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07-13
By:  데이지In-update ngayon la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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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한 성녀 엘리시아는 자신을 믿지 않았던 황제 칼릭스와 함께 결속식 한 달 전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삶에서 그녀는 사랑도 황후의 자리도 거부하고 자신의 선택권부터 되찾으려 한다. 칼릭스는 용서를 구하는 대신 권력을 내려놓고, 두 사람은 황제와 성녀 중 하나를 제물로 삼는 오래된 운명에 맞서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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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1. 죽은 성녀의 침실

종이 네 번째로 울렸을 때, 엘리시아는 자신이 죽을 시간을 정확히 알았다.

처형대 아래로 모인 사람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신성모독자를 보러 왔고, 

누군가는 황제의 연인을 끌어내린 여자를 확인하러 왔으며, 

대부분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훗날 부정할 수 있도록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비가 내린 뒤라 돌바닥은 검게 젖어 있었다. 

붉은 천을 덮은 처형대 아래로 빗물이 모여들었다가 계단을 타고 흘렀다. 

엘리시아는 맨발이었다. 

발목을 감싼 쇠고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축한 돌을 긁었다.

누군가 그녀의 등을 밀었다.

엘리시아는 넘어지지 않았다. 

처형을 집행하는 자들 앞에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는 손이 몸에 닿을 테고, 

지금은 누구의 손도 견딜 수 없었다.

높은 단상 위에는 제국의 문장이 걸려 있었다. 

황금 독수리 아래, 검은 제복을 입은 칼릭스가 앉아 있었다.

거리가 멀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때는 어둠 속에서도 알아보았던 금빛 눈이었다. 

엘리시아가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찾아와 창문을 닫아주고, 

약 냄새가 밴 손가락에 입을 맞추던 남자의 눈이었다.

이제 그 시선은 증거를 확인하는 황제의 것이었다.

엘리시아는 마지막으로 그를 불러볼 생각이었다.

변명도, 애원도 아니었다. 

자신을 한 번만 믿어달라는 말조차 이미 여러 차례 삼켜버렸다. 

그저 이름을 부르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정말 저 자리에 앉아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술이 열리기 전에 붉은 천이 얼굴 위로 내려왔다.

축축한 천 냄새가 코와 입을 막았다. 세계가 어두워졌고, 

종소리가 천 너머에서 둔하게 번졌다. 

왼쪽 쇄골 아래의 성흔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집행하라.”

칼릭스의 목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렇게 믿어야 죽는 순간까지 그를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았는지도 몰랐다.

목덜미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엘리시아는 붉은 천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떠오른 것은 칼릭스의 얼굴이 아니었다.

잠기지 않은 침실 문과, 그 문을 닫으며 내일 다시 오겠다고 웃던 젊은 남자였다.

날이 떨어졌다.

엘리시아는 숨을 들이켜며 상체를 일으켰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가 손바닥 아래에서 뛰는 맥박을 느끼고 그대로 굳었다. 

베인 상처도 피도 없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식은땀에 젖은 피부와 가늘게 떨리는 숨뿐이었다.

침대 위로 쏟아진 햇빛이 눈을 찔렀다.

붉은 천은 없었다.

머리맡에는 물이 담긴 유리병과 흰 백합이 놓여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늦여름의 바람이 얇은 커튼을 안쪽으로 부풀렸다. 

익숙한 금실 자수가 햇빛을 받을 때마다 엘리시아의 시야를 잘게 갈랐다.

그녀는 이 방을 알고 있었다.

황궁 동쪽 별궁, 결속식을 준비하는 동안 성녀에게 제공됐던 침실이었다. 

아직 침대 머리맡에 황실 문장이 새겨지기 전이고, 

창가의 작은 책상도 새것처럼 깨끗하던 때였다.

엘리시아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발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휘청거렸다. 

처형대의 쇠고리가 아직 발목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녀는 침대 기둥을 붙들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대신 왼손 엄지로 손목 안쪽을 눌렀다.

하나.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둘.

커튼이 흔들리는 방향을 보았다.

셋.

목에 상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넷.

마지막 숨을 내쉰 뒤에야 발바닥을 바닥에 붙였다.

거울은 침대 맞은편에 있었다. 

엘리시아는 그 앞까지 걸어가면서도 자신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거울 가장자리의 금박과 그 아래 놓인 은제 빗, 

전날 벗어놓은 듯 가지런한 귀걸이를 먼저 확인했다.

마침내 시선을 들었을 때, 거울 속 여자는 죽기 직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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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은 성녀의 침실
종이 네 번째로 울렸을 때, 엘리시아는 자신이 죽을 시간을 정확히 알았다.처형대 아래로 모인 사람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신성모독자를 보러 왔고, 누군가는 황제의 연인을 끌어내린 여자를 확인하러 왔으며, 대부분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훗날 부정할 수 있도록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비가 내린 뒤라 돌바닥은 검게 젖어 있었다. 붉은 천을 덮은 처형대 아래로 빗물이 모여들었다가 계단을 타고 흘렀다. 엘리시아는 맨발이었다. 발목을 감싼 쇠고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축한 돌을 긁었다.누군가 그녀의 등을 밀었다.엘리시아는 넘어지지 않았다. 처형을 집행하는 자들 앞에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는 손이 몸에 닿을 테고, 지금은 누구의 손도 견딜 수 없었다.높은 단상 위에는 제국의 문장이 걸려 있었다. 황금 독수리 아래, 검은 제복을 입은 칼릭스가 앉아 있었다.거리가 멀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때는 어둠 속에서도 알아보았던 금빛 눈이었다. 엘리시아가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찾아와 창문을 닫아주고, 약 냄새가 밴 손가락에 입을 맞추던 남자의 눈이었다.이제 그 시선은 증거를 확인하는 황제의 것이었다.엘리시아는 마지막으로 그를 불러볼 생각이었다.변명도, 애원도 아니었다. 자신을 한 번만 믿어달라는 말조차 이미 여러 차례 삼켜버렸다. 그저 이름을 부르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정말 저 자리에 앉아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입술이 열리기 전에 붉은 천이 얼굴 위로 내려왔다.축축한 천 냄새가 코와 입을 막았다. 세계가 어두워졌고, 종소리가 천 너머에서 둔하게 번졌다. 왼쪽 쇄골 아래의 성흔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집행하라.”칼릭스의 목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의 목소리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렇게 믿어야 죽는 순간까지 그를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았는지도 몰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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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이름으로 묶어둔 붉은 끈
잿빛이 밴 금발은 등 중간까지 내려와 있었고, 녹회색 눈 가장자리에는 얇은 금빛 테두리가 남아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지만, 감옥에서 말라붙었던 뺨과 터진 입술은 없었다.엘리시아는 잠옷의 목선을 잡아 내렸다.왼쪽 쇄골에서 심장 쪽으로 번진 성흔이 희미하게 빛났다. 검게 탄 흔적도, 처형 직전 신성력이 역류하며 생겼던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상처가 없었다.그 사실이 기쁨보다 먼저 공포를 불러왔다.꿈이라면 지나치게 선명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백합 줄기의 풋내, 밤새 꺼져 있던 벽난로의 재 냄새까지 모두 현실이었다. 반대로 죽음이 꿈이었다고 믿기에는 붉은 천의 축축한 감촉이 목 안쪽에 남아 있었다.엘리시아는 거울 앞에 놓인 은제 과도를 집었다.망설이지 않고 엄지 끝을 그었다. 얇은 붉은 선이 벌어지고, 피 한 방울이 손톱 옆으로 맺혔다. 통증이 뒤늦게 따라왔다.그녀는 피를 닦지 않은 채 창가로 갔다.책상 위에는 오늘 일정이 적힌 카드가 놓여 있었다.오전, 결속 예복 최종 치수 확인.정오, 대신전 파견 신관 접견.오후, 황제 폐하와 결속식 순서 검토.그 아래 작은 글씨로 날짜가 쓰여 있었다.결속식까지 삼십 일.엘리시아는 카드를 끝까지 읽었다.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졌지만 찢지는 않았다. 증거를 없애고 싶은 충동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빨랐다.침실 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금속 장식이 서로 부딪히는 익숙한 소리가 났다. 엘리시아는 과도를 쥔 채 문을 바라보았다. 노크가 세 번 이어졌다.“엘리시아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과도의 끝이 책상에 부딪혔다.죽은 사람의 목소리였다.감옥의 지하 통로에서 그녀를 구하려다 등에 검을 맞고 쓰러졌던 사람. 피가 너무 많이 흘러 손으로 막을 수조차 없었고, 마지막까지 쇠창살 열쇠를 엘리시아 쪽으로 밀어주었던 사람.이레나 보스.엘리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문밖의 사람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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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죽음 이후의 시간을 품은 눈빛 
정오가 되기 전, 대신전의 신관들이 돌아갔다.예복 담당자들은 가져온 상자를 풀지도 못했고, 황실 일정관은 문서 한 장을 남긴 채 별궁을 떠났다. 누구도 침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황제에게 보낸 일정 취소 통보의 답은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엘리시아는 밀랍이 찍힌 봉투를 책상 위에 놓은 채 한동안 뜯지 않았다. 검은 밀랍 위에 눌린 황금 독수리 문장은 전생 내내 수없이 보았던 것이었다. 황후가 될 사람에게 보내는 연서에도, 성녀의 내통 혐의를 정리한 조사 명령서에도 같은 문장이 찍혀 있었다.이레나는 봉투를 내려놓은 뒤 한 걸음 물러섰다.“황제 폐하께서 직접 작성하신 답신이라고 합니다.”“전달자는 돌아갔습니까?”“예. 답변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엘리시아는 봉인을 잘랐다.편지에는 세 문장만 적혀 있었다.‘성녀의 요청에 따라 오늘의 검토 일정을 취소하겠습니다.’‘재조정 여부와 시기는 성녀 측에서 결정해주십시오.’황실은 별도의 방문을 요청하지 않겠습니다.전생의 칼릭스라면 쓰지 않았을 문장이었다.그는 엘리시아가 피곤하다고 하면 일정을 줄였고, 대신 더 늦은 시간에 직접 별궁을 찾아왔다.자신의 방문은 업무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엘리시아 역시 그런 그를 반겼다.그때는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엘리시아는 편지 끝의 서명을 살폈다.획의 기울기, 마지막 글자를 누르는 힘, 잉크가 마르기 전에 접은 흔적까지 칼릭스의 것이 맞았다. 위조 여부는 지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문장을 고른 사람은 전생의 결속식 삼십 일 전 칼릭스와 같지 않았다.그가 달라졌을 가능성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함정이었다.미래를 아는 사람이 자신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엘리시아는 편지를 접어 원래 봉투에 넣었다.“이레나.”“예.”“이 편지는 별도 보관함에 넣어주세요. 전달 시각과 전달자 이름도 적고요.”“황실 답신을 증거물처럼 보관하실 생각입니까?”“지금부터 제게 오는 모든 문서를 그렇게 취급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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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 번째 숨이 끝나기 전에
밤이 깊어질수록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몸은 죽음과 회귀를 모두 겪은 사람의 의지를 오래 받아주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왼손목을 누른 채 네 번의 호흡을 반복했다.네 번째 숨이 끝나기 전에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바람이 멎었다.창밖의 벌레 소리와 복도를 걷는 경비의 발소리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벽난로의 재 냄새도, 백합의 풋내도 끊겼다.엘리시아는 눈을 떴다.침실은 그대로였다.그러나 창문 밖에는 황궁 정원 대신 별도 달도 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책상 위에 쌓아두었던 문서는 사라졌고, 문은 검은 벽 안에 박힌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었다.침대 위에 누워 있던 엘리시아는 어느새 맨발로 바닥에 서 있었다.잠옷 자락이 발등을 덮었다. 목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처형 직전의 차가운 금속 감각이 다시 살아났다.문손잡이가 움직였다.엘리시아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문이 천천히 열렸다.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문밖에 서 있었다.칼릭스 반 아델하이트.처형대 위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과 같은 얼굴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 빛이 없는 공간에서도 선명한 금빛 눈,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단단히 다문 입술까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다만 그는 문턱을 넘지 않았다.엘리시아가 침묵하자 칼릭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엘리시아.”한때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엘리시아는 손목 안쪽을 눌렀다. 호흡을 세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을 만큼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칼릭스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잠시 머물렀다가 곧 내려갔다.“알겠습니다.”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다가오지도 않았다.그 점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엘리시아는 문과 그 너머를 살폈다. 칼릭스의 뒤에는 황궁 복도도 왕의 침실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뿐이었다.“여기가 어디인지 아십니까?”“모릅니다.”짧은 대답 뒤 침묵이 붙었다. 칼릭스가 거짓말할 때 보이던, 지나치게 완전한 설명은 나오지 않았다.“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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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침묵은 동의가 아니다
“저도 이 방에 갇힌 것 같습니다.”문틈 너머로 보이는 칼릭스의 얼굴은 지나치게 고요했다.엘리시아는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문은 분명 안쪽으로 움직였지만, 마지막 한 뼘을 남겨둔 채 보이지 않는 것에 걸려 있었다. 그녀가 더 세게 밀자 문짝이 낮게 떨렸다. 칼릭스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어깨도 문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그가 거짓말하고 있다면 굳이 이런 방식일 이유가 없었다.황제의 권한을 내세워 문을 열 수도, 자신에게 해명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전생의 칼릭스는 부탁하는 법을 몰랐다. 엘리시아가 원하는 것을 미리 계산하고,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한 결과를 손에 쥐여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지금 문밖의 남자는 자신이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만 알렸다.엘리시아는 그를 믿지 않았다.그러나 당장 믿을 필요도 없었다. 확인하면 됐다.“뒤로 물러나십시오.”칼릭스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발뒤꿈치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문 바로 앞에 놓였다. 공간이 접힌 것처럼, 거리는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다시요.”두 번째도 같았다.칼릭스의 눈이 어둠 아래를 훑었다. 그는 바닥을 확인하려는 듯 발끝을 옆으로 돌렸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원 안에 두 발이 묶여 있었다.엘리시아는 문을 밀던 힘을 뺐다.그러자 걸려 있던 문짝이 아주 조금 열렸다.방이 칼릭스를 들이려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자신이 그를 완전히 밀어내는 것도 막고 있었다.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 넣되, 문턱 하나를 사이에 두도록 강제하는 구조였다.“폐하께서는 이 방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까?”“시도하지 않겠습니다.”“가능한지를 묻고 있습니다.”칼릭스는 문턱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뒤 오른발을 반걸음 앞으로 옮겼다.검은 장화 끝이 방 안쪽 바닥에 닿기 직전, 금빛 불꽃이 문지방을 따라 솟았다. 불길은 뜨겁지 않았지만 칼릭스의 제복 자락을 밀어냈다. 그는 즉시 발을 거두었다. 오른손이 아주 잠깐 굳었으나, 아무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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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침묵은 동의가 될 수 없으니 
엘리시아는 열린 문을 붙든 채 침실 안을 돌아보았다.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칼릭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몸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경비병들은 기척조차 듣지 못했다.“황제 폐하께서 별궁에 오셨습니까?”“오지 않으셨습니다.”이레나는 대답한 뒤 엘리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어제와 달리 질문을 삼키는 데 익숙해진 표정이었다.“물과 새 수건을 준비하겠습니다.”“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엘리시아는 복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문턱 안쪽에 섰다.“황궁에서 가장 최근에 도착한 관보를 가져다주세요. 오늘 것만 말고 지난 한 달 치 전부요. 제국력 연감과 귀족회의 회의록도 필요합니다.”“지금 가져오라는 말씀이십니까?”“가능한 것부터요. 기록보관실이 열리는 시각도 확인해주시고요.”이레나가 허리를 숙였다.“알겠습니다.”“그리고 황제 폐하의 동정을 알아보려 하지 마세요.”몸을 돌리던 이레나가 멈췄다.“폐하께서 어디 계시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엘리시아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그분이 기억하는 것과 제가 확인해야 할 것은 다른 문제예요.”그녀는 침실 안으로 돌아간 뒤 문을 닫았다.잠금쇠는 그대로 두었다.같은 시각, 칼릭스는 황제의 침실 바닥에서 눈을 떴다.침대 위가 아니었다.등 뒤에는 차가운 대리석이 닿아 있었고, 오른손은 침대 기둥 아래에 깔려 감각이 둔했다. 그는 몸을 일으킨 뒤 손가락을 한 번씩 접었다 펴보았다. 뼈에 이상은 없었다.방 안은 어두웠다. 창밖에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았고, 문밖 경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칼릭스는 열린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분명 잠들기 전에는 닫혀 있었다. 시종에게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명했고, 안쪽 잠금쇠도 자신이 직접 걸었다.지금 잠금쇠는 부러진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 있었다.칼릭스는 바닥에 떨어진 초를 주워 촛대에 불을 붙였다. 작은 불빛 아래로 방을 살폈지만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고, 침대 옆에 놓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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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침묵을 동의로 간주한다는 것
아침 일곱 시가 되자 황제 집무실의 긴 탁자 위에 결속식 문서가 쌓였다.레온하르트 폰 리히터는 외투를 제대로 여미지도 못한 채 불려왔지만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황제가 새벽에 사람을 부르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다만 결속식 한 달 전, 결속 준비를 멈추겠다는 지시를 내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그는 탁자 끝에 서서 원본 목록을 넘겼다.“성녀 측에서 일정 변경만 요청했을 뿐 결속 자체를 거부했다는 통보는 없었습니다.”“알고 있습니다.”“그렇다면 폐하께서 먼저 준비를 중단하실 이유가 있습니까?”칼릭스는 문서의 첫 장을 읽고 있었다.‘황실과 대신전의 합의에 따라 성녀의 거처를 결속식 칠 일 전 황궁 본전으로 옮긴다.’당사자의 승인란은 없었다.다음 장에도 마찬가지였다. 경호대 교체, 서신 검열, 성흔 검사, 식사 관리, 의복 규정, 의식 전 외부 접견 금지. 모두 엘리시아의 안전과 제국의 안정을 이유로 들고 있었지만, 그녀가 거절할 수 있는 항목은 한 줄도 없었다.“중단이 아니라 보류입니다.”칼릭스는 문서 한 장을 옆으로 빼놓았다.“로젠베르크 성녀가 결정하기 전까지 되돌릴 수 없는 조치를 하지 않습니다.”레온하르트가 탁자 가까이 다가왔다.“성녀의 결속 의사는 이미 확인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누가 확인했습니까?”“대신전입니다.”“어떤 방식으로요?”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서류 더미 아래쪽에서 얇은 장부를 꺼냈다. 어린 성녀의 신성력 교육, 신탁 수용, 향후 결속 의무가 한 문서에 묶여 있었다.서명란에는 열네 살의 엘리시아가 쓴 이름이 있었다.칼릭스의 시선이 멈췄다.처음 성녀로 선발된 날의 서명이었다. 엘리시아는 그날부터 대신전에 머물렀고, 성녀로서 지켜야 할 규율에 동의했다. 그 규율 끝에 황제와의 결속 의무가 포함돼 있었다.“열네 살이었습니다.”레온하르트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저도 압니다.”“결속 상대가 누군지도 정해지기 전입니다.”“당시 법으로는 성녀 선발 동의가 이후 결속까지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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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를 가두었던 문장을 지우며
칼릭스는 시선을 내렸다.결속 준비 문서 맨 위에는 황제의 최종 승인란이 남아 있었다.그는 펜을 들어 승인란 위에 짧게 썼다.‘당사자 의사 확인 전 집행 금지.’그 아래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오전 아홉 시, 엘리시아는 황궁 서쪽 기록보관실에 들어섰다.침실에서 문서를 받아볼 수도 있었지만, 원본이 어떻게 보관되는지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레나는 반걸음 뒤를 따랐고, 기록관 두 명은 갑작스러운 성녀의 방문에 잔뜩 굳은 얼굴로 앞장섰다.기록보관실은 창문이 적었다. 햇빛 대신 벽에 박힌 마석등이 긴 서가 사이를 밝히고 있었고, 오래된 종이와 가죽 표지에서 마른 먼지 냄새가 났다.엘리시아는 그 냄새를 천천히 들이마셨다.감옥 지하의 곰팡이 냄새와 달랐다.이레나가 옆에서 낮게 물었다.“괜찮으십니까?”“괜찮아요.”대답한 엘리시아는 곧 덧붙였다.“다만 이곳에서는 제 뒤에 서지 말아주세요.”이레나는 이유를 묻지 않고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검집이 엘리시아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거리였다.기록관이 준비한 책상에는 지난 한 달간의 관보와 귀족회의 회의록, 제국력 연감이 놓여 있었다.엘리시아는 가장 최근 관보부터 펼쳤다.서부 곡물세 조정, 남부 하천 범람, 로스테 외성 보수 예산 삭감, 아르카디아 사절단 입국 예정. 모두 기억과 같았다. 다만 처형 이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항목들이 지금은 서로 다른 의미로 보였다.로스테 외성 보수 예산이 삭감된 날짜는 결속식 사십이 일 전이었다.황실은 대신전의 성흔 증폭 장치 도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북부 재난예산 일부를 옮겼다.엘리시아는 해당 페이지에 얇은 표지를 끼웠다.“이 예산안 원본도 보고 싶습니다.”기록관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성녀께서 열람하실 수 있는 등급이 아닙니다.”“제 성흔 증폭 장치 비용 때문에 삭감된 예산인데도요?”“문서상 집행 주체가 황실과 대신전이라서 그렇습니다.”엘리시아는 기록관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규정을 읽어줄 뿐이었다.“열람 요청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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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번에는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이건 무엇입니까?”“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결속 관련 원본 사본입니다. 황실 보안문서도 모두 열람 허가가 내려왔습니다.”엘리시아는 상자를 바로 열지 않았다.“언제 명령하셨죠?”“오늘 아침 일곱 시 조금 넘어서입니다.”그녀가 기록보관실에 들어오기 전이었다.칼릭스는 엘리시아가 어떤 자료를 요구할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이 배려인지, 자신이 유리한 문서만 먼저 골라 보낸 것인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엘리시아는 봉인의 번호부터 확인했다.“봉인 목록과 반출 기록도 주세요.”서기관이 준비한 장부를 내밀었다.번호가 일치했다. 상자는 황제 집무실이 아니라 황실 중앙문서고에서 직접 봉인됐고, 레온하르트 재상이 입회했다. 중간에 칼릭스 혼자 내용을 바꿀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엘리시아가 직접 봉인을 잘랐다.상자 안에는 결속 준비 문서와 성녀 거처 규정, 결속 후 황후 예정자의 생활지침이 순서대로 들어 있었다. 그중 가장 아래에 낡은 장부 하나가 놓여 있었다.열네 살 때 대신전에 들어가며 작성했던 성녀 선발 동의서였다.엘리시아는 자신의 어린 서명을 단번에 알아보았다.획이 서툴렀고 마지막 글자가 작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성녀가 되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이름을 적었다.그 서명 아래로 작은 조항이 이어졌다.‘성녀로 선발된 자는 제국의 안정을 위하여 황제와의 결속 의무를 수락한다.’결속 상대도, 시기도, 거부 절차도 적혀 있지 않았다.다음 페이지에는 더 짧은 문장이 있었다.‘성녀가 별도의 거부 의사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 침묵은 결속 동의의 유지로 간주한다.’엘리시아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한 번은 성녀로서, 한 번은 처형당한 사람으로서.전생의 자신은 결속을 원했다. 칼릭스를 사랑했고, 그와 함께라면 제국의 의무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원했다는 사실이 선택할 기회를 받았다는 뜻은 아니었다.‘그녀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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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거부서
결속 거부서는 예상보다 얇았다.로젠베르크가의 법률대리인 오스카 벨른은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도 손을 떼지 못했다. 두 장뿐인 문서가 불에라도 탈 것처럼 손끝으로 모서리를 눌렀다. 맞은편에는 황실 법률관과 대신전 법률관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셋 사이에 놓인 잉크병은 회의가 시작된 뒤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엘리시아는 창가 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황궁 서쪽 기록보관실에 딸린 소회의실이었다. 벽면에는 오래된 법령집이 층층이 꽂혀 있었고, 좁은 창으로 들어온 오전 햇빛이 탁자 한가운데를 길게 갈랐다. 빛의 왼쪽에는 로젠베르크가의 푸른 문장이, 오른쪽에는 황실의 황금 독수리와 대신전의 백색 원환이 놓여 있었다.한 사람의 결정을 확인하는 자리에 세 기관의 인장이 필요했다.오스카가 헛기침을 했다.“성녀님께서 요청하신 문안은 작성했습니다. 다만 이것을 결속 거부서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확답하기 어렵습니다.”“제목에 그렇게 적혀 있군요.”엘리시아가 문서 첫 줄을 가리켰다.‘성녀 결속 거부 의사 통지서.’글자는 분명했다.“제목과 효력은 다른 문제입니다.”대신전 법률관이 말을 받았다. 회색 수염을 단정하게 다듬은 노인이었다. 이름은 그레고르 팔렌. 전생의 결속 준비 과정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엘리시아는 그가 내민 서류를 자세히 읽지 않았다. 칼릭스가 함께 있었고, 대신전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레고르는 법령집 한 권을 펼쳤다.“현행 성녀법에는 결속을 유예하거나 상대 황제의 부적합을 청원하는 절차는 존재합니다.하지만 성녀가 결속 의무 자체를 영구적으로 거부하는 절차는 규정돼 있지 않습니다.”“없다는 말이 금지됐다는 뜻입니까?”“법에 없는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엘리시아는 그의 얼굴이 아니라 펼쳐진 법령집을 보았다. 노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조항 옆에는 개정 연도가 적혀 있었다. 성녀가 열네 살이 되던 해보다도 오래전이었다.“반대도 마찬가지겠군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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