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이 밴 금발은 등 중간까지 내려와 있었고, 녹회색 눈 가장자리에는 얇은 금빛 테두리가 남아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지만, 감옥에서 말라붙었던 뺨과 터진 입술은 없었다.엘리시아는 잠옷의 목선을 잡아 내렸다.왼쪽 쇄골에서 심장 쪽으로 번진 성흔이 희미하게 빛났다. 검게 탄 흔적도, 처형 직전 신성력이 역류하며 생겼던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상처가 없었다.그 사실이 기쁨보다 먼저 공포를 불러왔다.꿈이라면 지나치게 선명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백합 줄기의 풋내, 밤새 꺼져 있던 벽난로의 재 냄새까지 모두 현실이었다. 반대로 죽음이 꿈이었다고 믿기에는 붉은 천의 축축한 감촉이 목 안쪽에 남아 있었다.엘리시아는 거울 앞에 놓인 은제 과도를 집었다.망설이지 않고 엄지 끝을 그었다. 얇은 붉은 선이 벌어지고, 피 한 방울이 손톱 옆으로 맺혔다. 통증이 뒤늦게 따라왔다.그녀는 피를 닦지 않은 채 창가로 갔다.책상 위에는 오늘 일정이 적힌 카드가 놓여 있었다.오전, 결속 예복 최종 치수 확인.정오, 대신전 파견 신관 접견.오후, 황제 폐하와 결속식 순서 검토.그 아래 작은 글씨로 날짜가 쓰여 있었다.결속식까지 삼십 일.엘리시아는 카드를 끝까지 읽었다.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졌지만 찢지는 않았다. 증거를 없애고 싶은 충동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빨랐다.침실 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금속 장식이 서로 부딪히는 익숙한 소리가 났다. 엘리시아는 과도를 쥔 채 문을 바라보았다. 노크가 세 번 이어졌다.“엘리시아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과도의 끝이 책상에 부딪혔다.죽은 사람의 목소리였다.감옥의 지하 통로에서 그녀를 구하려다 등에 검을 맞고 쓰러졌던 사람. 피가 너무 많이 흘러 손으로 막을 수조차 없었고, 마지막까지 쇠창살 열쇠를 엘리시아 쪽으로 밀어주었던 사람.이레나 보스.엘리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문밖의 사람이 다시
Last Updated : 2026-07-12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