 부분만 기록돼 있었다.그녀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그날 밤 흰 뿔의 왕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이번에는 소형 개체들이 앞에 없었다.왕 혼자 북쪽 삼림선에서 나와 낮 동안 13번 개체가 파던 지점까지 천천히 걸어왔다. 성벽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지만, 하겐은 야간 경비대를 깨우고 장궁을 준비하게 했다.공격하지 않았다.왕은 눈 위에 남아 있는 13번의 회색 흔적을 따라 몇 걸음 움직인 뒤, 첫 번째 심장에서 황제 닻 요청선으로 이어지던 구형 관 바로 위에 멈췄다.테사가 측정판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이제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왕도 그 사실을 확인하듯 코끝을 눈에 가까이 댔다.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다 거대한 흰 뿔을 땅 가까이 기울였다.아무 빛도 나지 않았다.신성력도 왕핵도 아니었다.다만 그 순간 지하 구형 관에 남아 있던 마지막 미세 잔류가 완전히 사라졌다.하겐은 망원경을 내려놓지 못한 채 물었다. “또 걷어낸 건가?”테사가 수치를 다시 확인했다. “예. 적어도 잔류는 사라졌습니다.”왕은 그다음 로스테를 향해 몸을 돌렸다.성벽 위 병사들의 손이 활로 갔다.하겐은 손을 들어 멈췄다.흰 뿔의 왕은 공격선을 넘지 않았다.그 대신 머리를 들고 아주 길게 숨을 내쉬었다.차가운 입김이 밤공기 속으로 번졌다.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반응이 일어났다.로스테 안이 아니었다.북서쪽.성녀 묘역 방향.테사의 측정판에 오래된 신성 잔류가 한꺼번에 떠올랐다.아델라이드 보관함.서쪽 열의 다른 성녀 표본.그동안 봉인된 채 움직이지 않던 잔류들이 아주 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엘리시아는 원격 화면을 보다가 미간을 좁혔다.“왕이 묘역을 부른
그녀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곧 끝난다’고 말하지 않았다. 흰 뿔의 왕이 왜 왕핵 잔류를 지우는지조차 아직 완전히 알지 못했다.그 대신 자신이 맡을 수 있는 일을 늘렸다.치료소의 신성력 사용 기준.서쪽 공회당 예비병상.북부 급수 부족으로 탈수 위험이 있는 가구 목록.그리고 만약 오늘 밤 실제 성벽 공격이 발생할 경우, 치료소를 어느 순서로 분산할지까지 미리 정했다.미하일이 서류를 받아보다가 물었다. “성녀님은 어느 쪽 치료소에 계십니까?”엘리시아는 지도 위 두 장소를 번갈아 봤다. “가장 많은 중환자가 있는 쪽에 있겠습니다.”“그럼 상황에 따라 바뀝니까?”“네. 제 위치를 미리 고정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저를 기준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미하일은 잠깐 웃었다. “그 말 들으면 이레나 경이 싫어하겠습니다.”문가에 서 있던 이레나가 바로 대답했다. “싫어합니다.”엘리시아가 그녀를 돌아봤다.“그래도 따르실 거죠?”“위험이 바뀔 때마다 위치를 알려주신다는 조건이면요.”“그건 하겠습니다.”이레나는 그 정도로 물러났다.보호한다는 이유로 엘리시아의 이동을 고정하지 않고, 엘리시아 역시 독립이라는 이유로 위치정보까지 숨기지 않는다.그 합의도 따로 기록될 필요는 없었다.사람 사이에서 지키면 되는 일이었다.해가 기울 무렵 황도에서 한 차례 더 통신이 왔다.이번에는 칼릭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엘리시아, 첫 번째 심장이 제 닻을 요구한 뒤 황실 왕핵 본선에도 아주 약한 역신호가 들어왔습니다.”그녀의 손이 멈췄다. “폐하 몸에도 반응이 있었습니까?”“없었습니다.”“확실합니까?”“주치의가 확인했고, 저도 통증이나 감각 변화는 없습니다. 다만 왕핵관리국 계기판에 로스테 쪽 요청이 한 번 찍혔습니다.”“응답했습니까?”“하지 않았습니다.”칼릭스는 숨기지 않고 말했고, 엘리시아는 그가 아프지 않았다는 답만 듣고 대화를 끝내지 않았다.“역신호를 차단하는 방법은 있습니까?”“황도 쪽에서도 별도 밸브를 닫을 수 있
우회관 공사는 북벽 안쪽 지하 통로에서 시작됐다.테사는 시설 기술자 네 명을 두 조로 나눴고, 한 조가 작업하는 동안 다른 조는 밖에서 압력과 잔류를 감시하게 했다. 작업 속도를 높이겠다고 교대 없이 밀어붙이지 않았다.하겐은 성벽 위에서 소형 개체의 움직임을 계속 확인했다.1번과 9번 고리를 달았던 개체는 새벽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11번은 먼 숲 가장자리에서 몇 차례 움직인 뒤 사라졌다. 문제는 13번이었다. 전날 성벽 앞까지 오지 않았던 그 개체가 오후가 되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번에는 북벽이 아니라 우회관 공사구간 바로 바깥쪽의 지면을 맴돌기 시작했다.하겐이 통신을 잡았다. “테사, 13번이 네 머리 위를 돌고 있어.”지하에서 작업하던 테사가 장비를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성벽 접근선은 넘었습니까?”“아직 아니다.”“그럼 공사 계속합니다. 단, 진동값 올라오면 바로 나가겠습니다.”하겐은 성벽 병사들에게 선제사격 금지를 다시 확인시켰다.13번은 한동안 눈 위에서 느린 원을 그리다가 갑자기 멈췄다. 목의 고리가 회색빛을 냈지만 전날처럼 주변에 넓게 잔류를 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면 아래를 향해 빛이 모였다.테사의 측정판이 급격히 흔들렸다.“공사 중지. 전원 밖으로.”기술자들은 도구를 놓고 뛰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퇴로부터 순서대로 빠져나왔고, 마지막 사람이 통로 밖으로 나온 뒤에야 테사가 압력선을 차단했다.잠시 뒤 13번 개체가 앞발로 눈을 파기 시작했다.그 아래에는 첫 번째 심장에서 황제 닻 요청선으로 이어지는 구형 관이 지나가고 있었다.하겐의 얼굴이 굳었다. “놈이 저 선을 어떻게 아는 거지?”“고리에서 감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테사가 지하도를 겹쳤다. “황제 닻 요청선의 잔류가 올라오기 시작한 시각하고 13번이 움직인 시각이 거의 같습니다.”흑갑 13번과 마물 13번.같은 번호체계가 단순한 우연일 가능성은 이제 더 낮아졌다.새 흑갑이 사람에게서 지역 지휘권과 왕핵 잔류
“왕핵은 연결 자체를 명령 가능 상태로 기록합니다. 제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아도 장치 입장에서는 황제가 현장 지휘에 복귀한 것이 됩니다.”“그럼 처음부터 선택지에서 뺍니다.”엘리시아가 말했다.칼릭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예.”“대신 폐하가 알고 있는 황실 자료는 필요합니다. 첫 번째 심장에서 현 황제 닻 요청선을 분리할 수 있는 설계기록이 있다면 전부 보내주세요. 단, 폐하의 현재 왕핵 반응값이나 혈액, 심박 기록을 같이 보내지는 마세요.”“이미 법무청에 범위를 지정했습니다.”엘리시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제가 요청하기 전에요?”“현 황제 닻을 요구한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에요. 다만 로스테가 자료를 원하지 않으면 전송하지 않도록 대기시켰습니다.”그 답을 들은 엘리시아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필요한 자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칼릭스가 자기 판단으로 사람까지 보내거나 왕핵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각각 받아들였다.“설계기록은 받겠습니다.”“기술관은요?”“원격 자문만 먼저요. 현장 투입이 필요하면 테사가 다시 요청할 겁니다.”“그렇게 하겠습니다.”칼릭스는 더 붙이지 않았다.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황실 왕핵관리국에서 오래된 설계도가 도착했다. 첫 번째 심장의 ‘현 황제 닻’ 요청선은 본체와 완전히 하나가 아니었다. 초기에는 국경 전쟁으로 현장 지휘자가 사라졌을 때 황제의 왕핵 반응을 받아 응급으로 중심 명령을 되살리는 보조 기능이었고, 후대에 성녀 결속과 지역 대행 기능이 덧붙으면서 한 장치 안에 여러 권한이 엉켜버린 구조였다.테사가 설계도를 보며 손가락으로 한 구간을 짚었다. “이 부분만 물리적으로 끊으면 황제 닻 요청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같은 관 안으로 북벽 보조압력이 지나간다는 겁니다.”“분리할 수 있나?”하겐이 물었다.“새 관을 우회로로 먼저 만들면 가능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얼마나?”“최소 다섯 시각.”그 말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북부 숲에서는 소형
첫 번째 심장이 ‘현 황제 닻’을 요구하기 시작한 뒤에도 로스테는 황도와의 통신을 끊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먼저 한 일은 통신과 왕핵 연결을 서로 다른 것으로 분리해 기록하는 일이었다. 황제와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황제의 몸을 장치에 연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고, 칼릭스의 현재 생존을 확인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래된 왕핵 체계가 그의 심박이나 왕핵 반응을 가져가게 둘 이유도 없었다.테사는 첫 번째 심장 주변에 남은 구형 선로를 따라가며 어느 경로가 황도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확인했고, 로스테 법무관은 그 옆에서 오래된 황실 비상규정과 현재 지휘분리 문서를 대조했다. 과거의 설계에서는 왕핵 명령이 급격히 약해질 경우 가장 가까운 황제 닻을 직접 연결해 중심 명령을 보존하게 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그 ‘직접 연결’이 단순한 통신 확인이 아니라 살아 있는 황제의 왕핵 반응을 로스테의 첫 번째 심장으로 끌어오는 절차라는 점이었다.하겐이 지도를 보다가 낮게 욕설을 삼켰다. “왕은 북쪽에서 오래된 맛을 지우고 있고, 심장은 그걸 살리겠다고 폐하 몸을 새 먹이로 쓰려는 거군.”테사가 표현을 고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확인된 구조만 놓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흰 뿔의 왕이 북부에 퍼진 오래된 왕핵 잔류를 걷어낼수록 첫 번째 심장은 자신이 유지해온 명령층을 잃었고, 장치는 그것을 정상적인 정리가 아니라 제국 기능의 소실로 판정했다. 과거 규정대로라면 그다음 단계는 살아 있는 황제에게 연결해 더 강하고 새로운 닻을 가져오는 것이었다.엘리시아는 한동안 첫 번째 심장의 반응표를 읽다가 통신판을 바라봤다. 칼릭스에게는 이미 같은 자료가 법무청을 통해 전달돼 있었지만, 그가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먼저 묻지는 않았다.“폐하 쪽에서 직접 연결을 거부하면 장치가 멈춥니까?”테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현재 황제가 거부한다는 개념을 이 장치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응답이 없으면 황제 부재인지, 통신 장
만약 그것이 왕의 원래 행동이라면, 지난 십일 년 동안 누군가는 ‘왕핵의 맛을 따라오는 마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왕핵의 맛을 지우려는 존재’에게 일부러 길을 보여주며 도시와 성녀, 황제 주변을 돌게 만든 셈이었다.하겐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러면 우리가 왕을 유인한 이유부터 다시 봐야겠군.”엘리시아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네. 적어도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목적이 하나 더 있을 수 있습니다.”그녀는 흰 뿔의 왕을 갑자기 선한 존재로 바꾸지 않았다.이미 그 개체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지맥이 죽었고, 성벽에 접근하면 사람들이 다칠 수 있었으며, 작은 개체들과의 관계도 아직 알 수 없었다.하지만 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전쟁의 방식도 틀릴 수 있었다.그날 밤 전사자는 없었다.두 번째 날 누적 부상자는 열한 명으로 늘었고, 북벽 한 구획과 배수선 두 곳이 사용 중지됐으며, 외곽 목축지의 가축과 건초 일부는 포기됐다. 첫 번째 심장 우회공사는 하루 늦어졌고, 북부 세 골목의 급수 제한도 다음 날까지 연장됐다.로스테 평의회는 전투기록 마지막에 새로운 지시를 추가했다.흰 뿔의 왕을 ‘적 지휘개체’로 확정하지 않는다.소형 개체의 고리와 번호체계를 독립 조사한다.검은 화살을 쏜 외부 인물을 추적하되 숲으로 수색대를 보내지 않는다.북벽 방어는 유지한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줄.왕이 고리 잔류를 제거한 현상을 공격·정화·섭취 중 어느 것으로도 아직 확정하지 않는다.엘리시아는 기록을 확인한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그곳에는 황도에서 온 새 문서가 기다리고 있었다.칼릭스의 다음 날 의료검사 일정과 함께, 왕핵관리국이 찾아낸 팔십 년 전의 짧은 북부 기록이었다.문서 제목은 ‘흰 뿔 대형 개체 접촉 주의’.내용은 오래되어 절반 이상 지워져 있었지만, 마지막 부분은 읽을 수 있었다. 북부 원정대가 왕핵 정제분을 이용해 개체를 유도하려 했을 때, 대형 개체가 표식판을 파괴하지 않고 잔류만 제거했다는 관찰이었다.그리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