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드셨어요?” 진정우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줄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어디 계세요?” 진정우 역시 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됐어요. 대답은 알겠네요.” 나는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진정우가 나를 불렀다. “지원 씨, 지금 어디예요? 집이에요 아니면 밖이에요?”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내 마음속 억눌려 있던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정우 씨가 뭔데요? 뭔데 저를 신경 써요?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이에요 나...” 갑자기 안리영이 다가와 내 폰을 빼앗듯이 받았다. “진정우 씨, 안심하세요. 지금 지원이 저희 집에 있어요. 저는 지원이의 절친이에요.” 안리영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부탁할 땐 얌전히 말해야지.” 나는 안리영을 밀며 그녀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때 진정우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내일 술이 깨면 다시 얘기합시다.” 그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하니 안리영을 바라봤다. “정우 씨는 내가 취한 줄 아네.” 안리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정우는 네가 지금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내일이면 말을 번복할까 봐 그런 거야.” 나는 술에 취했지만 그렇게까지 취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가 거절하는 또 다른 방식인 듯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직접 말했던 기억이 있을 테니 이제는 내가 장난을 치거나 그에게 복수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 술자리가 이어진 후 나는 다음 날 아침 안리영이 언제 출근했는지도 몰랐고 시끄러운 휴대폰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여보세요?” 나는 번호를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윤 팀장님, 지금 놀이공원으로 좀 와줄 수 있나요?” 고준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 비서님, 저 퇴사한 거 모르세요? 일이 있으면 강진혁 씨나 강 대표님께 연락하세요.” “윤 팀장님, 저는 꼭 윤 팀장님을 찾아야겠어요.” 고준석의 고집에 웃음이 나면
“뭐라고요?” 나는 충격을 받았고 이어서 욕이 튀어나왔다.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윤 팀장님, 강 대표님이 요즘 정말 좀 미친 것 같아요.” 고준석의 말에 나는 바로 이해했다. 그동안 예복이나 반지를 예약하는 등의 일들도 아마 그가 고준석에게 지시한 것이리라. “강유형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저를 역겹게 만들려는 건가요?” 나는 화가 나서 물었다. 고준석은 잠시 침묵했다. “누님, 저도 강 대표님이 뭘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아요. 강 대표님도 누님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아요. 정말로 누님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고준석 씨”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사람이야 뭐 그렇다 쳐도 당신마저 그렇게 말하다니. 고준석 씨는 진짜 강유형이 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고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준석 씨, 강유형이 미쳐 가든 말든 저는 그 사람 곁에 있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윤 팀장님, 사실 저는 그때부터 자책하고 있었어요. 그 사건이 없었다면 누님과 강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멀어지지 않았을 텐데요.” 고준석은 그 사건에 대해 아직도 자책하고 있었다. “고준석 씨, 오히려 저는 당신한테 고마워요.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저는 결심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알아둬요. 제가 강유형과 헤어진 이유는 그 사건 하나 때문이 아니에요. 얼어붙은 감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거든요. 당신도 이건 잘 알잖아요.” “하지만 결국 마지막 결정적 한 방을 제가 도운 셈이죠...” 고준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로 말했으니 고 비서님도 더 이상 자책하지 마요. 만약 강유형이 오늘 비서님이 한 일로 해고한다면 그냥 떠나요. 세상은 넓고 비서님 능력이라면 더 나은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를 위로했다. “윤 팀장님은 혹시 새로운 직장 찾으셨나요?” 고준석이 물었다. “제 능력을 믿고 있죠. 직장 찾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나는 분명
그는 내게 반한 걸까? 이 남자는 겉모습만큼이나 마음도 강직해서 미모 따위에 흔들릴 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다 똑같다는 말이 역시 맞나 보다. 이미 내가 진정우를 흔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더 요염하게 웨이브 진 긴 머리를 넘겼다. 그러자 진정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고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의 감정 변화를 뭐 때문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정우 씨, 제 부탁 들어줄 건가요?” “뭐라고요?” 그는 내 몸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술 취한 게 아니라 그가 취한 거였나? 아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냥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제 남자친구가 되어 줘요, 임시로.” 어젯밤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진정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먼 곳을 응시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오늘의 대관람차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고준석이 강유형이 내게 청혼하려고 한다고 한 게 떠올라서 혹시 대관람차에서 청혼하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관람차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려던 그때 진정우가 입을 열었다. “임시라는 게 무슨 의미죠?” “그러니까 잠시 동안만 제 남자친구 역할을 해달라는 거예요. 강유형 대표의 미친 짓이 끝나면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나니 왠지 스스로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설명했다. “우리가 진짜 사귀는 게 아니라 그냥 강유형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둘이 교제 중인 것처럼 연기하는 거예요.” “제가 왜 그런 일을 해줘야 하죠?” 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이런 제안 자체가 창피했다. 어젯밤 안리영의 부추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강유형의 미친 행동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 내 얼굴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제 곁에 당신만큼 적합한 사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진정우 씨, 저는 분명하게 얘기했어요. 우리의 목표가 다르다면 그만둬요.” “하지만 당신은 남자친구가 필요하잖아요?” 그가 물었다. “맞아요.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부담스럽네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내 말에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그가 나를 붙잡거나 타협할 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나를 과대평가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제가 무례했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를 몰고 떠나면서 마치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 진정우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 같아 차를 멈추고 숨을 고르며 어젯밤 술기운에 했던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했다. 아무나 부탁할걸. 하다못해 신지태를 남자친구 역할로 부탁하는 게 나았을 텐데 괜히 진정우를 끌어들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꽃집에 들러 꽃다발을 하나 사서 부모님 묘지로 갔다. 그동안 명절이나 부모님 기일 외에는 잘 오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어릴 적 꿈에서 자주 부모님을 만나다 보니 그리워서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묘비 앞에 이미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꽃이 시든 걸 보니 누군가가 최대한 보름 안에 다녀간 것 같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 외엔 강 씨 아버지와 강 씨 어머니뿐이었다. 혹시 그분들이 다녀가신 걸까? 그렇다면 왜 강 씨 어머니는 말하지 않으셨을까? 의아해하면서도 내가 강유형과 갈등을 빚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강 씨 어머니가 잊어버렸거나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시든 꽃을 한쪽으로 치우고 내가 가져온 꽃을 놓았다. 묘비에 새겨진 부모님의 젊은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리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 저 보고 싶으신가요? 요즘 자주 꿈에 나타나세요.” “엄마, 아빠, 저 강유형과 헤어졌어요. 죄송해요. 엄마 아빠와 강유형 부모님의 소원대로 강유형과 결혼하지 못했어요
“며칠 후면 네 삼촌 생일이잖아. 올 거지?” 강 씨 어머니의 말에 순간 멍해졌다. 이제 곧 강 씨 아버지 생신이 다가온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잊지 않을 것이다. 강 씨 가문 가족들의 생일은 모두 알람에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강 씨 가문에서 지내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항상 미리 준비해왔다. 비록 의지해 사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조심스럽게 지냈다. 혹여 어디선가 부족하게 보이면 나에 대한 마음이 달라질까 봐 신경 썼다. 순간 멍하니 대답하지 않자 강 씨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지원아, 알다시피 우리는 늘 너를 딸처럼 여겨왔어. 매년 생일에 네가 보내준 선물과 축하를 받았는데 이번에 네가 안 오면 삼촌이 많이 서운해할 거야.” 사실 나는 가지 않으려 했지만 선물은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물으니 곤란했다. 특히 최근 강유형이 미친 사람처럼 구는 걸 생각하면 내가 강 씨 가문에 가면 그가 갑자기 날 데려가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안 간다고 말하면 강 씨 어머니가 또 설득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당연히 갈 거예요, 이모.” “그럼 다행이다. 네가 안 오면 삼촌이 생일을 제대로 보내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 강 씨 어머니의 말은 일종의 압박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강 씨 어머니는 다시 물었다. “강유형이 한 짓은 우리가 이미 혼내고 나무랐어. 더는 너에게 못된 짓을 하지 않았지?”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강유형이 최근 벌인 짓을 그들이 모른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이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그들이 나에게 정말 잘해주었기 때문에 악의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그러지 않았어요.” 사실 있었더라도 강 씨 어머니는 전화를 통해 나를 달래기 위해 강유형을 꾸짖고 벌을 주겠다고 약속할 뿐이었다. 그러나 강유형은 이미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누가 말려도 막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강 씨 어머니가 아
“그래? 그럼 누굴까? 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도 꽤 되었고 예전 친구들도 이미 부모님을 잊은 지 오래야. 그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러 올 리가 있겠니?” 강 씨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 사람이 떠나면 차가워진다는 말이 딱 맞았다. 예전에는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지만 강 씨 어머니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원아, 혹시 누군가가 실수로 잘못 놔둔 걸 수도 있잖니?” 강 씨 어머니는 그렇게 내게 덧붙였다. 나는 묘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사진도 있고 이름도 있는데 실수로 잘못 올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말 같았다. “아마도 그렇겠죠.” 나는 강 씨 어머니에게 맞장구쳤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해서 말할 것이 뻔했다. 이제 강 씨 어머니 가족이 보낸 것이 아니란 걸 확신했고 부모님 옛 친구들도 아니라면 이 꽃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는 방법을 찾아 알아봐야 했다. “지원아, 괜한 걱정 말고 내가 나중에 삼촌에게 물어볼게. 혹시 옛 친구 중 누군가가 갔는지.” 강 씨 어머니는 나를 달래주려 했다. 나는 대충 대답하고 강 씨 어머니는 다시 한번 강 씨 아버지 생일에 꼭 오라고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손에 든 꽃을 사진으로 찍고 SNS에 올리며 ‘이건 누구의 추억일까?'라고 적었다. 그러자 안리영이 내 게시물을 보고 전화했다. 요즘 그녀는 정말 한가한지 SNS를 볼 시간도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상황이야?” 안리영이 물었다. 나는 상황을 설명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누군지 궁금해.” “너 진짜 강 씨 가문에 갈 거야? 그건 말 그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거잖아.” 안리영은 내 얘기를 듣고 꽃보다는 그 사실에 더 주목했다. “안 가면 이상하고 가면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돼.” 나도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남자를 한 명 데리고 가야 해. 혹시 문제가 생겨도 너를 지켜줄 수 있고 강유형과 강 씨 가문 사람들의 미련도 끊어놓을 수 있을 거야.” 안리영은
저녁 무렵 카페에서 내가 두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쯤에서야 소개팅 상대가 도착했다. 그는 비대한 체형도 아니고 머리가 벗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청량한 물빛 셔츠를 깔끔하게 입고 있어 전혀 기름지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과도 잘 일치해서 다행히 속은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지각은 호감도를 크게 떨어뜨렸고 다행히도 진짜 연애를 할 생각이 아니라 단지 강유형을 피하기 위해 잠시 그를 빌리려는 거였기에 그러려니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사실 소개팅이 아니라 전 남자친구를 빌리고 싶어서 나왔거든요.” 나는 솔직하게 내 의도를 밝혔다. 남자는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친구를 빌린다고요?” “네, 진지하게 연애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현재 상황상 급히 남자친구가 필요해요.” 나는 상세히 설명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기분이 상한 건가 싶어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비용을 지불하겠습니다.” “아, 돈이 많으신가 보네요.” 남자는 미세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돈에 흥미를 느끼는 반응이 약간 불쾌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곧바로 제안을 꺼냈다. “비용은 일당으로 드릴 수도 있고 매달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얼마가 적당할지 말씀해 주세요.” “그럼 아가씨는 얼마나 지불할 생각이신가요? 그리고 이 렌털은 단순히 겉모습만 필요한 건가요 아니면 전부 포함인가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경험이 많고 이런 일을 여러 번 해봤다는걸. 또 내가 남자친구 렌털을 이용한 첫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냥 겉모습만입니다.” 그는 전부 포함하길 원하지만 내가 허락할 리 없었다. “만약 친밀한 접촉이나 신체 접촉이 필요하면 어떻게 하죠?” 남자는 프로처럼 물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쪽 분야에서 일해 본 분이신 것 같네요. 이전에는 어떤 조건으로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
“그런 일은 많지 않아요. 사실 소개팅은 여전히 뜻이 맞는 짝을 찾기 위한 게 주요한 목적이죠.” 그의 말을 들으니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뜻이 맞는 짝이라고? 아마 나와 같은 방식으로 돈을 벌며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은 것뿐일 텐데. 다들 요즘 취업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머리를 쓰면 무자본으로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정말 남자친구로 빌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한 번 만나보면서 교제할 생각은 없는 건지 궁금한데요?” 남자는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커피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일반적으로 영리한 여성들은 교제를 선택하죠. 그러면 비용을 지불할 필요 없이 맞지 않으면 그냥 헤어지면 되니까요. 모두 그렇게 하면 당신은 손해 아니에요?” 나는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나 기회를 주진 않죠. 상대의 조건도 보고 선택할 사람만 선택해요.” 그의 의도는 이해했다. 나를 꽤 괜찮은 상대로 보고 있으니 무비용으로 한 번 시험해 볼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아까 말한 서비스 요금에 VIP 할인 혜택 같은 건 없나요?” 솔직히 그가 부른 가격은 꽤 비쌌다. 손을 잡는 것만 해도 하루에 5만 7천 원이라니 강유형 앞에서 연기를 하려면 필수적일 텐데. “없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협상 불가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조건은 다 이해했어요. 생각 좀 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동안 다른 일 받으셔도 괜찮고요. 혹시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이건 거절하셔도 됩니다.” 이 말을 하면서 문득 이게 소개팅이 아니라 완전히 사업 상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진심으로 협력하고 싶습니다.” “조건이 제 기준에 맞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좀 만나보고 결정할게요. 우수한 지원자를 고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비즈니스 협상에서 숙련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좋은 소식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